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여름,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레이다 기지에서 운용자가 화면에 뜬 작은 신호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 보고가 정리돼 전투기 비행장까지 내려가고 전투기가 뜨기까지 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영국 공군(Royal Air Force, RAF) 공식 역사 쪽은 탐지된 독일 공군기가 영국의 목표에 닿기까지 20분, 어떻게 대응할지 정하는 데 4분이 있었다고 적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은 1940년 여름과 가을, 주로 잉글랜드 남부 하늘에서 영국 공군과 독일 공군(Luftwaffe)이 맞붙은 큰 항공 작전입니다. 이 글은 하늘의 전투기보다 땅 위에서 돌아간 방공망에 무게를 둡니다. 레이다 기지와 관측대, 작전실과 비행장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졌는지, 싸움이 어떻게 흘러갔고 무엇을 남겼는지 공개 기록으로 따라가 봅니다.

프랑스가 무너진 뒤의 여름

영국 원정군이 덩케르크에서 바다로 철수하고, 이어 프랑스가 무너졌습니다. 히틀러는 1940년 6월에 프랑스를 꺾은 뒤 영국이 평화 협상을 청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영국은 싸움을 이어 가기로 했습니다. 영국이 히틀러의 마지막 평화 제안을 거절한 뒤인 7월, 영국 상륙 작전 '바다사자(Sealion)'의 본격 계획이 시작됐습니다. 칼레와 로테르담에서는 바지선과 예인선, 트롤선, 상선을 모아 큰 침공 선단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침공에는 먼저 풀어야 할 조건이 있었습니다. 침공이 조금이라도 성공할 가능성을 가지려면 독일은 먼저 잉글랜드 남부 하늘을 장악하고 영국 공군의 위협을 없애야 했습니다. 독일은 침공을 준비하며 제공권부터 얻으려 했습니다.

싸움의 이름은 싸움보다 먼저 나왔습니다. 1940년 6월 18일 처칠(Winston Churchill)은 하원에서 베강 장군이 '프랑스 전투'라 부른 싸움은 끝났고 이제 영국 전투가 곧 시작되리라 본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은 이 싸움을 1940년 7월 10일부터 10월 31일까지로 공식 인정합니다. 독일 쪽은 8월 13일 '독수리의 날(Adlertag)'을 자기들 항공전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전쟁 전에 준비한 방공망

문제는 속도였습니다. 두 대전 사이에 항공기가 크게 빨라져, 미리 경보를 받지 못하면 영국 전투기가 공습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1936년 7월 새로 생긴 전투기 사령부(Fighter Command)의 지휘관이 된 휴 다우딩(Hugh Dowding)은 곧바로 이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다우딩은 그 전에 공군에서 연구·개발을 맡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바탕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1차 대전 중인 1917년, 에드워드 애시모어(Edward Ashmore)는 런던 방공 구역을 세우고 관측소 200곳을 두었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 더퍽스포드의 안내원은 이 방공 구역을 다우딩 체계의 원형으로 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IWM 학예사는 다우딩이 관측대 연결망에 레이다라는 새 기술과, 정보를 지휘 계통으로 빠르게 전하는 지휘통제(command and control, C2) 체계를 더했다고 설명합니다.

새로 더해진 레이다는 전파를 보내 멀리 있는 물체에 맞고 돌아온 것으로 다가오는 공습의 거리와 방위, 규모, 높이를 짐작하게 해 주었습니다. 전파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의 물체를 찾는 기술은 1930년대에 영국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처음 실용 기술로 만들었습니다. 1940년까지 영국 해안을 따라 레이다 기지 수십 곳이 섰고, 이 사슬을 체인 홈(Chain Home, CH)이라 불렀습니다. 영국 공군 공식 쪽은 이것을 처음 지어진 조기 경보 레이다망이라고 적습니다.

체인 홈의 안테나는 오늘날 레이다처럼 돌지 않았습니다. 넓은 빔으로 넓은 지역을 투광 조명처럼 비추는 방식이었습니다. 낮게 나는 항공기를 찾으려고, 도는 안테나로 좁은 빔을 보내는 체인 홈 로(Chain Home Low, CHL)도 더해졌습니다.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레이다는 바다 쪽을 보고 있어서 항공기가 해안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오면 찾지 못했습니다. 늘 정확하지도 않았고, 결과는 신호를 읽는 운용자의 기술과 판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해안을 넘은 뒤를 맡은 것은 관측대(Observer Corps)였습니다.

1939년 전쟁이 터졌을 때 관측대는 자원자 약 3만 명과 관측소 약 1,000곳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책자와 카드, 포스터, 모형, 영화로 항공기 모양을 익혔습니다. 머리 위를 지나는 무리의 규모와 대수, 기종, 짐작한 높이, 나아가는 방향을 보고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었습니다.

나라의 하늘도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영국 공군은 방공을 네 개의 비행단(Group)에 맡겼습니다. 10비행단은 잉글랜드 남서부와 웨일스, 11비행단은 런던과 남동부, 12비행단은 미들랜즈와 이스트앵글리아, 북잉글랜드 일부, 13비행단은 나머지 북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남부, 북아일랜드를 맡았습니다. 비행단은 다시 구역(sector)으로 나뉘었고, 구역마다 중심 비행장인 구역 기지(Sector Station)에 전투기를 이끄는 작전실이 있었습니다.

점 하나가 지시가 되기까지

레이다와 관측대의 보고는 벤틀리 프라이어리(Bentley Priory)의 전투기 사령부로 모였습니다. 그곳의 걸러 내기 방(Filter Room)은 여러 갈래로 들어온 보고를 맞춰 보고 더 쓸 만한 정보로 걸렀습니다. 당시의 기록 영상은 이 일을 체에 비유하며, 체로 거른 결과를 꼭 필요한 내용만 담은 '항적(track)'으로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공습의 방향이 분명해지면 정보는 그 지역의 비행단 본부로, 다시 구역 기지로 내려갔습니다. 구역 기지는 전투기를 긴급 출격(scramble)시키고, 새 정보가 오는 대로 이미 떠 있는 전투기를 무전으로 이끌었습니다. 관측대의 보고는 관측대 센터에서 먼저 걸러진 뒤 전투기 사령부로 가거나 비행단과 구역 기지로 바로 갔습니다. 벤틀리 프라이어리에서 확인한 정보는 전화로 각 비행단에 돌렸습니다.

다우딩 체계의 정보 흐름을 그린 개념 도표. 왼쪽에 레이다 기지(체인 홈과 체인 홈 로, 바다 쪽을 보며 조기 경보), 관측대 관측소(1939년 자원자 약 3만 명, 내륙에 들어온 공습을 추적), 관측대 센터(관측소 보고를 먼저 거름)가 있다. 화살표가 가운데의 걸러 내기 방(벤틀리 프라이어리의 전투기 사령부, 여러 보고를 확인해 꼭 필요한 내용만 담은 '항적'으로 거름)으로 모인다. 걸러 내기 방에서 오른쪽의 비행단 본부(10·11·12·13비행단, 방향이 분명해진 공습을 받음)로, 다시 구역 기지 작전실(플로터가 지도에 블록을 놓아 피아, 대수, 고도를 표시하고 5분마다 고침)로, 마지막으로 전투기 비행대대(긴급 출격 뒤 무전으로 유도)로 화살표가 이어진다. 관측대 센터에서 구역 기지로 바로 가는 점선 길도 있다. 가운데 아래 상자에는 이 체계가 대공포, 탐조등, 방공 기구도 지휘했다고 적혀 있다. 아래 두 상자는 1940년 영국 공군기의 IFF Mk II 트랜스폰더가 체인 홈에 독특한 신호를 돌려보내 아군기를 표시했다는 것, 영국 공군이 설명한 시간(탐지에서 목표까지 20분, 요격까지 16분, 결정에 4분)이다. 지도가 아니며 실제 위치나 기지 수를 그리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레이다와 관측대의 보고가 걸러 내기 방을 거쳐 비행단, 구역, 비행대대로 내려가는 흐름입니다. 지도가 아니라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작전실의 지도판 위에서는 사람이 정보를 움직였습니다. IWM 더퍽스포드의 안내원에 따르면 플로터(plotter)는 나무 블록으로 아군인지 적인지, 대수, 고도를 표시했습니다. 시계 분침이 가리키는 색 칸에 맞춰 같은 색 화살표를 놓았고, 표지를 5분마다 고쳐 관제사가 내려다보며 지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했습니다.

화면의 점이 누구인지 가리는 장치도 있었습니다. 1940년 영국 공군기에는 전파 트랜스폰더인 피아식별장치(identification friend or foe, IFF) Mk II가 달렸습니다. 이 장치가 체인 홈 기지로 독특한 레이다 신호를 돌려보내 아군기와 적기를 가르게 했습니다.

이 흐름은 전투기만 다루지 않았습니다. 다우딩 체계(Dowding System)는 대공포와 탐조등, 방공 기구까지 함께 통제했고, 공습 정보가 올라가는 길과 명령이 내려가는 길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체계는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귀하고 수가 많지 않은 자원을 헛되이 쓰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여유는 많지 않았습니다. 영국 공군 공식 쪽은 탐지된 공습이 목표에 닿기까지 20분, 영국 전투기가 출격해 가로막기까지 16분이 걸렸다고 적습니다. 레이다가 있으니 쉬지 않고 하늘을 순찰할 필요가 없어졌고, 지친 승무원은 그만큼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독일 공군에는 이런 짜임이 없었습니다. 독일 전투기 부대는 영국 전투기의 위치를 표시할 효과적인 방법도, 지상에서 공중의 자기 비행기를 통제할 수단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7월부터 9월까지: 싸움의 흐름

영국 공군 박물관(RAF Museum)은 싸움을 다섯 단계로 나눕니다. 다만 역사가마다 나누는 법이 다르고, 한 단계가 다음 단계로 흘러들어 딱 잘라 볼 수 없다고 덧붙입니다.

6월 26일부터 7월 16일까지는 항구와 선박, 항공기 공장이 있는 도시에 흩어진 공격과 기뢰 부설이 이어졌습니다. 7월 17일부터 8월 12일까지는 영국 해협의 선박과 남·동해안 항구, 일부 해안 비행장에 대한 주간 공격이 더 잦아지고 커졌습니다. 8월 8일에는 약 300기가 남해안의 선단 CW9('피윗')을 노렸습니다.

8월 12일, 독일 공군은 전투기 사령부의 전방 비행장과 레이다 기지를 체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이다 기지 대부분은 곧 다시 돌아갔지만 와이트섬의 벤트너(Ventnor) 기지는 크게 부서졌습니다. 이튿날인 8월 13일이 독일이 말한 '독수리의 날'입니다. 이날 독일 공군은 1,485회, 전투기 사령부는 727회 출격했습니다.

8월 13일부터 9월 6일까지 공격의 중심은 잉글랜드 남동부의 영국 공군 비행장이었습니다. RAF Museum은 이 단계의 목적을 영국 공군이 방어할 힘을 바닥내는 것으로 적습니다. 전후에 영국과 독일 기록을 함께 살핀 연구는 가장 치열했던 날로 8월 18일을 꼽습니다. 그날 영국 공군과 해군 항공대는 모두 68기를 잃었고(공중전에서 31기), 독일기 69기가 파괴되거나 고칠 수 없게 부서졌습니다.

8월 마지막 주와 9월 첫 주는 IWM이 이 항공전의 결정적 단계로 보는 때입니다. 남동부 비행장들은 크게 부서졌지만 대부분 계속 쓸 수 있었습니다. 8월 31일 전투기 사령부는 항공전 전체에서 가장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비행기 39기가 격추되고 조종사 14명이 숨졌습니다.

9월 7일 독일은 갑자기 공격 대상을 바꿔 런던에 총공격을 했습니다. 이 무렵 독일 공군은 자기들이 준 피해를 부풀려 보고 영국 공군이 끝장 직전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런던 공습은 시민에게 끔찍한 피해를 주었지만, 영국 방공망에는 회복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IWM은 공격 대상을 영국 공군에서 돌린 이 결정을 항공전의 전환점이라 할 만한 전술적 실수로 봅니다.

9월 15일 독일은 또 한 번 대규모 공격을 했습니다. 그 사이 영국 방어는 회복했고 전투기 생산이 이어졌으며, 실전에 나설 수 있는 조종사 수는 항공전이 시작된 뒤 가장 많았습니다. 이날의 싸움은 독일 공군의 압도적이고 결정적인 패배로 여겨졌고, 영국은 9월 15일을 '영국 본토 항공전의 날(Battle of Britain Day)'로 기념합니다.

이틀 뒤인 9월 17일,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을 다음 통보가 있을 때까지 미뤘습니다. 작전은 무기한 연기됐을 뿐 공식으로 취소되지는 않았습니다. 10월에는 독일 공군의 주간 공격이 줄고 주로 단발 전투폭격기가 왔으며, 10월 29일이 마지막 큰 주간 싸움이었습니다. 그 무렵 런던에는 이미 대규모 야간 공습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것이 블리츠(Blitz)라 불리는 새 싸움의 시작이었습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6월 18일 처칠이 하원에서 영국 전투가 곧 시작된다고 말함, 7월 바다사자 작전의 본격 계획 시작, 7월 10일 시작(영국 공식 날짜), 7월 17일 해협 위 주간 폭격 시작, 8월 8일 약 300기가 선단 CW9(피윗)을 공격, 8월 12일 전방 비행장과 레이다 기지 공격, 8월 13일 독일이 말한 독수리의 날, 8월 18일 전후 연구로 본 가장 치열한 날, 8월 31일 전투기 사령부의 가장 큰 손실, 9월 7일 런던 총공격으로 전환, 9월 15일 독일의 대공격이 꺾이고 지금은 영국 본토 항공전의 날, 9월 17일 히틀러가 바다사자를 다음 통보까지 연기, 10월 29일 마지막 큰 주간 전투, 10월 31일 끝(영국 공식 날짜), 1941년 5월까지 블리츠가 이어짐. 오른쪽에 RAF Museum의 단계(2단계 7월 17일~8월 12일, 3단계 8월 13일~9월 6일, 4단계 9월 7일~10월 2일, 5단계 10월 3일~31일)가 붙어 있다. 1단계(6월 26일~7월 16일)는 공식 시작보다 앞섰다는 메모와, 줄 간격이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메모가 있다
6월부터 10월까지의 흐름. 날짜는 IWM, RAF Museum, 영국 의회 의사록에 나온 것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비행기와 사람

영국 쪽 주력 전투기는 허리케인(Hurricane)과 스핏파이어(Spitfire)였습니다. 허리케인은 전투기 사령부에서 가장 많은 기종으로, 1940년 9월까지 33개 비행대대가 썼습니다. 스핏파이어는 같은 때까지 18개 비행대대가 썼습니다.

독일 공군은 짜임부터 달랐습니다. 기능별 '사령부'로 나뉜 영국 공군과 달리, 독일 공군은 전투기와 폭격기를 함께 갖춘 항공함대(Luftflotte)로 짜였고 그 가운데 제2·3·5항공함대가 영국 해협과 북해 건너편에 배치됐습니다. 폭격기를 지키는 전투기로는 단발 단좌의 메서슈미트 Bf 109와 쌍발 복좌의 Bf 110이 있었고, 폭격기의 주력은 He 111H였습니다.

독일 공군은 지상군과 함께 나아가는 근접 지원용으로 만들어졌을 뿐, 단호하게 맞서는 상대 전투기 부대를 두고 전략 폭격을 벌일 도구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메우는 데서도 차이가 났습니다. 영국 땅 위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한 영국 조종사는 다치지 않았다면 다시 날 수 있었지만, 격추되고 살아남은 독일 조종사는 포로가 됐습니다.

하늘에 오른 영국 공군 승무원의 수는 자료에 따라 조금 다릅니다. 영국 공군 공식 쪽은 2,945명, IWM은 "3,000명 가까이"라고 적습니다. 처칠은 1940년 8월 20일 하원에서 "인류의 분쟁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이토록 적은 사람에게 이토록 큰 빚을 진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고, 이들은 '소수(The Few)'라는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같은 연설에서 처칠은 밤마다 독일 깊숙이 날아가는 폭격기 대대도 잊지 말자고 했습니다.

조종사가 모두 영국인은 아니었습니다. 영국 공군 공식 쪽은 13개 나라에서 자원자가 왔고 승무원의 약 5분의 1이 영국인이 아니었다고 적습니다. RAF Museum은 16개 나라라고 적고 폴란드 145명, 체코슬로바키아 88명, 뉴질랜드 126명, 캐나다 98명 등을 꼽습니다. 중립국이던 아일랜드와 미국에서도 각각 10명과 11명이 함께 싸웠습니다.

땅 위에도 사람이 많았습니다. 여성 공군 보조대(Women's Auxiliary Air Force, WAAF) 대원은 레이다 운용자로, 또 비행단과 구역 작전실에서 공습을 지도에 표시하는 플로터로 일했습니다. 이들이 일한 비행장과 방공 기구 기지, 레이다 기지는 모두 독일 공군의 주요 표적이었고, 비긴힐(Biggin Hill)의 WAAF 세 사람은 공습 중에도 자리를 지켰습니다. 항공전 동안 땅 위에서 숨진 영국 공군 인원은 312명입니다.

공장도 이 싸움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1940년 6월부터 10월까지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 약 2,000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영국은 독일보다 많이 생산했고, 그 생산량이 손실을 견디는 힘이 됐습니다.

숫자 읽기

손실 숫자는 어느 자료를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IWM은 항공전 동안 독일기 약 1,733기, 영국기 915기가 파괴됐다고 적습니다. 영국 공군 공식 쪽은 항공전이 가장 치열할 때 영국 공군이 쓸 수 있었던 전투기가 749기, 독일 공군기는 2,550기였다고 적습니다. 이 두 숫자는 영국 쪽은 전투기만, 독일 쪽은 모든 비행기를 센 것이라 그대로 견줄 수는 없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숫자를 자료별로 나눠 놓은 막대 도표. 항공전 전체에서 파괴된 비행기는 독일 약 1,733기, 영국 915기(영국 전쟁박물관). 항공전이 가장 치열할 때 쓸 수 있던 비행기는 영국 공군 전투기 749기, 독일 공군기 2,550기(영국 공군, 원문대로 영국은 전투기만, 독일은 모든 비행기). 항공 승무원 '소수'는 영국 공군 2,945명, 영국 전쟁박물관 '3,000명 가까이'. 참가 나라는 영국 공군 13개, RAF Museum 16개이고, 두 자료 모두 영국인이 아닌 승무원을 약 5분의 1로 본다. 8월 8일 선단 전투에서 145비행대대가 주장한 Ju 87 격추 21기와 실제 전투 손실 8기(RAF Museum). 8월 18일 하루 영국 공군과 해군 항공대 손실 68기(공중전 31기), 독일 파괴·수리 불능 69기(RAF Museum). 블록마다 축척이 다르고, 파랑은 영국, 주황은 독일, 회색은 전시의 주장이라는 메모가 있다
비행기와 사람의 숫자. 공개 자료마다 세는 대상과 값이 달라 자료별로 나눠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당시에 보고된 숫자와 뒤에 맞춘 숫자도 다릅니다. 8월 8일 선단 위의 싸움에서 영국 145비행대대는 Ju 87 21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전투 손실은 8기였습니다. 독일 쪽도 영국 공군의 피해를 부풀려 보았습니다. 8월 18일이 가장 치열한 날이었다는 판단도 전후에 영국과 독일 기록을 함께 살핀 연구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더 무겁습니다. 1940년 9월부터 히틀러는 영국 도시 폭격을 지시했고, 그 뒤 9개월 동안 블리츠로 민간인 4만 3,500명 넘게 숨졌습니다. 블리츠는 1941년 5월까지 이어졌습니다.

남긴 것

IWM은 영국의 승리를 결정적이었지만 본질은 방어였다고 정리합니다. 이 승리가 전쟁을 이기게 하지는 않았지만, 길게 보아 이길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4년 뒤 연합군은 영국 해안에서 오버로드 작전을 시작해 나치가 점령한 유럽으로 들어갔습니다.

승리의 몫을 어디에 둘지는 기관마다 강조가 다릅니다. IWM은 다우딩 체계를 영국 성공의 중요한 부분으로 꼽으면서도, 승리는 전투기 사령부가 얻었지만 방어는 영국 공군 전체가 했다고 적습니다. 레이다에 대해서도 IWM은 독일이 레이다 기지 파괴에 힘을 모으지 않아 레이다망이 항공전 내내 대체로 온전했다는 점을 듭니다. RAF Museum은 승리를 가른 것이 레이다였는지, 괴링(Hermann Göring)이 레이다의 중요성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는지를 열린 물음으로 남깁니다.

다우딩을 보는 눈도 하나가 아닙니다. RAF Museum은 다우딩이 승리의 설계자로 여겨진다고 적는 한편, 리-맬러리(Trafford Leigh-Mallory) 등이 바란 큰 편대 '빅 윙(Big Wing)'을 쓰지 않았다는 비판도 소개합니다. 큰 편대가 정말 더 나았을지는 지금도 논쟁이라고 덧붙입니다. 다우딩은 항공전이 끝나고 몇 주 안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1942년 7월 퇴역했습니다.

이 방공망을 오늘의 말로 부르는 설명도 있습니다. IWM 더퍽스포드의 안내원은 1940년 여름 영국이 세계 최초의 통합 방공 체계를 가졌다고 설명합니다. 관측대는 1941년 국왕 조지 6세에게서 '로열(Royal)' 칭호를 받았습니다. 한편 독일이 밤 폭격으로 돌아서자 전투기 사령부는 어려움을 겪었고, 공중 요격 레이다를 단 보파이터(Beaufighter)가 나오고서야 효과적인 야간 방어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