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5월 17일, 남아프리카의 마을 마페킹(Mafeking)을 둘러싼 포위가 풀렸습니다. 포위는 217일 동안 이어졌고, 이 전쟁에서 가장 긴 포위였습니다. 소식이 닿자 영국 곳곳에서 떠들썩한 축하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 두 해 가까이 영국 기마 부대와 보어 비정규군의 게릴라전이 이어졌고, 영국은 농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을 수용소에 가뒀습니다. 수용소에서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연기가 적은 새 화약과 탄창 소총이 전장의 모습을 어떻게 바꿨는지, 그리고 게릴라전이 민간인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따라가 봅니다.

금광과 두 공화국

19세기 말 남아프리카에는 영국 땅 둘과 보어인의 나라 둘이 있었습니다. 영국 쪽은 케이프 식민지와 나탈이었고, 보어 쪽은 오렌지 자유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트란스발(Transvaal)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보어인은 아프리칸스어를 쓰는 농민이었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 NAM)은 전쟁의 뿌리를 이 네 땅을 하나로 묶으려던 영국의 바람에서 찾습니다. 보어인은 독립을 지키고 싶어 했습니다. 1880~81년 트란스발의 보어인은 바로 그 독립을 위해 영국과 싸워 이긴 적이 있습니다. 1881년 2월 마주바 언덕 전투에서 영국 쪽은 285명이 죽거나 다쳤고, 보어 쪽은 2명이 죽고 4명이 다쳤습니다.

188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금이 나오면서 걸린 것이 훨씬 커졌습니다. 남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금을 가장 많이 캐는 곳이 됐습니다. 금광으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몰려왔고, 보어인은 이들을 위틀란더(Uitlander), 곧 '바깥사람'이라 불렀습니다. 보어인은 이들이 자기 삶의 방식을 흔든다고 보았고, 트란스발 정부는 14년 이상 산 외국인에게만 투표권을 주었습니다.

1895년 12월 29일 제임슨(Jameson)이 이끄는 무리가 트란스발로 쳐들어갔습니다. 위틀란더의 봉기를 일으키려는 시도였습니다. 습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제임슨은 1896년 1월 2일 크루거스도르프 근처 도른콥에서 항복했습니다. 해를 넘긴 일이라 자료에 따라 '1896년의 습격'으로 적기도 하며, 이 실패는 영국과 연방을 바라던 이들에게 굴욕이었습니다.

1897년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 식민 장관은 밀너(Alfred Milner)를 남아프리카 고등 판무관으로 보냈습니다. 트란스발의 크뤼거(Paul Kruger) 대통령은 영국이 내정에 끼어들지 않는다면 위틀란더의 투표권을 넓히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체임벌린은 이 제안을 거절했고, NAM은 그가 보어인을 빨리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고 적습니다.

1899년 10월 9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국경의 영국군은 물론 1899년 6월 1일 뒤로 보낸 증원군까지 모두 물리라는 요구였습니다. 거절당하자 두 공화국은 10월 12일 케이프 식민지와 나탈로 쳐들어갔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AWM)은 보어인이 다가오는 영국의 정복으로 본 것을 앞질러 막으려고 공격했다고 설명합니다.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세 단계

2차 보어 전쟁 연표 도표. 위쪽 막대는 1899년 10월부터 1902년 5월까지를 달 단위 비율로 그렸고, 호주 전쟁기념관의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1899년 10~12월 보어 기마병이 영국군을 이기거나 포위한 시기, 둘째 단계는 1899년 12월~1900년 9월 영국의 반격으로 주요 도시를 차지한 시기, 셋째 단계는 1900년 9월~1902년 5월 게릴라전 시기다. 아래에 번호 16개의 목록이 있다. 1899년 10월 9일 최후통첩, 10월 12일 침공, 10월 15일 킴벌리 고립, 12월 10~17일 검은 주간, 1900년 1월 24일 스피온콥, 2월 15일 킴벌리 해제, 2월 28일 레이디스미스 해제, 3월 13일 블룸폰테인 점령, 5월 17일 마페킹 해제(217일), 6월 5일 프리토리아 점령, 6월 16일 로버츠의 농가 소각 포고, 9월 첫 수용소, 10월까지 트란스발 합병, 11월 키치너가 지휘를 넘겨받음, 1901년 11월부터 민간 당국이 수용소 행정, 1902년 5월 31일 페레니힝 조약이다. 맨 아래 상자는 축척 밖의 앞뒤 사건으로, 전쟁 전 1880~81년 트란스발 보어인의 승리, 1886년 금 발견, 1895년 12월 29일~1896년 1월 2일 제임슨 습격, 전쟁 뒤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다
2차 보어 전쟁 연표. 위 막대는 달 단위 비율대로 그렸습니다 (도표)(도표)

이 전쟁은 보통 세 단계로 나뉩니다. 1899년 10~12월에는 주로 보병인 영국군이 빠르게 움직이는 보어 기마병에게 지거나 포위됐습니다. 1899년 12월부터 1900년 9월까지는 영국이 반격해 남아프리카의 주요 도시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1900년 9월부터 1902년 5월까지 이어진 가장 긴 셋째 단계는 주로 영국 기마 부대와 보어 비정규군 사이의 게릴라전이었습니다.

초기의 패배 뒤 영국은 훨씬 많은 병력을 보냈습니다. 제국 곳곳, 특히 캐나다와 호주에서도 부대가 왔고, 결국 40만 명이 넘는 군인이 이 전쟁에 관여했습니다. 오렌지 자유국의 수도 블룸폰테인(Bloemfontein)은 1900년 3월 13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 프리토리아(Pretoria)는 6월 5일 영국군 손에 들어갔습니다.

블룸폰테인에서는 다른 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00년 초 이 도시에서 쉬던 영국군은 주검과 오물로 더러워진 물에 감염됐고, 1,000명이 죽었습니다. 대부분 장티푸스였습니다.

1900년 5월 말까지 영국은 오렌지 자유국을 휩쓸었고, 10월까지 트란스발을 합병했습니다. 지도 위에서는 전쟁이 끝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이 실제로 다스린 땅은 부대가 서 있는 자리뿐이었고, 많은 보어인이 계속 싸웠습니다.

검은 주간과 세 포위전

전쟁 초 보어인은 킴벌리(Kimberley), 마페킹, 레이디스미스(Ladysmith) 세 마을을 둘러쌌습니다. 1899년 12월 영국군은 이 마을들을 구하러 나섰다가 스톰베르흐, 마허르스폰테인, 콜렌소에서 잇달아 졌습니다. 12월 10~17일의 이 시기는 '검은 주간(Black Week)'이라 불렸고, AWM은 세 번의 교전에서 2,300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적습니다.

제국 곳곳에서 들려오던 승전 소식에 익숙했던 영국 대중에게 검은 주간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NAM은 무장이 약한 상대에게 대체로 통하던 영국의 전술이 보어인에게는 재앙이 됐다고 봅니다. 영국군은 몸을 숨긴 보어 진지에 정면으로 공격했고, 이 공격이 먹히지 않아 12월에 여러 번 졌습니다.

킴벌리에는 수비대 4,800명이 있었고, 그 가운데 정규군은 600명이었습니다. 1899년 10월 15일 고립된 마을은 넉 달을 버텼습니다. 1900년 2월 15일 프렌치(John French) 중장 기병 사단의 오스트레일리아 기병 정찰대가 마을에 들어오며 포위가 풀렸습니다.

레이디스미스에는 병력 약 1만 3,500명과 민간인 7,500명이 갇혔습니다. 병력은 대부분 영국 정규군이었고, 민간인 가운데 2,500명은 인도인이었습니다. 식량이 모자라 배급에 말고기가 들어갔습니다. 구원군은 1900년 1월 24일 스피온콥(Spion Kop)에서 또 졌다가, 2월 28일 보병과 포병이 긴밀히 손발을 맞춘 끝에 포위를 뚫었습니다.

마페킹의 217일 동안에는 무장한 흑인 주민의 군사적 역할이 점점 커졌습니다. 5월 17일 포위가 풀릴 때까지 양쪽의 전투 사상자는 463명이었습니다.

연기가 사라진 전장: 무연 화약과 탄창 소총

총을 쏘면 무엇이 남을까요? 19세기 중반까지 대포와 소총에 쓰는 발사약은 흑색 화약(black powder) 하나뿐이었습니다. 흑색 화약은 쏠 때 총 안에서 부서지며 타서, 뒤에 나온 무연 화약보다 연기와 찌꺼기를 훨씬 많이 남겼습니다.

1880년대에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군사사 학술지 British Journal for Military History에 실린 요엘 베르그만(Yoel Bergman)의 논문은, 1884년 말 프랑스에서 처음 드러났듯 1880년대의 무연 발사약이 흑색 화약을 크게 앞섰다고 설명합니다. 무연 화약은 총 안에서 흑색 화약처럼 부서지지 않아서 쏠 때마다 거의 같은 결과를 냈습니다. 거의 찌꺼기 없이 깨끗하게 탔고, 연기가 훨씬 적어 쏜 자리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반자동·자동 사격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흑색 화약과 무연 화약을 견주는 개념 도표. 왼쪽 칸은 흑색 화약을 쓴 소총 한 자루가 쏜 뒤 짙은 연기 구름을 남기고 총 안에 찌꺼기가 남는 모습이고, 19세기 중반까지 대포와 소화기의 유일한 발사약이었다는 메모가 있다. 오른쪽 칸은 무연 화약을 쓴 소총 한 자루로, 연기가 훨씬 적어 쏜 자리를 드러내지 않고 찌꺼기가 거의 없으며 쏠 때마다 결과가 거의 같고 반자동·자동 사격을 가능하게 했다는 메모가 있다. 아래 띠는 1884년 말 프랑스, 1886년 Lebel, 1889년 초 코다이트, 1892년 모델 Krag(1894~1896년 스프링필드 제작), 1895년 Lee-Enfield, 1899~1902년 보어 전쟁에서 두 쪽 모두 무연 발사약을 썼다는 연도 띠다. 맨 아래에 수치와 성분은 그리지 않은 개념 그림이라는 메모가 있다
흑색 화약과 무연 화약. 양과 성분을 그리지 않은 개념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흑색 화약을 가장 먼저 밀어낸 곳은 군용 소총이었습니다. 1886년 프랑스의 Lebel, 1895년 영국의 Lee-Enfield, 그리고 러시아의 Mosin 같은 소총이 무연 화약을 썼습니다. 영국의 첫 무연 군용 발사약인 코다이트(Cordite)는 1889년 초 전쟁부의 화학자 프레더릭 에이블(Frederick Abel)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제임스 듀어(James Dewar)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미국도 비슷한 때 같은 길을 갔습니다. 미 국립공원청(NPS)의 스프링필드 조병창 사적지 설명을 보면, 1894~1896년 이곳에서 만든 M1892는 조병창의 첫 볼트 액션 크라그-요르겐센(Krag-Jorgensen) 탄창 소총이자, 작은 구경의 무연 화약 탄약을 쓴 첫 소총이었습니다. 보어 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의 일입니다.

보어인은 현대식 소총과 무연 화약으로 먼 거리에서 영국 보병을 저격하고, 정해진 꼴의 맞대결이 벌어지기 전에 물러났습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움직였고, 들판의 지형을 잘 이용했으며, 고원 초원(high veldt)의 삶에 익숙했습니다. 보어군은 8만 8,000명이었고 포는 비교적 적었습니다. NAM에는 보어군 지휘관 루이스 보타(Louis Botha)가 1900년 무렵 쓴 Mauser M1896 소총이 남아 있습니다.

새 화약은 한쪽만 쓴 것이 아닙니다. 영국군도 코다이트를 썼고, 보어 전쟁 동안 코다이트가 포신을 너무 많이 깎아 낸다는 것이 드러나 뒤에 조정을 거쳤습니다. 무연 화약 하나로 검은 주간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NAM은 숨은 진지에 대한 정면 공격과 함께 보어인의 기동력, 지형 이용, 초원 생활의 경험을 나란히 적습니다.

게릴라전, 초토화, 수용소

두 수도를 잃은 뒤에도 많은 보어인이 싸움을 이어 갔습니다. 합병 뒤 18개월 동안 혹독한 게릴라전이 이어졌습니다. 보어 쪽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인 얀 스뮈츠(Jan Smuts)는 이 시기 기습으로 케이프 식민지 깊숙이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시골을 다스리려고 영국군은 돌과 골함석으로 블록하우스(blockhouse)라는 작은 초소를 지었습니다. 초소마다 상주 수비대를 두고, 초소와 초소 사이를 전화선과 철조망으로 이었습니다. 게릴라가 보급과 정보와 도움을 얻지 못하게 수천 채의 농가를 불태우고 작물을 없앴고, 게릴라를 도운 주민을 벌하려는 뜻도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전쟁사 학자 프란스요한 프레토리우스(Fransjohan Pretorius)는 이 정책의 시작을 1900년 6월 16일 로버츠(Lord Roberts)의 포고에서 찾습니다. 철도가 공격당할 때마다 가장 가까운 농가를 불태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00년 11월 키치너(Lord Kitchener)가 지휘를 넘겨받은 뒤 정책은 크게 세졌고, 보어인 농가 거의 모두, 약 3만 채가 무너지고 가축 수천 마리가 죽었습니다.

영국은 보어인 가족과 흑인 주민을 수용소(concentration camp) 연결망에 가뒀습니다. 첫 두 곳은 1900년 9월 블룸폰테인과 프리토리아에 세워졌습니다. 영국 쪽 설명을 정리한 NAM은 게릴라의 지원 수단을 없애고, 가족이 수용소에 있으면 들판의 병사들이 항복하리라 여겼다고 적습니다.

프레토리우스는 가족들이 뜻과 상관없이 실려 갔고, 그 목적은 아직 싸우는 보어인의 저항을 끝내는 데 있었다고 봅니다. 그는 남아프리카 수용소의 목표가 체계적 살해는 아니었다고도 적습니다. 워릭 대학 연구진은 수용소 문제가 이 전쟁에서 가장 논란이 큰 주제였고, 20세기 아프리카너 민족주의가 자라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됐다고 설명합니다.

수용소의 숙소는 나빴습니다. 물과 식량이 모자랐고, 의료와 위생 시설은 거의 없었으며, 병이 널리 퍼졌습니다. 1901년 7월부터 1902년 2월까지 백인 수용소의 사망률은 평균 한 해 1,000명당 247명이었습니다.

흑인 수용소는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에 66곳이 있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배급을 받지 못했고 스스로 작물을 길러야 했습니다.

수용소 사망자를 자료별로 나란히 놓은 도표. 위 칸은 보어인(백인) 수용소다. 영국 기록 20,139명, 워릭 대학 연구가 확인한 약 25,000명, Goldman 27,927명, 영국 국립육군박물관과 Pretorius 28,000명을 막대로 그렸다. 아래 칸은 흑인 수용소다. 영국 통계 보고와 워릭 연구의 확인된 값 14,154명(공식 최소), 국립육군박물관의 '그 절반쯤', Pretorius 20,000명, Benneyworth가 묘지를 살펴 낸 추정 20,000명 이상이다. 옆 메모는 백인 수용소 사망의 4분의 3이 16세 미만 어린이였고 가장 큰 단일 사인이 홍역이었다는 것(워릭), 흑인 수용소 사망자의 81%가 어린이였다는 것(남아프리카 역사 기록), 워릭의 합계가 4만 명에 가깝다는 것이다. 맨 아래 칸은 영국·제국군 사망 22,000명 가운데 3분의 2가 병과 모자란 의료 때문이었고, 말 약 350,000마리와 노새 50,000마리가 죽었다는 국립육군박물관의 숫자다
같은 수용소, 다른 숫자. 자료마다 센 방법이 달라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몇 명이 죽었는지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NAM은 보어인 2만 8,000명, 주로 여성과 어린이가 수용소에서 죽었고 그 절반쯤의 흑인이 따로 된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적습니다. 프레토리우스는 백인 2만 8,000명, 흑인 2만 명이 죽었다는 것이 잘 확인돼 있다고 봅니다.

이언 스미스(Iain R. Smith)와 엘리자베스 판헤이닝언(Elizabeth van Heyningen)의 워릭 대학 연구는 2007년에 끝났습니다. 이 연구가 백인 수용소에서 확인한 사망은 약 2만 5,000명으로, 영국 기록의 2만 139명보다 많고 널리 받아들여진 골드먼(Goldman)의 2만 7,927명보다 적습니다. 흑인 수용소는 영국 통계 보고의 1만 4,154명을 썼습니다. 연구진은 이 값이 실제보다 낮을 수 있다고 보면서도 2만 명이라는 제안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두 수용소를 합하면 4만 명에 가깝습니다.

남아프리카 역사 기록 South African History Online(SAHO)은 흑인 수용소 사망을 공식적으로 최소 1만 4,154명으로 세면서, 베니워스(G. Benneyworth)가 실제 묘지를 살펴 적어도 2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함께 적습니다. 흑인 수용소 사망자의 81%가 어린이였습니다. 백인 수용소에서도 사망자의 4분의 3이 16세 미만 어린이였고, 가장 큰 단일 사인은 홍역 유행이었습니다.

사망 소식은 영국 안팎에서 큰 비판을 불렀습니다. 에밀리 홉하우스(Emily Hobhouse)는 수용소의 실상을 알리는 데 큰 몫을 하고 구호 활동을 꾸렸습니다. 정부의 여성 위원회 보고가 뒤를 이었고, 1901년 11월부터 밀너의 민간 당국이 군에게서 수용소 행정을 넘겨받아 상태가 천천히 나아졌습니다.

NAM은 이 정책이 군사적으로도 결함이 있었다고 봅니다. 가족을 영국이 맡아 주니 끝까지 싸우던 이들은 싸움에만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뒤에 키치너는 이 정책을 뒤집어 보어 가족을 보어 쪽이 돌보도록 남겨 두게 했고, 이것이 보어 부대의 움직임을 무겁게 해 많은 이가 싸움을 그만두었습니다. 포로가 된 보어인은 남아프리카뿐 아니라 버뮤다,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인도, 세인트헬레나의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철도, 전신, 기구, 탐조등

남아프리카는 넓었습니다. 그 거리 때문에 영국군은 전신과 야전 전화를 널리 썼고, 수소를 채운 기구를 띄워 적을 살피고 포격을 이끌었습니다. 이런 기술 가운데 몇은 앞선 전쟁에서도 쓰였지만, NAM은 남아프리카에서 쓴 규모가 남달랐다고 평가합니다.

철도는 이 전쟁에서 큰 몫을 했고, 보어인은 자주 철도를 공격했습니다. 영국군은 장갑 열차로 주요 노선을 순찰했습니다. 그 무렵 종군 기자였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탄 장갑 열차가 보어 코만도의 매복을 당한 일도 있습니다.

밤에는 이동식 발전기로 켠 탐조등(searchlight)이 철도를 비췄고, 그 불빛 아래에서 선로를 고쳤습니다. 증기 견인차는 길과 들판에서 무거운 짐을 끌어 짐 끄는 동물의 부담을 덜었습니다.

동물의 손실은 컸습니다. 말과 노새는 풍토에 적응하지 못한 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일하는 일이 너무 잦았습니다. 전쟁 동안 말 약 35만 마리와 노새 5만 마리가 죽었습니다.

페레니힝 조약과 남은 것

1902년 5월 31일 페레니힝(Vereeniging) 조약이 서명됐습니다. 스뮈츠도 보어 쪽 협상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어인은 제한된 자치와 함께 영국의 주권을 받아들였습니다. 두 보어 공화국은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ca)에 완전히 합쳐졌습니다.

조약문의 조항 몇 가지는 이렇습니다. 들판의 시민군은 곧 무기를 내려놓고, 부모가 바라면 공립 학교에서 네덜란드어를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원주민, 곧 흑인에게 투표권을 줄지는 자치를 들인 뒤로 미뤘습니다.

전쟁은 영국 정부에 2억 1,000만 파운드를 들게 했고, NAM은 이를 오늘 돈으로 250억 파운드가 넘는다고 셉니다. 영국과 제국군의 사상자는 12만 명이 넘었고, 그 가운데 2만 2,000명이 죽었습니다. 죽음의 3분의 2는 병과 모자란 의료 때문이었습니다.

영국군만 싸운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흑인 1만 5,000~3만 명이 영국군의 정찰병과 보초로 무기를 들었고, 또 10만 명이 노동자, 수송 마부, 대장장이, 건축 일꾼 등으로 일했습니다. 처음에 두 쪽은 흑인을 무장시키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기 어려웠습니다. 인도 구급대는 자유 인도인 300명과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 노동자 800명으로 꾸려졌습니다.

호주에서는 약 1만 6,000명이 싸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호주 부대에서는 282명이 전투나 그 상처로, 286명이 병으로, 38명이 사고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죽었습니다. 보어 쪽에 선 호주인도 조금 있었습니다. 호주 본국은 처음에 전쟁을 지지했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보어 민간인이 겪은 일이 알려지면서 실망했습니다.

영국 안에서는 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이 무기를 든 첫 원정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제국 의용 기병대(Imperial Yeomanry) 같은 새 부대에 들어갔고, 전쟁 뒤 몇 해 동안 전술, 장비, 행정의 개혁이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의 이름도 하나가 아닙니다. NAM은 보어 전쟁이라 부르고, 남아프리카 쪽 글에서는 남아프리카 전쟁(South African War), 일명 앵글로-보어 전쟁이라고도 씁니다. SAHO가 옮긴 질리오미(Giliomee)와 음벵가(Mbenga)의 2007년 글은 이 전쟁을 남아프리카 역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파괴적인 근대 무력 분쟁으로 부르고, 그 끝을 흑인과 백인 모두의 남아프리카 사회를 영국이 정복해 온 긴 과정의 끝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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