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0월 25일, 해가 막 뜬 필리핀 사마르(Samar)섬 동쪽 바다입니다. 작은 호위 항공모함 6척과 구축함(destroyer) 3척, 호위구축함 4척이 일본 전함 4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1척과 마주쳤습니다. 미국의 고속 항공모함과 고속 전함은 그때 북쪽으로 일본의 미끼 함대를 쫓아가 있었습니다.
레이테만 해전(Battle of Leyte Gulf)은 1944년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필리핀 둘레의 바다에서 벌어진 네 갈래 싸움을 묶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약 20만 명과 함정 282척이 10만 제곱마일에 걸친 바다에서 싸웠습니다. 일본 해군은 남은 함대의 대부분을 걸었고, 이 해전 뒤로는 적어도 수상 함대로는 다시 큰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가장 강한 미국 함대는 왜 가장 약한 부대만 남겨 두고 자리를 비웠을까요? 답은 일본의 미끼 계획과 둘로 나뉜 미국의 지휘 구조, 그리고 몇 시간씩 늦게 닿은 전문 몇 통에 있습니다.
왜 필리핀, 왜 1944년 10월인가
1944년 6월 19~20일 필리핀해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2척과 항공기 350~450대를 잃었습니다. 일본 지휘부는 연합군의 기세를 꺾고 본토 공격을 막을 시간과 자원이 떨어져 간다고 봤습니다.
이때 연합국의 태평양 목표는 셋이었습니다. 동인도로 가는 일본의 보급선을 끊고, 포모사(대만)와 중국 동해안 침공을 준비하고, 일본 본토를 칠 기지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레이테 공격은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의 중부 태평양 공세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남쪽 진격이 한곳에서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필리핀을 고른 데는 반대도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해 레이테, 이어 루손과 수도로 나아가는 길을 얻었습니다. 필리핀을 아예 건너뛰고 일본으로 가자던 킹(Ernest J. King) 해군참모총장 같은 지휘관들의 반대를 넘은 결정이었습니다.
날짜는 앞당겨졌습니다. 미처(Marc Mitscher) 제독의 항공모함 공습이 일본 방어의 뜻밖의 약점을 드러내자, 9월 중순 12월로 잡았던 상륙을 10월로 당겼습니다. 상륙 계획을 짜야 하는 킨케이드의 참모들에게 남은 시간은 5주였습니다.
쇼 1호 작전: 미끼와 협공
일본 해군은 연합군이 올 수 있는 길에 맞춰 대비 계획을 넷 세웠습니다. 이를 묶어 쇼고(Shō-Go, "승리 작전")라 불렀고, 어느 계획이든 남은 함대의 대부분을 한 번의 싸움에 걸었습니다. 필리핀을 지키는 계획이 쇼 1호였습니다.
표적은 상대 함대가 아니라 맥아더 상륙 부대의 수송선과 보급선이었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의 소장 새뮤얼 콕스(Samuel J. Cox)는 함대끼리의 결전을 앞세운 일본 해군의 수십 년 교리와 완전히 어긋나는 목표였다고 봅니다. 그 교리는 미 해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대는 넷이었습니다.
- 중앙 부대: 구리타 다케오(Takeo Kurita) 중장. 브루나이를 떠나 필리핀 가운데를 지나 북쪽에서 레이테만을 칩니다. 전함 야마토(Yamato)와 무사시(Musashi)를 포함한 전함 5척, 중순양함 10척이 중심이었습니다.
- 남쪽 부대: 니시무라 쇼지(Shoji Nishimura) 중장. 전함 2척과 중순양함 1척으로 수리가오 해협을 지나 남쪽에서 들어갑니다.
- 시마 부대: 시마 기요히데(Kiyohide Shima) 중장. 중순양함 2척을 포함했지만 계획에 제대로 묶이지 않았고, 시마는 니시무라를 따라 수리가오로 갔습니다.
- 북쪽 부대: 오자와 지사부로(Jisaburo Ozawa) 중장. 항공모함 4척과 항공전함 2척으로 루손 북동쪽에 나타나 미 제3함대를 레이테만에서 끌어냅니다. 미끼였습니다.
미끼를 맡은 쪽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오자와는 전쟁 뒤 심문에서 미끼 노릇에 자신이 별로 없었지만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구리타는 해전을 앞두고 승조원들에게 "나라가 망하는데 함대만 멀쩡히 남는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연료도 빠듯했습니다. 일본 본토의 연료는 잠수함의 유조선 공격으로 이미 크게 줄어 있었고, 구리타의 부대는 연료 가까이 있으려고 싱가포르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두 함대, 두 사령부
미국 쪽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토머스 킨케이드(Thomas C. Kinkaid) 중장의 제7함대는 맥아더 휘하에서 상륙을 직접 도왔고, 구식 전함 6척과 호위 항공모함 18척, 해군 항공기 약 450대가 있었습니다. 윌리엄 할시(William F. Halsey) 제독의 제3함대는 니미츠 휘하였고 고속 항공모함 17척과 고속 전함 6척을 거느렸습니다.
제3함대의 일은 상륙을 엄호하는 것이었지만, 기회가 오면 일본 주력 함대를 쫓아 싸울 권한도 있었습니다. 할시가 받은 명령에는 "적 함대의 큰 부분을 없앨 기회가 생기거나 만들 수 있으면, 그것이 첫째 임무가 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습니다.
통신도 걸림돌이었습니다. 맥아더는 킨케이드가 니미츠나 할시와 직접 교신하지 못하게 하고, 모든 통신을 마누스(Manus)섬의 무선국을 거치게 했습니다. NHHC 역사가 마틴 월드먼(Martin Waldman)은 그 결과 아주 중요한 전문 몇 통이 보낸 지 여러 시간 뒤에야 닿았고, 이것이 할시와 킨케이드의 판단에 크게 영향을 줬다고 씁니다.
두 지휘관은 이 구조를 다르게 봤습니다. 할시는 한 지휘 아래 하나의 작전 통제·정보 체계가 있었다면 해전이 다르게 흘러 다른 결과가 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킨케이드는 각자의 임무가 분명했으니 머리 하나가 둘보다 낫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0월 23~24일: 팔라완과 시부얀해
바다의 싸움 전에 하늘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10월 10일 제3함대의 항공모함 기동단 넷이 항공기 1,000대 넘게 띄워 오키나와와 류큐 열도를, 이어 포모사를 쳤습니다. 뒤따른 항공전에서 일본이 잃은 항공기는 콕스의 글에 약 500대, 월드먼의 글에 추정 529대로 적혀 있습니다.
그 대가는 레이테에서 드러났습니다. 오자와의 항공모함 부대에 남은 항공기는 110대 남짓이었고, 일본 수상 부대는 해전 내내 엄호기 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10월 17일 제시 올덴도프(Jesse B. Oldendorf) 소장의 포격 지원단이 레이테만 입구를 확보하러 다가왔고, 20일 제7함대가 만에 들어가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태평양 상륙과 달리 일본 방어는 가벼웠고 미군 사상자도 적었습니다. 맥아더는 그날 해변에서 필리핀 국민에게 자신이 돌아왔다고 방송했습니다.
일본이 쇼 작전을 시작한 날은 기록마다 다릅니다. NHHC의 해전 개요는 10월 15일로 적고, 월드먼은 18일에야 쇼 1호를 본격적으로 발동했다고 씁니다. 구리타는 22일 브루나이를 떠났습니다.
23일, 팔라완 수로에서 미 잠수함 다터(Darter)와 데이스(Dace)가 구리타 부대를 덮쳤습니다. 다터는 기함인 중순양함 아타고(Atago)를 가라앉히고 다카오(Takao)를 크게 부쉈고, 데이스는 마야(Maya)를 가라앉혔습니다. 구리타는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중순양함 10척 가운데 3척을 잃었고, 자신도 구조될 때까지 물에 떠 있어야 했습니다. 좌초한 다터의 승조원은 모두 데이스가 구했습니다.
24일에는 시부얀해(Sibuyan Sea)를 지나던 구리타 부대에 제3함대 항공기가 몇 차례나 몰려들었습니다. 미 항공기는 같은 배를 거듭 노렸는데, 그 배가 초대형 전함 무사시였습니다. 무사시는 폭탄과 어뢰를 20~30발 맞고 19시에 승조원 1,100명과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무사시에 타고 있던 이노구치 도시히라(Toshihira Inoguchi) 소장은 큰 대포와 큰 배를 너무 믿었던 것을 크게 뉘우쳤습니다.
미국도 배를 잃었습니다. 9시 38분 일본기 한 대가 경항공모함 프린스턴(Princeton)에 폭탄을 맞혔고, 15시 23분 함내 화재가 어뢰 보관고를 터뜨려 배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옆에 붙어 돕던 경순양함 버밍엄(Birmingham)의 사망자는 월드먼의 글에 229명(부상 420명), 콕스의 글에 233명으로 적혀 있습니다.
16시, 구리타는 서쪽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래도 전함 4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 모두 22척이 남아 있었습니다. 18시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Soemu Toyoda)는 "하늘의 인도를 믿고 공격을 다시 하라"는 전문을 보냈습니다. 부풀려진 전과 보고와 이 회항은 할시에게 구리타의 부대가 꺾여 물러나는 중이라고 믿게 했습니다.
수리가오 해협: 전함끼리의 마지막 싸움
레이테만의 남쪽 문은 좁은 수리가오 해협(Surigao Strait)입니다. 니시무라의 7척이 이 문으로 들어오려 했고, 안쪽에서는 올덴도프의 함정 40척이 기다렸습니다. 올덴도프는 구축함을 해협 양쪽에 두고, 순양함과 전함으로 해협을 가로지르는 줄을 쳤습니다.
이런 모양을 "T자 긋기(crossing the T)"라고 합니다. 세로로 줄지어 들어오는 쪽은 앞쪽 포만 쓸 수 있고, 가로로 늘어선 쪽은 전열 전체로 쏠 수 있습니다.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이긴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일본이 당하는 쪽이었습니다.
니시무라 부대는 자정 무렵 해협에 들어서자마자 어뢰정(PT boat)에 둘러싸였습니다. 이어 양쪽에서 구축함의 어뢰가 날아들었습니다.
일본 구축함 3척과 전함 후소(Fuso)가 가라앉고 기함 야마시로(Yamashiro)가 크게 부서진 것은 모두 미 전함의 사정거리에 들기 전, 구축함의 어뢰 때문이었습니다. 미 순양함은 3시 51분, 전함은 3시 53분 무렵 포문을 열었습니다.
해협 끝에 늘어선 미 전함 6척 가운데 미시시피(Mississippi)를 뺀 5척은 1941년 진주만 공격 때 부서졌다가 돌아온 배였습니다. 이 밤 싸움에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도 함께했습니다. 태평양에서 항공기가 큰 몫을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해전이기도 합니다.
일본 쪽 피해는 컸습니다. 두 전함에서만 3,500명이 해협 바닥으로 갔습니다. 뒤따라온 시마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 헛되다고 보고 남쪽으로 돌아갔고,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배는 구축함 시구레(Shigure) 하나였습니다.
미국 쪽에도 비극이 있었습니다. 구축함 앨버트 W. 그랜트(Albert W. Grant)는 기관 고장으로 멈춘 채 야마시로와 아군 전열의 포화 사이에 끼었습니다. 사격이 멈췄을 때 이미 34명이 죽었거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역사상 마지막 전함 대 전함 교전으로 유명합니다. 콕스는 일본 함정들이 좁은 해협에 갇혀 T자 긋기는 거의 정해진 결과였다고 보고, 오히려 미 해군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수상 어뢰 공격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니시무라를 보는 눈도 갈립니다. 많은 기록이 그가 함정에 걸려들었다고 쓰지만, 콕스는 그가 무엇을 마주할지 알았고 이것이 일본 자료에서 "특공"이라 부른 희생 임무라는 것도 알았다고 적습니다. 월드먼은 각주에서, 자살 임무라고 밝힌 문서는 없지만 역사가 털리(Tully)가 그렇게 계획됐다고 본다고 소개합니다.
할시의 북상과 엥가뇨곶
24일 낮까지 할시 쪽은 일본 항공모함이 어디 있는지 몰랐습니다. 오자와는 발견되려고 무선 침묵을 거듭 깼고, 16시 40분 TG 38.3의 항공기가 마침내 북쪽 부대를 찾았습니다.
할시는 골라야 했습니다. 북쪽의 항공모함을 칠 것인가, 산베르나르디노 해협(San Bernardino Strait)을 지킬 것인가.
그는 중앙 부대가 너무 크게 부서져 결판을 낼 수 없다고 확신했고, 함대를 둘로 나누는 것은 늘 힘을 모아야 한다는 당시의 원칙과도 어긋났습니다. 23시 45분 할시는 함대를 모아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월드먼은 이 결정이 본디 나쁘거나 해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합니다. 문제는 전문 한 줄이었습니다.
할시는 앞서 고속 전함으로 이뤄진 TF 34가 "편성될 것"이라는 전문을 보냈는데, 그는 대비안이라는 뜻으로 썼지만 니미츠와 킹은 달리 읽었습니다. 이 전문을 엿들은 킨케이드도 TF 34가 남아서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지킨다고 여겼습니다.
25일 7시 35분 정찰기가 북쪽 부대를 찾았고, 8시 10분 첫 공격대가 덮쳤습니다. 이 엥가뇨곶 해전(Battle of Cape Engaño)에서 할시의 항모 항공단(carrier air wing)은 미끼 부대를 거의 무너뜨렸습니다. 항공모함 즈이카쿠(Zuikaku)·즈이호(Zuiho)·지토세(Chitose)는 항공기에, 부서진 지요다(Chiyoda)는 해 질 녘 미 순양함의 포격에 가라앉아 네 척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즈이카쿠는 진주만 공격에 나섰던 일본 항공모함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배였습니다.
그런데 이 항공모함들에는 모두 합쳐 항공기가 약 110대뿐이었습니다. 그사이 남쪽에서는 급한 전문이 이어졌지만, 복잡한 통신 구조 탓에 할시가 태피 3의 위급을 알리는 킨케이드의 전문을 받은 것은 거의 10시가 되어서였습니다.
10시에는 니미츠의 전문도 닿았습니다. "TF 34는 어디 있나, 되풀이한다, 어디 있나. 세계가 궁금해한다." 끝 구절은 해독을 어렵게 하려고 하급 통신 장교가 덧붙인 군말이었는데, 지워지지 않은 채 할시에게 갔습니다.
그때 할시의 전함들은 북쪽 부대에서 42마일 떨어져 있었습니다. 할시는 고속 전함을 돌려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으로 보냈지만, 구리타가 해협을 빠져나가기 전에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다시 남쪽으로 오간 전함들의 헛걸음은 뒷날 "불스 런(Bull's Run)"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습니다.
사마르 앞바다의 "태피 3"
도입의 장면이 여기입니다. 미끼가 제3함대를 끌어낸 탓에, 25일 이른 아침 해협을 빠져나온 구리타 부대 앞에는 제7함대의 호위 항공모함 부대 셋만 있었습니다.
상륙 부대에 근접 항공 지원과 대잠 경계를 해 주던 부대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북서쪽에 있던 것이 클리프턴 스프레이그(Clifton A. F. Sprague) 소장의 TG 77.4.3, 호출 부호 "태피 3(Taffy 3)"였습니다.
호위 항공모함(escort carrier, CVE)은 "지프 항공모함"이라고도 불린 길이 약 500피트의 작은 배로, 항공기를 많아야 27대 실었습니다. 수상 함대와 싸우려고 만든 배가 아니라 호송 선단과 상륙을 돕는 배였습니다.
스프레이그는 7시 16분과 7시 42분, 두 번에 걸쳐 호위함들에 어뢰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앞장선 구축함 존스턴(Johnston)은 중순양함 구마노(Kumano)에 어뢰를 맞혔습니다. 존스턴은 10시 10분 가라앉았고, 승조원 327명 가운데 함장 어니스트 에번스(Ernest E. Evans)를 포함한 186명을 잃었습니다.
하늘에서도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호위 항공모함의 항공기 가운데는 연료가 모자라거나 탄약도 없이 뜬 것도 있었습니다. 구리타 부대는 협조되지는 않았지만 무거운 항공 공격을 교전 내내 받았고, 구리타는 자신이 쫓는 항공모함이 아니라 육상 기지의 항공기에 공격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구리타는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는 호위 항공모함의 속력을 약 30노트로 잘못 봤지만, 실제로는 18노트였습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연료와 미국 증원에 대한 걱정도 커졌고, 끝내 그는 북쪽 산베르나르디노 해협 쪽으로 배를 돌렸습니다. 구리타가 밝힌 이유를 의심한 부하 우가키 마토메(Matome Ugaki) 중장은 일기에, 같은 함교에서 지휘부의 투지와 기민함이 모자라 보여 답답했다고 적었습니다.
이날 태피 3는 구축함 존스턴과 호엘(Hoel), 호위구축함 새뮤얼 B. 로버츠(Samuel B. Roberts)를 잃었고, 호위 항공모함 갬비어 베이(Gambier Bay)는 함포에 가라앉았습니다. 일본도 중순양함 지쿠마(Chikuma), 조카이(Chōkai), 스즈야(Suzuya)를 잃었고 구마노가 크게 부서졌습니다. 태피 3는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고, 에번스는 사후에 명예 훈장을 받았습니다.
같은 아침, 남쪽의 태피 1에는 처음으로 가미카제(kamikaze) 전용 공격이 닥쳤습니다. 처음부터 자살 공격을 목적으로 뜬 비행기들이었습니다. 호위 항공모함 산티(Santee)가 가미카제에 맞은 첫 배가 됐고, 그 시각은 콕스의 요약에 7시 40분, 자세한 글에 7시 38분으로 적혀 있습니다. 앞서 21일에는 부서진 일본기 한 대가 오스트레일리아 군함 오스트레일리아(HMAS Australia)의 앞돛대에 일부러 부딪혀 함장을 포함한 30명이 죽었습니다.
세인트로(St. Lo)는 앞선 싸움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10시 51분 제로기 한 대가 비행갑판(flight deck)에 뛰어들었고, 배는 15분이 안 돼 141명과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가미카제 공격으로 가라앉은 첫 미국 군함이었습니다.
숫자와 해석
"역사상 가장 큰 해전"이라는 말에는 기준이 따라야 합니다. NHHC는 2023년 소식에서 레이테만을 2차 대전에서 가장 큰 해전으로 소개합니다.
월드먼은 본문에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큰 해전 가운데 하나"라고 쓰고, 각주에 흔히 역사상 가장 큰 해전이라 불리지만 이는 톤수와 지리적 넓이로만 맞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습니다. 배의 무게와 싸운 바다의 넓이로 재면 맨 앞일 가능성이 크고, 다른 잣대로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숫자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 쇼 작전 시작: 10월 15일(NHHC 개요) / 18일 본격 발동(월드먼)
- 포모사 항공전의 일본 항공기 손실: 약 500대(콕스) / 추정 529대(월드먼)
- 버밍엄 사망자: 229명(월드먼) / 233명(콕스)
- 사마르의 구리타 부대: 구축함 10척을 더해 22척(월드먼) / 구축함 11척을 더해 23척(NHHC 사마르 쪽)
- 엥가뇨곶 해전의 날짜: NHHC 개요는 10월 24일로 적지만, 콕스는 엥가뇨곶·사마르·태피 1 공격이 모두 25일 날이 밝으며 시작됐다고 씁니다
배의 손실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NHHC 2023에 따르면 일본은 전함 3척, 큰 항공모함 1척, 경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11척을 잃었습니다. 미국이 잃은 배에는 경항공모함 프린스턴, 호위 항공모함 갬비어 베이와 세인트로, 구축함 존스턴과 호엘, 호위구축함 새뮤얼 B. 로버츠가 있었습니다.
해석은 사람마다 갈립니다.
월드먼은 할시의 결정 자체는 본디 나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엥가뇨곶의 의문스러운 결정이 작전을 거의 망칠 뻔했고 지휘 구조와 통신 절차의 약점을 드러냈다고 정리합니다. 콕스는 할시가 레이테 상륙을 앞당기자고 한 덕에 일본이 준비되기 전에 덮칠 수 있었다며 그 공을 적습니다. 전쟁 뒤 할시가 자서전에서 킨케이드를 탓하면서 논쟁은 공개된 싸움이 됐습니다.
구리타를 두고도 그렇습니다. 스프레이그는 일본 주력이 태피 3를 끝까지 짓밟을 수 있었고 그랬어야 했다고 썼습니다.
반면 콕스는 구리타가 만에 들어갔더라도 수송선 20척쯤을 가라앉혔을 것이라고 봅니다. 상륙 때 있던 200척 가운데 대부분은 이미 떠난 뒤였기 때문입니다. 콕스는 구리타가 처음부터 임무가 가망 없음을 알았을 것이고, 그의 회항이 일본인 1만 명 넘는 목숨을 구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남긴 것
일본의 계획은 거의 들어맞을 뻔했지만, 결과는 미 해군의 결정적 승리였습니다. NHHC는 레이테 점령이 일본 해군의 전략적 위협을 완전히 없앴다고 적습니다.
그 자리에 다른 싸움이 왔습니다. 콕스에 따르면 가미카제는 그 뒤 연합국 함정 400척 넘게 맞히고 47척을 가라앉혔으며, 미 해군 장병 5,000명 가까이를 죽였습니다. 레이테만은 그 긴 싸움이 조직적으로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섬 위의 싸움도 길었습니다. 레이테 지상전은 길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되어 미 육군 3,500명 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The National WWII Museum)은 전쟁 동안 필리핀 민간인이 많게는 100만 명, 군인 수만 명이 죽었다고 적습니다.
맥아더의 선택은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본토에 가까운 섬 대신 필리핀을 고집한 것이 옳았는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이 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의 의견은 아직 갈립니다.
바다에는 싸움과 다른 비극도 있었습니다. 10월 24일 미 잠수함 한 척(아마 샤크)이 미군 포로 1,700명 넘게 태운 줄 모르고 일본 수송선 아리산 마루(Arisan Maru)를 가라앉혔습니다. 포로 대부분은 침몰에서 살아남았지만 바다에 버려졌고, 끝내 9명만 살았습니다.
월드먼은 이 해전을 세 갈래로 정리합니다. 시부얀해와 수리가오에서는 계획이 거의 완벽하게 실행됐고, 엥가뇨곶에서는 한 결정이 작전 전체를 흔들었으며, 사마르에서는 개인의 용기와 희생이 승패를 갈랐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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