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광 빔 결합(spectral beam combining, SBC) 장치를 앞에서 뒤로 따라가 보면, 수많은 증폭기에서 따로 나온 빛이 마지막에 한 판 위에서 만납니다. 모든 채널의 출력이 그 판을 한꺼번에 지나갑니다. 그 판이 회절격자(diffraction grating)입니다.

분광 빔 결합이 무엇인지는 분광 빔 결합 자세히 글에서 보았습니다. 이 글은 결합 방법이 아니라 소자 하나를 봅니다. 격자는 빛을 어떻게 꺾고, 센 빛 앞에서 무엇을 견뎌야 할까요?

줄무늬 판이 색을 가르는 방식

회절격자는 가는 줄, 곧 격자 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히 놓인 판입니다. 빛을 되비추는 반사형 격자에서는 빛이 닿은 격자 선 하나하나가 작은 파를 다시 냅니다. 이 파들은 모든 방향으로 퍼지고, 서로 겹치면서 어떤 방향에서는 세지고 어떤 방향에서는 사라집니다.

어느 방향에서 세질까요? 이웃한 두 격자 선에서 출발한 파가 어떤 방향으로 갈 때, 두 파가 지나는 길의 길이는 조금 다릅니다. 그 차이가 파장(wavelength) 한 개만큼이면 마루와 마루가 다시 맞아 간섭(interference)으로 보강됩니다. 격자 선이 하나 더해질 때마다 꼭 한 파장씩 밀리니, 모든 선의 파가 그 방향에서 함께 세집니다.

이렇게 세지는 방향을 차수(diffraction order)라고 부릅니다. 길 차가 0인 방향이 0차입니다. 0차는 거울처럼 그냥 되비친 방향이라 색이 갈리지 않습니다. 길 차가 한 파장인 방향이 1차, 두 파장인 방향이 2차입니다.

색이 갈리는 곳은 1차부터입니다. 파장이 길면 한 파장만큼의 길 차를 만들려고 더 크게 기울어야 하므로, 빨간빛의 1차는 파란빛의 1차보다 더 크게 꺾입니다. 파장에 따라 꺾이는 각이 달라지는 이 성질을 분산(dispersion)이라고 하고, 각으로 나타나니 각분산이라고도 부릅니다. 같은 파장 차이에도 각이 크게 벌어질수록 분산이 큰 격자입니다.

줄지어 선 합창단을 떠올려 봅니다. 모두 같은 음을 내도, 듣는 사람이 비스듬히 서면 각 사람의 소리가 조금씩 늦게 닿습니다. 늦어진 정도가 소리가 한 번 떨리는 시간과 꼭 같아지는 방향에서는 소리가 다시 맞아 커집니다. 음이 낮아 한 번 떨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수록 그 방향은 더 옆으로 갑니다.

실제로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빛의 파장은 소리보다 훨씬 짧고, 격자는 스스로 소리를 내는 합창단이 아니라 들어온 빛을 되비출 뿐입니다.

분광 결합은 이 성질을 거꾸로 씁니다. 색마다 알맞은 방향에서 빔을 보내면, 1차로 꺾인 빛이 모두 한 방향으로 겹쳐 나갑니다. 원리는 간섭과 회절 글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AI 생성 이미지: 어두운 남색 배경에서 가는 평행 홈이 촘촘히 새겨진 판을 비스듬히 가까이 본 그림. 빨강, 초록, 파랑 빔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판의 같은 자리에 닿고, 같은 앞면에서 흰빛 한 줄기가 되비쳐 나간다. 홈의 확대 그림에는 홈마다 작은 물결이 퍼져 겹치는 모습이 있다. 영어 이름표가 붙어 있다. 홈 간격과 각도는 실제 값이 아니다
회절격자의 홈마다 퍼진 파가 겹쳐 보강되는 방향은 파장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색마다 알맞은 방향에서 보낸 빔들이 격자에서 되비쳐 한 빔으로 겹칩니다. 색은 구분하려고 칠한 것이고, 실제로는 모든 홈이 모든 색의 파를 냅니다. 개념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AI 생성 이미지)(AI 생성 이미지)

분광 결합에서 맡는 자리

파장이 다른 빔을 합치는 길은 크게 둘입니다. 직렬 방식은 파장마다 결합기를 하나씩 두고 빔을 차례로 더합니다. 합칠 파장 수만큼 광학 소자가 필요하고, 스펙트럼 폭이 좁은 체적 브래그 격자(volume Bragg grating)로 만든 예도 있습니다.

병렬 방식은 회절격자 한 장으로 여러 파장을 한꺼번에 합칩니다. 파장을 많이 늘릴수록 병렬 방식이 유리한데, 소자를 더하지 않고 격자 한 장에 색을 더 얹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분광 결합에서 흔히 말하는 격자가 바로 이 한 장입니다.

그래서 설계의 많은 것이 격자에서 출발합니다. 분산이 큰 격자일수록 같은 파장 폭 안에서 더 많은 빔을 가려 합칠 수 있고, 그 분산은 어떤 격자를 고르느냐로 정해집니다. 2014년 MIT 링컨 연구소 학술지 기사도 여러 광학 소자 가운데 이 분산 소자를 결정적인 것으로 꼽습니다.

격자에 바라는 것: 효율과 견딤

격자에게 바라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빛을 원하는 차수로 고스란히 보내는 것, 그리고 센 빛을 받으면서도 꺾인 빔의 모양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첫째가 왜 중요할까요? 격자에 닿은 빛은 한 차수로만 가지 않습니다. 분광 결합이 쓰는 것은 1차뿐이라, 0차나 다른 차수로 새는 빛은 합친 빔에서 그대로 빠집니다. 결합 효율을 깎아 먹는 손실의 대부분이 이 원치 않는 차수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1차와 0차만 생기도록 격자를 고르고, 남는 0차를 줄이는 쪽으로 설계합니다. 고른 편광(polarization) 하나와 중심 파장 근처에서는 0차로 새는 빛이 아주 적은 격자도 만들 수 있습니다. 편광이 조건에 붙는 까닭은, 격자가 빛의 진동 방향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들어온 쪽으로 빛을 되돌려 보내는 배치에서는 1차 효율을 가장 높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얻은 값도 있습니다. 2014년 링컨 연구소 기사에 따르면 유전체 격자는 회절 효율 96%로 만들어졌고, 흡수(absorption) 손실이 10⁻⁴보다 작아 열광학 왜곡을 거의 일으키지 않고 센 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열광학 왜곡은 빛을 조금 흡수한 면이 데워지면서 모양이 부풀고 굴절률이 바뀌어, 그 면을 지나거나 거기서 되비친 빔이 일그러지는 일입니다. 센 빛을 오래 받는 격자일수록 이 문제가 커집니다.

금속 대신 유전체: 코팅이 정하는 열

격자의 표면은 무엇으로 덮을까요? 금속을 입힌 격자는 금속의 높은 전도도 덕분에 효율이 높습니다. 그러나 전도도가 있으면 빛의 흡수도 따라옵니다.

미국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LNL) 쪽 연구자들이 1995년 학회에서 발표한 초록은 이 흡수를 피하는 길을 적었습니다. 투명한 유전체 재료만으로 고효율 반사 격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얇은 유전체 층을 여러 겹 쌓아 반사를 얻고, 그 위에 격자를 새겨 회절을 얻습니다. 층을 쌓아 반사를 만드는 원리는 거울, 렌즈, 코팅 글의 브래그 거울과 같은 생각입니다.

AI 생성 이미지: 좌우 두 칸의 단면 그림. 왼쪽은 금속 막을 입힌 홈 판으로, 빔이 닿은 자리가 주황색으로 달아오르고 열기가 번진다. 오른쪽은 얇은 투명 층을 여러 겹 쌓은 판 위에 홈을 새긴 것으로, 빔 대부분이 깔끔하게 되돌아 나가고 판은 차분한 푸른색 그대로다. 영어 이름표가 붙어 있다. 층 수와 두께는 실제 값이 아니다
금속 격자는 전도도 덕분에 효율이 높지만 빛의 일부를 흡수합니다. 투명한 유전체 층을 쌓은 다층 유전체 격자는 흡수와 열 부하가 아주 작습니다. 개념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AI 생성 이미지)(AI 생성 이미지)

분광 결합에서는 이 차이가 열로 나타납니다. 금속 대신 유전체 층을 광학 코팅(optical coating)으로 쓰면 흡수가 아주 작아 결합 효율이 오릅니다. 흡수가 적으니 격자가 받는 열 부하도 아주 낮고, 앞에서 본 열광학 왜곡이 크게 줄어듭니다. 링컨 연구소 기사가 유전체 격자의 큰 이점으로 든 점입니다.

센 빛과 열: 격자 위 빔을 키우는 까닭

합칠 빔이 늘수록 격자는 더 어려운 처지에 놓입니다. 빔을 더 넣으려면 격자 위의 빔도 커져야 하고, 그 까닭은 둘입니다. 하나는 더 많은 빔을 서로 가려 받으려면 격자의 분해능이 더 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가 열과 손상입니다. 빛의 세기를 어떤 한계 아래로 지켜야 광학 손상도, 합친 빔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열광학 변형도 피할 수 있습니다. 같은 출력을 넓은 면에 나눠 받으면 면의 한 곳 한 곳이 받는 세기는 낮아집니다. 격자 위 빔을 키우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AI 생성 이미지: 위아래 두 칸의 그림. 위 칸에서는 여러 빔이 격자 판의 작은 점 하나에 몰려 그 자리가 하얗게 달아오른다. 아래 칸에서는 같은 빔들이 넓게 퍼진 큰 원으로 격자에 닿아 판 전체가 고르게 은은히 빛난다. 영어 이름표가 붙어 있다
합칠 빔이 늘면 격자 위의 빔도 커져야 합니다. 같은 출력을 넓은 면에 나눠 받으면 면마다 받는 세기가 낮아집니다. 반사형 격자라 합친 빔은 들어온 쪽으로 되비쳐 나갑니다. 개념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AI 생성 이미지)(AI 생성 이미지)

빔을 키우는 데도 대가가 있습니다. 광섬유 레이저처럼 채널마다 출력이 큰 빔을 많이 합치면, 세기 한계 때문에 빔을 모으는 광학계의 초점 거리가 아주 길어집니다. 렌즈나 거울 한 장으로 이 길이를 채우면 장치가 쓰기 어려울 만큼 커집니다. 여러 광학 소자를 나눠 쓰면서 소자마다 세기를 한계 아래로 지키면 광학계를 작게 묶을 수 있습니다.

선폭과 격자

격자는 채널 하나의 빛에도 까다롭습니다. 채널마다의 빛은 완전한 한 색이 아니라 선폭(linewidth)이라는 좁은 폭을 갖고, 격자는 그 폭 안의 파장들도 조금씩 다른 각으로 꺾습니다. 분산이 큰 격자일수록 같은 선폭이 더 크게 벌어집니다.

그 벌어짐이 커지면 빔이 더는 회절 한계를 지키지 못합니다. 회절 한계는 빔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만큼만 퍼지는, 빔 품질이 가장 좋은 상태입니다. 선폭을 얼마나 좁게 지켜야 하는지와 일부러 조금 넓히는 까닭은 분광 빔 결합 자세히 글에 있습니다.

펄스 레이저의 큰 격자에서 본 손상

격자가 센 빛에 부딪히는 곳은 분광 결합만이 아닙니다. 초고속 레이저에서는 격자 두 장을 쓰는 가장 단순한 배치를 보통 펄스 압축기로 씁니다. 펄스를 늘였다가 키운 뒤 다시 압축하는 처프 펄스 증폭(chirped pulse amplification, CPA)에서는 압축기의 격자가 아주 센 펄스를 받습니다.

1995년 LLNL 쪽 초록은 페타와트 레이저처럼 효율 높은 격자가 분산 소자일 때, 격자가 레이저 손상에 약하다는 점이 닿을 수 있는 첨두 세기를 묶는다고 보았습니다. 2010년의 다른 초록에 따르면 페타와트급 레이저용 다층 유전체 격자는 손상 특성이 독특합니다. 격자 선의 세밀한 모양과 표면에 남은 흡수성 불순물이 손상 문턱(laser-induced damage threshold, LIDT)을 크게 좌우합니다.

격자는 크게도 만듭니다. SPIE 학회 논문집(2005)에 실린 LLNL 쪽 발표는 구경 80 cm의 다층 유전체 격자를 처음으로 LLNL의 Titan 초단 펄스 레이저 시설에 넘겼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아주 짧은 펄스를 다룬 것입니다. 연속파로 오래 빛을 받는 분광 결합 격자에서는 흡수에서 오는 열이 더 앞에 서고, 손상이 생기는 방식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두 쓰임이 같은 결론에 닿습니다. 격자의 표면과 코팅이 레이저 전체가 낼 수 있는 빛의 상한을 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회로 본 격자의 흐름

앞에서 본 연구소 기사와 LLNL 초록은 2014년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뒤 격자가 어디로 갔는지는 국제광공학회(SPIE)의 Photonics West 학회 초록으로 이어 볼 수 있습니다. 결합과 손상에 닿는 발표만 추려 보았습니다.

해공개된 발표의 요지
2023선폭이 넓은 고출력 빔을 투과형 체적 브래그 격자로 분광 결합할 때 생기는 분산 문제를 모의하고 보상 방식을 제시한 발표. 초단 펄스로 유리 안에 처프 체적 브래그 격자를 처음 새겨 고출력 처프 펄스 증폭에 쓰려는 발표
2024kW급 툴륨 광섬유 증폭기를 이중 회절격자로 분광 결합해 2 µm 대역에서 1.91 kW를 낸 발표. 결합 효율은 90%였고, 격자의 온도 상승도 쟀습니다. 칩 안에 격자를 넣어 바깥 격자 없이 파장을 고정한 펌프 다이오드도 나왔습니다
2026능동 제어 고밀도 파장 빔 결합으로 만든 kW급 고휘도 청색 다이오드 레이저
2027분광 결합 지향성 에너지 광원에서 채널마다의 스펙트럼을 회절격자에 맞춘 단순한 발진-증폭 구조. 핵융합 연구용 대형 레이저의 투과 격자에서 손상이 시작되고 자라는 원리를 분석한 발표

흐름은 셋으로 읽힙니다.

첫째, 격자로 하는 분광 결합이 이터븀 광섬유 밖으로, 2 µm 툴륨 광섬유와 청색 다이오드로 넓어졌습니다. 둘째, 2027년 발표처럼 광원 쪽을 격자에 맞춰 설계하는 생각이 나왔습니다. 셋째, 격자는 결합 소자만이 아니라 펌프 다이오드의 파장을 붙잡는 부품으로도 쓰이고, 대형 격자의 손상 연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2027년 줄은 학회 프로그램에 실린 초록이라, 발표 뒤에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격자', 다른 일

레이저 글에는 격자라는 이름이 여러 번 나옵니다. 광섬유 브래그 격자(fiber Bragg grating, FBG)는 광섬유 코어 안에 새긴 격자로, 빛의 방향을 펼치는 대신 정해진 파장을 되돌립니다. 하는 일은 아이솔레이터와 광섬유 부품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체적 브래그 격자는 앞에서 본 직렬 방식의 결합기로도 쓰였습니다. 펄스 압축기의 격자는 색을 펼쳐 펄스의 길이를 다룹니다. 이름은 같아도, 분광 결합의 격자는 여러 색을 한 방향으로 모으는 일을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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