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 12월 2일 아침, 빈 북쪽의 낮은 고원 위로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체코 땅인 이곳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Napoleon)의 군대가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과 맞섰습니다. 동맹군에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Francis I)와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가 함께 있었습니다. 한 싸움터에 황제가 셋이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동맹군의 후퇴는 걷잡을 수 없는 도주로 바뀌었습니다. 이 승리로 프랑스의 독일 원정이 끝났고, 3주 남짓 뒤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는 8월 말에 시작된 원정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전쟁이 왜 다시 시작됐는지, 프라첸 고지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1805년 프랑스군이 어떻게 짜여 있었는지를 차례로 따라갑니다. 승자가 다음 날 병사들에게 내린 포고문의 숫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함께 봅니다.
3차 대프랑스 동맹
1805년 8월 9일, 오스트리아는 영국 외교관과 협상한 끝에 영국·러시아의 동맹에 들어가기로 몰래 서명했습니다. 이 동맹을 3차 대프랑스 동맹(Third Coalition)이라고 부르며, 곧 나폴리 왕국과 스웨덴도 함께했습니다. 맞은편에는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스페인, 네덜란드,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 헤센다름슈타트 같은 나라들이 섰습니다.
왜 또 전쟁이었을까요? 몇 해 전 맺은 뤼네빌과 아미앵의 평화 조약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흔들렸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의 학습 자료는 서명국들이 조건을 지킬 뜻이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났고, 나폴레옹에 맞선 동맹이 다시 생겼다고 설명합니다.
싸움은 9월 10일 오스트리아군이 바이에른에 들어가면서 시작됐습니다. 바이에른은 프랑스 편에 선 나라였습니다.
불로뉴에서 빈까지
그해 여름 나폴레옹의 군대는 영국 상륙에 대비해 불로뉴(Boulogne) 둘레의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었고, 나폴레옹도 8월 한 달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8월 26일 그는 진지를 거두고 20만 명의 병력을 오스트리아 쪽으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8월 29일에는 행군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폴레옹 재단(Fondation Napoléon)의 연표는 이날 대육군(Grande Armée)이 태어났다고 적습니다.
군대는 7개 군단(corps)으로 나뉘어 움직였습니다. 걸음은 빨랐습니다. 뮈라(Murat)의 병사들은 9월 25일부터 10월 1일까지 390 km를 걸었습니다.
10월 13일 저녁, 오스트리아의 마크(Mack) 장군과 그 군대가 울름(Ulm)에서 완전히 포위됐습니다. 연락선이 모두 끊긴 마크는 10월 19일 항복했습니다. 다음 날 오스트리아군 25,000명이 대포 60문과 함께 나폴레옹 앞을 줄지어 지나갔습니다.
이틀 뒤 바다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10월 21일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트라팔가르 곶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에 졌고, 영국 함대를 이끈 넬슨(Nelson)은 전투 중 입은 상처로 죽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한 달 가까이 지난 11월 17일이었습니다.
육지의 길은 빈으로 이어졌습니다. 11월 3일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포츠담에서 동맹 조약을 맺었지만, 연표는 프로이센의 참여를 '소극적'이었다고 적습니다. 11월 14일 나폴레옹은 빈에 들어가 쇤브룬(Schönbrunn)에 사령부를 차렸습니다.
러시아군은 아직 건재했습니다. 11월 15일 홀라브룬(Hollabrunn)에서 바그라티온(Bagration)은 뮈라에게 졌지만, 프랑스군을 충분히 붙잡아 두어 쿠투조프(Kutuzov)의 군대가 빠져나가게 했습니다. 11월 20일 나폴레옹은 브륀(Brünn)에 사령부를 차리고, 다음 날 나중에 싸움터가 될 땅을 둘러봤습니다. 11월 29일에는 동맹군이 아우스터리츠 둘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프라첸 고지의 하루
아우스터리츠는 오늘의 슬라프코프 우 브르나(Slavkov u Brna)입니다. 싸움터는 약 8마일×6마일로, 나폴레옹 시대 싸움터 가운데 가장 넓은 축에 듭니다. 동맹군은 그 중앙을 프라첸 고지(Pratzen Heights)라는 고원 위에 두었습니다.
오전 7시, 키엔마이어(Kienmayer)가 이끈 동맹군이 텔니츠(Telnitz) 마을을 쳤습니다. 마을에는 프랑스 제3 전열 보병연대와 포(Po) 저격병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공격하는 쪽은 수가 훨씬 많았는데도 끈질기게 버티는 프랑스군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오전 8시, 북스회브덴(Buxhöwden)이 텔니츠 공격을 도우려고 프라첸 고지에서 병력을 내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동맹군 지휘관 랑제롱(Langeron)도 고지를 떠나 가까운 소콜니츠(Sokolnitz) 마을로 향했습니다.
오전 8시 30분, 아침 안개가 걷혔습니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두 마을 공격을 도우려고 고지 중앙을 크게 비운 것을 보고, 술트(Soult)에게 고지를 차지하라고 보냈습니다. 술트는 30분 만에 그 일을 해냈습니다.
오전 9시, 쿠투조프는 고지를 비운 실수를 메우려고 러시아 근위대까지 모든 병력을 던져 고원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같은 때 쿠투조프의 오른쪽에서는 바그라티온이 란(Lannes)과 뮈라에 밀리며 질서 있게 물러났습니다. 프랑스 근위대도 고지의 술트를 도우러 움직였습니다.
격렬한 기병전 끝에, 오전 11시 쿠투조프는 아우스터리츠 쪽으로 후퇴를 명했습니다. 이 후퇴는 오후에 전면 도주가 됐습니다. 오후 1시 무렵에는 술트와 다부(Davout) 사이에 갇힌 동맹군 왼쪽 날개가 텔니츠 동쪽의 얼어붙은 늪 위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우예즈드(Ujezd u Brna)의 성 안토니오 예배당에서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흐트러지는 동맹군을 지켜봤습니다. 그날은 그가 황제로 대관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이튿날 포고문에서 나폴레옹은 적의 계획을 "그대들의 황제가 대관한 바로 그 기념일에" 무너뜨렸다고 병사들에게 말했습니다.
1805년의 프랑스군: 군단, 머스킷, 대포
석 달 남짓 만에 불로뉴에서 빈 너머까지 간 군대는 어떻게 짜여 있었을까요? 역사가 J.-P. 베르토(Bertaud)가 나폴레옹 재단에 쓴 글이 원정 직전의 프랑스 육군을 숫자로 보여 줍니다. 국방부는 전시 병력을 526,918명, 그 가운데 보병을 401,845명으로 내다봤습니다. 절반 넘게가 갓 들어온 징집병이었고, 1800년부터 1805년까지 30만 명 넘는 젊은이가 소집됐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군단(corps d'armée)이었습니다. 1793년에 생긴 사단은 보병·기병·포병 연대를 함께 묶은 부대였는데, 이제는 사단 몇 개를 모아 군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장군 한 명이 보병 사단 두세 개와 기병 여단 하나, 포병 분견대를 거느렸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사단과 군단에 붙이는 기병·포병 수를 일부러 제한했습니다. 승부를 가를 때 쓸 기병·포병을 예비로 따로 쥐고 있으려는 뜻이었습니다.
보병은 여전히 싸움의 중심이었습니다. 소총의 사격과 총검의 충격을 갖춘 보병을 베르토는 "전투의 여왕"이라고 부릅니다. 전열 보병은 3개 대대 연대 71개와 4개 대대 연대 19개였고, 한 대대는 척탄병 중대 하나를 포함한 9개 중대, 1,071명이었습니다. 병사가 든 머스킷 소총은 1777년형을 1801년에 고친 것으로, 길이 1.51 m에 무게 4.37 kg이었습니다.
기병은 일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흉갑기병(cuirassier) 12개 연대 8,472명은 적의 진형에 큰 타격을 줘 전선을 깨는 일을 맡았고, 벌어진 틈은 보병이 이어받았습니다. 경기병 33,202기는 정찰과 추격을 맡았습니다.
포병은 43,000명이었고, 한 전투에 늘어세울 수 있는 대포는 병사 1,000명당 2문 정도로 어림됐습니다. 1803년 5월 2일의 명령은 그리보발(Gribeauval) 체계를 고쳐 12파운드 포와 6파운드 포, 24파운드 곡사포를 갖추게 했습니다. 12·6·24라는 숫자는 포에 넣는 포탄의 무게를 옛 단위 리브르(livre)로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근위대(Imperial Guard)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한 사람만이 지휘하는 정예 12,187명으로, 베르토의 표현으로는 이미 "군대 안의 작은 군대"였습니다. 불로뉴 진지의 시간은 훈련으로 채워졌고, 술트는 일주일에 세 번 사단을 움직여 손발을 맞췄습니다.
포고문의 숫자 읽기
전투 다음 날인 12월 3일,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포고문을 냈습니다. 쓴 곳은 아우스터리츠의 18세기 바로크 궁이었습니다. 전투 전날 알렉산드르 1세와 프란츠 1세가 사령부를 차린 바로 그 궁에, 나폴레옹은 12월 3일부터 6일까지 머물렀습니다.
포고문의 숫자는 크고 또렷합니다. 네 시간이 안 되는 사이 두 황제가 이끈 10만 명의 군대가 베이거나 흩어졌고, 군기 40개와 대포 120문, 장군 20명, 포로 3만 명 넘게를 얻었다고 적었습니다. 칼을 피한 이들은 호수에 빠졌다는 말과, 상대 보병은 "수가 더 많았다"는 말도 들어 있습니다. 끝에는 "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있었다"고 말하면 "용감한 사람이로구나"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이 붙었습니다.
이 숫자를 그대로 전투 결과로 옮겨 적으면 곤란합니다. 포고문은 이긴 쪽 사령관이 자기 병사에게 한 말이고, 상대 쪽의 셈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시간도 견줘 볼 만합니다. 연표에서 첫 공격은 오전 7시, 동맹군 왼쪽 날개의 도주는 오후 1시 무렵인데, 포고문의 '네 시간'이 어디서부터 센 시간인지는 포고문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른 기록과 나란히 놓으면 숫자의 크기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울름에서 항복한 오스트리아군은 25,000명, 대포 60문이었습니다. 파리 방돔 광장의 기둥은 러시아·오스트리아군에게 빼앗은 대포 1,200문을 녹여 만들었습니다. 1806년 8월 25일 짓기 시작해 1810년 8월 15일 마친 높이 42 m의 이 기둥은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처음 이름은 '아우스터리츠 기둥'이었습니다.
프레스부르크 조약과 그 뒤
12월 4일 나폴레옹은 슬라프코프 남동쪽 10마일의 '불탄 방앗간'에서 오스트리아 황제를 만났습니다. 12월 6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휴전했고, 12월 26일 프레스부르크(Pressburg, 오늘의 브라티슬라바)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조약문은 오스트리아 쪽 군주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황제'라고 부릅니다. 그는 캄포포르미오·뤼네빌 조약으로 받은 옛 베네치아 공화국 땅을 내놓았고, 그 땅은 이탈리아 왕국에 영원히 합쳐지게 됐습니다. 나폴레옹을 이탈리아 왕으로 인정했고, 브릭센·트렌토를 포함한 티롤 백작령 등을 바이에른 왕에게 넘겼습니다. 잘츠부르크와 베르히테스가덴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들어갔습니다.
별도 조항에 따라 오스트리아 황제는 프랑스군이 점령지에 매기고 아직 걷지 못한 군세를 대신해 4,000만 프랑(금속 가치)을 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비준서를 바꾼 뒤 두 달 안에 오스트리아 세습령에서 물러나되, 그동안 지나는 길에 세운 자기 창고에서 먹을 것과 물자를 받기로 했습니다. 돌려주지 않은 전쟁 포로는 40일 안에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독일 땅의 모양도 바뀌었습니다. 바이에른 선제후는 12월 10일, 뷔르템베르크 선제후는 12월 11일 왕이 됐고, 조약은 두 사람의 왕 칭호를 인정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의 설명으로는 1806년 7월 여러 독일 제후가 라인 동맹(Rheinbund)으로 나폴레옹의 보호 아래 들어가며 신성 로마 제국을 떠났습니다. 프란츠 2세는 제국이 끝났다고 선언하고 수백 년 된 왕관을 내려놓았는데, 그 전에 이미 오스트리아에 새 황제 자리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싸움터에는 다른 기억도 남았습니다. 프라첸 고원 꼭대기에는 건축가 요제프 판타(Josef Fanta)가 1909~1912년에 그린 설계로 평화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평화-명예'라는 석판 아래에는 싸움터에서 찾은 병사들의 유해가 놓였고, 바깥 네 귀퉁이의 조각상은 맞서 싸운 세 군대의 병사를 함께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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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2년 러시아 원정: 대육군은 왜 돌아오지 못했나: 아우스터리츠에서 이긴 대육군이 7년 뒤 겪은 일입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조약에도 들어간 군대의 먹을 것과 창고 문제를 오늘의 말로 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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