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5월 27일 이른 아침, 한반도 남쪽 끝 진해만에 모여 있던 일본 연합 함대에 보고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가장 순양함 시나노마루가 적 함대를 보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함대는 곧 바다로 나갔고, 그날과 이튿날 쓰시마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와 맞섰습니다. 상대는 그 전해 가을 발트해에서 떠나 아프리카를 돌아온 함대였습니다.

이 싸움이 러일전쟁에서 가장 큰 해전입니다. 전쟁에 나선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이었지만, 두 나라가 차지하려고 다툰 땅은 만주와 한국이었습니다. 1904년 2월에 시작된 전쟁은 1905년 9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맺은 조약으로 끝났고, 두 달 뒤 한국은 을사조약을 강요받았습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1년 반 남짓 동안 땅과 바다에서 어떻게 흘러갔는지 따라가 봅니다. 철도와 속사포, 기뢰와 어뢰가 이 전쟁에서 맡은 자리와, 한국·일본·러시아가 같은 전쟁을 서로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함께 봅니다.

왜 만주와 한반도였나

출발점은 10년 앞의 청일전쟁입니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청에게서 많은 것을 얻었고, 그 가운데에는 베이징과 만주로 가는 길목인 랴오둥반도가 있었습니다. 엿새 뒤인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이 랴오둥에 자리 잡으면 아시아가 더 불안해진다며 나섰습니다. 이것이 삼국간섭이고, 일본은 랴오둥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땅에 들어간 나라는 러시아였습니다. 러시아는 1898년 뤼순(포트아서)과 다롄을 25년 동안 빌려 쓰는 조차를 맺었습니다. 뤼순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로, 군사로도 장사로도 값어치가 큰 곳이었습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이 만주로 번지자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지킨다며 만주를 군대로 점령했고, 사건이 가라앉은 뒤에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그사이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철도를 세기가 바뀔 무렵 완성했습니다. 만주를 가로지르는 동청철도와 뤼순으로 내려가는 선도 1903년에는 열차가 다녔습니다. 일본 안에서는 어떻게 맞설지 의견이 갈렸지만,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다른 나라가 러시아 편으로 끼어들면 영국이 일본을 돕게 되어 있어서, 이 동맹은 러시아 편에 설 나라를 막아 두는 구실을 했습니다.

1903년 8월부터 두 나라는 만주와 한국 문제를 두고 여러 차례 교섭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자기 보호령으로 삼는 대신 만주에서는 러시아의 우월권을 인정하되, 다른 나라에도 기회가 고르게 열려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만주 독점권을 지키면서 한국의 북위 39도 이북을 중립지대로 두고, 한국 땅을 군사 목적으로 쓰지 말라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의 마지막 회답이 알려지기도 전에 임시 각의를 열어 개전을 정했습니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한 장의 연표

러일전쟁 연표 도표. 1904년 2월부터 1905년 12월 앞까지를 달 단위 비율로 그린 막대 위에 번호 14개가 있다. 1904년 2월 8일 뤼순 기습, 2월 9일 인천 앞바다 러시아 군함 두 척 격침, 2월 10일 일본 선전 포고, 4월 말 압록강 도하, 9월 랴오양 점령, 10월 제2태평양 함대 출항과 도거뱅크 사건, 1905년 1월 1일 뤼순 함락, 2월 15일 제3태평양 함대 출항, 3월 봉천 전투, 5월 27~28일 쓰시마 해전, 6월 8일과 10일 루스벨트의 강화 제의 수락, 7월 7일 사할린 상륙, 8월 9일 포츠머스 회담 시작,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막대 위에는 육전 기간, 발트 함대의 항해 기간(1904년 10월~1905년 5월), 강화로 가는 기간이 칠해져 있다. 아래 한국 줄에는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와 의병의 시작, 1904년 8월 한일협약, 1905년 11월 을사조약과 의병 봉기가 있다
러일전쟁 연표. 막대는 달 단위 비율대로 그렸고, 한국에서 일어난 일은 아래 줄로 나눴습니다 (도표)(도표)

전쟁은 1904년 2월 8일 밤 일본군이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정식 선전 포고가 러시아에 닿기 전이었습니다. 이튿날인 9일 일본은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 군함 두 척을 격침했고, 10일에야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러시아 극동 함대는 전쟁 첫머리부터 뤼순 항 안에 갇혔습니다.

그 뒤 한 해 반 동안의 흐름은 크게 세 덩어리로 볼 수 있습니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3월까지는 한반도를 거쳐 만주로 이어진 육전이었습니다. 1904년 10월부터 1905년 5월까지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보낸 함대가 지구 반 바퀴를 도는 시간이었습니다. 1905년 6월부터 9월까지는 미국이 다리를 놓은 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일본은 큰 승리를 여러 번 거뒀지만 그 대가도 컸습니다. 양쪽 모두 사상자가 많았습니다.

뤼순과 봉천: 땅 위의 큰 싸움

1904년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간 일본 제1군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습니다. 6월에는 만주군 총사령부를 두었고, 병력은 15개 사단에 이르렀습니다. 일본군은 9월 랴오양을 점령했습니다.

일본군은 랴오둥반도를 따라 내려가 항구를 둘러싼 산 위에 포를 올렸고, 항구 안에 갇힌 러시아 함대를 그 포로 가라앉혔습니다. 그때까지 근대전에서 쓰인 가장 큰 포였습니다. 노기 마레스케 대장이 이끈 제3군이 1905년 1월 1일 뤼순을 함락했습니다.

가장 큰 육전은 1905년 3월 봉천에서 벌어졌습니다. 맞선 병력은 일본군 약 25만 명, 러시아군 약 32만 명이었습니다. 잃은 병사는 러시아 6만 명, 일본 4만 1,000명이었다는 것이 미 국무부 역사실(Office of the Historian)의 숫자입니다. 일본군은 이 싸움에서 이겨 육전을 사실상 마무리했습니다.

두 숫자는 자료도 다르고 세는 대상도 다릅니다. 앞의 것은 서로 마주 선 병력이고, 뒤의 것은 그 싸움에서 잃은 병사입니다. 이 차이는 뒤에서 숫자 도표로 한 번 더 봅니다.

지구 반 바퀴를 돈 함대와 쓰시마 해전

불리해진 전세를 되돌리려고 러시아 황제는 유럽 쪽 해군을 극동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1904년 10월 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의 제2태평양 함대가, 1905년 2월 15일에는 제3태평양 함대가 발트해의 리바우 군항을 떠났습니다. 두 함대를 묶어 흔히 발트 함대라고 부릅니다. 함대는 군함 45척 규모였습니다.

제2태평양 함대가 떠난 그달에는 '도거뱅크 사건' 또는 '헐 사건'으로 영국과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위기가 한때 일었습니다. 함대는 아프리카와 인도를 돌아 먼 길을 왔습니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오는 긴 항해로 함대의 전력과 싸울 뜻은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네모와 선으로만 그린 배치도. 실제 지도가 아니고 거리와 위치는 비율이 맞지 않는다는 메모가 있다. 위쪽에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굵은 선(시베리아 철도, 5,772마일, 여덟 시간대, 세기가 바뀔 무렵 완성)이 있고, 만주(랴오양, 봉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동청철도, 만주에서 뤼순으로 내려가는 선(1903년까지 운행)이 있다. 왼쪽에는 발트해 리바우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지나 쓰시마 해협으로 가는 발트 함대의 점선 항로가 있고, 제2태평양 함대는 1904년 10월, 제3태평양 함대는 1905년 2월 15일에 보냈으며 1904년 10월 도거뱅크 사건으로 영국과 전쟁 위기가 있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른쪽에는 한반도 안의 진해만, 일본, 쓰시마 해협이 있고, 일본 연합 함대가 진해만에서 기다렸으며 1905년 5월 27일 시나노마루의 발견 보고가 있었다는 설명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길을 뜻하는 점선이 있다
긴 철도 하나와 긴 항해 하나. 네모와 선으로만 그린 배치도이고 실제 거리 비율은 맞지 않습니다 (도표)(도표)

일본 연합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는 발트 함대가 쓰시마 해협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것이라고 보고, 한반도 남쪽 끝 진해만에 함대를 모아 기다렸습니다. 5월 27일 이른 아침 시나노마루의 발견 보고가 들어오자 함대는 바로 출항했습니다. 연합 함대의 기함은 미카사였습니다. 삼국간섭 뒤 일본은 전함 6척과 장갑 순양함 6척을 짓는 '6·6 함대' 계획을 밀었고, 미카사는 영국에 주문한 여섯째 전함으로 1902년 3월 비커스 조선소에서 취역했습니다.

해전의 결과는 자료마다 말이 다릅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러시아 함대가 도착하자마자 절반이 부서졌다고 쓰고, MIT 비주얼라이징 컬처스(Visualizing Cultures)에 해설을 쓴 역사학자 존 다우어(John W. Dower)와 미카사 보존회는 '전멸'이라고 씁니다. 미카사 보존회는 5월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싸워 러시아 함대를 항복시켰다고 적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 백과)는 24시간 이어진 해전 끝에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포로가 됐다고 적습니다.

이름도 하나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대마도 해전이라고도 부르고, 일본 해군의 공식 이름은 '일본해 해전'입니다. 영어권에서는 흔히 쓰시마 해전(Battle of Tsushima)이라 합니다.

철도, 속사포, 기뢰와 어뢰: 그 시대의 기술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부딪힌 큰 벽 하나는 거리였습니다. 병력과 물자가 싸움터까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었고, 그 짐을 진 것이 시베리아 철도와 거기에 이어진 선들이었습니다.

시베리아 철도의 길이는 5,772마일이고 여덟 개의 시간대를 지납니다. 그런데 전쟁 초기에 이 철도로 실어 나른 군 수송은 하루 6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주로 옮긴 러시아 병력 120만 명은 대부분 1905년에 옮긴 것입니다.

전쟁에서 보급·수송·정비를 묶어 군수(logistics)라고 부릅니다. 러일전쟁의 러시아 쪽 이야기는 군수가 철길 한 줄에 얼마나 크게 걸려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철도수비대 2만 4,000명은 동청철도를 따라 넓은 땅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무기도 빠르게 바뀌던 때였습니다. 일본 방위연구소(NIDS)가 2004년 연 국제 전쟁사 포럼에서 요코야마 히사유키(Yokoyama Hisayuki)는 빨리 쏘고 멀리 쏘는 자동 포, 연기가 적은 무연 화약, 통신과 철도망의 발전이 반세기 넘게 이어지던 때에 이 전쟁이 터졌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러일전쟁 때의 이런 화기 혁신을 오늘날 '군사 혁신(RMA)'이라 부른다고 하고, 전쟁 초에는 일본 무기의 질이 러시아 무기에 뒤졌다고 봅니다.

바다에서는 기뢰와 어뢰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규모로 쓰였습니다. 같은 포럼에서 베르톨트 잔더나가시마(Berthold Sander-Nagashima)는 이 점이 독일 해군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고 봤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앞다퉈 관전 무관을 보냈습니다. 새로 개발한 무기를 갖춘 두 근대 국가의 정규군이 맞선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기자와 사진가, 화가, 무관이 몰려왔고 그 가운데 많은 이가 일본군과 공식적으로 함께 다녔습니다. 영국·미국·프랑스·독일 군함도 중국 앞바다에 모여 싸움을 지켜봤습니다. 다만 사진기가 아직 느려서 움직이는 싸움 장면을 그대로 찍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전쟁은 마침 그림엽서가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때와 겹쳤습니다.

전쟁에는 돈도 들었습니다. 일본은 런던과 뉴욕에서 큰 차관을 얻었습니다. 일본은 한 해 전비를 4억 5,000만 원쯤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두 해 동안 19억 원(엔)을 썼고, 1904년 4월부터 1905년 5월 사이 영국과 미국이 네 차례 준 차관 4억 1,000만 달러 가운데 약 40%가 전비로 쓰였습니다.

포츠머스 강화와 한국이 겪은 일

봉천 전투 뒤 일본은 전쟁을 더 끌고 갈 힘이 바닥나 있었습니다. 러시아도 1905년 나라 안에서 혁명이 일어나 전쟁을 이어 가기 어려웠습니다. 두 나라는 6월 8일과 10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였고, 미국은 12일 중재를 발표했습니다. 회담 장소와 대표를 정하는 동안 일본은 7월 7일 사할린에 상륙했습니다.

회담은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열렸습니다. 일본의 고무라·다카히라와 러시아의 비테·로젠이 8월 9일부터 9월 5일까지 약 4주 동안 마주 앉았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의 '가장 우월한 이익', 랴오둥반도 조차권, 창춘과 뤼순 사이 철도의 양도는 쉽게 합의됐습니다. 걸린 것은 사할린과 배상금이었습니다.

일본은 북위 50도 이북의 북사할린을 돌려주는 대가로 12억 원(엔)을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러시아 육군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고 보급도 비교적 원활했기 때문에, 비테는 패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회담이 깨질 위기에 놓이자 일본은 돈 요구를 거두고 사할린 남부를 받는 쪽을 택했습니다.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과, 뤼순과 철도를 포함한 남만주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과 사할린 남쪽 절반을 얻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의 전비를 물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도 돈 사정이 전쟁을 쉽게 이어 갈 형편이 아니어서 서로 물러선 결과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전쟁에 이겼다고 여겼고, 배상금이 없는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조건이 알려지자 도쿄에서는 시위와 소요가 잠시 일었고, 러시아 사람들도 사할린 절반을 내준 데 불만이 컸습니다.

루스벨트는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노벨재단은 수상 이유를 세계의 두 강대국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끝내는 데 한 역할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미 국무부 역사실은 그의 중재와 압력이 최종 합의에 실제로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덧붙입니다.

한국에서 이 전쟁은 남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개전 직후인 1904년 2월 한국은 한일의정서를, 8월에는 한일협약을 강요받았습니다. 이에 맞서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사늑약) 뒤에는 원용팔·민종식·최익현 등이 봉기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일본의 한국 침략은 국권을 직접 빼앗는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한국 안에는 이 전쟁을 개혁의 기회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2004년 NIDS 포럼에서 발표자 Lee Sung-Hwan은 개전 뒤 한국에서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자는 개혁 제안과, 한·중·일 세 나라의 동맹으로 독립을 지키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둘 다 실패했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는 이런 움직임 뒤에 러시아에 대한 공통의 두려움과 일본에 대한 낙관이 있었다고 보고, 러일전쟁을 한국인이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마지막 기회였다고 평가합니다.

같은 전쟁을 보는 여러 눈

자료별 숫자 비교 도표. 봉천 전투 칸: MIT 자료는 일본군 약 25만 명과 러시아군 약 32만 명이 맞섰다고 적고, 미 국무부 역사실은 러시아가 6만 명, 일본이 4만 1,000명을 잃었다고 적는다(네 막대는 같은 비율). 일본 칸: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일본군 약 120만 명, 사상자 68만 9,000명, 전사자 13만 5,000명이고, MIT 자료는 약 100만 명 동원, 전투와 병과 추위로 약 9만 명 사망이다. 러시아 칸: 백과는 만주로 옮긴 병력 120만 명(대부분 1905년), 사상자 40여만 명이고, MIT 자료는 러시아의 죽음이 일본보다 더 많았다고만 적는다. 쓰시마 칸: 국무부는 '절반이 부서졌다', MIT는 45척의 발트 함대를 '전멸', 미카사 보존회는 5월 27~28일 이틀 동안 '전멸'시키고 항복받았다, 백과는 24시간의 해전과 사령관 포로로 적는다. 아래 칸에 숫자가 다른 까닭 세 가지(세는 대상이 다름, 한 전투의 병력과 전쟁 전체의 동원이 다름, 러시아 사망자는 MIT에 하나의 숫자가 없음)와, 강화 조약 전까지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MIT의 문장이 있다
같은 전쟁, 다른 숫자. 공식·학술 자료의 값과 표현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먼저 숫자부터 갈립니다. 한국 백과는 전시 일본군을 약 120만 명, 사상자를 68만 9,000명, 그 가운데 전사자를 13만 5,000명으로 적습니다. 다우어는 일본이 약 100만 명을 동원했고 약 9만 명이 싸움이나 병, 혹독한 추위로 죽었다고 씁니다.

러시아 쪽은 백과가 사상자 40여만 명, 다우어는 죽은 사람이 일본보다 더 많았다고만 적습니다. '사상자'는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을 함께 센 숫자이고, '사망'에는 병으로 죽은 사람도 들어가니 같은 전쟁이라도 숫자가 크게 달라집니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도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오래 이어진 해석으로는 러시아의 베조브라조프 일파가 밀어붙인 모험주의, 일본의 북진 정책,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원인으로 드는 견해가 있습니다. 한국 백과의 집필자는 여기에 러시아의 눈을 아시아로 돌리려 한 독일 외교와, 혁명이 걱정되던 나라 안의 위기를 밖으로 돌리려 한 차르의 계산을 더해야 한다고 봅니다.

연구자 이토 유키오(Ito Yukio)의 결론은 이 전쟁을 피할 수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전 총리와 메이지 천황은 두 나라를 모두 망칠 것이라 보고 전쟁에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성격을 보는 눈도 다릅니다. 한국 백과는 러일전쟁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제국주의 전쟁으로 정의합니다. 연구자 드미트리 파블로프(Dmitrii Pavlov)에 따르면 러시아의 러일전쟁 연구는 약 800편이고, 제정 시기의 공식 역사학은 패전의 까닭을 찾으려 했으며, 소련 역사학은 이 전쟁을 양쪽 모두의 제국주의·식민지 전쟁으로 봤습니다.

구소련 학자들 가운데에는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벌일 전쟁을 일본이 대신 치렀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전쟁과 회담 내내 미국 여론은 대체로 일본 편이었습니다.

일본 쪽 기념 시설은 또 다르게 기억합니다. 미카사를 보존하는 재단은 이 승리로 일본이 독립을 지키고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아시아의 독립 운동에 희망을 줬다고 설명합니다. 일본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봉천 전투의 3월 10일을 육군 기념일로, 쓰시마 해전의 5월 27일을 해군 기념일로 지켰습니다.

러일전쟁이 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연구자 키스 닐슨(Keith Neilson)은 이 전쟁이 1차 대전으로 이어진 가장 중요한 국제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일본은 지역 강대국이 됐고 약해진 러시아는 1907년 영국과 협상을 맺을 마음이 생겼다고 봅니다. 한국 백과도 동아시아로 나아가는 길이 막힌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와 발칸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것이 1차 대전으로 가는 세력 구도를 앞당겼다고 서술합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포츠머스 조약을 1868년 메이지 유신 때부터 이어진 미일 협력 시대의 마지막 사건으로 보고, 그 뒤 태평양에서 두 나라의 경쟁이 커졌다고 적습니다.

러일전쟁은 1905년 9월 5일 조약이 서명되기 전까지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도표의 숫자 하나하나 뒤에 그 사람들이 있었고, 싸움의 당사자가 아니었던 한국도 전쟁의 결과를 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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