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년 7월 3일, 갈릴리 호수 서쪽의 메마른 언덕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가 물을 찾지 못한 채 밤을 맞았습니다. 둘레에서는 불이 타올랐고 연기와 화살이 밤새 이어졌습니다. 이튿날 이 군대는 무너졌고, 석 달이 안 돼 예루살렘도 살라딘(Saladin, 살라흐 앗딘)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 소식이 서유럽에 닿자 독일 황제와 프랑스 왕, 잉글랜드 왕을 원정에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3차 십자군(1189~1192)입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프랑스 왕과 함께 아크레를 되찾고 아르수프에서 살라딘의 군대를 막아 냈지만, 끝내 예루살렘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하틴에서 그렇게 크게 졌고, 그 뒤의 원정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얻지 못했을까요? 이 글은 하틴에서 1192년 휴전까지를 따라갑니다. 같은 사건을 십자군 쪽 연대기와 무슬림 쪽 기록이 어떻게 다르게 적었는지도 나란히 봅니다.
이집트에서 시리아까지, 살라딘의 길
살라딘은 티그리스강 가 도시 티크리트의 총독 아이유브의 아들이었습니다. 1168년 12월, 시리아의 통치자 누르 앗딘(Nur al-Din)의 부장이던 숙부 시르쿠를 따라 이집트 정복에 나섰습니다. 1912년에 이 시대 원사료를 엮은 Archer는 살라딘이 "마지못해" 따라갔다고 적었습니다.
1169년 3월 23일 시르쿠가 죽자 조카 살라딘이 그 자리를 이었습니다. 살라딘의 힘이 커지자 누르 앗딘은 그를 의심했고, 그를 치러 갈 준비를 하던 1174년 5월 15일에 죽었습니다. 그해 10월 말 살라딘은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187년 무렵 살라딘은 지중해와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까지 이르는 땅을 다스리게 됐습니다. 1099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차지한 뒤 세워진 십자군 나라들은 이제 이집트와 시리아를 한 사람이 쥔 세력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하틴: 물에서 멀어진 군대
1187년 여름,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은 사푸리아의 샘 근처에 군대를 모았습니다. 이 무렵을 적은 연대기 『성지 정복기(De Expugnatione Terrae Sanctae per Saladinum)』는 병력을 기사 1,200명, 셀 수 없이 많은 투르코폴(현지에서 뽑은 경기병), 보병 18,000명 이상으로 적었습니다.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맡겨 둔 돈까지 풀어, 창이나 활을 들 수 있는 사람이면 삯을 주고 불러 모았습니다.
7월 2일 살라딘의 군대가 도시 티베리아스를 둘러쌌습니다. 티베리아스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의 도시였고, 그의 아내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레몽은 물과 먹을 것이 있는 곳을 떠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는 이 더위에 물이 넉넉하지 않으면 군대가 반나절도 버티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왕은 다른 조언을 따랐습니다. 7월 3일 금요일 군대는 필요한 것을 두고 무리 지어 나섰고, 적의 공격과 갈증에 시달리다 물이 없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무슬림 군은 둘레의 덤불에 불을 놓았습니다. 살라딘은 덤불과 마른 풀을 모아 불을 놓게 했고, 티베리아스 호수의 물을 실은 낙타 무리를 따로 데려오게 했습니다.
1187년 7월 4일 토요일, 티베리아스에서 4마일 떨어진 "하틴의 뿔(Horns of Hattin)"에서 싸움이 끝났습니다. 레몽의 무리는 돌격했다가 적에게 둘러싸여 열에서 열두 기사만 빠져나갔고, 왕과 성전기사단 단장, 레이날드 드 샤티용을 비롯한 많은 귀족이 사로잡혔습니다. 왕이 예루살렘 총대주교에게 청해 진영으로 가져온 성십자가(True Cross) 유물도 이때 잃었습니다.
레이날드는 그 뒤 죽임을 당했지만, 그때와 모습은 기록마다 다릅니다. 『성지 정복기』는 이튿날이라 적었고, 현지 프랑크인이 쓴 에르눌(Ernoul)의 기록과 14세기 무슬림 학자 알 우마리는 그날 살라딘이 손수 죽였다고 적었습니다. 사로잡힌 성전기사단·구호기사단 사람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반면 티베리아스 성채에 있던 백작 부인과 사람들은 목숨을 보장받고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의 항복과 서유럽의 응답
하틴 뒤 남은 군사는 해안의 요새 도시, 특히 티레로 피했습니다. 7~8월 사이 살라딘은 남은 도시와 성을 차례로 차지했지만, 티레를 처음 공격했을 때는 실패하고 지나쳤습니다. 그사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배로 온 몬페라토의 콘라드(Conrad of Montferrat)가 티레에 들어가 항복을 막았습니다.
예루살렘은 9월 20일 포위됐습니다. 살라딘이 내건 몸값은 열 살 이상 남자 10베잔트(besant), 여자 5베잔트, 일곱 살 이하 아이 1베잔트였습니다. 10월 2일 금요일 이 조건이 거리마다 읽혔고, 사람들은 40일 안에 몸값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몸값을 낼 수 없는 사람은 전리품이 된다는 조건도 붙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해설은 살라딘의 개인 비서가 전한 일화를 함께 싣습니다. 살라딘이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교회의 재물을 갖고 도시를 떠나도록 허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한쪽 기록은 가혹한 조건을, 다른 쪽 기록은 너그러움을 앞세운 셈입니다.
예루살렘 소식이 닿기도 전인 1187년 10월 29일, 교황 그레고리오 8세가 새 십자군을 호소했습니다. 1188년 1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지소르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했지만, 그해 안에 두 나라는 다시 싸웠습니다. 1189년 7월 헨리 2세가 죽고 아들 리처드가 왕이 되자 원정 전망이 크게 나아졌습니다.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는 먼저 움직였습니다. 1189년 5월 독일군이 땅길로 발칸과 소아시아를 지났고, 1190년 5월 17일 코니아 근처에서 한 번 크게 싸워 이겼습니다. 그러나 1190년 6월 10일 황제는 물살이 매우 빠른 칼리카드누스강을 헤엄쳐 건너다 소용돌이에 빠져 죽었고, 독일군은 그 뒤 갈라졌습니다.
아크레: 2년 가까운 포위
1188년 5월 풀려난 기 왕은 모은 군대로 1189년 8월 말 해안 도시 아크레 앞에 진을 쳤습니다. 아크레는 좋은 항구와 튼튼한 성벽을 갖춰, 성 안 사람들이 바다를 쥐고 있는 한 거의 떨어뜨릴 수 없는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살라딘이 야전군을 도시 가까이 옮겨 와, 포위한 쪽은 성 안 수비대와 바깥 군대를 함께 상대해야 했습니다.
포위하는 군대가 다시 포위당한 꼴이었습니다. 1191년 4월 프랑스 함대와 군대가 왔고, 리처드는 오는 길에 키프로스를 차지한 뒤 아크레에 닿았습니다. 프랑스 왕의 공격은 바깥 군대의 공격 때문에 물러나야 했고, 공들여 만든 공성 기계는 "그리스의 불"에 하나씩 타 버렸습니다.
리처드 쪽은 다른 방법도 썼습니다. 『이티네라리움(Itinerarium Peregrinorum)』에 따르면 갱도를 파 탑의 기초를 깎아 낸 뒤 그 자리를 나무로 채워 불을 질렀고, 돌 탄환을 맞은 탑이 무너졌습니다. 성벽 돌을 하나 빼 오는 사람에게 금화 둘을 주겠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넷까지 올렸습니다.
결국 무슬림 쪽이 항복을 제안했습니다. 귀족 그리스도교인 포로 2,000명과 낮은 신분 포로 500명을 돌려주고, 옷만 입고 성을 떠나며, 두 왕에게 사라센 탈렌트 200,000을 내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인질로 준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인질은 1191년 7월 12일 넘겨졌고, 성십자가와 포로는 그달 말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필리프 2세는 병을 이유로 들어 1191년 8월 1일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군대의 더 큰 부분은 리처드에게 남겼습니다. 이제 원정의 지휘는 리처드 한 사람에게 쏠렸고, 8월 20일 그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며 아크레의 무슬림 포로를 처형했습니다. 이 처형은 수와 까닭이 기록마다 달라 뒤에 따로 봅니다.
아르수프: 해안을 따라 싸우며 걷다
포로 처형 이틀 뒤, 십자군은 아크레를 떠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걸었습니다. 살라딘의 군대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먹을 것을 실은 함대가 군대와 나란히 갔고, 짐말과 수레는 공격을 피하려고 군대와 바다 사이에 두었습니다.
하틴에서도 물과 먹을 것이 있는 곳을 떠날지가 다툼거리였습니다. 싸우는 군대에 먹을 것과 물을 대는 일을 오늘날에는 군수(logistics)라고 부릅니다. 오늘의 군대가 이 일을 어떻게 나누는지는 군수·보급·정비에서 이어 볼 수 있습니다.
9월 1일 카이사레아를 떠난 뒤 살라딘의 군대는 날마다 행렬을 따라붙었습니다. 리처드는 열두 무리를 다섯 부대로 나눠 맨 앞에 성전기사단, 맨 뒤에 구호기사단을 두었습니다. 활병과 석궁병이 뒤를 막았고, 군대는 흩어지지 않게 천천히 걸었습니다.
무슬림 쪽 기록도 이 행렬을 그렸습니다. 전투 때 살라딘 군의 중군에 있던 바하 앗딘(Baha al-Din, 옛 번역의 Bohadin)은 자기 눈으로 보고 포로와 상인에게 들은 것이라며, 보병이 두 무리로 나뉘어 하나는 바닷가를 걷고 지치면 다른 무리와 교대했다고 적었습니다. 기병은 그 사이를 걸었고 돌격할 때만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1191년 9월 7일 아르수프 근처에서 큰 싸움이 붙었습니다. 맨 뒤의 구호기사단은 맞받아치지 못하고 화살과 몽둥이를 견뎌야 했고, 단장은 돌격을 허락해 달라고 리처드에게 청했습니다. 리처드는 참으라고 답했습니다. 계획은 세 곳에서 나팔 여섯을 함께 불어 한꺼번에 돌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한 두 기사, 구호기사단의 원수와 리처드의 동료 볼드윈 드 카로가 먼저 뛰쳐나갔고, 다른 무리가 뒤따르면서 계획이 흐트러졌습니다. 그래도 십자군은 밀리면서 버텼고, 싸움이 끝났을 때 리처드의 군대가 전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군대는 아르수프를 지나 야파에 들어가 도시를 튼튼히 했습니다.
활, 석궁, 갑옷: 두 군대의 무기
두 군대는 서로 다른 무기에 기댔습니다. 십자군 쪽 기록이 거듭 적은 살라딘 군의 무기는 말 탄 군사의 활이었습니다. 『이티네라리움』은 튀르크 군이 활을 가장 큰 자랑으로 삼는다고 적었고, 아르수프에서는 화살이 땅을 덮어 한 번 손을 휘저으면 스무 개를 주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십자군 쪽은 창을 든 기사의 돌격에 기댔습니다. 다만 기사만으로는 화살을 버틸 수 없었습니다. 하틴의 마지막 날에도 보병을 적의 화살 쪽에 세우고, 기사의 창이 보병을 적의 돌격에서 지키게 하는 짜임을 짰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방식이었습니다.
하틴에서는 이 짜임이 무너졌습니다. 갈증에 지친 보병이 산꼭대기로 올라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라 싸우지 않겠다"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보병이 빠지자 왕은 튀르크의 화살을 버틸 수 없었습니다.
아르수프에서는 짜임이 버텼습니다. 두꺼운 펠트 저고리와 사슬 갑옷을 입은 십자군 보병은 바하 앗딘의 눈에 벽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등에 화살 열 개가 꽂힌 채 대열을 지키며 걷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맨 뒤의 석궁병과 활병도 무기를 계속 쏘아 공격을 막았지만, 공격이 거세지자 석궁병 여럿이 버티지 못하고 본대 안으로 물러났습니다.
성을 둘러싼 싸움에서는 양쪽 모두 기계를 썼습니다. 1187년 예루살렘에서 살라딘 군은 공성 기계와 발리스타를 세워 돌을 쏘고 그리스의 불을 던졌습니다. 1191년 아크레에서는 반대로 아크레 수비대가 그리스의 불로 십자군의 공성 기계를 태웠습니다. 새 무기가 싸움의 모양을 바꾼 뒤 시대의 예는 군사기술의 전환점에 모았습니다.
같은 사건, 다른 기록
3차 십자군의 기록은 양쪽에 다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 쪽마다 다르게 적힌 곳이 잘 보입니다. 숫자부터 그렇습니다.
하틴의 십자군 병력은 『성지 정복기』가 기사 1,200명과 보병 18,000명 이상으로 적었습니다. 전투 뒤 두 달이 안 돼 쓴 것으로 보이는 구호기사단의 편지는 "적어도 30,000명"이라 적고, 살라딘이 기병 80,000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이런 숫자는 그 기록이 그렇게 적었다는 뜻이지, 실제로 센 값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 무거운 차이는 아크레 포로 처형에 있습니다. 약속한 기한이 지나도 성십자가와 포로가 오지 않자 리처드는 포로를 죽이기로 했습니다. 『이티네라리움』은 몸값이나 교환을 바라 귀족 몇은 따로 두고 2,700명을 성 밖으로 끌어내 죽였다고 적었습니다. 번역본 주석을 따르면 결정은 8월 16일, 실행은 8월 20일이었습니다.
바하 앗딘의 기록은 결이 다릅니다. 그는 포로가 3,000명이 넘었고 밧줄에 묶여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살라딘은 포로가 돌아오기 전에 돈과 십자가와 포로를 먼저 넘기면 배신을 막을 길이 없다며 십자군의 요구를 거절했고, 리처드는 항복 때 목숨을 약속했었다는 것이 그의 서술입니다.
까닭도 갈립니다. 『이티네라리움』은 앞서 죽은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적었습니다. 연대기 작가 로저 오브 하우덴(Roger of Howden)은 살라딘이 이틀 앞서 그리스도교 포로를 모두 죽였다고 적었습니다. 바하 앗딘은 앙갚음이라는 말과, 아스칼론으로 떠나며 많은 포로를 남겨 두지 않으려 했다는 말을 함께 전하고, 참된 까닭은 신만 안다고 적었습니다.
아르수프의 손실도 한쪽 숫자만 남았습니다. 『이티네라리움』은 전장에 돌아간 사람들이 아미르(지휘관) 32명의 주검을 셌고, 튀르크 쪽 주검이 7,000이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고 적었습니다. Archer는 바하 앗딘이 그린 전투가 작은 점에서 이 기록과 맞지 않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휴전과 남긴 것
아르수프 뒤 겨울에 리처드의 군대는 살라딘이 허물었던 아스칼론의 성벽을 다시 쌓았습니다. 1192년 봄부터 리처드는 동생 존과 필리프 2세의 움직임에 대한 나쁜 소식을 받았고, 여름에는 병까지 들었습니다. 1192년이 되어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살라딘의 손에 있었습니다.
휴전은 살라딘의 동생 사이프 앗딘(Saif ad-Din)이 사이에 서서 맺어졌습니다. 아스칼론은 허물고 3년 동안 누구도 다시 쌓지 않는다, 야파는 그리스도교인에게 돌려준다, 양쪽 모두 자유롭게 오가고 공물 없이 성묘에 갈 수 있으며 장사도 자유롭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바하 앗딘은 이 평화를 1192년 9월 2일 수요일 문서 날짜부터 3년으로 적었고, 람라와 리다는 프랑크인에게 남긴다고 했습니다.
양쪽 모두 지쳐 있었습니다. 바하 앗딘은 술탄이 군사가 많이 지치고 재원이 바닥나 평화가 낫다고 판단했다고 적었습니다. 리처드는 1192년 10월 성지를 떠났고, 돌아가는 길에 빈 근처에서 오스트리아 공작의 사람들에게 붙잡혀 도나우강 가의 뒤른슈타인(Tyernstein) 성에 갇혔습니다. 살라딘은 1193년 3월 4일 죽었습니다.
이 원정이 남긴 것은 평가가 갈립니다. 원사료를 번역한 Brundage는 성과가 크지 않았다고 봅니다. 팔레스타인 해안에 작은 라틴 왕국을 다시 세웠지만,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큰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해설은 십자군이 키프로스와 아크레를 얻었고, 살라딘이 유럽 순례자의 예루살렘 출입을 보장하고 유대인이 도시로 돌아오는 것을 반겼다는 점을 함께 적습니다.
1912년의 Archer는 실패의 원인으로 필리프의 이탈, 왕관 다툼, 앞의 두 십자군도 망친 나라 사이의 경쟁을 들었습니다. 100년도 더 전 한 학자의 해석입니다. 이 글이 따라온 기록에 거듭 나온 것은 물과 보급, 그리고 기사와 보병을 묶는 짜임이었습니다. 하틴에서는 그 짜임이 갈증 속에 흩어졌고, 아르수프에서는 함대와 나란히 걸으며 버텼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1차 십자군: 왜 유럽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갔나: 살라딘이 마주한 십자군 나라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슬러 봅니다.
- 4차 십자군: 예루살렘 대신 콘스탄티노플로 간 원정: 3차 십자군 뒤 원정이 어디로 흘렀는지 이어 봅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하틴의 물과 아르수프의 함대가 보여 준 보급 문제를 오늘의 말로 정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