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0월 14일, 미국 U-2 정찰기 한 대가 쿠바 상공에서 사진 몇 장을 찍었습니다. 사진에는 짓고 있는 탄도미사일 기지가 뚜렷이 보였습니다. 이튿날 사진이 백악관에 올라갔고, 그 뒤 두 주 가까이 세계는 핵전쟁의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이 위기를 냉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핵 충돌에 가장 가까이 간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13일"이라고 하는데, 케네디가 첫 대책 회의를 연 10월 16일부터 흐루쇼프가 미사일 철수를 발표한 10월 28일까지를 양 끝 포함해 세면 13일입니다.

왜 하필 쿠바였을까요? 13일 동안 어떤 말과 편지가 오갔고, 수십 년 뒤에야 알려진 것은 무엇일까요? 미국 정부가 공개한 회의 녹취와 편지, 해군의 작전 기록을 따라가 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연표 도표. 첫 줄 위기로 가는 길(1959~1962년): 1959년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 정부, 1961년 4월 17일 피그스만 상륙과 이틀 만의 패배, 1961년 11월 몽구스 작전 결정, 1962년 7월 소련·쿠바의 비밀 미사일 합의, 1962년 9월 4일 케네디의 공개 경고. 둘째 줄 13일(1962년 10월 16~28일): 10월 14일 U-2가 미사일 기지를 찍음, 16일 백악관 첫 회의, 22일 격리 명령·텔레비전 연설·DEFCON 3, 24~25일 일부 배가 격리선에서 돌아섬, 26일 첫 검색과 흐루쇼프의 첫 편지, 27일 터키 문제를 단 둘째 편지와 U-2 격추, 28일 흐루쇼프의 철수 발표. 셋째 줄 위기 뒤: 1962년 11월 20일 IL-28 폭격기 철수 합의 뒤 격리 끝, 1963년 4월 터키의 미국 주피터 미사일 철수, 1963년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 서명, 위기 뒤 백악관과 크렘린 사이 핫라인. 13일은 10월 16일과 28일을 모두 넣어 센 것이고,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으며 지도·사거리·무기 수치는 없다
피그스만부터 핫라인까지. 미 국무부 역사실과 미 해군 역사 기록의 날짜를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피그스만에서 비밀 합의까지

쿠바에서는 1959년 좌파 혁명이 바티스타 대통령을 몰아내고 피델 카스트로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새 정부는 쿠바 안의 미국 경제 자산을 몰수하고 소련과 가까워졌습니다. 미국 바로 앞바다의 섬이 냉전의 새 무대가 된 것입니다.

1960년 3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중앙정보국(CIA)에 쿠바 침공 계획을 짜라고 지시했습니다. CIA는 망명 쿠바인으로 이루어진 2506 여단을 훈련하고 자금을 댔습니다. 이 여단은 1961년 4월 17일 피그스만에 상륙했지만, 카스트로가 직접 지휘한 쿠바군에 이틀 만에 졌습니다.

실패는 오히려 카스트로 정부의 자리를 굳혔습니다. 미국은 1961년 11월 몽구스라는 새 비밀 작전을 정했는데, 목표는 피그스만이 못 한 일, 곧 카스트로 정권을 권력에서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1962년에 계획 가운데 일부가 실행됐지만 군사 개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해 봄과 여름에는 소련이 쿠바로 보내는 무기가 늘었다는 정보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의 서술로는 1962년 7월 흐루쇼프가 카스트로와 비밀리에 합의해, 앞으로 있을지 모를 침공을 억제하려고 소련 핵미사일을 쿠바에 두기로 했습니다. 늦여름 기지 공사가 시작됐고, 미국의 정찰 비행은 IL-28 폭격기를 포함한 무기 증강을 찾아냈습니다. 9월 4일 케네디는 쿠바에 공격용 무기를 들여오지 말라고 공개 경고했습니다.

10월 14일의 사진과 첫 회의

경고에도 공사는 이어졌습니다. 10월 14일 U-2의 사진에는 준중거리 탄도미사일(medium-range ballistic missile, MRBM)과 중거리 탄도미사일(intermediate-range ballistic missile, IRBM)을 세울 기지를 짓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사진은 처리를 거쳐 이튿날 백악관에 보고됐습니다.

10월 16일 오전 11시 50분, 백악관에서 첫 회의가 열렸습니다. 공개된 녹취는 사진 분석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이 기지를 없앨 일련의 조치를 시작해야 한다면서 두 갈래 길을 놓았습니다. 하나는 기습 공격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를 키워 상대가 물러서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길이었습니다.

자문단의 의견은 갈렸습니다. 합동참모본부(합참) 전원을 포함한 일부는 공습으로 미사일을 부수고 이어 쿠바를 침공하자고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쿠바와 소련에 엄중히 경고하는 쪽을 원했습니다. 케네디는 그 사이의 길을 골랐습니다.

바다 위의 선: 봉쇄가 아니라 격리

10월 22일 케네디는 쿠바에 대한 해상 "격리(quarantine)"를 명령했습니다. 왜 "봉쇄"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봉쇄는 전쟁 상태를 전제하는 말이어서, "격리"라는 이름은 이 조치를 법적으로 봉쇄와 구분했습니다. 그 덕에 미국은 미주기구(OAS)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같은 날 케네디는 흐루쇼프에게 편지를 보내 공격용 무기의 반입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짓고 있거나 다 지은 기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편지가 위기 내내 두 정부 사이에 오간 직접·간접 연락의 첫 번째였습니다.

그날 저녁 텔레비전 연설에서 그는 쿠바에서 서반구 어느 나라를 향해 쏜 핵미사일이든 소련이 미국을 공격한 것으로 보고 전면 보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합참은 방어 준비 태세를 DEFCON 3으로 올렸습니다.

10월 24일 흐루쇼프는 미국의 "봉쇄"가 "침략 행위"라며 쿠바로 가는 소련 배들에 계속 가라고 명령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24~25일 일부 배는 격리선에서 돌아섰습니다. 멈춰 세운 배들도 공격용 무기가 없어 그대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10월 26일 아침에는 미 해군 구축함(destroyer) 두 척의 검색반이 레바논 화물선 마루클라에 올라 첫 격리 검색을 했습니다.

격리는 큰 작전이었습니다. 미 해군 구축함과 호위함은 바다 위에서 보급을 받으며 한 달 동안 자리를 지켰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의 정리로는 격리 마지막 주에 접어든 11월 중순까지 해군 지원 부대가 배 183척에 탄 8만 5천 명을 보급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찰 비행은 쿠바의 미사일 기지가 가동 준비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 줬습니다. 미군은 전략공군사령부가 낀 전쟁이 임박했다는 뜻의 DEFCON 2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어두운 토요일

10월 26일, 케네디는 자문단에게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는 것 말고는 미사일을 없앨 길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외교에 시간을 조금 더 주자고 했습니다. 그날 오후 ABC 방송 기자 존 스칼리가 백악관에 소식을 전했습니다. 한 소련 요원이 다가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소련이 미사일을 빼는 합의가 가능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흐루쇼프의 편지가 왔습니다. 핵 참화를 떠올리게 하는 길고 감정적인 편지였고, 내놓은 해법은 스칼리가 전한 제안과 아주 닮았습니다. 흐루쇼프는 "밧줄의 양 끝을 당기는 힘을 늦출 뿐 아니라 그 매듭을 풀 조치를 하자"고 썼습니다.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0월 27일 흐루쇼프는 터키에 있는 미국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도 거래에 넣어야 한다는 둘째 편지를 보냈습니다. 같은 날 미국 U-2 한 대가 쿠바 상공에서 격추됐고, 조종사가 숨졌습니다.

1992년 해군 역사 학술 발표에서 월터 풀(Walter S. Poole)은 이날을 위기에서 가장 암울한 날로 꼽았습니다. 그날 합참은 공격용 무기가 해체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늦어도 29일 월요일 아침에 공습하고 7일 뒤 침공하자는 권고를 백악관에 보냈습니다.

케네디는 둘째 편지는 제쳐 두고 첫 편지에 답하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유엔의 감독 아래 소련 미사일을 빼는 단계와,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제안했습니다. 둘째 편지를 무시한 것은 위험한 수였습니다.

그 뒤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이 아나톨리 도브리닌 주미 소련 대사를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그는 미국이 어차피 터키의 주피터 미사일을 곧 뺄 계획이라고 알리면서, 다만 이것은 공개 합의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인 10월 28일, 흐루쇼프는 소련 미사일을 해체해 쿠바에서 가져가겠다고 공개 발표했습니다.

같은 날 케네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흐루쇼프는 공격용이라 부른 무기를 해체해 상자에 담아 소련으로 돌려보내라는 새 명령을 내렸다고 썼습니다. 소련이 쿠바에 무기를 준 까닭은 쿠바가 늘 침공 위협 아래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1962년 10월 26~28일 편지와 비밀 경로를 그린 흐름도. 왼쪽 열은 모스크바에서, 오른쪽 열은 워싱턴에서 나온 연락이다. 26일 오후 한 기자가 소련 쪽 사람의 제안(미국이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사일을 뺀다)을 전함(비공식 경로, 점선). 26일 저녁 흐루쇼프의 첫 편지: 길고 감정적이며 '매듭을 풀자'는 말, 조건이 기자의 제안과 닮음. 27일 흐루쇼프의 둘째 편지: 터키의 미국 주피터 미사일 철수도 넣어야 함. 27일 밤 케네디가 첫 편지에 답함(둘째 편지는 제쳐 둠): 유엔 감독 아래 소련 미사일 철수와 쿠바 불공격 보장. 27일 로버트 케네디와 도브리닌 대사의 비밀 면담(점선): 주피터는 어차피 곧 빼지만 공개 합의에 넣을 수 없음. 화살표가 모두 28일 아침 흐루쇼프의 공개 발표(소련 미사일을 해체해 쿠바에서 가져감)로 모인다. 단순화한 그림이다
공개 편지와 비밀 경로가 함께 움직였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의 정리를 바탕으로 단순화했습니다 (도표)(도표)

위기 속의 무기: 미사일, 사진, 잠수함

이 위기에는 냉전의 무기 기술이 여럿 얽혀 있었습니다. 중심에는 미사일이 있었습니다. 준중거리와 중거리는 탄도미사일을 사거리로 나눈 이름이고, 이 구분은 탄도미사일 글에 자세히 있습니다. 1992년 가트호프의 발표에 따르면 쿠바에 있던 핵 준중거리 미사일은 흐루쇼프의 명시적인 허가 없이는 어떤 경우에도 쏘지 않게 돼 있었고, 쿠바의 소련군은 미국이 공격할 때만 싸우라는 엄격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판단의 근거는 사진이었습니다. 위기를 연 것은 U-2의 사진이었고, 해군의 항공 사진기와 초계기도 소련 공격용 무기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바닷길로 빠져나가는 것을 감시하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하늘에서 찍은 사진이 정보가 되는 길은 군사 정찰위성 글에서 이어집니다.

U-2를 떨어뜨린 무기는 지대공 미사일이었고, 그 원리는 지대공 미사일 글에 있습니다. 10월 27일 카스트로가 낮게 나는 미국 정찰기에 대공포를 쏘라고 명령한 뒤, 소련군은 방공 레이다를 켰습니다. U-2가 사정권에 들어오자 현지 소련 방공 지휘관들이 지대공 미사일 부대에 격추를 명령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쿠바군이 쏜 줄 알았습니다.

바닷속에도 긴장이 있었습니다. 해군은 쿠바로 가는 상선뿐 아니라 그 해역의 소련 잠수함도 가로막았습니다. 10월 26일 격리 해역에서는 강한 감시에 떠밀려 수면으로 올라온 잠수함들이 목격됐고, 소련의 "F"급 장거리 재래식 잠수함 세 척이 확인됐습니다.

그때는 몰랐던 것, 엇갈리는 해석

1992년 6월 18일 NHHC의 학술 발표에서 레이먼드 가트호프(Raymond L. Garthoff, 브루킹스 연구소)는 냉전 뒤 소련 쪽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격리가 시작될 때 쿠바에는 소련군 약 4만 2천 명이 있었습니다. 10월 중순 미국 정보 당국 추정의 네 배가 넘고, 위기 뒤인 1963년에 다시 추정한 2만 2천 명의 두 배 가까운 숫자입니다.

핵무기 이야기는 더 무겁습니다. 미국이 미사일을 찾고 격리를 시작했을 때 준중거리 미사일(SS-4)은 핵탄두 36개와 함께 이미 쿠바에 있었습니다. 중거리 미사일(SS-5)은 모두 바다 위에 있다가 쿠바에 닿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전술 핵무기도 있었고, 미군이 침공하면 쓸 수 있도록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에게 권한이 미리 위임돼 있었습니다.

이 숫자들에는 단서가 붙습니다. 가트호프 스스로, 소련 쪽 공개 내용 대부분은 회고 자료이고 회고는 쓸모 있지만 선택적이며 때로 틀릴 수 있어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미국이 추정한 것과 뒤에 알려진 것을 비교한 도표. 왼쪽 막대 두 개(0~4만 5천 명 축척): 1963년 미국 정보 당국이 다시 추정한 쿠바 주둔 소련군 2만 2천 명, 격리가 시작될 때 실제로 있던 약 4만 2천 명(소련 쪽 이야기). 그 아래에 1962년 10월 중순 미국 추정은 이 수의 4분의 1이 안 됐다는 글. 오른쪽 상자 세 개: 준중거리 미사일(SS-4)은 핵탄두 36개와 함께 이미 쿠바에 있었음, 중거리 미사일(SS-5)은 바다 위에 있다가 돌아가 쿠바에 닿지 않음, 전술 핵무기가 있었고 침공군에 쓸 권한이 쿠바의 소련군 사령관에게 미리 주어져 있었으나 그때는 알려지지 않음. 아래에 이 수치의 바탕인 소련 쪽 공개 내용 대부분이 회고 자료라는 주의 글. 1992년 가트호프의 발표가 출처이고 사거리·위력·부대 편성은 그리지 않았다
위기 때 미국이 본 그림과 30년 뒤 알려진 그림. 1992년 가트호프의 발표를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흐루쇼프는 왜 미사일을 보냈을까요? 국무부 역사실은 앞으로의 침공을 억제하려는 것이었다고 적고, 10월 28일 흐루쇼프의 편지도 쿠바가 늘 침공 위협 아래 있었다고 말합니다. NHHC의 요약 쪽은 흐루쇼프가 자기가 본 미국과의 전략 불균형을 바로잡으려 했다고 씁니다.

가트호프는 세 가지 고려가 함께 있었다고 봅니다. 미국의 전략 우위가 드러난 "거꾸로 된 미사일 격차", 피그스만 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할 것이라는 쿠바와 소련의 믿음, 미국이 터키의 중거리 미사일을 포함한 항공·미사일 전력으로 소련을 더 단단히 에워싸던 일입니다. 그러면서 이 가운데 무엇이 더 무거웠는지는 아마 영영 알 수 없는 물음이라고 했습니다.

위기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두고도 강조점이 다릅니다. NHHC 요약 쪽은 흐루쇼프가 자기 미사일·폭격기 전력으로는 해군의 폴라리스 잠수함과 공군의 지상 핵전력에 맞설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케네디가 우위를 밀어붙이지 않았기에 소련 지도자가 평화롭게 물러날 수 있었다고 씁니다. 국무부 역사실의 서술은 편지와 비밀 경로, 그리고 서로의 의도를 읽느라 애먹은 두 지도부를 더 앞에 둡니다.

위기가 남긴 것

흐루쇼프의 발표로 위기는 끝났지만 격리는 바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소련이 IL-28 폭격기를 쿠바에서 빼기로 하자 미국은 1962년 11월 20일 격리를 끝냈습니다. 터키의 주피터 미사일은 1963년 4월에 철수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위기가 케네디의 국내외 이미지를 강하게 했고, 피그스만 실패로 나빠진 세계 여론을 누그러뜨렸을 수도 있다고 평가합니다. 이와 다른 중요한 결과도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연락의 문제였습니다. 편지가 숱하게 오갔는데도, 어쩌면 그래서, 두 지도자와 자문단은 위기 내내 서로의 진짜 의도를 알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일을 다시 겪지 않으려고 백악관과 크렘린을 잇는 직통 전화선이 생겼고, 이것이 "핫라인"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둘째는 핵실험이었습니다. 핵전쟁의 문턱까지 갔던 두 나라는 핵 군비 경쟁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의 빠른 확대가 미국과 소련 지도자들을 핵실험 금지 합의 쪽으로 더 적극적으로 밀었습니다. 1963년 미국·소련·영국이 서명한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은 대기권·우주·물속의 핵실험을 모두 금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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