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7일, 지금까지 지은 가장 큰 전함 야마토가 오키나와에서 300해리 넘게 떨어진 바다에서 가라앉았습니다. 미국 항공모함에서 날아온 항공기 390대가 이 배를 쳤고, 미국이 잃은 것은 항공기 10대와 조종사·승무원 12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5년 전, 배 위의 비행기는 순양함 뱃머리에 덧댄 나무 발판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사이 바다의 중심은 거대한 함포를 단 전함에서 비행기를 띄우는 항공모함으로 옮겨 갔습니다. 무엇이 그 변화를 만들었고, 전함은 정말 쓸모를 잃었을까요? 조약 문서, 함정 기록, 해군 연습과 해전의 공개 기록으로 그 길을 따라갑니다.

전함이 바다의 중심이던 때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큰 해군들은 전함(battleship)을 함대의 주먹으로 여겼습니다. 두꺼운 장갑과 큰 함포를 단 배들이 줄지어 맞붙어 전쟁의 승부를 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005년 미 해군대학 학술지(Naval War College Review)에 실린 토머스 윌든버그(Thomas Wildenberg)의 논문에 따르면, 일본도 미국처럼 먼저 항공 작전이 있고 그 뒤 다음 전쟁의 결과를 정할 전함끼리의 "결전"이 온다고 내다봤습니다.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연습의 정규 모습이 된 뒤에도 미 해군의 전함 쪽 제독들은 서로 지키도록 항공모함을 전함 곁에 두자고 했습니다. 해군 항공 쪽 생각은 정반대였습니다. 느린 전함에 묶이는 것은 항공모함에 치명적이고, 빠르게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어라고 봤습니다.

생각이 바뀐 사람도 있습니다. 윌리엄 심스(William Sims) 제독은 처음에는 해군 항공, 특히 항공기를 싣는 배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항공기를 싣는 배는 적보다 강한 전함 부대의 받침 없이는 다른 나라를 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뉴포트의 해군대학을 맡은 뒤 생각이 크게 바뀌어, 1921년 버지니아곶 앞바다의 폭격 시험을 본 뒤 1922년 3월까지 "전함은 죽었다"고 썼습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세로 연표 도표. 1910년 11월 일리가 순양함 버밍엄의 나무 발판에서 배 위 첫 이륙, 1911년 1월 장갑순양함 펜실베이니아에 첫 착함, 1922년 2월 워싱턴 해군 조약 서명, 1922년 3월 랭글리 취역(미국 첫 항공모함), 1922년 12월 일본 호쇼 완성, 1924년 영국 허미스 완성, 1925년 함대 연습 5에 처음 항공모함 참가, 1927년 새러토가 취역(순양전함 선체를 바꾼 배), 1940년 11월 타란토 공격,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과 프린스 오브 웨일스·리펄스 침몰, 1942년 5월 산호해 해전(첫 항공모함끼리의 싸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일본 항공모함 4척 침몰), 1944년 6월 필리핀해 해전, 1945년 4월 야마토 침몰이 차례로 적혀 있다. 왼쪽 띠는 전간기와 전쟁 기간을 나누고,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일리의 나무 발판에서 야마토까지 35년.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과 다릅니다 (도표)(도표)

배 위의 첫 비행기와 첫 항공모함

1910년 11월 14일, 민간 곡예 비행사 유진 일리(Eugene Ely)가 미 순양함 버밍엄의 뱃머리에 지은 83피트 길이의 비스듬한 나무 발판에서 이륙했습니다. 배 위에서 비행기가 뜬 첫 기록입니다. 두 달 뒤인 1911년 1월 18일에는 장갑순양함 펜실베이니아의 고물에 특별히 만든 130×32피트 발판에 내렸다가 다시 떠났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의 해군 항공 연표는 이 일을 항공기를 배에서 쓸 수 있음을 처음 보여 준 시험으로 적습니다.

그렇다면 첫 항공모함은 어느 배일까요? 답은 무엇을 "처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영국의 아거스(Argus)는 이탈리아 여객선으로 설계됐던 배에 평평한 갑판을 얹은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가가 첫 진짜 항공모함으로 봅니다. 영국의 허미스(Hermes)는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된 세계 첫 배로 1924년에 완성됐고, 일본의 호쇼(鳳翔)는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 지어 1922년 12월에 먼저 완성됐습니다.

미국의 첫 항공모함 랭글리(Langley)는 석탄 운반선 주피터를 고친 배입니다. 항공모함으로 바꾸는 일은 1919년 7월 11일 승인됐고, 랭글리는 1922년 3월 20일 항공모함으로 다시 취역했습니다. 옛 함교 위에 534피트 비행갑판을 얹고 뱃머리에 사출기(catapult)를 달았습니다. 내려앉는 비행기를 와이어로 붙잡는 시험도 이 배에서 했고, 그 결과가 랭글리의 착함 제동장치(arresting gear)였습니다.

랭글리는 항공모함이라는 배 종류 자체를 시험하는 배였습니다. 1922년 10월 17일 닻을 내린 채 첫 비행기를 띄웠고, 10월 26일에는 바다를 달리는 중에 첫 착함을 받았습니다. 일리의 발판은 한 번의 시험을 위한 받침이었지만, 랭글리는 비행기를 띄우고 받는 일을 거듭 시험하는 배였습니다.

조약이 만든 항공모함

1921~1922년 세계의 큰 해군국들이 워싱턴에 모여 해군 군축을 논의했습니다.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서명한 5개국 조약은 나라마다 지킬 톤수 비율을 정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의 요약으로는 미국·영국 500,000톤, 일본 300,000톤, 프랑스·이탈리아 각 175,000톤이고, 흔히 말하는 5:5:3 비율입니다. 조약은 다섯 나라에 주력함(capital ship) 건조를 멈추고 옛 배를 폐기해 해군 규모를 줄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모든 함종이 묶인 것은 아니어서, 1922년 뒤에는 제한에서 빠진 순양함을 짓는 새 경쟁이 일어났고 다섯 나라는 1927년과 1930년에 다시 협상에 나섰습니다.

조약은 1922년 2월 6일 서명됐습니다. 그런데 미국에는 조약 때문에 폐기될 순양전함 가운데 두 척의 용골이 이미 놓여 있었습니다. 조약에는 이 배들을 항공모함으로 바꿀 수 있는 조항이 있었고, 한 척에 33,000톤까지, 방호 장갑을 더하면 3,000톤을 더 쓸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새로 짓는 항공모함은 27,000톤으로 묶였지만, 일본과 미국은 짓다 만 순양전함 두 척씩을 바꿔 이 한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두 나라가 33,000톤 항공모함 두 척씩을 계획한 것도 이 조항 때문이었습니다.

새러토가(Saratoga)가 그 예입니다. 1920년 9월 25일 순양전함으로 용골을 놓았고, 1922년 7월 1일 워싱턴 조약에 따라 항공모함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1927년 11월 16일 취역했습니다. 자매함 렉싱턴(Lexington)도 순양전함 선체를 바꾼 배입니다. 일본의 아카기(赤城)는 순양전함, 가가(加賀)는 전함 선체를 바꾼 항공모함이었습니다.

조약은 항공모함의 전체 톤수도 묶었습니다. 미국 몫 가운데 66,000톤을 렉싱턴과 새러토가가 썼습니다. 이어 레인저(Ranger)와 요크타운(Yorktown)·엔터프라이즈(Enterprise)가 남은 몫을 나눠 썼고, 와스프(Wasp)는 조약이 정한 135,000톤 한도의 남은 몫 안에서 지어야 했고 14,700톤으로 취역했습니다. 그 뒤 조약이 허락한 항공모함 톤수는 몇백 톤만 남았습니다.

연습장에서 자란 생각

항공모함을 어떻게 쓸지는 바다 위 연습에서 다듬어졌습니다. 1925년의 함대 연습 5(Fleet Problem V)는 해마다 하는 미 해군 연습 가운데 처음으로 항공모함을 넣었습니다. 랭글리는 배가 작고 승조원이 서툴러 한 번에 10대까지만 띄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연습 뒤 함대 사령관은 렉싱턴과 새러토가를 서둘러 완성하자고 권했습니다.

1928년 5월 17일에는 하와이 방어를 시험하는 육해군 연습이 있었습니다. 랭글리는 새벽 4시 30분부터 35대를 띄워 휠러 비행장과 섬의 다른 시설을 지키던 쪽을 완전히 기습했습니다. 이 공격을 지켜본 하와이 방면 사령관은 하와이 방어에 항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작은 갑판에서 더 많은 비행기를 다루는 방법도 이때 나왔습니다. 처음 랭글리는 영국식 절차에 따라 비행기가 내릴 때마다 갑판을 비우고 내린 비행기를 곧바로 아래로 내렸습니다. 조지프 리브스(Joseph Reeves)의 지도 아래 랭글리 승조원들은 비행기를 갑판에 세워 두는 갑판 계류(deck park), 충돌 방지망, 색 셔츠로 나뉜 갑판 팀을 만들어 냈습니다. 1925년 6월의 보고에는 이 배의 비상 차단막이 내려앉던 비행기가 갑판에 세워 둔 비행기와 부딪히는 것을 막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40~1941년: 하늘에서 맞은 전함

1940년 11월 11일 저녁, 영국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Illustrious)에서 낡은 복엽기 소드피시 21대가 떠올랐습니다. 목표는 이탈리아 타란토 항구에 정박한 이탈리아 해군 군함이었고, 이틀 전 정찰로 이탈리아 전함 전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 확인돼 있었습니다. National WWII Museum의 글은 두 번의 작은 공격에서 두 대를 잃고 전함 리토리오·카이오 두일리오·콘테 디 카보우르를 크게 망가뜨렸으며 사상자가 700명 가까이 났다고 적습니다.

NHHC의 연재 "Evolution of Aircraft Carriers"는 이것을 역사상 첫 성공한 전시 항공모함 공격으로 기록하고, 이 한 번으로 지중해의 해군력 균형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처칠의 말을 옮깁니다. 미 해군도 이 공격을 자세히 살폈고 진주만에 어뢰 방어망을 치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일본의 계획가들도 타란토를 연구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항공모함 6척에서 뜬 항공기 353대가 두 차례에 걸쳐 진주만의 미 태평양 함대와 둘레의 비행장·기지를 쳤습니다. 전함 5척이 가라앉고 3척이 망가졌습니다. NHHC 개요의 집계로는 이날 수병과 해병, 육군 장병, 그리고 민간인 68명을 포함해 2,40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됐고(해군 2,008명, 해병대 109명, 육군 218명), 1,100명 넘게 다쳤습니다.

그날 진주만에 미국 항공모함은 한 척도 없었습니다. NHHC 개요는 항공모함들이 마침 항구를 비워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이어지는 몇 달 동안 순양함·구축함(destroyer)·급유선과 함께 결정적인 몫을 했다고 적습니다. 사흘 뒤인 12월 10일에는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가 일본 항공기에 가라앉았습니다. 진주만의 미국 전함에 이어 영국의 주력함 두 척도 항공기의 공격에 진 것입니다.

1942년: 항공모함끼리의 싸움

1942년 5월 7~8일 산호해에서 이 전쟁의 첫 항공모함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한 달 뒤 미드웨이에서 미국은 항공모함 1척, 일본은 4척을 잃었고, 일본의 네 척은 모두 진주만 공격에 나섰던 배였습니다. NHHC 개요는 이때부터 태평양의 해상 세력 균형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 싸움에서 일본과 미국의 배는 50~150마일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거리에서 상대를 친 것은 함포가 아니라 갑판에서 뜬 비행기였습니다. 전함끼리 줄지어 포를 주고받는 결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윌든버그는 미드웨이를 항공모함이 전함을 대신해 바다의 우위를 정하는 존재가 된 군사 혁신의 마지막 단계로 봅니다. 함포 대신 항공모함의 항공력이 바다에서 폭탄과 어뢰를 나르는 주된 수단이 된 기술 혁명의 정점이라는 해석입니다. 같은 논문은 미국의 승리를 이끈 것이 결국 더 나은 교리였고, 그 승리가 태평양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고 결론짓습니다.

조선소의 차이와 야마토의 끝

2차 대전이 터졌을 때 미국의 항공모함은 7척이었습니다(수상기 모함으로 바뀐 랭글리는 세지 않습니다). 일본은 10척으로 시작했지만 미국 항공모함과 견줄 만한 큰 "함대" 항공모함은 6척이었습니다. 전쟁 동안 미국은 에식스(Essex)급 17척, 경순양함 선체를 바꾼 인디펜던스(Independence)급 경항공모함 9척, 더 작고 느린 호위 항공모함 100척 넘게를 새로 취역시켰습니다.

개전 때와 전쟁 중의 항공모함 수를 견준 막대 도표. 위 칸은 2차 대전이 터졌을 때로, 미국 항공모함 7척(랭글리는 세지 않음), 일본 10척 가운데 큰 함대 항공모함 6척과 나머지 중형·경항공모함 4척. 아래 칸은 전쟁 중 미국이 새로 취역시킨 항공모함으로 에식스급 17척,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9척, 호위 항공모함 100척 넘게(막대 끝이 열려 있음). 일본은 전쟁 중 만들어 싸움에 나간 큰 함대 항공모함이 다이호 1척이라는 메모가 있다. 출처는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H-gram 005
개전 때의 항공모함과 전쟁 중 새로 들인 항공모함. 호위 항공모함은 '100척 넘게'라고만 적혀 있어 막대 끝을 열어 두었습니다 (도표)(도표)

NHHC의 H-gram은 이 차이를 일본이 따라갈 수 없던 미국의 조선 능력으로 설명하고, 그 까닭의 하나로 미 잠수함이 원자재를 나르는 일본 상선을 가라앉힌 일을 듭니다. 전쟁 중 일본이 만들어 싸움에 내보낸 큰 함대 항공모함은 다이호(大鳳) 한 척이었습니다. 야마토급 셋째 선체를 항공모함으로 바꾼 시나노(信濃)는 1944년 11월, 시운전도 하기 전에 미 잠수함에 가라앉았습니다.

함대 안에서 전함의 자리도 바뀌었습니다. 1944년 6월 필리핀해 해전 무렵, 미국의 고속 전함들은 처음에 항공모함 기동전대마다 나뉘어 들어가 대공 방어를 맡았습니다. 함대끼리의 결전이 다가오자 일곱 척을 따로 한 전대로 모으기도 했습니다. 같은 달 13일 시작된 사이판 해안 포격은 고속 전함이 열었고, 옛 전함들이 순양함·구축함과 함께 이어받았습니다.

1945년 4월의 야마토는 이 흐름의 끝에 서 있습니다. 야마토와 자매함 무사시는 배수량 65,000톤(만재 72,000톤)으로 지금까지 지은 가장 큰 전함이었습니다. 승조원 수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H-gram은 3,332명 가운데 3,055명이 죽었다는 것이 가장 확실해 보인다고 적습니다. 함께 나섰던 배들까지 합치면 그날 일본 수병 약 4,24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함은 사라졌나

"전함은 죽었다"는 심스의 말은 1922년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함이 바다에서 바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1944년의 미 함대에서 고속 전함은 항공모함 전대마다 나뉘어 하늘을 지키거나 사이판에서처럼 해안을 포격했습니다. 함대의 주먹이던 배가 항공모함을 지키고 해안을 포격하는 배로 일을 바꾼 것입니다.

함대 모양의 변화를 그린 개념도 두 칸. 왼쪽 칸 '전간기의 생각'에는 가운데 전함 줄이 있고 그 곁에 항공모함이 붙어 있으며, 메모에는 항공 작전 뒤 전함끼리의 결전으로 승부가 난다고 양쪽 해군이 내다봤다는 것과 전함 쪽 제독들이 항공모함을 전함 곁에 두자고 했다는 것이 적혀 있다. 오른쪽 칸 '1944년'에는 가운데 항공모함이 있고 둘레를 고속 전함, 순양함, 구축함이 둘러싸 대공 방어를 맡으며, 옛 전함은 따로 해안 포격을 맡는다는 메모가 있다. 축척과 거리가 없는 개념도라는 메모가 있다
가운데에 무엇이 있었나. 전간기의 생각과 1944년의 함대를 견준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바뀐 것은 배 한 종류의 순위만이 아니었습니다. 1910년의 나무 발판, 1922년의 조약 조항, 1925년과 1928년의 연습, 갑판 계류 같은 갑판 위의 작은 발명이 하나씩 쌓여 1942년의 항공모함 싸움이 됐습니다. 윌든버그가 미드웨이의 승리를 "더 나은 교리"로 설명한 것도 이 점과 닿아 있습니다.

오늘의 항공모함도 그 바탕 위에 있습니다. 갑판 계류와 색 셔츠로 나뉜 갑판 팀은 랭글리 승조원이 만들었고, 사출기와 착함 제동장치도 이 배에서 시험했습니다. 그 장치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이 사이트의 다른 글에서 하나씩 풀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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