1241년, 몽골 군대는 헝가리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안에 군대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멀리 몽골에서 대칸 우구데이(Ögödei)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은 새 대칸을 뽑으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유럽 한복판의 군대를 불러들일 만큼 이 제국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묶여 있었습니다. 동시에 초원에서 헝가리까지, 고려에서 바그다드까지 군대와 소식을 실어 나르는 길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몽골 정복 전쟁이 왜 시작됐는지, 말과 조직과 역참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 고려와의 전쟁을 포함해 어떻게 흘러갔고 무엇을 남겼는지 공개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왜 초원을 나섰나
13세기 초 몽골 사람들은 왜 초원을 떠나 정복에 나섰을까요? 컬럼비아 대학의 교육 자료는 구체적인 이유에 학계 합의가 없다고 먼저 밝힙니다. 자주 꼽히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기후, 교역, 그리고 칭기즈칸이라는 사람입니다.
첫째는 풀입니다. 1180년부터 1220년 사이 몽골의 연평균 기온이 내려가 풀이 자라는 철이 짧아졌습니다. 유목민에게 가축은 삶의 바탕이고, 풀이 줄면 가축이 위험해집니다. 이 위협이 몽골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을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둘째는 교역입니다. 몽골은 곡식과 수공업품을 이웃에게서 얻어야 했습니다. 화북을 다스린 금(Jin)과 서북의 서하(Xia)가 몽골과의 교역을 줄이려 하자 위기가 생겼고, 몽골은 약탈과 공격, 마침내 침공으로 답했습니다.
셋째는 칭기즈칸 자신입니다. 하늘신 텡그리가 그에게 세상을 한 칼 아래 두라는 사명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세 설명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국 한 사람의 생애로 모인다는 점이 이 시기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부족을 흩어 하나로 묶다
칭기즈칸의 본명은 테무친(Temujin)입니다. 1206년 몽골 귀족들의 회의인 쿠릴타이(Khuriltai)가 그에게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때 테무친이 초원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 나라 이름을 예케 몽골 울루스(Yeke Mongol Ulus)라 했다고 적습니다.
통일을 지키는 방법이 독특했습니다. 부족이 합류하면 칭기즈칸은 그 구성원을 자기가 거느린 여러 단위로 흩어 놓았습니다. 부족 안의 충성은 부족장에게 가기 쉬웠기 때문에, 그 충성이 자기에게 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단위는 열을 바탕으로 쌓았습니다. 10명, 100명, 1,000명, 10,000명 단위가 차례로 있었고, 1만 명 단위의 장은 칭기즈칸과 강한 개인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런 충성은 넓은 땅을 하나로 다스리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나라의 뼈대도 이 무렵 생겼습니다. 1204년, 칭호를 받기도 전에 칭기즈칸은 위구르 출신 신하에게 위구르 문자를 바탕으로 몽골 문자를 만들게 했습니다. 일반적인 도덕 규범과 법을 모은 법전 자삭(Jasagh)도 남겼습니다.
말 서너 마리와 활
몽골 군대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역사학자 모리스 로사비(Morris Rossabi)는 1994년 글에서 칭기즈칸이 거느린 군대가 20만 명을 넘은 적이 없다고 썼습니다. 이 군대가 넓은 땅을 얻은 바탕으로 그는 작지만 튼튼한 몽골 말을 꼽습니다.
기병 한 사람은 보통 말 서너 마리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긴 행군에서 말을 번갈아 타며 한 마리씩 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정주 문명과의 싸움에서 말은 기동성이라는 큰 이점을 주었습니다.
무기와 마구도 말 위의 삶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힘줄과 뿔로 만든 합성궁을 말 위에서 잘 쏘았습니다.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안장은 오래 타도 버티게 했고, 튼튼한 등자는 말 위에서 몸을 더 안정되게 잡아 주었습니다. 안장주머니에는 솥, 말린 고기, 요구르트, 물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군대를 마주한 쪽의 눈에는 보급이 필요 없는 군대처럼 보였습니다. 1220~1221년의 일을 적은 이슬람 역사가 이븐 알아시르(Ibn al-Athir)는 그들이 보급대 없이 양과 소와 말을 데리고 다니며 그 고기를 먹고, 말은 발굽으로 땅을 파 풀뿌리를 먹는다고 적었습니다. 실제로는 가축 떼를 몰고 다닌 것이니 보급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보급의 모양이 달랐던 셈입니다. 오늘날 군대가 말하는 군수(logistics)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223년 칼카 강(Kalka River) 전투는 이런 군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여 주는 예로 자주 꼽힙니다. 로사비의 글에 따르면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뒤 칭기즈칸은 제베(Jebe)와 수베데이(Subedei)에게 약 3만 명을 주어 서쪽을 살피게 했습니다. 1223년 5월 러시아 쪽 므스티슬라프(Mstislav)는 8만 명을 이끌고 맞섰고, 몽골군은 2만 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몽골군은 일주일 넘게 물러나며 상대를 길게 늘어서게 한 뒤 칼카 강에서 돌아서 싸웠고, 러시아 쪽은 크게 졌습니다. 이런 거짓 후퇴는 칭기즈칸이 즐겨 쓴 방법이었습니다.
역참: 제국을 잇는 길
말이 군대를 빠르게 했다면, 역참(postal station)은 제국을 이어 붙였습니다. 역참은 본래 제국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공문서를 보내려고 만든 제도였습니다. 컬럼비아 자료에 따르면 큰 교역로를 따라 대략 20마일마다 역을 두고 먹을 것, 말, 잠자리를 갖췄습니다.
공문서 길은 곧 모든 여행자의 길이 되었습니다. 상인도 역에서 쉬고 물자를 얻었고, 몽골이 다스린 땅에서 상인의 지위는 예전 중국 왕조 때보다 높아졌습니다. 칸국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지만 몽골이 유라시아를 지배한 100년쯤 동안 상인은 대체로 위험하지 않았다고 이 자료는 설명합니다. 이를 흔히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곧 몽골의 평화라고 부릅니다.
역참은 나뉜 제국을 묶는 끈이기도 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각 울루스가 역참으로 연결되어 천호제나 케식 같은 몽골의 기본 제도를 유지하면서 현지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여 다스렸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길은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 몽골이 놓은 길은 주로 통치를 위해 쓰였고, 길과 역참망과 대운하 연장 같은 공공사업은 비용이 매우 컸습니다. 이 비용은 뒤에 원 왕조를 흔드는 짐이 됩니다.
정복의 흐름: 1206년에서 1279년까지
칭기즈칸이 직접 이끈 원정은 셋이었습니다. 1209년에는 서북 중국의 서하(탕구트)를 쳐서 교역에 매기던 관세를 낮추게 했고, 땅을 넓히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1215년까지는 금을 쳐서 지금의 베이징 지역을 차지하고, 금이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세 번째 원정은 성격이 달랐습니다. 칭기즈칸이 중앙아시아에 보낸 사절이 살해된 일이 계기였습니다. 1219년에 출발한 이 원정에서는 양쪽 모두 대량 살육을 벌였고, 큰 도시들을 정복하는 데 몇 해가 걸렸습니다. 1225년 중앙아시아를 떠날 때 칭기즈칸은 처음으로 군대를 남겨 정복한 땅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칭기즈칸은 1227년에 죽었습니다. 컬럼비아 자료는 중앙아시아 원정을 마치고 몽골로 돌아가던 길이었다고 적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탕구트 원정 도중이었다고 적습니다. 그는 질서 있는 계승 제도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칸마다 개인적인 충성 관계를 새로 쌓아야 했습니다.
뒤를 이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의 12년(1229~1241) 동안 제국은 가장 크게 넓어졌습니다. 몽골군은 1230년대에 러시아로 들어가 넓은 땅을 차지했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습니다. 1234년에는 금을 완전히 무너뜨려 장강(양쯔강) 북쪽의 중국을 모두 차지했고, 페르시아 동부로도 나아갔습니다.
작은 집단이 어떻게 이렇게 넓은 땅을 얻었을까요? 컬럼비아 자료는 두 가지를 듭니다. 하나는 정복한 사람들 가운데 충성스러운 이들을 군대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특히 위구르를 비롯한 튀르크 사람들이 큰 몫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웃들이 약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적어도 세 나라로 나뉘어 다투고 있었고, 러시아는 흩어진 도시 국가들이었습니다.
1241년 우구데이가 죽자 그 뒤 19년 동안 누가 대칸이 될지를 두고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에도 정복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쿠빌라이의 동생 훌레구(Hulegu)는 1258년 바그다드를 점령해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1260년에 이르러 몽골의 땅은 네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쿠빌라이가 다스린 중국·몽골·고려·티베트,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일 칸국, 러시아의 금장 칸국입니다.
쿠빌라이는 1271년 원(元)을 세웠고, 1279년까지 남송을 정복했습니다. 장강을 건너려고 몽골이 수군을 꾸려야 했던 이 원정을 컬럼비아 자료는 원 초기의 가장 큰 승리로 꼽습니다. 로사비는 칭기즈칸이 시작한 정복이 고려에서 헝가리까지, 러시아에서 지금의 베트남과 시리아까지 이르렀다고 적습니다.
고려와 몽골: 30년 가까운 전쟁
한반도도 이 흐름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고려를 다녀가던 길에 국경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보고 관계를 끊었고, 1231년 8월 살리타이(撒禮塔)가 이끄는 군대로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그해 12월 개경이 포위되자 고려 조정은 항복을 결정했고, 몽골군은 북쪽 지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명을 남기고 물러났습니다.
고려의 무신 집권자 최우는 다른 길을 골랐습니다. 1232년 6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각지의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게 해 오랜 항전을 준비했습니다. 그해 다시 쳐들어온 살리타이는 처인성에서 승려 출신 장수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죽었고, 몽골군은 물러났습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몽골군은 1235~1239년, 1247~1248년, 1253~1254년, 1254~1259년에 거듭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백성의 항전도 이어졌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고려의 피해는 커졌습니다.
1258년 항전을 주장하던 집권자 최의가 살해되면서 최씨 정권이 끝났습니다. 이듬해인 1259년 태자가 전쟁을 끝내려고 몽골로 향했고, 고려는 자기 풍속을 바꾸지 않는다는 조건 등을 얻어 강화를 맺었습니다. 그 뒤 개경 환도에 반발한 삼별초가 항쟁을 이어 가다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에 진압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려를 "30여 년 동안 몽골에 항쟁한" 나라로 적습니다.
바다와 남쪽에서 멈춘 원정
초원의 기병은 바다 앞에서 다른 문제를 만났습니다. 몽골은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1274년 1차 일본 원정에는 고려도 8,000여 명의 군사와 전함으로 참여했지만, 원정은 큰 손실을 남기고 실패했습니다. 실패의 큰 원인은 날씨였습니다.
1281년 여름의 2차 원정은 처음보다 훨씬 컸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심한 태풍이 함대를 망가뜨려 원정을 멈춰야 했습니다. 일본 쪽은 이 태풍을 신이 보낸 바람이라 여겨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렀습니다.
남쪽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1292년 자바 원정에서는 상륙까지 했지만 더위와 열대 환경, 기생충과 감염병 때문에 1년 안에 물러났습니다. 버마, 캄보디아, 베트남에서도 처음에는 이긴 곳이 있었지만 결국 날씨와 질병으로 물러났습니다. 컬럼비아 자료는 몽골이 해전에 능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보고, 원정이 실패할 때마다 막대한 돈이 들어 제국이 더 약해졌다고 설명합니다.
파괴와 교류, 두 얼굴의 기억
몽골 정복을 겪은 사람들의 기록에는 두려움이 짙게 남아 있습니다. 이븐 알아시르는 이 일을 "가장 큰 재앙"으로 적었고, 그들이 사람이 사는 땅 대부분을 1년쯤 만에 차지했다고 썼습니다.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양쪽 모두 대량 살육을 벌였다는 것도 앞에서 본 대로입니다.
학계의 시선은 시간이 지나며 넓어졌습니다. 1980년대까지 원 시대 중국 연구는 대부분 몽골 지배의 파괴를 강조했습니다. 북중국 인구가 파국적으로 줄었다는 예전 추정은 뒤에 고쳐졌지만, 정복 과정에서 큰 피해와 인명 손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대로입니다. 컬럼비아 자료는 몽골 원정의 잔혹함을 가볍게 보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유라시아 문화에 끼친 영향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정리합니다.
교류의 흔적은 사람의 발길에 남았습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와 모로코 출신 여행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가 이 시기 중국에 왔습니다. 베이징 근처 출신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라반 사우마(Rabban Sauma)는 유럽에 가서 영국과 프랑스의 왕, 그리고 교황을 만났습니다.
1241년 헝가리와 폴란드 공격에 놀란 유럽은 1245년 카르피니(John of Plano Carpini), 1253~1255년 뤼브룩(William of Rubruck)을 보냈습니다. 둘 다 종교와 외교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몽골에 관한 첫 정확한 기록을 가져왔습니다.
몽골은 장인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사마르칸트를 칠 때 칭기즈칸은 장인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고, 제국 곳곳의 장인에게 세금 혜택을 주고 부역을 면제했습니다.
원의 마지막은 비싼 원정과 공공사업의 무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340년대 큰 홍수로 황허의 물길이 바뀌어 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고, 1350년대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1368년 명이 중국을 되찾으면서 원은 중국에서 물러났습니다. 정복으로 시작한 제국은 바다와 길과 운하의 비용, 그리고 계승을 둘러싼 다툼 앞에서 흩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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