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 6월 29일 금요일, 지중해의 크레타섬에 크레타 범선 세 척이 들어왔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배였습니다. 선원들은 한 달 전인 5월 29일 아침에 메흐메트의 군대가 도시에 들어갔고 황제를 죽였다고 전했습니다. 그리스어 사본 한쪽에 덧붙여 적힌 짧은 메모에는 그날 크레타에 큰 슬픔과 울음이 있었다는 말이 남아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의 수도는 어떻게 두 달도 안 되는 포위 끝에 무너졌을까요? 이 글은 성 안에 있던 두 사람과 오스만 쪽에서 글을 쓴 한 사람의 기록을 나란히 놓고 그 봄을 따라갑니다. 황제의 측근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George Sphrantzes), 베네치아 외과의 니콜로 바르바로(Nicolo Barbaro), 메흐메드 2세(Mehmed II)를 섬긴 그리스 관리 크리토불로스(Kritovoulos)입니다.

세 사람은 같은 날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봤습니다. 그래서 숫자도, 시각도, 마지막 장면도 조금씩 다릅니다. 오래된 성벽이 화약 대포를 크게 맞닥뜨린 이 포위에서 무엇이 기록으로 남았는지 차례로 따라갑니다.

작아진 제국, 커진 이웃

15세기 중반의 비잔틴은 옛 제국의 그림자였습니다. 하버드 대학 덤바턴 오크스(Dumbarton Oaks)의 황제 인장 전시에서 마지막에서 두 번째 황제 요안네스 8세(John VIII)는 콘스탄티노플 말고는 트라키아 조금, 섬 몇 곳, 그리고 모레아(Morea)를 다스린 황제로 나옵니다. 제국은 도시 하나와 흩어진 땅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요안네스는 재위 대부분을 서방의 도움을 얻는 데 썼습니다. 1439년 피렌체에서 그는 비잔틴 교회를 교황의 관할 아래 두는 통합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 결과 일어난 십자군은 1444년 바르나(Varna)에서 무너졌고, 서유럽의 도움을 받을 마지막 희망도 함께 꺼졌다고 전시는 봅니다. 요안네스는 1448년에 죽었고, 그의 제국은 다섯 해 뒤에 끝났습니다.

뒤를 이은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노스(Constantine)입니다. 스프란체스의 셈으로 그는 팔라이올로고스(Palaiologos) 왕조의 여덟째 황제였습니다.

1452년 3월 26일,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성채를 지으려고 해협을 차지했습니다. 성채가 다 지어지자 그는 8월 31일 그곳을 떠나며 도시의 방어 시설을 공격했고, 9월 3일 아드리아노폴리스(Adrianople)로 돌아갔습니다.

스프란체스의 연대기에서 황제는 도움을 받을까 하는 바람으로, 어쩔 수 없이 예배에서 교황의 이름을 기리기로 합니다. 그 예배는 11월 12일에 열렸습니다.

여섯 달 뒤 스프란체스는 로마에서 받은 도움이 카이로의 술탄이 보낸 것만큼이었다고 썼습니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는 쓴 말이고, 다른 기독교인들도 도움을 보내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입니다.

세 줄짜리 연표 도표. 첫 줄은 1439년부터 1452년까지로, 1439년 피렌체의 교회 통합 서명, 1444년 바르나의 패배, 1448년 요안네스 8세의 죽음, 1452년 3월 26일 해협을 차지하고 성채를 짓기 시작함, 8월 31일 성채 완성 뒤 도시 방어 시설 공격, 9월 3일 아드리아노폴리스로 돌아감, 11월 12일 교황의 이름을 기린 예배가 있다. 둘째 줄은 1453년 4월로, 4월 4~5일 포위 시작, 4월 9일 사슬 위의 큰 배 아홉 척, 4월 11일 대포 배치, 4월 12일 오스만 함대 도착, 4월 20일 해전, 4월 21일 산 로마노의 탑 붕괴, 4월 22일 언덕을 넘은 배, 4월 28일 불배 시도가 있다. 셋째 줄은 5월부터 9월까지로, 5월 22일 달의 징조와 땅굴, 5월 29일 마지막 공격과 함락, 6월 29일 크레타에 소식, 7월 27일 그라츠의 편지, 9월 1일 스프란체스가 풀려남이 있다. 점의 색으로 비잔틴과 서방 쪽, 오스만 쪽, 소식을 나눈다
1439년의 교회 통합에서 1453년 가을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육지 성벽과 바다의 사슬

콘스탄티노플은 한쪽이 육지, 나머지가 물에 닿은 도시였습니다. 육지 쪽에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an Walls)이 섰고, 물가에는 바다 성벽과 금각만(Golden Horn)을 따라가는 성벽이 있었습니다.

이 성벽에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학회 서평이 전하는 연구서의 설명으로는, 447년 큰 지진이 잇따라 성벽이 무너졌지만 시민들이 석 달 안에 다시 세웠습니다. 그때 원래 구조에 덧붙여 세 겹의 방어선을 갖췄습니다. 1453년은 그 재건에서 1,006년 뒤입니다.

크리토불로스는 포위 이야기에서 바깥의 낮은 벽, 주 성벽, 해자를 따로 부릅니다. 바깥에서 보면 해자, 낮은 바깥 벽, 주 성벽 순서입니다.

1453년 4월 술탄이 돌아왔습니다. 스프란체스는 4월 4일, 바르바로는 4월 5일 해 뜬 뒤 한 시간을 적었습니다. 바르바로의 일기에서 오스만 군대는 7일에 6마일 길이의 육지 성벽을 따라 한 줄로 펼쳤습니다.

바다 쪽은 사슬이 막았습니다. 4월 9일 수비 쪽은 항구를 가로지르는 방재(boom) 위에 가장 큰 배 아홉 척을 늘어세웠습니다. 그 배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맞은편 페라(Pera)까지 이어졌고, 방재 양 끝에는 탑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오스만 함대는 4월 12일에 왔습니다. 크리토불로스에 따르면 함대는 황금문(Golden Gate)에서 갈라타(Galata)까지 약 43스타디온의 바다 성벽 앞을 막았습니다. 육지와 바다로 에워싼 도시 둘레는 약 126스타디온이었고, 그 가운데 사슬 안쪽 금각만을 따라가는 성벽만 지키지 않았습니다.

도시 배치 개념 도표. 가운데 세모꼴 도시의 왼쪽 변이 육지 성벽이고, 위쪽 변은 금각만, 오른쪽과 아래쪽 변은 바다 성벽이다. 금각만 입구에는 도시와 건너편 페라를 잇는 사슬과 그 위의 배들이 있다. 육지 성벽 바깥에 오스만 진영이 있고, 산 로마노 문 근처에 대포 표시가 있다. 페라 뒤쪽 언덕을 넘어 금각만 안으로 들어가는 점선 화살표가 언덕을 넘은 배의 길이다. 오른쪽 아래 작은 상자는 성벽 단면 개념도로, 바깥에서 안쪽으로 해자, 바깥 벽, 안쪽 벽이 차례로 서 있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과 치수가 없다는 메모가 있다
육지 성벽, 금각만의 사슬, 언덕을 넘은 배의 길을 네모와 선으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문제는 사람이었습니다. 황제는 구역 책임자들에게 성벽을 지킬 수 있는 사람과 무기를 세게 했고, 그 목록을 스프란체스가 집에서 몰래 더했습니다. 그리스인 4,773명과 외국인 200명 남짓이었습니다. 참된 숫자는 황제와 스프란체스 두 사람만 알았습니다.

크리토불로스의 글에서도 사정은 같습니다. 금각만 쪽을 비워 두었는데도 나머지 성벽에서는 흉벽 둘이나 셋에 수비병이 한 사람꼴이었습니다.

거대한 대포: 성벽 앞에 선 새 무기

크리토불로스의 글에서 술탄은 도시를 에워싼 군대와 함대를 배치한 뒤 대포 기술자들을 불러 성벽을 어떻게 무너뜨릴지 묻습니다. 기술자들은 가진 포에 하나를 더 만들면 성벽을 부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나온 대포는 크리토불로스의 표현으로 보기에 무섭고, 말로 들으면 믿기 어려운 물건이었습니다.

대포가 자리를 잡은 것은 4월 11일입니다. 술탄은 성벽의 가장 약한 곳 가까이 네 군데에 대포를 놓았습니다.

놓인 곳대포 수
황제의 궁 근처3
피기 문(Pigi gate)3
크레수 문(Cressu gate)2
산 로마노 문(gate of San Romano)4

바르바로는 산 로마노를 도시 전체에서 가장 약한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의 한 대포는 무게가 1,200파운드쯤 되는 돌 포탄을, 다른 하나는 800파운드짜리를 쐈고, 이 둘이 가장 컸습니다. 나머지는 500파운드에서 200파운드, 그보다 작은 것까지 여러 크기였습니다.

크리토불로스가 본 배치는 조금 다릅니다. 술탄은 자기 천막이 있는 가운데 성벽 맞은편에 가장 크고 강한 대포 셋을 두게 했고, 나머지는 약해 보이는 곳 여기저기로 보냈습니다. 여러 곳을 한꺼번에 치는 편이 낫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포격은 성벽을 조금씩 허물었습니다. 크리토불로스의 글에서는 어떤 성벽도 그 돌 포탄을 견딜 만큼 강하거나 두껍지 않았습니다. 4월 21일에는 산 로마노 쪽에 하루 종일 포격이 이어져 탑 하나와 성벽 몇 야드가 무너졌습니다.

크리토불로스의 같은 대목에는 단서도 붙어 있습니다. 화약의 힘이 청동 포 자체를 터뜨리는 일도 잦았다는 것입니다.

수비 쪽은 무너지는 대로 메웠습니다. 처음에는 성벽 위에서 들보를 내밀고 양모 뭉치를 밧줄로 늘어뜨려 충격을 받으려 했습니다. 효과가 오래가지 않자 무너진 곳 바깥에 큰 말뚝으로 울타리를 세우고 돌과 나무, 덤불로 높였습니다. 그 위에는 흙을 채운 나무통을 줄지어 놓았습니다.

이 흙 울타리는 뜻밖에 잘 버텼습니다. 크리토불로스의 설명으로는 세게 날아온 돌 포탄이 무른 흙에 박혀 버려, 단단한 것에 부딪칠 때처럼 구멍을 내지 못했습니다. 돌담을 망치로 치면 금이 가지만 모래 더미를 치면 망치가 파묻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실제 울타리는 말뚝과 돌·나무·덤불, 흙을 채운 통으로 쌓아 모래 더미보다 훨씬 거칠었습니다. 바르바로의 일기에도 성벽이 무너지면 곧바로 고치기 시작했고, 통 같은 것으로 서둘러 메웠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당대 사람은 이 무기를 어떻게 봤을까요? 크리토불로스는 옛 왕과 장군들은 이런 것을 갖지도 알지도 못했다고 적었습니다. 그의 설명으로는 150년 남짓 전에 게르만인 또는 켈트인이 새로 만든 것이고, 옛 이름이 없어서 사람들은 그냥 '장치'라고 불렀습니다.

술탄은 성벽 밑으로 땅굴도 파게 했습니다. 크리토불로스의 글에서 술탄은 대포가 모든 일을 해내자 땅굴을 쓸데없는 비용으로 여깁니다. 바르바로의 일기에는 5월 22일과 24일에도 성벽 밑에서 땅굴을 찾아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두 기록을 함께 놓으면 땅굴은 5월 하순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언덕을 넘은 배

4월 20일, 바다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도시를 도우러 온 큰 배들이 나타났고 오스만 함대가 막아섰습니다. 크리토불로스는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식량과 도움을 실어 보낸 큰 갤리온 세 척으로 적었고, 바르바로는 제노바에서 온 것으로 여겨진 큰 배 네 척으로 적었습니다.

결과는 두 기록이 같습니다. 큰 배들이 빠져나갔습니다. 크리토불로스는 갑자기 센 남풍이 불어 돛을 채운 덕이라고 했고, 갤리온 쪽은 22명이 죽고 절반 넘게 다쳤으며 술탄의 함대는 100명 남짓이 죽고 300명 넘게 다쳤다고 적었습니다. 바르바로는 싸움이 두세 시간 이어졌고 145척의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았다고 썼습니다.

크리토불로스의 글에서는 술탄이 갈라타 성벽 너머 사슬 앞의 배를 맞히려고 돌을 높이 쏘아 올리는 다른 포를 만들게 했고, 그 포에 갤리온 한 척이 가라앉자 나머지 배들은 더 안전한 곳으로 물러났습니다.

사슬 안의 금각만은 여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4월 22일 술탄은 함대 일부를 항구 안으로 넣기로 했습니다. 바르바로의 일기에서 오스만 쪽은 페라 위 언덕을 3마일 고르고, 기름 바른 굴림대를 줄지어 깔았습니다. 그 위에 작은 배인 푸스타(fusta)를 올려 많은 사람이 끌었고, 72척까지 항구 안으로 들였습니다.

크리토불로스는 거리를 다르게 적었습니다. 바다에서 바다까지 그 길은 약 8스타디온이었고, 갈라타 조금 너머 '차가운 물(Cold Waters)'이라는 만에 배 67척쯤이 모였습니다.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는 것이 그의 말입니다.

배가 금각만 안에 들어오자 성 안의 계산이 바뀌었습니다. 비워 두었던 금각만 쪽 성벽도 지켜야 했고, 수비 쪽은 다른 흉벽의 사람을 빼 와야 했습니다. 모자란 사람을 더 얇게 펴야 했던 것입니다.

수비 쪽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4월 28일 금각만 안의 오스만 배를 불태우려 했지만, 앞서 나간 푸스타가 포탄에 맞아 가운데가 뚫리고 곧바로 가라앉았다고 바르바로는 적었습니다.

5월 29일의 마지막 공격

5월 22일 밤, 하늘에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르바로에 따르면 보름달이 사흘 된 달처럼 조금만 보이며 떠올랐습니다. 그리스인들 사이에는 보름달이 징조를 보이기 전에는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예언이 있었다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5월 28일 술탄은 진영 곳곳에 나팔을 울려 다음 날의 총공격을 알렸습니다. 바르바로의 일기에서 공격은 5월 29일 해 뜨기 세 시간 전에 시작됐고, 술탄은 군대를 50,000명씩 세 무리로 나눴습니다.

크리토불로스의 글은 시각이 다릅니다. 해가 기울어 저녁이 가까울 때 공격 신호가 나오고, 첫 공격이 해 질 때까지 두세 시간 이어집니다. 밤 대부분 동안 수비 쪽이 적잖이 잘 버텼고, 술탄은 아껴 둔 정예와 예니체리(Janissaries)를 들여보냈습니다.

그 사이 제노바 사람 주스티니아니(Giustiniani)가 싸움에서 빠졌습니다. 황제가 군의 대장으로 삼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빠졌는지는 기록이 갈리는데, 바로 다음 소제목에서 나란히 봅니다.

성 안으로 들어온 때는 세 기록이 대체로 아침으로 모입니다. 바르바로는 해 뜰 무렵 오스만 군대가 대포에 무너진 산 로마노 근처로 들어왔다고 적었고, 싸움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이어졌습니다. 스프란체스는 5월 29일 화요일 이른 시각에 술탄이 도시를 차지했다고 썼고, 크리토불로스의 글에서도 이미 날이 밝고 있었습니다.

탑 위의 깃발이 바뀌었습니다. 산마르코(베네치아)의 깃발과 황제의 깃발이 내려지고, 같은 탑에 술탄의 깃발이 올라갔습니다.

같은 날, 다른 기록

세 사람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부터 알아야 기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스프란체스는 여러 황제 밑에서 외교관과 사절로 일한 궁정 신하였고, 말년에 일부 자서전 같은 연대기를 남겼습니다. 바르바로는 베네치아 귀족 가문의 외과의였습니다. 중세 군사사 학회 De Re Militari의 편집자는 그의 일기를 포위와 함락에 대한 가장 자세하고 정확한 목격담일 것이라 소개하면서도, 동료 베네치아인의 활동에 자주 초점을 맞추고 때로 함께 싸운 그리스인과 제노바인을 깎아내린다고 짚습니다.

크리토불로스는 메흐메드 2세 밑에서 일한 관리로, 1456~1466년 고향 임브로스(Imbros)섬의 총독을 지냈습니다. 같은 학회 소개는 그의 기록이 다른 어떤 그리스어 저작보다 오스만에 우호적이고, 공격 쪽 전술과 대포를 자세히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성 안의 눈과 성 밖의 눈이 이렇게 섞여 있습니다.

무엇스프란체스바르바로크리토불로스
포위 시작4월 4일4월 5일—
공격군200,000명약 160,000명, 마지막 공격은 50,000명씩 세 무리—
함대크고 작은 배 400척145척—
도시 둘레18마일육지 성벽 6마일약 126스타디온
언덕을 넘은 배—72척까지, 3마일약 67척, 약 8스타디온
4월 20일의 큰 배—네 척, 제노바에서 온 것으로 여김갤리온 세 척, 교황이 보냄
마지막 공격의 시작—해 뜨기 세 시간 전저녁이 가까울 때 신호

줄표(—)는 이 글이 본 발췌에 그 값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섯 칸짜리 비교 도표. 공격군: 스프란체스 200,000명, 바르바로 약 160,000명, 바르바로가 적은 마지막 공격의 세 무리는 50,000명씩. 함대: 스프란체스 크고 작은 배 400척, 바르바로 145척. 언덕을 넘은 배: 바르바로 72척까지, 크리토불로스 약 67척. 수비 인원: 스프란체스 그리스인 4,773명과 외국인 약 200명. 함락 때의 사람: 크리토불로스가 전해 들은 숫자로 사망 4,000명 가까이, 포로 50,000명 조금 넘게. 모든 값은 기록에 적힌 그대로이며 단위가 다른 거리(마일과 스타디온)는 환산하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포위, 다른 숫자. 기록마다 적힌 값을 칸마다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주스티니아니의 마지막도 두 가지로 남았습니다. 크리토불로스는 그가 쇠뇌 화살에 가슴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부하들이 그를 데리고 서둘러 갤리온에 올랐다고 적었습니다. 바르바로는 그가 자리를 버리고 자기 배로 달아났다고 썼습니다. 제노바인에게 박했던 바르바로의 눈을 함께 놓고 읽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황제 콘스탄티노스의 최후는 세 기록이 모두 다릅니다. 크리토불로스의 글에서 황제는 곁에 있던 모든 사람과 함께 싸우다 쓰러집니다. 스프란체스는 황제가 그때 죽임을 당했다고만 쓰고, 자신은 그 시각 다른 곳을 살피러 가 있어 곁에 없었다고 밝힙니다. 바르바로는 황제가 무엇을 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여러 말이 돌았다고 적었습니다.

함락이 남긴 것

함락은 도시 사람들에게 가장 무거웠습니다. 크리토불로스의 글에서 육군과 해군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도시로 쏟아져 들어와 약탈합니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에 피신해 있던 남자와 여자, 아이들은 한꺼번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르바로는 오스만 군대가 들어온 해 뜰 때부터 한낮까지 마주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죽였고, 숨어 있던 상인들도 뒤에 붙잡혀 노예로 팔렸다고 적었습니다.

크리토불로스가 전해 들은 숫자로는 싸움과 함락에서 비잔틴 사람과 외국인, 남녀와 아이까지 모두 4,000명 가까이 죽었고, 50,000명을 조금 넘는 사람이 포로가 됐습니다. 그 숫자 하나하나가 가족과 이웃이었습니다. 스프란체스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포로가 돼 비참한 노예 생활을 겪었고, 1453년 9월 1일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 미스트라(Mistra)로 갔습니다.

크리토불로스는 도시에 들어온 술탄이 그 크기와 아름다움, 죽은 사람과 무너진 건물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합니다. 그가 옮긴 술탄의 말은 "우리가 어떤 도시를 약탈과 파괴에 넘겼는가!"입니다. 오스만에 우호적인 기록자의 글이라는 점을 함께 기억해 둘 장면입니다.

제국도 거기서 끝났습니다. 스프란체스는 팔라이올로고스 왕조가 194년 10개월 4일 동안 도시를 다스렸다고 셈해 남겼습니다.

소식은 천천히, 엇갈리며 퍼졌습니다. 크레타에는 한 달 뒤인 6월 29일에 닿았습니다. 크레타 메모에 따르면 범선 선원들은 메흐메트의 군대가 5월 29일 아침 셋째 시, 곧 오전 9시에 도시에 들어갔다고 전했습니다.

7월 27일 그라츠(Graz)에서 쓴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Aeneas Silvius Piccolomini)의 편지에는 아직 소문이 엇갈립니다.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졌다는 끔찍한 소문 뒤에 도시가 지켜졌다는 덜 나쁜 소식이 왔고,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사실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학자들은 이 포위에서 대포를 크게 봅니다. 학회 서평에 따르면 스티븐 턴불(Stephen Turnbull)은 오스만이 더 나은 화포를 받아들인 것을 정복이 성공한 결정적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데이비드 니콜(David Nicolle)은 술탄이 포위 중에 새로운 종류의 장거리 박격포를 만들어 냈다고 봅니다. 한 가지 요인만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가운데 하나'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그 시대의 큰 포는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왕립 무기고(Royal Armouries)의 포트 넬슨(Fort Nelson) 전시실 입구에는 청동으로 된 '대 튀르크 봄바드(Great Turkish Bombard)'가 있습니다. 전시 설명은 큰 돌 포탄을 쏘는 봄바드를 중세의 무거운 파괴 무기로 소개하고, 이 포를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무니르 알리(Munir Ali)에게 주문했다고 적습니다. 전시 설명은 이 포가 1453년 포위에 쓰였다고 적지 않습니다.

포를 차체와 엔진 위에 올린 오늘의 이야기는 자주포: 포가 스스로 움직이면 달라지는 것(Self-propelled howitzer)에서 이어집니다.

다음에 읽을 글

  • 4차 십자군: 예루살렘 대신 콘스탄티노플로 간 원정: 같은 도시가 그보다 먼저 서방 원정군에게 무너진 이야기입니다.
  • 비잔틴 제국과 그리스의 불: 비밀로 남은 무기: 이 도시를 바다에서 지켜 온 또 다른 무기의 이야기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새 무기가 자리를 잡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레이저 쪽에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