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7월 1일 아침, 펜실베이니아 남쪽의 작은 마을 게티즈버그(Gettysburg) 서쪽 능선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남부연합의 북버지니아군과 연방의 포토맥군 가운데 어느 쪽도 이곳을 싸움터로 정해 두지 않았습니다. 두 군의 선두는 계획만큼이나 우연으로 이 마을에서 마주쳤습니다.

사흘 뒤 싸움이 끝났을 때, 두 군을 합쳐 5만 1천 명 넘는 병사가 죽거나 다치거나 사라졌습니다. 남북전쟁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투였고, 오늘도 흔히 전쟁의 '전환점'으로 불립니다.

리는 왜 북쪽까지 올라왔을까요? 사흘은 어떻게 흘러갔고, 병사들은 어떤 소총과 대포를 들었을까요? 기록마다 다른 숫자를 어떻게 읽을지, '전환점'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디까지를 가리키는지도 함께 봅니다.

리는 왜 북쪽으로 갔나

전쟁은 벌써 2년 넘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1863년 5월까지 서쪽에서는 그랜트(Ulysses S. Grant)가 미시시피강의 도시 빅스버그(Vicksburg)를 포위하고 있었고, 남부가 이기는 듯 보인 곳은 동부 전역뿐이었습니다. 그 동부에서 로버트 E. 리(Robert E. Lee)의 북버지니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이 5월 챈슬러즈빌(Chancellorsville)에서 이겼습니다.

리는 그 기세로 북부를 치기로 했습니다. 남부의 사기를 되살리고, 빅스버그에 걸린 압박을 덜려는 결정이었습니다. 리가 바란 것은 그 밖에도 있었습니다. 유럽의 지지, 북부에서 커지던 평화 운동, 남부 땅에서 북군의 눈을 돌리는 일, 그리고 군대가 먹을 식량입니다.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게티즈버그 전적지를 관리하는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의 설명이 분명합니다. 노예제 문제가 남북전쟁의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보통 병사가 싸운 이유는 저마다 달랐고, 양쪽 후손들은 조상의 개인적인 동기를 두고 지금도 다툰다는 점을 함께 적습니다.

6월 3일 리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리는 버지니아의 프레데릭스버그에서 서쪽 셰넌도어 계곡(Shenandoah Valley)으로 가서 산줄기 뒤로 움직임을 가렸습니다. 6월 9일 브랜디 스테이션(Brandy Station)에서 남북전쟁 최대의 기병전이 벌어졌고, 게티즈버그 원정도 이 싸움으로 막을 올렸습니다.

연방의 포토맥군(Army of the Potomac)은 산줄기 동쪽에서 뒤따랐습니다. 수도 워싱턴을 지키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늘 리와 수도 사이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 덕에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로 들어선 리는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였습니다.

6월 14~15일 2차 윈체스터 전투에서 이웰(Richard S. Ewell)의 남군이 계곡의 북군을 몰아냈습니다. 6월 26일에는 남군 얼리(Jubal Early) 소장이 게티즈버그에 들어와 마을 정부에 물자와 돈을 요구했습니다. 6월 28일 남군은 요크를 지나 서스쿼해나강의 컬럼비아 다리에 닿았지만, 민병대가 다리에 불을 질러 강 건너편으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같은 6월 28일, 아직 어두운 새벽에 포토맥군의 사령관이 바뀌었습니다. 군이 게티즈버그 남쪽 약 35마일의 메릴랜드 프레더릭(Frederick) 둘레에 머물던 때, 조지 고든 미드(George Gordon Meade)의 천막에 임명 소식이 왔습니다. 놀란 미드는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결국 받아들였습니다.

6월 30일, 헤스(Henry Heth)가 이끄는 리의 사단 하나가 체임버즈버그 길을 따라 게티즈버그 서쪽 9마일까지 와 있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뷰퍼드(John Buford)의 포토맥군 기병 사단이 마을로 다가왔습니다. 리는 원래 방어전을 생각했지만, 이 뜻밖의 만남이 계획을 바꿔 놓았습니다.

1863년 게티즈버그 원정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6월 3일 리의 북진 시작, 6월 9일 브랜디 스테이션(가장 큰 기병전, 원정의 시작), 6월 14~15일 2차 윈체스터, 6월 26일 얼리의 게티즈버그 진입과 물자·돈 요구, 6월 28일 미드의 지휘 인수와 컬럼비아 다리 소각, 6월 30일 서쪽 9마일의 헤스와 남쪽에서 온 뷰퍼드, 7월 1~3일 전투 사흘(크게 표시: 맥퍼슨 능선과 묘지 언덕, 전선 양 끝 공격, 포격과 피켓의 돌격), 7월 4일 리의 후퇴 시작과 빅스버그 항복, 7월 13~14일 포토맥강 도하와 원정 끝, 11월 19일 국립묘지 봉헌과 게티즈버그 연설. 점의 색으로 남군 쪽, 북군 쪽, 양쪽·기타, 전투 사흘을 나눈다
1863년 6월 3일부터 11월 19일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7월 1일: 시내 서쪽의 첫 충돌

싸움은 7월 1일 아침 시내 서쪽의 맥퍼슨 능선(McPherson Ridge)에서 시작됐습니다. 남군이 그곳의 북군을 쳤고, 수가 적던 북군은 오후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첫날의 싸움터는 시내 북쪽과 서쪽으로 넓게 트인 땅입니다.

하루 내내 두 군의 병력이 속속 도착하며 싸움이 커졌습니다. 오후 4시쯤 북군은 결국 밀려 시내를 지나 물러났고, 그 길에 많은 병사가 붙잡혔습니다. 남은 병력은 시내 남쪽의 묘지 언덕(Cemetery Hill)과 컬프스 힐(Culp's Hill)로 모였습니다.

남군은 이 이점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습니다. 밤사이 북군 본대가 도착해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을 사람 가운데에는 1812년 전쟁에 나갔던 노인 존 번스(John Burns)처럼 머스킷을 들고 북군 곁에서 싸운 이도 있었습니다.

7월 2일: 낚싯바늘 모양의 전선

7월 2일 아침, 두 군의 주력이 모두 싸움터에 와 있었습니다. 두 군은 1마일 가까이 떨어진 평행한 두 능선에 섰습니다. 북군은 묘지 능선(Cemetery Ridge), 남군은 그 서쪽의 세미너리 능선(Seminary Ridge)이었습니다.

북군 전선은 흔히 낚싯바늘에 빗댑니다. 2마일이 조금 못 되는 묘지 능선은 남쪽 리틀라운드톱(Little Round Top)과 빅라운드톱 쪽으로 갈수록 낮아지고, 마을 쪽 끝은 묘지 언덕을 둥글게 돌아 컬프스 힐에 닿습니다. 맞은편 세미너리 능선은 숲이 덮인 비탈로, 워필드 능선까지 2마일 넘게 이어졌습니다.

리는 북군 전선의 양 끝을 치라고 명했습니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의 공격은 남쪽 끝의 복숭아 과수원(Peach Orchard)을 휩쓸었고, 리틀라운드톱 아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밀밭(Wheatfield)에 수많은 사상자를 남겼습니다. 이웰은 저녁에 북쪽 끝의 이스트 묘지 언덕과 컬프스 힐을 쳐 잠시 성공했지만, 남군은 그것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리틀라운드톱에서는 미드의 수석 공병 워런(Gouverneur K. Warren) 준장이 남군의 위협을 재빨리 알리고 지원 병력을 데려왔습니다. 저녁까지 북군은 리틀라운드톱을 지켰고 이웰의 병력 대부분을 물리쳤습니다. 둘째 날은 어느 쪽에도 결정적인 결과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7월 2~3일 두 전선의 개념 도표. 왼쪽에 세로로 긴 갈색 선이 2마일 넘는 세미너리 능선의 남군 전선이고, 1마일 가까이 떨어진 오른쪽에 파란 선이 2마일이 조금 못 되는 묘지 능선의 북군 전선이다. 파란 선 위쪽 끝은 묘지 언덕을 돌아 컬프스 힐로 휘어 낚싯바늘 모양을 이루고, 아래쪽 끝에 리틀라운드톱과 빅라운드톱이 있다. 화살표 셋: 7월 2일 북군 왼쪽(복숭아 과수원, 밀밭, 라운드톱) 공격, 7월 2일 저녁 오른쪽(컬프스 힐) 공격, 7월 3일 가운데로 향하는 굵은 붉은 화살표 피켓의 돌격(자료에 따라 약 12,000명 또는 15,000명). 위쪽에 마을과 7월 1일 싸움터(시내 북쪽과 서쪽), 오른쪽 위에 7월 3일 오후의 동쪽 기병 들판이 있다. 지도가 아니며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평행한 두 능선과 낚싯바늘 전선. 공원청의 설명을 네모와 선, 화살표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7월 3일: 포격과 피켓의 돌격

7월 3일 이른 아침, 북군은 전날 저녁 남군이 차지했던 컬프스 힐의 마지막 발판을 되찾았습니다. 전날 양 끝을 쳐 본 리는 이제 북군 중앙을 노렸습니다. 미 육군 군사사 센터(Center of Military History, CMH)의 답사 안내서에는 롱스트리트가 북군 중앙 맞은편에 대포 159문을 모았다고 나옵니다.

오후 1시, 남군 대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북군 포병은 오후 2시쯤까지 응사하다가 탄약을 아끼려고 멈췄습니다. 두 시간 동안 양쪽 대포가 맞붙었지만, 북군의 방어 진지는 별로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어 남군 보병이 세미너리 능선의 숲에서 나와 1마일의 트인 들판을 건넜습니다. 이 공격은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으로 널리 알려졌고, 피켓-페티그루 공격이나 롱스트리트의 공격이라고도 부릅니다. 돌격한 병력은 공원청 자료에서 약 12,000명, CMH와 미 육군 기사에서 약 15,000명입니다.

돌격의 가운데 무리가 잠시 북군 전선을 뚫었지만, 곧 큰 손실을 입고 밀려났습니다. 리는 이 한 시간 동안 5,000명 넘는 병사를 잃었습니다. 리는 이 실패를 자기 탓으로 돌렸습니다.

같은 날 오후 시내 동쪽에서는 그레그(David Gregg)의 북군 기병이 스튜어트(Jeb Stuart)의 남군 기병을 막아섰습니다. 스튜어트는 북군 옆을 돌아 미드의 뒤를 위협하려 했습니다. 이곳은 지금 동쪽 기병 들판(East Cavalry Field)으로 불립니다.

7월 4일 리는 버지니아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부상병을 실은 행렬이 14마일 넘게 이어졌습니다. 7월 13~14일 밤 북버지니아군이 포토맥강을 건너면서 게티즈버그 원정은 끝났습니다.

강선 소총과 대포

게티즈버그의 보병이 든 주된 무기는 강선 머스킷(rifled musket)이었습니다. 미 육군은 1855년 .69구경 활강(smooth-bore) 머스킷 대신 총열에 강선을 새긴 .58구경 강선 머스킷을 채택했습니다. 탄을 총구로 넣는 방식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북군 보병은 주로 스프링필드(Springfield), 남군은 영국에서 들여온 엔필드(Enfield)를 썼습니다. 병사는 1분에 겨눈 세 발을 쏠 수 있어야 했고, 기본 탄약은 탄약 상자에 든 40발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보병 무기도 이 소총이었습니다.

얼마나 멀리 맞힐 수 있었을까요? 답은 자료와 조건에 따라 다릅니다.

CMH의 표는 강선 머스킷과 엔필드의 유효 사거리를 200~500야드, 활강 머스킷을 50~80야드로 적고, 공원청 교사용 안내서는 200~300야드에서 정확했다고 씁니다. 최대 사거리는 1,000야드를 넘을 수 있었지만 실제로 쏘는 거리는 짧을 때가 많았고, 먼 거리의 정확도보다 가까운 거리의 사격량을 중시했습니다.

CMH는 활강총에서 강선 머스킷으로 바뀐 것이 남북전쟁에서 방어하는 쪽을 강하게 하고 공격하는 쪽의 사상자를 늘렸다고 봅니다. 그래도 장교가 눈과 목소리로 부대를 이끌어야 했기 때문에, 촘촘한 대형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느 정도 남았습니다.

포병은 대포 4문이나 6문으로 포대(battery)를 이뤘습니다. 게티즈버그의 야전포는 북군 360문, 남군 241문이었습니다. 북군은 주로 10파운드 패럿(Parrott)과 3인치 오드넌스(Ordnance) 강선포를, 남군은 주로 12파운드 나폴레옹(Napoleon)과 같은 두 강선포를 썼습니다.

유효 사거리는 청동으로 만든 활강포인 12파운드 나폴레옹이 1,600야드, 쇠로 만든 10파운드 패럿과 3인치 오드넌스 강선포가 1,800야드입니다. 포탄은 기본적으로 고체탄, 유산탄, 작렬탄, 산탄의 네 가지였습니다. 쇠구슬 28~32개를 깡통에 채운 산탄은 약 350야드 안에서만 효과가 있었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게티즈버그에서 몇 명이 싸웠고 몇 명이 쓰러졌는지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CMH 안내서도 사상자 표 첫머리에서, 남북전쟁 전투의 병력 추정은 자료마다 다르고 사상자 통계는 불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숫자 하나를 고르기보다 나란히 놓고 보는 편이 낫습니다.

병력부터 보겠습니다. 공원청 전투 요약에서는 북군 83,289명과 남군 75,054명, 합쳐 158,343명이 싸웠습니다. CMH 표는 북군 95,170명, 남군 65,510명인데, 둘 다 전투보다 한 달쯤 앞선 1863년 5월 31일의 숫자입니다. 미 육군 기사는 어림수로 북군 9만 5천 명, 남군 7만 5천 명이라고 씁니다.

사상자에는 죽은 사람뿐 아니라 다친 사람, 붙잡히거나 실종된 사람이 함께 들어갑니다. 공원청 요약의 추정은 북군 2만 3천 명, 남군 2만 8천 명, 합계 5만 1천 명입니다. CMH 표에서 북군 손실은 23,049명(전사 3,155명, 부상 14,529명, 포로·실종 5,365명)으로 약 네 명에 한 명꼴이었습니다.

남군 쪽은 더 어렵습니다. 남군이 보고한 손실은 20,451명이지만, CMH는 보고가 불완전하며 실제 사상자는 2만 8천 명, 곧 병력의 3분의 1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고 적습니다. 공원청 요약의 2만 8천 명과 같은 크기입니다.

피켓의 돌격에 나선 병력도 자료에 따라 약 12,000명에서 약 15,000명까지 갈립니다. 미 육군 기사는 이를 남군 사단 셋으로 적습니다. 공원청 교사용 안내서에 실린 숫자로 피켓의 사단만 보면 세 여단 5,848명이었습니다.

장부와 실제가 다른 것은 부대 단위에서도 보입니다. 교사용 안내서는 이상적인 연대를 1,000명으로 잡지만, 예로 든 버지니아 두 연대는 게티즈버그에서 각각 376명과 505명이었습니다.

자료별 숫자 비교 가로 막대 도표. 병력: 공원청 전투 요약 북군 83,289명·남군 75,054명, 미 육군 군사사 센터 북군 95,170명·남군 65,510명(1863년 5월 31일 기준), 미 육군 기사 북군 95,000명·남군 75,000명(어림수). 사상자(전사·부상·포로·실종): 공원청 요약 북군 23,000명·남군 28,000명(추정), 군사사 센터 북군 23,049명·남군 보고 20,451명(실제는 2만 8천 명에 가까움). 피켓의 돌격에 나선 남군: 공원청 개관 약 12,000명, 군사사 센터 약 15,000명, 미 육군 기사 약 15,000명. 파란색은 북군(포토맥군), 갈색은 남군(북버지니아군)
같은 전투, 다른 숫자. 자료마다 세는 때와 범위가 다릅니다 (도표)(도표)

마을, 국립묘지, 272단어

전투 전의 게티즈버그는 펜실베이니아 중남부의 여느 시골 마을과 비슷했습니다. 군대가 떠난 뒤 거의 모든 건물에 부상자가 들어찼고, 교회와 공공건물, 개인 집까지 병원이 됐습니다. 마을 동쪽에 세운 캠프 레터먼(Camp Letterman) 종합병원의 큰 천막 병동을 2만 명 넘는 양군 부상병이 거쳐 갔고, 마지막 환자가 떠난 것은 1864년 1월이었습니다.

민간인 가운데 목숨을 잃은 사람은 한 명이었습니다. 제니 웨이드(Jennie Wade)는 언니 집 부엌에서 빵 반죽을 하다가 문 두 개를 뚫고 들어온 총알에 맞았습니다. 스물한 살 교사 샐리 마이어스(Sallie Myers)처럼 아버지의 집과 성당에서 양군 부상병을 돌본 마을 사람도 있었습니다.

1863년 11월 19일, 새로 만든 병사 국립묘지(Soldiers' National Cemetery)의 봉헌식이 열렸습니다. 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Edward Everett)이 나섰고,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은 2분 길이의 짧은 연설을 했습니다. 모두 272단어였습니다. 북군 전사자를 묘지로 옮기는 일은 그해 가을에 시작해 봉헌식 뒤로도 오래 이어졌습니다.

연설은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자유 속에 잉태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명제에 바쳐진 새 나라를 이 대륙에 세웠습니다"로 시작합니다. 끝은 이 나라가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맞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자는 다짐입니다. 지금 이 묘지에는 6,000명 넘는 미군 병사와 참전 군인이 묻혀 있고, 그 가운데 3,500명 넘게가 게티즈버그에서 죽은 병사입니다.

전적지를 지키려는 움직임도 곧 시작됐습니다. 1864년 시민들이 게티즈버그 전적지 기념 협회를 세웠고, 협회가 1895년 땅을 연방 정부에 넘기면서 국립군사공원이 됐습니다. 참전 군인 위원회가 두 군의 전선을 찾아 표시했고, 1933년부터는 국립공원청이 공원을 맡고 있습니다. 1870년부터는 마을 의사 오닐(O'Neal)이 남긴 무덤 기록을 바탕으로 남군 유해가 남부의 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전환점이라는 말

게티즈버그를 '전환점'이라고 부를 때, 기관마다 그 범위가 조금씩 다릅니다. 공원청 수업 자료는 게티즈버그를 남부가 북부를 전면 침공하려 한 마지막 시도로 보고, 여기서 이기지 못한 것이 동부 전역의 전환점이 됐다고 씁니다. 그 원정 뒤로 남군은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공원청 교사용 안내서는 범위를 넓혀, 7월 4일의 빅스버그 승리와 묶어 게티즈버그가 남북전쟁의 전환점으로 흔히 꼽힌다고 적습니다. 빅스버그가 항복하면서 연방은 미시시피강을 완전히 손에 넣었습니다. 남은 2년 동안 남군은 다시 게티즈버그만큼 북쪽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전쟁은 게티즈버그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리가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한 날은 1865년 4월 9일이었습니다. 링컨 연설의 "자유의 새로운 탄생"과 "끝나지 않은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두고도 사람들은 지금까지 다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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