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11일 새벽 4시, 캐나다 군단이 벨기에 도시 몽스(Mons)에 들어섰습니다. 1914년 8월 영국군이 이 전쟁의 첫 전투를 치른 곳이고, 그 뒤 내내 독일군이 점령하던 곳입니다. 서부 전선의 싸움은 그날 오전 11시까지 이어지다 멎었습니다.
그러나 그 오전 11시에 효력을 낸 것은 휴전 협정이었지 평화 조약이 아니었습니다. 독일과의 평화 조약은 이듬해 6월 28일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에서 서명됐고, 1920년 1월 10일에야 발효됐습니다.
그해 봄까지만 해도 큰 공세를 펴던 독일은 왜 그렇게 빨리 휴전을 청했을까요? 조약에는 무엇이 적혔고, 그 조약은 지나치게 가혹했을까요, 아니면 타협의 산물이었을까요?
1918년, 마지막 공세와 반격
1918년 3월 3일 러시아와 동맹국 사이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 강화 조약이 서명됐습니다. 러시아는 인구의 25% 넘게, 경제적으로 쓸 수 있는 땅의 27%를 잃었습니다. 3월 21일에는 독일군이 서부 전선의 피카르디에서 70 km 폭으로 봄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군사적 성공으로 연합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 했습니다.
봄 공세는 연합군 전선을 거의 무너뜨렸지만 연합군은 겨우 버텼습니다. 7월 15일~8월 6일의 2차 마른 전투에서도 독일군은 결정타를 내지 못했고, 7월 18일 프랑스군이 이끈 반격에 다시 밀려났습니다. 마른은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가 됐습니다. 그해 3월부터 프랑스의 포슈(Ferdinand Foch)가 서부 전선의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습니다.
8월 8일 오전 4시 20분 아미앵(Amiens)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호주 군단과 캐나다 군단이 전차 534대를 뒤따라 앞장섰고 몇 시간 만에 목표에 닿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이날을 "독일군의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날부터 11월 11일까지를 흔히 백일 공세(Hundred Days Offensive)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95일이었습니다. 8월 말 프랑스에 와 있던 미군은 140만 명이 넘었습니다. 포병, 전차, 항공기를 한데 묶어 쓰는 새 방식이 자리를 잡았고, 싸움은 참호를 벗어나 열린 땅으로 옮겨 갔습니다. 9월 29일 생캉탱 운하 전투에서 연합군은 힌덴부르크선에서 가장 단단한 구간 하나를 뚫었습니다.
대가는 컸습니다. 8월부터 11월까지 연합군 사상자는 약 70만 명, 독일군은 그보다 조금 많은 약 76만 명이었습니다. 연합군도 처음에는 이 공세로 전쟁이 끝나리라 보지 않았고, 마지막 공격을 1919년 봄으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휴전을 청하다
1918년 가을 독일과 동맹국은 지쳐 있었습니다. 군은 패배했고 굶주린 시민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9월 29일에 이미 루덴도르프는 전투를 멈출 길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고, 같은 날 불가리아가 연합국과 휴전했습니다.
10월 3일 총리가 된 막스 폰 바덴(Max von Baden)은 이튿날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에게 휴전 중재를 청했습니다. 바탕으로 내세운 것은 윌슨이 그해 1월 8일 의회 합동 회의에서 내놓은 14개 조항(Fourteen Points)이었습니다. 연설의 내용은 약 150명의 학자로 꾸린 연구단 "인콰이어리(The Inquiry)"의 보고서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14개 조항 가운데 8개는 교전국 사이의 영토 문제였습니다. 나머지 6개 중 5개는 공개 외교, 바다의 자유, 자유 무역, 군비 축소, 민족 자결에 따른 식민지 문제 조정이라는 일반 원칙이었고, 14번째는 뒷날 국제연맹이 될 국제 기구를 제안했습니다. 넷째 조항은 각국 군비를 "국내 안전에 맞는 가장 낮은 수준"까지 줄이자고 적었습니다.
윌슨은 조건을 걸었습니다. 10월에 그는 무제한 U보트전을 그만두고 지금의 통치자를 바꿔야 한다고 분명히 했고, 10월 23일에는 독일이 다시 싸울 수 없게 만드는 휴전만 중재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사이 동맹국이 하나씩 빠졌습니다. 10월 30일 오스만 제국,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연합국과 휴전했습니다.
독일 안에서도 질서가 흔들렸습니다. 10월 해군 지휘부가 승인받지 않은 마지막 출격을 계획하자 수병들은 출항 준비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11월 3일 킬(Kiel)에서 수병 봉기가 일어났고 반란은 크게 번졌습니다. 11월 9일 오후 2시 사회민주당의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이 공화국을 선포했고, 황제 빌헬름 2세는 이튿날 네덜란드로 망명했습니다.
11월 11일 오전 11시
휴전 협상단이 언제 처음 마주 앉았는지는 기록마다 조금 다릅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WM)의 한 글은 11월 7일, 다른 글은 공화국 선포 다음 날로 적습니다. 독일 역사박물관(DHM) 연표에는 11월 8일 에르츠베르거(Matthias Erzberger)가 이끈 협상이 콩피에뉴(Compiègne)에서 시작됐다고 나옵니다. 장소는 파리 북동쪽 콩피에뉴 숲의 열차 칸이었습니다.
독일은 협상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포슈가 이끈 연합국이 조건을 짰고, 독일 대표단은 가혹한 조건에서 작은 완화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대표단은 11월 11일 오전 5시에 동의했고, 오전 11시 휴전이 효력을 냈습니다.
휴전은 보통 싸움을 멈추는 정전일 뿐입니다. 1918년의 휴전은 달랐습니다. 독일군은 프랑스·벨기에·룩셈부르크의 점령지와 알자스-로렌을 15일 안에 비우고 무기, 항공기, 군함, U보트를 넘겨야 했습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부쿠레슈티 조약도 무효가 됐습니다.
공식으로는 36일짜리 정전이었지만 싸움은 다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조건이 독일이 전쟁을 이어 갈 가능성을 없앴기 때문에 IWM은 이 휴전을 사실상 독일의 항복으로 봅니다. 전선의 반응은 환희에서 무덤덤함까지 여러 가지였고, 축하 분위기는 전사자를 애도하는 수많은 사람의 슬픔으로 누그러졌습니다.
함대는 따로 다뤄졌습니다. U보트는 모두 바로 넘겨졌고, 수상 함대는 강화 회의에서 처리를 정할 때까지 억류하기로 했습니다. 1918년 11월 21일 연합국 함정 191척과 독일 함정 70척이 함께 스코틀랜드의 포스만(Firth of Forth)으로 들어왔고, 독일 함정 74척은 스캐파플로(Scapa Flow)에 억류됐습니다.
1919년 6월 21일 아침, 영국 함대가 훈련하러 나간 사이 독일 쪽 지휘관 폰 로이터(von Reuter)가 배를 스스로 가라앉히라고 명령했습니다. 억류된 74척 가운데 52척이 다섯 시간 안에 가라앉았고, 22척은 얕은 곳으로 끌어 올려졌습니다. 배를 나눠 갖고 싶어 했던 프랑스 등 연합국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파리 강화 회의
1919년 1월 18일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습니다. 30개 가까운 나라가 참가했지만 회의를 이끈 것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의 "4대 강국"이었습니다. 3월 24일에는 윌슨,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오를란도(Vittorio Emanuele Orlando)의 "4인 위원회"가 회의의 최고 기구가 됐습니다.
빠진 나라도 있습니다. 패전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튀르키예, 불가리아는 초대받지 못했고, 연합국은 볼셰비키 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러시아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연합국이 아니라 "협력국(Associated Power)"으로 싸웠기 때문에 연합국끼리 맺은 전후 영토 분배 협정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윌슨은 이탈리아의 아드리아해 요구를 비롯한 그 약속 다수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회의는 1920년 1월까지 이어졌고 패전국마다 따로 조약을 만들었습니다. 휴전 때처럼 조건은 승전국이 정했습니다. 연합국 쪽 여론은 되도록 가혹한 조건을 바랐고, 영국 하원의원 233명은 로이드 조지에게 강경한 태도를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독일 대표단은 4월 29일 베르사유에 도착해 5월 7일 조약 초안을 받았습니다. 독일에서 이 조건은 참담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노동총동맹(CGT)도 민족 자결을 부정한다며 초안에 항의했습니다.
샤이데만 내각은 서명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6월에 총사퇴했습니다. 새 정부는 단독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대목을 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연합국은 "조건부 수락"을 거절했습니다. 연합국이 군사 개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서명 말고는 정치적으로 감당할 대안이 없었습니다.
6월 22일 독일 국민의회가 237 대 138로 조약을 승인했고, 6월 28일 뮐러(Hermann Müller) 외무장관과 벨(Johannes Bell) 교통장관이 거울의 방에서 서명했습니다.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된 지 꼭 5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1871년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선포된 바로 그 방이기도 했습니다.
조약은 독일과 주요 연합국 세 나라가 비준하면 효력을 내도록 돼 있었습니다. 독일 국민의회가 7월 9일, 프랑스 하원이 10월 2일 비준했고 영국과 이탈리아도 10월에 비준했습니다. 조약은 1920년 1월 10일 발효됐습니다.
조약에 적힌 것: 땅과 군대
서쪽에서는 1871년 독일에 넘어갔던 알자스-로렌이 휴전일인 1918년 11월 11일부터 프랑스 주권으로 돌아갔습니다(51조). 자르(Saar) 탄광은 북프랑스 탄광 파괴의 보상이자 배상의 일부로 프랑스에 넘어갔습니다(45조). 자르 지역은 국제연맹이 맡아 다스리다 15년 뒤 주민 투표로 앞날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프랑스는 1935년까지 그 경제 자원을 쓸 수 있었습니다.
동쪽에서 독일은 폴란드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했습니다(87조). 단치히(Danzig)와 그 둘레는 국제연맹이 보호하는 자유시가 됐습니다(102조).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존중해야 했고, 그 독립은 국제연맹 이사회의 동의 없이는 바꿀 수 없었습니다(80조).
해외 식민지는 모두 내놓았습니다(119조). 잃은 땅의 크기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적힙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유럽의 전쟁 전 영토의 약 10%와 해외 영토 전부"로, DHM은 "영토의 7분의 1과 인구의 10분의 1"로 적습니다.
군대는 더 자세히 묶였습니다. 육군은 1920년 3월 31일까지 보병 7개 사단과 기병 3개 사단 이하로 줄이고, 그 뒤로는 장교를 포함해 10만 명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160조). 장교는 4,000명까지였고, 군의 일은 국내 질서 유지와 국경 통제로 한정됐습니다. 일반 징병제는 폐지되고 지원병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173조).
해군은 전함 6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어뢰정 12척까지만 현역으로 둘 수 있었고 잠수함은 한 척도 둘 수 없었습니다(181조). DHM은 해군 인원을 15,000명으로 적습니다. 육·해군 항공 전력은 아예 금지됐고 비행선도 둘 수 없었습니다(198조).
171조는 질식성·독성 가스의 사용이 금지돼 있다는 전제에서 독일 안의 그 제조와 수입을 엄격히 막았습니다. 같은 조항은 장갑차, 전차와 비슷한 전쟁용 구조물의 제조·수입도 금지했습니다. 금지 목록을 모으면 잠수함, 군용 항공기, 비행선, 전차, 장갑차, 독가스가 됩니다.
라인강 왼쪽 강변과, 오른쪽 강변에서 강 동쪽 50 km 선의 서쪽에는 요새를 둘 수 없었습니다(42조). 그 지역에서는 군대를 두거나 모으는 일과 어떤 기동 훈련도 금지됐습니다(43조). 연합군은 라인강 왼쪽 강변과 교두보를 15년 동안 점령하기로 했고, 많은 무장 해제 조항을 확인하려고 국제 군사 감시 위원회를 두었습니다.
전쟁 책임과 배상
227조에서 연합국은 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국제 도덕과 조약의 신성함을 해친 최고의 죄"로 공개 기소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이 판사를 한 명씩 내는 특별 재판소를 세우고, 네덜란드 정부에 그를 넘겨 달라고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가장 큰 논란을 부른 것은 231조였습니다. 독일은 "독일과 그 동맹국의 침략으로 강요된 전쟁"의 결과로 연합국과 그 국민이 입은 모든 손실과 피해의 책임이 독일과 그 동맹국에 있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조항은 흔히 "전쟁 책임 조항(War Guilt Clause)"으로 불립니다.
바로 다음 232조는 독일의 자원이 그 모든 손실을 완전히 갚기에는 모자란다고 인정합니다. 대신 연합국 민간인과 그 재산에 입힌 피해는 보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금액은 조약에 적지 않고, 배상 위원회가 1921년 5월 1일까지 정해 알리고 그날부터 30년 안에 갚을 일정을 짜게 했습니다(233조).
그때까지 독일은 1919년, 1920년, 1921년 첫 넉 달 동안 200억 금마르크 상당을 내야 했습니다(235조). 1921년 위원회가 정한 금액은 1,320억 금마르크였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이를 320억 달러로 적고, 조약이 처음 요구한 50억 달러 위에 더해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920년 7월 스파 회의에서는 받을 몫을 프랑스 52%, 영국 22%, 이탈리아 10%, 벨기에 8%, 나머지 나라 8%로 나눴습니다.
국제연맹과 미국 상원
조약의 제1편은 국제연맹 규약(Covenant)입니다. 윌슨은 규약을 조약에 붙이는 데 큰 힘을 썼고, 효과적인 연맹이 강화 조건의 불공평을 덜어 주리라 믿었습니다. 26개 조로 된 규약에서 회원국은 분쟁을 평화롭게 풀고 비밀 외교를 버리며 군비를 줄이기로 약속했습니다.
규약 8조는 평화를 지키려면 각국 군비를 "국가 안전에 맞는 가장 낮은 수준"까지 줄여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14개 조항의 넷째 조항과 거의 같은 표현입니다. 10조에서 회원국은 서로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을 외부 침략에 맞서 존중하고 지키기로 했습니다. 유엔 제네바 사무소는 이것을 집단 안보 체제를 세우려는 첫 시도로 봅니다.
연맹은 1920년 1월 10일 출범했습니다. 1920년 11월 15일 제네바의 첫 총회에 모인 나라는 유엔 제네바 사무소 자료로 41개국, DHM 연표로 42개국입니다. 모두 63개국이 가입했고, 한꺼번에 가장 많을 때가 60개국이었습니다. 연맹은 옛 독일 식민지와 오스만 영토를 위임국의 "후견" 아래 두는 위임 통치도 감독했습니다.
미국은 끝내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윌슨이 1919년 7월 돌아왔을 때 미국 여론은 비준을 크게 지지했고 32개 주 의회가 찬성 결의를 했지만, 상원은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반대한 의원들은 집단 안보를 다룬 10조가 미국 정부의 전쟁 권한을 연맹 이사회에 넘긴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대파는 두 무리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연맹에 들지 않겠다는 "비타협파(Irreconcilables)"가 있었고, 비준 전에 수정을 원한 상원 외교위원장 로지(Henry Cabot Lodge)의 "유보파(Reservationists)"가 있었습니다. 로지는 11월 조약에 유보 조항 14개를 붙였고, 1920년 3월 19일 마지막 표결에서 조약은 비준에 7표가 모자랐습니다. 미국은 1921년 8월 25일 독일과 따로 베를린 조약을 맺었습니다.
다른 패전국과의 조약도 차례로 나왔습니다. 오스트리아와는 1919년 9월 10일 생제르맹(Saint-Germain)에서, 불가리아와는 11월 27일 뇌이(Neuilly)에서 서명했습니다. 헝가리는 1920년 6월 4일 트리아농(Trianon)에서 서명하며 영토의 71%를 넘기고 군대를 35,000명으로 줄여야 했습니다. 8월 10일 세브르(Sèvres) 조약은 옛 오스만 제국을 원래 크기의 10분의 1로 줄였지만, 아타튀르크가 이끈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은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서명이 곧 평화는 아니었습니다. 휴전 뒤에도 여러 지역에서 민족주의나 혁명, 반혁명을 내건 무장 집단의 싸움이 이어졌고, 러시아 내전은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러시아인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유럽에 평화가 돌아온 것은 1923년이었습니다.
가혹했나, 타협이었나
독일에서는 특히 전쟁 책임 조항 때문에 극우에서 사회민주당까지 조약을 "강요된 평화(Diktat)", "치욕의 평화"로 거부했습니다. 에베르트(Ebert) 대통령은 미국 정부에 보낸 호소에서 이 조건을 14개 조항의 완전한 "부정"이라 불렀습니다. 1919년 11월 18일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는 의회 조사위원회에서 독일군이 진 것이 아니라 뒤에서 "찔렸다"고 진술했고, 이 말이 배후 중상설의 바탕이 됐습니다. 조약은 이 전설과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을 공격하는 선동에 그 뒤 여러 해 동안 쓰였습니다.
승전국 쪽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1919년 6월 영국 재무부 대표단을 이끌던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독일에 강요된 배상이 세계적 금융 파국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공식 기관의 서술도 한 방향이 아닙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조약이 프랑스와 영국의 바람에 따라 독일에 엄격한 징벌을 가했고, 독일인들이 그 가혹한 조건에 분개하게 됐다고 적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조약이 집행할 수 없거나, 근시안적이거나, 너무 지나치다는 평가 속에 신뢰를 잃었다고도 씁니다. IWM의 한 글은 231조와 1,320억 금마르크의 배상이 널리 분노와 경제적 고통을 낳았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나치당 지지가 커진 중요한 요인이 됐다고 봅니다.
IWM의 다른 글은 무게를 다르게 둡니다. 승자가 부과한 이 강화가 미래 분쟁의 바탕을 깔았다는 비판을 받아 왔지만, 실제로 패전국에 부과된 조건은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았고 어려운 문제마다 타협안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조약 자체가 2차 대전을 피할 수 없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적습니다.
두 견해가 함께 서 있는 사실도 있습니다. 1차 대전은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렸고, 유럽과 중동에 생긴 새 나라들은 미래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습니다. 영국과 그 제국만 해도 100만 명 가까이 죽고 그 두 배가 넘게 다쳤습니다. 조약 서명 겨우 20년 뒤인 1939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다른 세계대전을 막으려던 국제연맹은 끝내 막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1차 세계대전은 왜 시작됐나: 사라예보에서 동원령까지. 조약 서명일이 사라예보 암살 5년째 되는 날이었던 그 사건부터 읽습니다.
- 솜 전투: 첫날 기록이 남긴 질문. 휴전 2년 전, 서부 전선의 소모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봅니다.
- 1차 대전의 독가스와 화학무기 금지 협약. 171조가 금지한 독가스가 그 뒤 어떻게 국제 금지로 이어졌는지 다룹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레이다와 근접신관에서 무인체계까지, 그 뒤의 무기 기술 흐름을 이어 봅니다.
- 눈 안전과 국제 규범: 실명 레이저 무기 금지 의정서. 특정 무기를 조약 문장으로 묶는 일이 레이저 무기에서는 어떻게 이뤄졌는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