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7월 4일 오전 10시, 미시시피주 빅스버그의 흙 요새 위에 흰 깃발이 다시 올랐습니다. 47일 동안 갇혀 있던 남부연합군이 진지에서 걸어 나와 무기를 쌓았습니다. 닷새 뒤에는 강 아래쪽의 포트허드슨도 항복했고, 미시시피강은 처음부터 끝까지 북군 손에 들어갔습니다.
강 하나를 두고 왜 2년 가까이 싸웠을까요? 전쟁 첫해에 나온 "아나콘다 계획(Anaconda Plan)"이라는 큰 그림부터, 1862년 강을 따라 내려간 싸움, 빅스버그를 둘러싼 1863년의 작전과 포위, 그리고 증기선과 철갑 포함 같은 강의 기술까지 차례로 따라가 봅니다. 근거는 미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과 미 육군 군사사 센터(Center of Military History, CMH)의 공개 기록입니다.
미시시피강이 왜 중요했나
미시시피강과 그 지류는 미국과 캐나다에 걸친 100만 제곱마일이 넘는 땅의 물을 모읍니다. 배가 다닐 수 있는 물길만 2만 마일이었습니다. 남북전쟁 무렵 이 강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의 길이었고, 남부 주들이 분리하자 남부연합군은 강의 항행을 막았습니다. 북부 상업이 숨이 막힐 처지였습니다.
중서부 농민에게 이 강은 곡식과 돼지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길이었습니다. 링컨이 가장 걱정한 일 가운데 하나는 이 주들이 강을 쓰려고 남부연합과 타협하는 것이었다고 육군 소책자는 적습니다. 일리노이주 한 곳에서만 빅스버그 캠페인에 36,000명 넘는 병력이 나왔습니다.
양쪽 지도자의 말도 남아 있습니다.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에게 빅스버그는 "남부의 두 반쪽을 붙잡아 두는 못대가리"였고, 링컨은 "빅스버그가 열쇠"라고 했습니다.
땅 모양도 한몫했습니다. 미시시피강 양옆은 대부분 늪과 낮은 땅입니다. 다만 범람원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켄터키에서 루이지애나까지 절벽이 이어지는데, 대포로 강을 쉽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이 절벽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시시피강을 둘러싼 싸움은 대체로 강과 절벽이 만나는 몇 군데를 차지하는 싸움이 되었습니다.
아나콘다 계획: 놀림에서 나온 이름
전쟁이 시작될 무렵 북군을 이끈 사람은 74세의 육군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이었습니다. 스콧은 남부 전체를 침공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그가 내놓은 군사 방안은 피와 폭력을 줄이는 쪽이었습니다. 남부의 해안과 미시시피강을 봉쇄하고, 6만 명이 강을 따라 내려가는 "강력한 이동"으로 남부를 나누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안이 나온 때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육군의 1861년 소책자는 링컨의 취임 연설 전날인 1861년 3월에 스콧이 네 가지 방안을 담은 각서를 보냈다고 적고, 1862년 서부 전역 소책자는 1861년 5월에 계획을 만들었다고 적습니다.
링컨은 제안의 일부를 받아들여 1861년 4월 19일 남부연합 해안의 봉쇄를 명령했습니다. 북부 언론은 이것을 "스콧의 아나콘다 계획"이라 부르며 적을 너무 느리게 조인다고 비웃었습니다. 큰 뱀이 먹이를 감아 조이듯 남부를 둘러싸겠다는 그림에 붙은 놀림이었습니다. 리치먼드를 곧바로 쳐서 한 번의 싸움으로 끝내자는 목소리도 컸습니다.
실제로는 뱀처럼 한 번에 감을 수 없었습니다. 봉쇄는 처음에는 띄엄띄엄 지켜졌고, 북부가 봉쇄와 강 작전에 넉넉한 해군을 갖추는 데는 몇 해가 걸렸습니다. 링컨도 계획에 쓸 점이 있다고 보았지만, 육군이 스콧의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862년: 강을 따라 내려간 싸움
강 위의 싸움은 1861년 9월 남부연합군이 켄터키주 콜럼버스의 절벽을 차지해 요새로 만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862년 2월 율리시스 S. 그랜트의 육군과 앤드루 푸트의 해군 포함이 테네시강과 컴벌랜드강의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점령했습니다. 포함이 두 강을 거슬러 올라가 옆으로 돌아 들어가자 남부연합은 콜럼버스에서 물러났습니다.
4월에는 미시시피강의 뉴마드리드와 10번 섬(Island Number 10) 요새가 떨어졌습니다. 같은 달 데이비드 패러것의 함대가 강 어귀로 들어와 잭슨 요새와 세인트필립 요새를 지나 남부연합에서 가장 큰 도시 뉴올리언스를 점령했습니다. 6월 6일 강 위의 마지막 방어가 무너지고 멤피스도 떨어졌습니다.
뉴올리언스와 멤피스를 잃으면서 남부연합의 강 해군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충각함 14척을 모두, 상선을 고친 포함 25척 가운데 20척을, 만들었거나 만들던 철갑함 7척 가운데 6척을 잃었습니다. 그 뒤 남부연합은 강변 포대에 거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습니다.
1862년 여름, 빅스버그는 미시시피강에 남은 마지막 남부연합 거점이었습니다. 5월 18일 패러것이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7월 1일에는 빅스버그 포대 앞 2마일을 빼고 강 전체가 북군 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맞은편 반도에 운하를 파려던 시도는 실패했고, 물이 줄고 남부연합 철갑함 아칸소(Arkansas)가 나타나자 패러것은 깊은 하류로 물러났습니다.
절벽 위의 요새
1862년 9월부터 남부연합군과 주변 농장에서 데려온 노예들이 빅스버그의 육지 쪽에 방어 시설을 팠습니다. 큰 요새 아홉 곳을 소총호로 이어 강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9마일의 방어선을 만들었습니다. 강 쪽 포대는 결국 13곳에 대구경 대포 37문이 되었습니다. 그해 가을 빅스버그는 수도 리치먼드 다음으로 방비가 단단한 남부연합 도시였습니다.
강을 따라 244마일 내려가면 포트허드슨이 있습니다. 동쪽 강가 80피트 절벽 위의 요새였습니다. 두 요새는 물살 때문에 성격이 달랐습니다. 빅스버그 앞을 지나는 북군 배는 물살을 타고 내려가 속도가 거의 두 배가 되었지만, 포트허드슨에서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해서 포화에 훨씬 오래 드러났습니다.
1862년 12월이 되자 남부연합은 두 요새 덕분에 강 244마일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서쪽의 레드강이 흘러들었고, 이 길이 루이지애나와 텍사스를 나머지 남부와 이었습니다. 이 일대를 맡은 존 C. 펨버턴 중장의 관구는 결국 5개 사단 43,000명이 되었습니다.
겨울의 실패: 운하와 늪길
1862년 11월 26일 그랜트는 45,000명을 이끌고 철도를 따라 미시시피주 북부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12월 20일 얼 반 돈의 남부연합 기병이 홀리스프링스의 북군 주 보급 기지를 점령했고, 그랜트는 공세를 멈추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강으로 내려간 윌리엄 T. 셔먼의 부대는 12월 29일 빅스버그 북쪽 치카소 바이유(Chickasaw Bayou)의 절벽을 공격했다가 실패했습니다.
1863년 1월 20일 무렵에는 늪이 물로 찼고, 강이 넘쳐 거의 석 달 동안 홍수가 이어졌습니다. 마른 땅이 모자란 진영에 병이 돌아 죽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1월 말부터 4월 초까지 그랜트는 빅스버그를 돌아가려고 다섯 가지 길을 시도했습니다. 맞은편 반도의 운하, 레이크프로비던스를 거쳐 레드강으로 가는 물길, 야주 패스, 스틸스 바이유, 덕포트 운하였고, 모두 실패했습니다.
1863년 봄: 강을 건너 내륙으로
그랜트는 배 대신 발을 택했습니다. 3월 29일 테네시군이 밀리컨스 벤드를 떠나 강 서쪽 루이지애나 땅을 따라 하드타임스까지 내려갔습니다. 병사들은 진흙길에 다리를 놓고 통나무를 깔며 나아갔습니다.
강을 건너려면 배가 강 아래쪽에 있어야 했습니다. 4월 16일 밤 데이비드 딕슨 포터 제독의 함대 일부가 기관 소리를 죽이고 불을 끈 채 빅스버그 포대 앞을 내려갔습니다. 남부연합군은 강가의 솜뭉치와 타르 통에 불을 붙여 강을 밝혔고, 배마다 여러 번 맞았습니다. 철갑함 7척, 충각함 1척, 수송선 3척, 예인선 1척 가운데 잃은 것은 수송선 1척과 석탄 바지선 1척이었고, 사람 피해는 부상 12명이었습니다.
4월 29일 그랜드걸프의 남부연합 포대를 포격으로 누르지 못하자, 그랜트는 더 아래쪽 브루인스버그에서 4월 30일~5월 1일 강을 건넜습니다. 4월 30일 오후 늦게까지 17,000명이 뭍에 올랐습니다. 공원 쪽 설명은 이것을 2차 대전 노르망디 상륙 전까지 미국 군사사에서 가장 큰 상륙 작전이라고 적습니다.
그 뒤의 싸움은 내륙에서 벌어졌습니다. 5월 1일 포트깁슨을 지나 철도를 끊으려 동쪽으로 나아갔고, 레이먼드(5월 12일)와 잭슨(5월 14일)을 거쳐 서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공원 쪽 설명이 캠페인에서 가장 결정적인 싸움으로 꼽는 5월 16일 챔피언힐에서, 그랜트는 32,000명 가운데 전사 410명, 부상 1,844명, 실종 187명을 잃었습니다. 펨버턴은 23,000명 가운데 전사 381명, 부상 1,018명, 실종 2,441명과 대포 27문을 잃었습니다. 5월 17일 빅블랙강 다리에서 남부연합군이 강 건널목을 지키는 사이 펨버턴의 군대는 빅스버그로 물러났습니다.
47일의 포위와 항복
그랜트는 먼저 정면 공격을 두 번 했습니다. 5월 19일 셔먼 군단의 공격은 1,000명을 잃고 물러났습니다. 5월 22일에는 네 시간 포격 뒤 3마일 전선에서 세 군단이 함께 나아갔고, 몇 곳에서는 깃발이 요새 바깥 비탈에 꽂혔습니다. 그러나 다시 밀려나 3,000명 넘게 잃었습니다.
그랜트는 힘으로는 빅스버그를 얻을 수 없다고 보고 포위로 바꾸었습니다. 5월 26일부터 북군은 남부연합 방어선의 여러 곳을 향해 13개의 접근 참호를 팠습니다. 6월 25일에는 잭슨 길의 제3 루이지애나 레댄 아래 갱도를 터뜨리고 구덩이로 뛰어들었지만, 26시간 싸움 끝에 밀려났습니다. 증원이 이어져 그랜트의 병력은 56,000명에서 약 90,000명으로 늘었습니다.
포위 안쪽의 삶은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배급은 거듭 줄었고 병과 영양실조가 수비대를 무너뜨렸습니다. 많은 시민이 포격을 피해 언덕에 판 "동굴"로 옮겨 살았습니다. 포격으로 실제로 죽거나 다친 시민은 몇 명뿐이었지만, 마음이 받은 상처는 컸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포위를 풀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6월 7일 남부연합군이 강 서쪽의 북군 보급 기지 밀리컨스 벤드를 쳤고, 막 모집되어 훈련이 덜 된 미국 유색인 부대(United States Colored Troops)가 이를 맞았습니다. 남부연합군은 1,061명이 지키던 북군 진지를 넘어 들어왔지만 철갑함 촉토(Choctaw)의 포격에 거듭 막혔고, 북군은 652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싸움과 남부 곳곳의 다른 싸움들은 흑인 부대를 쓰는 데 대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조지프 존스턴은 30,000명이 넘는 구원군을 모아 7월 1일에야 빅스버그 쪽으로 출발했습니다. 7월 3일 빅블랙강 근처에 닿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날 오후 펨버턴과 그랜트가 두 진지 사이에서 만났고, 밤에 그랜트는 무조건 항복 대신 수비대를 가석방(parole)하는 조건을 보냈습니다. 7월 4일 오전 10시 남부연합군이 진지에서 나와 무기를 쌓았습니다.
강 아래쪽에서는 너새니얼 뱅크스가 30,000명으로 포트허드슨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수비군은 프랭클린 가드너가 이끄는 7,500명이었고, 5월 27일과 6월 14일의 공격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5월 27일 공격에는 흑인 부대인 루이지애나 네이티브 가드 1·3연대도 나섰습니다. 7월 9일 빅스버그 함락 소식을 들은 수비대가 항복했고, 링컨은 "물의 아버지가 다시 거침없이 바다로 간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강의 기술: 증기선, 철갑 포함, 수뢰
보통 군대에게 강은 건너야 할 장애물입니다. 서부 전역에서는 거꾸로 강이 병력과 보급과 화력을 실어 나르는 큰길이었습니다. 길이 나쁘고 철도가 드문 땅에서 강 증기선은 군대의 군수(logistics)를 떠받쳤습니다.
차이는 숫자로 보면 분명합니다. 강 증기선은 250~1,700톤을 실었는데, 그 시대 기차 한 편성은 150톤, 말이 끄는 마차는 1~2톤을 실었습니다. 500톤짜리 증기선 한 척이면 보통 야전군을 이틀 먹일 수 있었고, 한 척에 보병 연대 하나, 열 척이면 사단 하나가 탔습니다.
배는 화력도 실었습니다. 빅스버그 작전을 도운 북군 포함대는 보통 대구경 대포 200문쯤을 갖추었고, 육군은 그보다 작은 야포 180문으로 캠페인의 많은 부분을 치렀습니다. 북군 강 함대에는 얕은 강을 다니도록 만든 시티급(City Class) 철갑 포함 7척이 있었습니다. 위쪽 미시시피강과 오하이오강의 도시 이름을 붙인 배들이었습니다.
그 한 척인 카이로함(USS Cairo)은 1862년 1월 취역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12일 빅스버그 북쪽 야주강에서 포대와 "토르피도(torpedo)"를 치우는 일을 하다가 두 번의 폭발을 맞았습니다. 공원 쪽 설명은 이 토르피도를 수중 기뢰라고 풀어 둡니다. 배는 12분 만에 36피트 물속으로 가라앉았지만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같은 싸움이라도 무엇을 어디서부터 세느냐에 따라 숫자가 달라집니다. 아래 표는 이 글에 쓴 기록의 숫자를 한자리에 놓은 것입니다. 남북전쟁 전적지 자문위원회(CWSAC) 요약은 "추정 사상자"라고만 적고 셈법을 밝히지 않습니다.
| 무엇 | 숫자 | 기록 |
|---|---|---|
| 빅스버그(1863년 3~7월) 추정 사상자 | 37,532명(북군 4,835, 남군 32,697) | CWSAC 요약(MS011) |
| 18개월 캠페인 전체 사상자 | 48,000명 넘음 | NPS 빅스버그 공원 |
| 가석방 서류에 서명한 남군 | 30,000명 | 육군 소책자(75-8) |
| 포트허드슨 추정 사상자 | 17,500명(북군 10,000, 남군 7,500) | CWSAC 요약(LA010) |
| 포트허드슨 병력 | 북군 30,000, 남군 수비 7,500 | 육군 소책자(75-8) |
| 포위 기간 | 47일 / 5월 23일~7월 4일 / 5월 26일~7월 3일 | NPS 빅스버그 공원의 서로 다른 쪽 |
| 스콧의 제안 시점 | 1861년 3월 / 1861년 5월 | 육군 소책자(75-2 / 75-7) |
포트허드슨 줄을 보면 남군 추정 사상자와 남군 수비 병력이 똑같이 7,500명입니다. 빅스버그 줄의 남군 32,697명도 가석방 30,000명과 크기가 비슷합니다. 요약에는 셈법이 없어서, 항복한 사람까지 사상자로 넣었는지는 이 기록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숫자는 어느 기록의 값인지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남긴 것과 엇갈리는 평가
빅스버그 항복으로 남부연합의 야전군 하나가 통째로 전쟁에서 빠졌습니다. 가석방된 30,000명 가운데 일부는 다시 싸움터로 돌아왔지만 많은 사람이 탈영했습니다. 남부연합은 캠페인과 항복에서 소화기 60,000정과 대포 260문을 잃었습니다. 이때부터 미시시피강 동쪽과 서쪽의 작전은 서로 떨어져 치러졌고, 강을 다니는 북군 포함이 남부 안쪽의 교역을 막는 "안쪽 봉쇄"가 되었습니다.
국립공원청의 빅스버그 항복 쪽은 빅스버그 함락이 7월 1~3일 게티즈버그에서 로버트 E. 리가 진 것과 함께 남북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그런데 빅스버그는 그늘에 가리기도 했습니다. 육군 소책자는 빅스버그가 하루 전 절정에 이른 게티즈버그에 가려 동부의 큰 전투만큼 이름나지 못했다고 봅니다.
아나콘다 계획을 보는 눈은 기관마다 다릅니다. 국립공원청의 스콧 서클 소개는 스콧이 일찍 물러났지만 결국 그의 아나콘다 계획에 담긴 전략이 북부의 승리로 이어졌다고 평가합니다. 육군의 대서양 해안 소책자도 스콧이 처음 그린 큰 전략이 결국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보고, 1862~1865년 남부의 면화 수출이 전쟁 전의 5%로 떨어졌다는 숫자를 듭니다. 반면 1862년 서부 전역 소책자는 스콧이 피를 적게 흘리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하면서 북부가 넉넉한 해군을 만드는 데 몇 해가 걸린다는 사실을 외면했다고 지적합니다.
빅스버그에는 1899년 국립군사공원이 생겼고, 곁의 국립묘지에는 남북전쟁 군인 17,000명이 묻혀 있습니다. 1933년 육군부가 공원과 묘지를 국립공원청에 넘겼습니다. 1964년 야주강 바닥에서 세 토막으로 건져 올린 카이로함도 1977년 공원으로 돌아와 일부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미국 남북전쟁 한눈에: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빅스버그가 전쟁 전체에서 어디쯤인지 봅니다.
- 게티즈버그 전투: 사흘 동안의 전환점: 빅스버그와 같은 주에 동부에서 벌어진 싸움입니다.
- 모니터함과 버지니아함: 철갑함끼리의 첫 대결: 바다 쪽 철갑함 이야기입니다.
- 철도와 전신: 남북전쟁을 산업의 전쟁으로 만든 것: 강 증기선과 함께 군대를 움직인 또 다른 길입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보급이 싸움을 좌우한다는 이야기를 오늘의 군대로 이어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새 기술이 싸움을 바꾼 다른 순간들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증기와 철갑 다음에 찾아온 새 무기 기술의 한 갈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