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5월 7일 오후, 뉴욕을 떠나 영국으로 가던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아일랜드 남쪽 바다에서 어뢰를 맞았습니다. 배는 20분이 채 안 되어 가라앉았고 1,198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 밑에 숨은 배가 상선과 여객선을 노리는 전쟁은 이미 몇 달째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1차 대전의 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보트는 영국으로 가는 배를 끊으려 했습니다. 영국은 처음에 잠수함을 찾아다니며 맞섰고, 1917년 봄 손실이 크게 불어난 뒤에야 상선을 한데 모아 군함이 함께 가는 호송 선단(convoy)을 들였습니다. 이 결정에는 긴 논쟁이 있었습니다.

바다의 규칙은 어떻게 무너졌고, 그 일은 어떻게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였을까요? 호송 선단은 왜 효과가 있었을까요? 이 글은 공개 기록으로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자료마다 다른 숫자도 함께 봅니다.

봉쇄에 맞선 새 무기

1914년 11월 2일 영국은 북해를 전쟁 수역으로 선포하고 봉쇄를 시작했습니다. 독일을 세계 무역에서 끊으려는 조치였습니다.

영국도 바다에 기대는 나라였습니다. 1차 대전 전에도 영국 식량의 절반쯤을 바깥에서 들여왔고, 1914년 세계의 증기선 가운데 거의 절반이 영국 깃발을 달았습니다. 제국에서 오는 식량과 물자에 기댄 이 구조는 그 자체로 위험의 씨앗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잠수함은 19세기에 나온 발명품입니다. 여러 나라의 해군 지도부는 오래도록 무거운 전함과 빠른 순양함으로 된 수상 함대를 믿었고, 잠수함에는 통상 파괴와 정찰 같은 보조 역할만 기대했습니다. 독일은 그중에서도 잠수함에 늦게 관심을 두었습니다. 독일 잠수함은 이름 대신 번호를 달았고, 첫 배 U1은 1906년에 취역했습니다.

이 시절 U보트는 물 위에서는 디젤이나 석유 기관으로, 물속의 짧은 구간에서는 더 약한 전동기로 움직였습니다. 싸움도 주로 물 위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독일 역사박물관(DHM)은 이 배들을 '잠수함'보다 '잠항정'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그 뒤 잠수함의 동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디젤전기·AIP·핵추진 잠수함 글에서 이어집니다.

1914년 9월 22일, 오토 베디겐 대위가 이끈 U9가 북해에서 한 번에 영국 순양함 세 척을 가라앉혔습니다. 이 일로 잠수함은 갑자기 진지하게 따져야 할 무기가 되었습니다.

나포 규칙과 '경고 없는 공격'

당시 국제법은 잠수함을 순양함처럼 다뤘습니다. 적 상선을 보자마자 가라앉힐 수는 없었습니다. 멈춰 세워 수색하고 승조원의 안전을 챙긴 뒤에야 나포하거나 가라앉힐 수 있었고, 이것을 나포 규칙(prize rules)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U보트는 이 규칙을 지켜 물 위로 올라온 뒤 승조원과 승객이 배를 떠나게 했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잠수함은 공격받기 쉬웠고, 영국이 포를 숨긴 위장 군함 'Q선'을 들이자 더욱 그랬습니다. 연합국은 상선에도 포를 달았습니다. Q선은 독일이 끝내 나포 규칙을 버리는 데 한몫했습니다.

1915년 독일은 영국 둘레의 바다를 전쟁 수역으로 선포했습니다. 날짜와 방식은 자료마다 조금 다르게 적힙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WM)은 2월 4일 선포와 함께 그 안의 상선을 경고 없이 가라앉혔다고 적고, DHM은 2월 22일 나포 규칙에 따른 U보트전을 명령했으며 예외적으로 경고 없이 쏘기도 했다고 적습니다.

경고 없이 배를 가라앉히는 이 방식을 '무제한 잠수함전(unrestricted submarine warfare)'이라고 합니다. 중립국, 특히 미국이 크게 반발했습니다.

루시타니아호와 서식스 서약

루시타니아호는 1915년 5월 1일 1,959명을 태우고 뉴욕을 떠났습니다. 5월 7일 오후 2시 15분쯤, 아일랜드 올드헤드오브킨세일 남쪽 15마일쯤에서 독일 잠수함 U-20의 어뢰를 맞았습니다. 곧이어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끝내 다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배가 미국에서 군 장비와 물자를 싣고 있었다며 정당한 공격이라고 주장했고, 영국 당국은 이를 부인했습니다. 배에 탄약이 얼마간 실려 있었으므로 이 주장은 엄밀히 따지면 맞았던 것으로 뒤에 드러났습니다. 그래도 침몰은 세계에 큰 분노를 불렀고, 정치적으로는 독일에 역효과를 냈습니다.

죽은 미국인의 수는 자료마다 다르게 적힙니다. DHM은 100명 넘게, 왕립 박물관 그리니치(RMG)는 128명으로 적고, 미 국무부 역사실은 루시타니아호와 아라빅호를 합쳐 131명으로 적습니다. 미국은 항의하며 처음으로 참전을 경고했고, 빌헬름 2세는 중립국 배와 적 여객선을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한 뒤 끝내 U보트전을 지중해로 줄였습니다. 경고 없이 가라앉히는 공격은 1915년 9월 1일에 멈췄습니다.

1916년 3월에는 영국해협에서 무장하지 않은 프랑스 배 서식스호가 가라앉았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이 모든 여객선 공격을 멈추고, 적 상선의 승조원이 공격 전에 배를 떠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외교 관계를 끊겠다고 경고했습니다. 1916년 5월 4일 독일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고, 이 약속이 '서식스 서약'입니다.

1917년: 무제한 잠수함전과 미국의 참전

1916년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에게서 바다를 빼앗지 못한 독일은 1917년 2월 1일 무제한 잠수함전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해 1월 회의에서 해군 대표들은 군 지도부와 빌헬름 2세에게, 무제한 잠수함전을 다시 하면 다섯 달 안에 영국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베트만홀베크 총리는 이 결정이 미국을 연합국 쪽으로 끌어들여 독일이 지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독일 정부는 첫 미국 수송선이 유럽에 닿기 훨씬 전에 잠수함이 전쟁을 끝내리라고 셈했습니다. 1월 31일 베른슈토르프 대사가 랜싱 국무장관에게 이튿날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문서를 건넸습니다.

윌슨은 2월 3일 의회에서 독일과 외교 관계를 끊었다고 밝혔습니다. 2~3월 사이 독일 잠수함이 미국 배 여러 척을 가라앉혀 많은 미국 선원과 시민이 죽었습니다. 윌슨은 2월 26일 의회에 상선을 무장할 권한을 청했고, 반전파 상원의원들의 필리버스터로 막히자 행정 명령으로 상선을 무장시켰습니다.

그사이 영국 해군 정보부는 1월 19일, 치머만 독일 외무장관이 멕시코시티의 독일 대사에게 보낸 전보를 가로채 풀었습니다. 전보는 멕시코에 미국에 맞선 동맹을 제안하며 멕시코가 미국에 내준 땅을 되찾게 돕겠다고 약속했고, 해독문에는 2월 1일에 무제한 잠수함전을 시작하려 한다는 문장도 들어 있었습니다. 영국은 2월 24일 이 전보를 윌슨에게 넘겼고, 3월 1일 미국 신문에 널리 실렸습니다.

윌슨은 4월 2일 의회에 선전 포고를 청했습니다. 상원이 4월 4일, 하원이 이틀 뒤 찬성해 미국은 4월 6일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잠수함 공격의 재개를 윌슨 결정의 으뜸 동기로 꼽으면서도, 1917년에 전쟁을 고른 정확한 까닭은 역사학자들 사이에 아직 논쟁거리라고 덧붙입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U보트전과 호송 선단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1914년 9월 22일 U9가 북해에서 영국 순양함 세 척을 가라앉힘, 1914년 11월 2일 영국이 북해를 전쟁 수역으로 선포하고 봉쇄 시작, 1915년 2월 독일이 영국 둘레를 전쟁 수역으로 선포(IWM은 2월 4일, DHM은 2월 22일 명령), 1915년 5월 7일 U-20이 루시타니아호를 공격해 1,198명 사망(RMG), 1915년 9월 1일 경고 없는 격침 중단(IWM), 1916년 5월 4일 서식스 서약, 1916년 11월 해군성 대잠부 창설, 1917년 1월 19일 영국 해군 정보부가 치머만 전보 해독, 1917년 2월 1일 무제한 잠수함전 재개(1월 31일 통보), 2월 3일 미국 단교, 2~4월 상선 500척 넘게 격침(IWM), 4월 6일 미국 참전(상원 4월 4일, 하원 이틀 뒤), 5월 10일·12일 첫 시험 호송(USNI, NAM은 5월 10일), 6월 첫 미군 수송 선단과 6월 26일 생나제르 상륙 시작, 1918년 4월 23일 오스텐트·제브뤼헤 기지 공격, 1918년 10월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전 포기(DHM), 1918년 11월 11일 휴전. 점의 색으로 독일 쪽, 영국·연합국 쪽, 미국, 전쟁의 끝을 나눈다
1914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호송 선단을 둘러싼 논쟁

재개 직후의 손실은 컸습니다. IWM에 따르면 1917년 2~4월에 U보트가 상선 500척 넘게 가라앉혔고, 4월 후반에는 하루 평균 13척이 가라앉았습니다. 미 해군협회(USNI)의 해군사 잡지 Naval History에 실린 기고는 새 공세 처음 석 달의 손실을 200만 톤 가까이로 적고, 영국 정부가 이 기록적인 손실을 비밀로 했다고 설명합니다.

영국 해군도 대책을 찾고 있었습니다. 1916년 11월 제리코 제독이 해군성 안에 대잠부를 만들었지만, 효과 있는 대책은 느리게 왔습니다. 첫 대응은 구축함(destroyer)과 무장 트롤선이 막 들여온 수중 청음기와 폭뢰를 갖추고 U보트를 찾아다니는 '사냥 순찰'이었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적을 찾기가 어려워 이 순찰은 대체로 효과가 없었고, 1917년 연합국 항로 둘레에서 움직인 U보트 140척 가운데 순찰로 없앤 것은 14척이었습니다.

호송에 반대한 쪽의 이유는 여럿이었습니다. 첫째는 영국에 호송을 받칠 해군 자원이 모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호송을 하려면 구축함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배를 한데 모으면 표적이 커져 손실이 늘어난다는 주장도 있었고, 제리코는 느린 상선 때문에 선단 전체가 느려진다는 걱정을 보탰습니다.

찬성하는 목소리는 해군성 안의 계급이 낮은 장교들에게서 나왔습니다. 듀어 대령과 헨더슨 중령은 상선 손실이 공개된 것보다 꽤 크고, 호위가 필요한 대양 항해 배의 수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두 사람은 민간 기구인 해운부를 거쳐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이 내용을 전했습니다.

누가 호송을 들였는지는 자료마다 무게가 다릅니다. USNI 기고는 로이드 조지의 선호가 결정적이었고, 제리코가 위원회를 세워 1917년 5월 10일과 12일에 시험 호송 둘을 띄웠다고 적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M) 연표는 5월 10일 영국 해군이 호송 체계를 들였다고 적고, 캐나다 전쟁박물관은 1917년 영국 해군성이 들였다고 적습니다. 영연방 전쟁묘지위원회(CWGC)는 해운부가 들인 조치 가운데 하나로 호송 체계를 꼽습니다.

호송 선단은 어떻게 배를 지켰나

반대론은 배가 많이 모이면 찾기 쉽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는 반대였습니다. U보트가 호송 선단의 상선 20척, 30척, 40척을 볼 가능성은 배 한 척을 볼 가능성보다 조금 클 뿐이었고, 따로 가는 수십 척 가운데 한 척을 볼 가능성보다는 훨씬 작았습니다.

배가 흩어져 있으면 잠수함이 지켜보는 바다 어디에든 배가 지나갈 수 있습니다. 배가 한 무리로 모이면 그 무리가 없는 바다는 비고, 잠수함은 넓은 바다에서 그 한 무리를 찾아야 합니다. 상선을 모으고 호위 군함을 붙이자 U보트가 배를 찾아 가라앉히는 일은 훨씬 어려워졌고, 연합국의 손실도 크게 줄었습니다.

호송 선단이 왜 찾기 어려웠는지 보여 주는 개념 도표. 같은 넓은 바다를 그린 네모 두 개에 상선 30척이 있다. 왼쪽 '따로 가는 배'에서는 상선이 바다 곳곳에 흩어져 있고, U보트 한 척이 지켜볼 수 있는 점선 원 안에도 상선 두 척이 들어 있다. 오른쪽 '호송 선단'에서는 상선 30척이 한 무리로 모여 있고 둘레에 호위 군함 네 척이 있으며, 같은 크기의 점선 원 안은 비어 있다. 아래에 위치·거리·원의 크기는 실제 값이 아니라는 메모가 있다
같은 배 30척, 같은 바다. 흩어져 가느냐 모여 가느냐의 차이를 그린 생각 그림이며 실제 비율이 아닙니다 (도표)(도표)

선단 둘레에는 호위 군함이 함께 갔습니다. 보통 호송에서는 구축함 6~8척이 상선 40척까지를 지켰고, 독일이 가라앉힌 호위 중인 군함은 두 척뿐이었습니다. 1917년 6월 뒤로 손실 톤수는 꾸준히 줄었습니다.

호송만이 대응은 아니었습니다. 상선에는 눈을 어지럽히는 '대즐' 위장 도색을 칠했고, 항공기와 해안의 방향 탐지국으로 U보트를 찾았으며, 군함은 초기 형태의 소나(sonar)와 폭뢰를 갖췄습니다. 1918년 4월 23일에는 영국 해군이 오스텐트와 제브뤼헤의 U보트 기지를 공격했습니다. 소리로 물속을 보는 원리는 소나: 물속에서는 왜 소리로 볼까에서 따로 풉니다.

미국이 참전한 뒤에는 병사를 실어 나르는 수송 선단도 호송을 받았습니다. 미 전쟁기념물위원회(ABMC)에 따르면 1917년 6월 초 순양함 4척, 구축함 13척, 무장 요트 2척, 급유선 2척이 뉴욕항에 모여 증기선 14척과 해군 수송선 3척을 프랑스로 호송했습니다. 6월 22일 밤에는 어뢰가 선단 사이를 지나 여러 척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고, 구축함 윌크스의 장교는 초기 수동 소나로 가까운 U보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브레스트 앞바다에 U보트가 있어 선단은 생나제르로 방향을 바꿨고, 6월 26일 상륙이 시작되었습니다.

DHM은 나아진 방어 방법이 독일의 기대를 꺾는 데 한몫했다고 봅니다. 미군의 대서양 수송도 조금도 방해받지 않았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같은 사건도 자료마다 숫자가 다르게 적힙니다. 두 사건을 합쳐 세기도 하고, 배의 수와 톤수처럼 세는 단위가 다르기도 합니다.

자료별 숫자 비교 도표. 맨 위는 루시타니아호 침몰의 미국인 사망자 가로 막대: 독일 역사박물관 100명 넘게, 왕립 박물관 그리니치 128명, 미 국무부 131명(루시타니아·아라빅호 합계). 그 아래 1917년 봄 손실: 영국 전쟁박물관은 2~4월 상선 500척 넘게, 미 해군협회 기고는 처음 석 달 200만 톤 가까이. 호송을 언제 누가 시작했나: 국립육군박물관 1917년 5월 10일 영국 해군, 미 해군협회 기고 5월 10일·12일 시험 호송, 캐나다 전쟁박물관 1917년 영국 해군성, CWGC 해운부의 조치 가운데 하나. 전쟁 전체: 독일 역사박물관은 취역 U보트 380척이 연합국·중립국 상선 5,554척을 가라앉혔고 U보트 187척과 5,000명 넘게 잃음, CWGC는 영국 상선대가 상선 3,305척과 17,000명을 잃음
같은 전쟁, 다른 숫자. 자료마다 세는 대상과 단위가 다릅니다 (도표)(도표)

루시타니아호의 미국인 사망자는 100명 넘게, 128명, 131명으로 세 가지입니다. 이 가운데 131명은 아라빅호의 사망자까지 합친 수입니다. 1917년 봄의 손실은 IWM이 2~4월 상선 500척 넘게로, USNI 기고가 처음 석 달 200만 톤 가까이로 적습니다. 하나는 배의 수를, 하나는 배의 크기를 톤으로 센 것입니다.

전쟁 전체로 보면, 취역한 독일 U보트 380척이 많은 군함과 함께 연합국·중립국 상선 5,554척을 가라앉혔고 독일 해군은 U보트 187척과 5,000명 넘는 사람을 잃었다고 DHM은 적습니다. CWGC와 캐나다 보훈부는 영국 상선대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상선 3,305척과 17,000명을 잃었다고 적습니다. 앞의 수는 연합국과 중립국 상선 전체이고, 뒤의 수는 영국 상선대의 손실입니다.

손실의 흐름을 보여 주는 숫자도 있습니다. USNI 기고는 월평균 손실이 80만 톤을 넘던 때에서 1918년 말에는 월 20만 톤 아래로 내려갔다고 적습니다. 숫자 하나하나 뒤에는 돌아오지 못한 선원과 승객이 있습니다.

남긴 것

DHM의 평가로는 1917년 2월 1일 뒤 격침 수가 크게 뛰어 연합국을 크게 걱정시켰지만, 영국이 빨리 무너지리라는 독일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무제한 잠수함전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고 독일에 실망으로 남았으며, 1918년 10월 윌슨의 14개조에 대한 응답으로 전쟁이 끝나기 전에 거둬들여졌습니다. 휴전 무렵 U보트의 위협은 무력화되어 있었습니다.

호송의 몫에 대해 USNI 기고는 경제적 굶주림으로 연합국을 굴복시키려던 독일의 전략을 무너뜨렸다고 봅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으로 싸움이 멈췄고, 살아남은 독일 U보트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모두 넘겨졌습니다. 독일이 다시는 영국 무역에 그만한 위협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바다에서 죽은 상선 선원들도 기억됩니다. 런던 한가운데의 타워힐 추모비는 무덤 없이 바다에 잠든 1차 대전의 상선 선원·뱃사람·어부 12,000명 가까이를 기립니다. 에드윈 러티엔스가 설계했고, 1928년 12월 12일 메리 왕비가 제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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