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호로프카 마을로 가는 길 남쪽 들판에는 높이 52 m의 승리 기념탑이 서 있습니다. 가까운 박물관 단지 앞에는 소련 T-34 전차 두 대가 독일 티거 전차 두 대를 짓밟는 조각이 있습니다. 탑도 조각도 1943년이 아니라 1990년대에 세워졌습니다. 그 싸움을 직접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던 무렵입니다.
1943년 7월 러시아 쿠르스크 둘레에서 벌어진 싸움은 흔히 "역사상 가장 큰 전차전"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기록을 펼치면 병력과 전차 수가 자료마다 다르고, 가장 유명한 장면인 프로호로프카의 손실 숫자는 수십 년 뒤 크게 고쳐졌습니다. 그렇다고 승패가 뒤집힌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은 독일이 왜 쿠르스크를 노렸고 왜 몇 달을 기다렸는지, 소련이 무엇을 준비했는지, 7월의 열흘 남짓과 그 뒤의 반격이 어떻게 흘렀는지를 미 육군의 공식 전사와 독일 국립 박물관, 학술지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마지막에는 기억과 기록이 어디서 어긋나는지 견주어 봅니다.
1943년 봄, 튀어나온 전선
1943년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완전히 수세에 몰렸습니다.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크게 진 데 이어 소련 공세에 밀려, 봄에는 1941년 겨울에 이미 차지했던 선까지 물러났습니다. 독일은 동부의 전략적 주도권을 되찾을 한 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눈에 띈 곳은 쿠르스크 둘레로 불룩 튀어나온 소련 쪽 전선이었습니다. 크기는 자료마다 달라서, 150 km 길이의 전선 돌출부로 적은 곳도 있고 남북 160마일, 동서 약 100마일로 적은 곳도 있습니다. 돌출부의 북쪽 어깨 오룔과 남쪽 어깨 벨고로드 근처는 독일군이 쥐고 있었습니다.
3월 13일 히틀러는 작전 명령 5호로 이 돌출부를 골랐습니다. 북쪽과 남쪽에서 집게처럼 밀고 들어가 쿠르스크 근처에서 만나면 안쪽의 소련군을 에워쌀 수 있습니다. 독일 지휘부는 여기서 이기면 전선이 곧게 펴지고 소련을 한동안 균형을 잃게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미뤄진 공세
계획은 "성채(Zitadelle)", 영어로 Citadel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4월 15일 작전 명령 6호는 4월 28일 뒤 6일 예고로 시작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날짜는 거듭 밀렸고, 5월 6일 육군 총사령부는 6월 12일로 미룬다고 알렸습니다.
미룬 까닭 가운데 하나는 새 전차였습니다. 히틀러는 새 전차, 특히 6월에 90대를 갖게 될 페르디난트 자주포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남쪽의 켐프 장군은 미루는 것이 공격하는 쪽보다 막는 쪽에 이롭다고 보았고, 구데리안은 왜 1943년에 동부에서 공세를 하려는지 히틀러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히틀러가 성채 작전의 최종 형태를 승인한 것은 6월 18일입니다. 북쪽은 제9군이 오룔-쿠르스크 선을 따라 남쪽으로, 남쪽은 제4기갑군이 벨고로드에서 북쪽으로 쿠르스크를 향하는 그림은 몇 달 동안 그대로였습니다. 미 육군 군사사 센터의 공식 전사를 쓴 Earl F. Ziemke는 이 계획이 지나칠 만큼 논리적이어서 기습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이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독일 지휘부는 공세의 한계를 감추려 했습니다. 요들은 국방군 선전 부서에 성채 작전을 공세가 아니라 반격으로 그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번에는 제한된 공세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추고, 실패할 때를 대비한 알리바이를 미리 만들어 두려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는 쪽의 준비
돌출부 안은 두 전선군이 맡았습니다. 북쪽은 로코솝스키의 중앙전선군, 남쪽은 바투틴의 보로네시전선군입니다. 두 전선군은 독일 공격이 예상되는 곳에 포와 전차의 약 3분의 2를 모았습니다.
땅도 바뀌었습니다. 중앙전선군만 해도 군인과 주민을 동원해 3,000마일 넘는 참호를 팠고, 들판의 마을과 언덕마다 진지를 만들었으며, 공병이 지뢰 40만 개를 묻었습니다. 각 군의 방어 띠 세 겹 뒤에는 전선군이 두 겹을 더 둘렀습니다.
뒤에는 또 한 겹이 있었습니다. 전략 예비인 코네프의 초원전선군이 1,600대 넘는 전차를 가지고 돌출부의 열린 동쪽 끝을 막아섰습니다. 독일이 뚫고 나오면 막고, 막고 나면 반격에 힘을 보태는 몫이었습니다.
소련은 막는 데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방어 계획 안에 반격 두 번을 미리 넣었습니다. 첫째는 독일 공세가 이어지는 동안 북쪽 오룔 돌출부를, 둘째는 남쪽의 독일 진격이 멈춘 뒤 쿠르스크 남쪽 독일군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자신 있었던 것일까요? 미 육군 전투연구소의 David M. Glantz는 1986년 보고서에서 반대쪽을 짚습니다. 소련은 독일의 전략 공세를 전술·작전적 성공을 거두기 전에 멈추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을 하려 했고, 스스로의 의심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방어를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두 쪽의 힘, 자료마다 다른 숫자
양쪽이 얼마나 모였는지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독일역사박물관 숫자로는 독일이 약 80만 명, 항공기 1,400대, 포 1만 문, 전차 2,000대 넘게를 냈습니다. 이 전차는 동부 전선 전체 보유량의 약 70%였습니다. 소련은 약 135만 명과 전차·돌격포 4,000대 가까이를 모았습니다.
Glantz의 1986년 보고서는 사람 대신 전차·자주포를 셉니다. 북쪽에서는 1,200대 넘는 전차·자주포가 30 km가 안 되는 폭에 공격하기로 했고, 그 가운데 바로 싸울 수 있는 부대에 있던 것은 약 900대였습니다. 남쪽 공격군은 전차·돌격포 1,500대, 소련 두 전선군은 약 3,300대, 초원전선군은 1,600대 넘게였습니다.
National WWII Museum이 옮긴 Glantz의 다른 숫자는 더 큽니다. 이 숫자로는 소련군 190만 명 넘게와 전차 5,000대 넘게가 독일군 78만 명 넘게, 전차 3,000대 가까이와 맞섰습니다. 어떤 값은 전차와 돌격포를 함께 세고, 어떤 값은 예비인 초원전선군을 따로 셉니다.
하늘에서는 독일 공군이 동부 전선에 일선 전투기 약 2,500대를 두고, 그 절반쯤을 성채 작전 직접 지원에 쓰려 했습니다.
7월 5일, 북쪽과 남쪽
1943년 7월 5일 독일군은 오룔과 벨고로드 근처에서 동부 전선의 마지막 대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독일 포병은 03시 30분에 사격을 시작했는데, 그보다 몇 시간 전 소련 쪽이 먼저 대규모 포격을 퍼부었습니다.
북쪽에서는 발터 모델의 제9군이 오룔-쿠르스크 철도 쪽으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독일 군 일지를 바탕으로 한 Ziemke의 서술로는 7월 6일 밤까지 오른쪽 날개를 빼고 약 13마일을 얻었습니다. 7월 8일에는 올호바트카 남서쪽의 요새화된 능선에 막혔고, 모델은 앞으로의 싸움을 "구르는 소모전"이라고 불렀습니다.
북쪽의 진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7월 12일 중앙전선군 방어 2~12 km 깊이에서 독일의 진격이 지쳐 멈췄습니다.
남쪽은 조금 달랐습니다. 헤르만 호트의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이 북쪽으로 쳤고, 7월 6일 밤까지 제2SS기갑군단 선두는 25마일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 숫자로 보면 진격 거리는 북쪽이 모두 합쳐 10 km, 남쪽이 30 km를 조금 넘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정적인 돌파는 이루지 못했고, 싸움은 양쪽이 마지막 예비까지 쏟아붓는 거대한 소모전이 됐습니다.
프로호로프카
7월 11일 무렵 제2SS기갑군단은 프숄강 북쪽에 교두보를 얻었습니다. 남쪽 독일 공격의 선두는 북동쪽 프로호로프카로 방향을 틀었고, 거기서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과 부딪쳤습니다. 바투틴은 예비에서 온 제5근위전차군과 초원전선군에서 온 제5근위군을 반격에 넣었습니다.
7월 12일 무렵의 이 싸움이 "가장 큰 전차전"의 한가운데로 기억되는 장면입니다. Glantz는 1986년 보고서에서 프로호로프카의 거대한 전차전이 독일 공세의 등뼈를 꺾었다고 적었습니다. 7월 13일 무렵 싸움은 잦아들었습니다.
그날 들판에서 얼마나 많은 전차가 부서졌는지는 뒤에서 다시 봅니다. 이 숫자가 가장 크게 고쳐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중지 명령과 소련의 반격
7월 12일 아침, 북쪽에서는 소련의 첫째 반격이 시작됐습니다. 브랸스크전선군과 서부전선군 왼쪽 날개가 오룔 돌출부의 북쪽 면을 세 갈래로 쳤습니다. 이 공세는 1812년 나폴레옹을 몰아낸 러시아 장군의 이름을 따 쿠투조프 작전으로 불렸습니다.
이틀 전인 7월 10일에는 미군과 영국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했습니다. 7월 13일 히틀러는 만슈타인과 클루게를 총통 본부로 불러 성채 작전을 멈추기로 했다고 알렸습니다. 이유는 셋이었습니다. 오룔 돌출부가 위험했고, 도네츠 분지 쪽 소련 병력도 걱정스러웠지만, 가장 큰 걱정은 시칠리아였습니다.
만슈타인은 작전이 이제 막 전환점에 이르렀다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7월 17일 제2SS기갑군단을 전선에서 빼라고 명령했습니다. 중지 날짜는 독일역사박물관도 7월 13일로 적지만, National WWII Museum은 7월 12일에 히틀러가 장군들에게 쿠르스크의 병력을 이탈리아로 옮기고 싶다고 알렸다고 적습니다.
같은 7월 17일 소련 남서·남부전선군이 도네츠강의 이줌과 미우스강에서 새 공세를 열었습니다. 북쪽의 독일군은 오룔 돌출부를 내주기로 하고 8월 1일 밤부터 물러나, 8월 17일 밤 마지막 부대가 하겐 진지로 들어갔습니다. 물러나면서 약 25만 명의 주민을 가축, 수레, 살림과 함께 옆길로 몰고 갔습니다.
남쪽에서는 하리코프가 넘어갔습니다. 소련이 하리코프를 차지하면서 이 전역이 끝난 날은 8월 23일로 적은 자료도, 8월 말로만 적은 자료도 있습니다. 11월까지 남쪽에서 독일군이 약 250 km 서쪽으로 밀려났고, 11월 6일 1941년 9월부터 점령됐던 키이우가 소련 손에 돌아갔습니다.
새 전차, 지뢰밭, 하늘
독일이 기다린 새 장비는 무엇이었을까요? 판터 전차는 티거보다 가볍고 기동성이 좋았고 늦봄부터 생산 라인에서 나오기로 돼 있었습니다. 독일 전차 생산은 1943년 4월 621대, 5월 988대로 늘었고, 5월 숫자에는 새 판터 300대가 들어 있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티거 차체에 긴 88 mm 포를 얹은 차량입니다. 구데리안은 느린 속도, 고정된 포탑, 근접전에 쓸 기관총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그저 그런 무기로 보았지만, 두꺼운 장갑과 강한 포는 히틀러를 사로잡았습니다. 독일은 수가 적은 쪽이 이기도록 전격전 방식과 판터·티거 전차, 페르디난트 돌격포 같은 새 장비에 기댔습니다.
전장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7월 7일 무렵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전차 300대 가운데 80대만 싸울 수 있었습니다. 쓸 수 없게 된 전차의 대부분은 기계 고장으로 정비소에 들어간 새 모델이었습니다.
막는 쪽은 땅을 썼습니다. 대전차 장애물이 자연 지형을 보강했고 지뢰를 넉넉히 묻었습니다. 위에서 본 참호와 지뢰 숫자가 그 규모를 보여 줍니다.
하늘은 어느 쪽 것도 아니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공세 동안 하루 3,000회 출격했지만 전장의 제공권은 없었습니다. 일선 부대를 가까이 돕는 일이 더 급해서 공중에서 소련에 크게 맞서지 못했습니다.
부서진 전차를 어떻게 셀지도 문제였습니다. 독일 기갑 부대는 완전 손실과 수리 중인 전차를 나눠 보고했고, 수리는 다시 단기와 6일 넘게 걸리는 장기로 나뉘었습니다.
독일 쪽에서는 1943년 말까지 맞은 전차를 거둬 고치는 일이 아주 잘 돌아갔습니다. 프로호로프카처럼 며칠 동안 땅을 내주지 않은 곳에서는 많은 차량을 거둬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서진 전차"와 "잃은 전차"는 같은 수가 아닙니다.
기록과 신화
National WWII Museum은 쿠르스크를 역사상 가장 큰 전차전이라 부르고, 독일역사박물관도 쿠르스크의 싸움을 전쟁 최대의 전차전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둘러싼 정설의 몇몇 부분은 최근 들어 강하게 다시 따져졌고, 그 가운데 하나가 프로호로프카의 손실입니다.
오래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7월 12일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이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 반격을 받아 장갑 차량을 대량으로 잃었다는 것입니다. 7월 17일 제5근위전차군의 보고는 프로호로프카 들판에서 하루 만에 독일 장갑 차량 353대를 부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에 출판된 제2SS기갑군단 전투 일지에는 쿠르스크 공세 전체의 손실이 33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 뒤 독일의 Klink와 Frieser, 러시아의 Zamulin 같은 역사가들이 이 이야기를 다시 따졌습니다. 2023년 영국 학술지 서평이 소개한 Ben Wheatley의 연구는 러시아·독일 기록에 항공 정찰 사진까지 맞춰 보았습니다. 그 결과 제2SS기갑군단 세 사단이 잃은 장갑 차량은 16대(티거 1대 포함)였고, 싸움에 나선 소련 전차 군단 넷은 212~265대를 잃었습니다.
여기서 "그럼 독일이 이긴 것인가"로 건너뛰면 또 다른 신화가 됩니다. Wheatley도 소련이 프로호로프카에서 이겼다고 인정하고, 압도적인 포병, 단단한 대전차 방어, 많은 전차를 그 까닭으로 듭니다. 싸움 뒤에도 제5근위전차군은 400대 넘는 장갑 차량을 낼 수 있었습니다.
2024년 논문에서 Wheatley는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서방 역사가들이 독일의 적은 손실에만 매달려 싸움의 넓은 맥락을 놓치곤 했고, 프로호로프카에서 티거를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일 원자료로 보면 7월 12~13일 그 지역에서 티거 1대가 완전 손실로 처리됐습니다.
신화는 한쪽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 지휘부는 성채 작전을 반격으로 포장하라고 지시했고, 소련 쪽 보고가 하루에 부쉈다고 한 숫자는 독일 전투 일지에 적힌 공세 전체 손실의 열 배가 넘었습니다. 티거는 독일 기갑을 상징하는 가장 알아보기 쉬운 전차였기에, 프로호로프카의 조각에서도 짓밟히는 쪽은 티거입니다.
쿠르스크가 남긴 것
쿠르스크의 손실은 양쪽 모두 컸습니다. National WWII Museum이 옮긴 숫자로는 소련 손실이 68만 5,000명을 넘고, 독일 손실은 약 18만 5,000명입니다. 소련 숫자는 Glantz가 전사자와 싸움에 돌아오지 못한 부상자를 더해 계산한 값이고, 독일 숫자는 독일 역사가 Frieser의 추정입니다. 쿠투조프 작전 하나에서만 소련 손실이 42만 9,000명을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무게는 달랐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전사·포로와 부서진 전차가 그 뒤 전쟁에서 독일보다 소련에게 덜 무거운 짐이었다고 봅니다. 독일 군수 산업은 1943년 전차 약 2만 2,000대를 만들었지만 보급 문제로 가을에 전선에서 쓸 수 있던 것은 2,300대뿐이었습니다. 여름 공세 때 소련 전차는 8,400대, 독일 전차는 2,300대였고, 소련에는 넉넉한 예비도 있었습니다.
쿠르스크를 전쟁의 전환점으로 보는 자료가 많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행동의 주도권이 마침내 붉은 군대로 넘어갔다고 적고, Glantz는 쿠르스크와 쿠투조프 반격을 독일이 전략적 주도권을 되돌릴 수 없게 잃은 지점으로 봅니다.
다만 결과를 처음부터 정해진 것처럼 보지 말라는 경고도 같은 자료들 안에 있습니다. Glantz는 오늘의 관찰자가 뒤늦은 지식 때문에 쿠르스크의 결과를 당연하게 여긴다고 지적합니다. Ziemke 역시 독일 사단들이 상태가 좋았고 새 전차를 많이 받았다며, 성채 작전이 처음부터 실패하게 돼 있던 것은 아니라고 적습니다.
숫자가 이렇게 크면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모스크바 대조국전쟁 박물관의 쿠르스크 디오라마를 소개한 National WWII Museum의 글은, 수십만 사상자 하나하나가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이 싸움의 크기를 겨우 짐작할 수 있다고 맺습니다. 오룔에서 가축과 수레를 끌고 옆길로 내몰린 25만 명의 주민도 그 크기 안에 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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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꺼운 장갑이 오늘 어떤 모양이 됐는지는 복합장갑과 반응장갑: 전차 표면의 블록은 무엇일까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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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차처럼 전쟁의 판을 바꾼 기술들을 한 줄로 놓아 보려면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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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묶음에서 쓰는 중인 글: "스탈린그라드 전투: 도시 하나가 전쟁의 방향을 틀다",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의 소련 침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