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6월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가 버지니아의 작은 마을 시티포인트(City Point)에 본부를 차리자, 마을은 하룻밤 사이에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항구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미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의 설명으로는 포위전 동안 평범한 날에도 이 일대에 식량 900만 끼니와 건초·귀리 1만 2천 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짐을 전선까지 나른 것은 기차였습니다. 하루 평균 18편이 시간표에 맞춰 오갔습니다.
그전까지 군대의 보급은 말과 노새가 끄는 짐마차가 맡았습니다. 남북전쟁(1861~1865)에서는 병력 2만 5천 명이 기차와 증기선으로 1,200마일을 옮겨 갔고, 워싱턴의 대통령은 전투 소식을 전선(電線)으로 받았습니다. 일부 역사가는 철도와 전신, 강선 소총, 철갑선 같은 새 기술을 들어 이 전쟁을 미국의 첫 현대전으로 봅니다.
철도와 전신은 어디까지 깔려 있었고, 군대는 그것을 어떻게 조직했을까요? 기차로 옮긴 병력과 보급은 실제로 얼마나 됐고, 남부는 왜 같은 방식으로 따라가지 못했을까요? 미국 정부 기관이 공개한 기록의 숫자로 따라가 봅니다.
전쟁 전에 깔린 선로와 전선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남과 북의 산업은 크게 달랐습니다. 남부는 세계 면화의 3분의 2를 생산했지만 제조 능력은 적었습니다. NPS의 역사가 벤저민 애링턴(Benjamin Arrington)이 정리한 숫자로는 1860년 남부가 가진 철도 선로는 전국의 약 29%, 은행은 13%였습니다. 같은 해 미국 제조업 생산의 90%가 북부 주에서 나왔고, 북부는 선철을 20배, 화기를 32배 더 만들었습니다.
전신(telegraph)의 역사는 그보다 짧습니다. 새뮤얼 모스(Samuel Morse)는 1837년과 1838년에 전신을 공개로 시연했습니다. 점과 선으로 된 부호, 신호를 보내는 키, 움직이는 종이띠에 신호를 눌러 찍는 수신기가 한 벌이었습니다. 1843년 의회가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 시험 선로에 3만 달러를 댔고, 이 선로는 1844년 5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15년 동안 전신망은 빠르게 퍼졌습니다. 1850년에는 미시시피강 동쪽의 중요한 곳이 모두 전선으로 이어졌고, 1861년에는 대륙을 가로지른 선이 캘리포니아에 닿았습니다. 그사이 운영자들은 종이에 찍힌 부호를 읽는 대신 수신기의 딸깍 소리를 귀로 듣고 풀게 됐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몇몇 회사가 주요 도시들을 전선으로 묶었고, 모스 부호를 익힌 젊은이도 많았습니다. 철도, 증기선, 전신, 증기 인쇄기처럼 이미 있던 기술은 전쟁을 치르며 더 다듬어졌습니다. 전쟁은 이미 깔린 선로와 전선, 그리고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 위에서 시작된 셈입니다.
철도를 군대가 맡다
1862년 1월 31일 미국 의회는 나라의 안녕과 안전이 요구할 때 대통령이 철도를 넘겨받을 수 있게 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의 잡지 Prologue는 남북전쟁을 큰 규모의 철도 수송으로 군대를 먼 거리에 빠르게 옮기고 보급한 첫 전쟁들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이 법으로 육군부가 운영하는 미 군용 철도(United States Military Railroads, USMRR)가 생겼습니다. 1862년 2월 11일 에드윈 스탠턴 육군장관은 1854년부터 뉴욕·이리 철도의 감독이었던 대니얼 맥칼럼(Daniel McCallum)을 국장 겸 감독으로 앉혔습니다. 그가 일을 시작할 때 연방 정부가 쥔 철도는 워싱턴에서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까지 7마일 한 줄뿐이었습니다. 맥칼럼은 자기 조직을 "지휘관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거대한 건설·수송 기계"라고 불렀습니다.
USMRR이 모든 철도를 운영한 것은 아닙니다. 미 육군 수송병과의 철도 연구를 보면 북부 안의 철도는 철도 회사가 그대로 운영했고, USMRR은 남부연합 주에서 넘겨받은 철도의 운영과 수리를 맡았습니다. 이 연구가 꼽는 USMRR의 큰 몫은 철도를 한곳에서 통제하고 군사 수송을 먼저 하게 만든 일이었습니다.
현장은 허먼 하웁트(Herman Haupt)의 몫이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수석 기술자였던 그는 1862년 초 버지니아 전역의 군용 철도 운영을 맡았고, 그해 4월 대령이 됐습니다. 맥칼럼이 행정을, 하웁트가 현장의 기차와 다리를 책임진 셈입니다.
하웁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일은 포토맥 크릭(Potomac Creek)의 철도 다리입니다. 1862년 5월 그는 숙련되지 않은 보병들을 데리고 비 오는 9일 만에 이 다리를 다시 세웠습니다. 5월 28일 다리를 본 링컨은 길이 400피트, 높이 80피트의 다리에 "옥수숫대와 콩 받침대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허술해 보였지만 링컨을 크게 감탄시킨 이 다리는 하루 10~20편의 열차를 받아 냈습니다.
다리를 빨리 고치려고 미리 만들어 둔 트러스(truss)를 쓰는 생각도 하웁트에게서 나왔습니다. 일할 사람도 조직했습니다. 직업 철도인, 병사, 노동자, 그리고 노예였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건설대(Construction Corps)에 들어왔습니다. 1863년 약 300명이던 건설대는 전쟁이 끝날 무렵 거의 1만 명이 됐습니다.
하웁트는 화차를 바로 비워 돌려보내게 했습니다. 맥칼럼은 보급 열차의 시간표를 짰고, 1862년 11월 11일 특별 명령 337호를 내도록 육군장관에게 권했습니다. 장교들은 화차를 빨리 비우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했습니다. 철도가 사람과 물자를 군의 후방까지 나르면, 거기서부터 군단까지는 마차가 날랐습니다.
기차로 옮긴 군대와 보급
철도가 얼마나 달랐는지는 짐마차와 견주면 보입니다. 말과 노새가 실은 짐의 일부를 스스로 먹어야 했기 때문에 짐마차 보급은 평균 약 150마일 안에서만 할 수 있었고, 속도는 걷는 사람 정도인 시속 3마일이었습니다. 철도는 속도를 시속 약 10~15마일로 올렸고, 거리는 선로가 놓인 데까지 늘렸습니다. 철도는 군 수송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큰 전투와 전역의 대다수가 철도를 따라, 또는 철도를 차지하려고 벌어졌습니다.
1863년 7월 게티즈버그에서 하웁트는 볼티모어와 웨스트민스터 사이의 단선 29마일 웨스턴 메릴랜드 철도를 북군의 보급선으로 바꾸었습니다. 시간표 대신 열차 다섯 편씩을 한 묶음으로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철도로 하루 1,500톤의 보급품이 꾸준히 들어왔고, 부상병 2천~4천 명이 후송됐습니다.
같은 해 가을에는 더 큰 이동이 있었습니다. 1863년 9월 24일 스탠턴은 채터누가를 증원하려고 버지니아 북부의 11군단과 12군단을 철도로 보내기로 하고, 1862년 법을 꺼내 들었습니다.
계획은 맥칼럼이 맡았고, 닷새 안에 2만 5천 명과 장비가 12일, 1,200마일의 길에 나섰습니다. 이 길에는 증기선 구간도 들어 있었습니다. 역사가 존 행키(John Hankey)와 다른 역사가들은 이 이동을 두고 "철도로 보면 전쟁의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합니다.
1864년 애틀랜타 전역의 보급도 철도에 기댔습니다. 윌리엄 셔먼(William Sherman) 장군은 473마일 철도가 마차 36,800대와 노새 220,800마리의 일을 해냈다고 추정했습니다. 셔먼 자신의 어림셈이므로 정확한 측정값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역사가 토머스 웨버(Thomas Weber)는 채터누가에서 애틀랜타까지 이어진 이 보급을 군용 철도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꼽았습니다.
글머리의 시티포인트는 피터스버그 포위전의 보급 기지였습니다. 그랜트는 이곳에서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6만 5천 마리가 넘는 말·노새를 먹여야 했습니다.
건설대는 피터스버그 쪽 선로를 다시 놓았고, 기관차 25대와 차량 275량을 바지선으로 들여왔습니다. 첫 구간은 22일 만에 끝났고, 아홉 달 포위 동안 선로 21마일이 놓였으며 열차가 달린 거리는 230만 마일에 이르렀습니다.
북부에서 들여오지 않은 식량은 빵뿐이었습니다. 현장의 빵 공장이 하루 10만 개의 빵 배급을 만들었습니다.
전신이 바꾼 지휘
1861년 4월 전쟁이 터지자 통신선을 지키는 일이 곧 군사 문제가 됐습니다. 웨스턴 유니언(Western Union)의 감독 앤슨 스테이저(Anson Stager)는 전보 내용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암호 체계를 만들었고, 육군부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스테이저는 미 군용 전신(United States Military Telegraph, USMT)의 책임자가 됐고, 워싱턴의 육군부 전신실은 토머스 에커트(Thomas Eckert) 소령이 전쟁 내내 맡았습니다.
링컨은 전신을 열심히 받아들였습니다. 각 주의 주지사와는 군대를 모으고 갖추는 일로, 현장 지휘관과도 전보로 연락했고, 전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전보로 받았습니다. 에커트의 전보 문서를 가진 헌팅턴 도서관(The Huntington Library)은 전신 덕분에 대통령이 전역과 전투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게 됐고, 이는 몇 해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던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헌팅턴 도서관이 2012년에 사들인 에커트 문서는 1862년 2월 2일부터 1865년 4월 6일까지의 장부 76권입니다. 전보 15,922통이 들어 있고, 그 가운데 약 5,400통(34%)이 암호문입니다. 이 장부에서만 세 통 가운데 한 통꼴로 암호가 쓰인 것입니다.
전신은 철도와 짝을 이뤘습니다. 하웁트는 워싱턴 부근의 부서진 철도를 고치면서 선로를 따라 전신 연락도 손봤습니다. 1862년 말에는 북군 병참 장교가 전신으로 화차 한 대분의 물자를 알렉산드리아에 주문하고, 12시간 안에 프레더릭스버그 바로 북쪽의 팔머스 역에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행키는 이것을 남부연합에는 끝내 없던 보급이자 1862년 기준으로 놀라운 일이었다고 봅니다.
전선은 끊기기도 했습니다. 1862년 8월 2차 매너서스(불런) 전투 때 존 포프(John Pope) 장군과의 전신이 끊기자, 하웁트가 전투의 진행을 워싱턴에 계속 알렸습니다.
전신이 현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보여 주는 말도 남아 있습니다. 1863년 치카모가 전투에서 북군 컴벌랜드군을 지켜본 육군부 차관보 찰스 데이나(Charles Dana)는 전신을 "우리 군의 가장 쓸모 있는 부속물 가운데 하나"라고 했습니다. 치카모가·채터누가 국립군사공원은 남북전쟁의 전신이 전술·작전·전략의 세 층위 모두에서 통신 수단으로 가치를 보였다고 소개합니다.
1864년 12월 사바나를 차지한 셔먼이 링컨에게 보낸 전보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바나시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바칩니다." 남부 깊숙이 들어간 군대의 소식도 전선을 타고 대통령에게 닿았습니다.
남부의 철도
철도의 쓸모를 처음 크게 보여 준 것은 남부연합 쪽이었습니다. 1861년 7월 첫 매너서스(불런) 전투의 무대는 오렌지·알렉산드리아 철도와 매너서스 갭 철도가 만나는 교차점이었습니다. 셰넌도어 계곡에 있던 조지프 존스턴(Joseph Johnston)의 군 1만 명은 매너서스 갭 철도를 타고 매너서스로 왔고, 대부분 7월 20일과 21일에 닿았습니다. 미 육군 수송병과 연구는 이 일이 미국 군대에 철도의 쓸모를 처음 알려 주었다고 봅니다.
1863년 9월에는 남부연합의 롱스트리트(Longstreet) 중장이 군단 1만 2천 명을 12일 동안 800마일 옮겨 치카모가 전투의 브랙스턴 브래그(Braxton Bragg) 군에 합류시켰습니다. 북군 11·12군단의 이동은 그로부터 2주 뒤였습니다. 두 쪽 모두 일찍부터 철도가 전쟁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차이는 조직과 바탕에 있었습니다. 미 육군 연구는 북군이 철도를 한곳에서 통제한 반면, 주마다 스스로 정할 권리를 내세운 남부는 철도 운영을 민간 회사에 맡겼다고 설명합니다. 애링턴은 남부의 작은 산업 기반, 적은 철도, 노예 노동에 기댄 농업 경제가 자원 동원을 어렵게 했다고 봅니다. 북군이 남부로 들어가면서 남부의 수송·제조 시설이 북군 손에 넘어갔고, 셔먼의 군대는 철도 중심지 애틀랜타와 항구 사바나를 차지했습니다.
숫자는 자료마다 다르다
같은 철도를 두고도 기관마다 적은 숫자가 다릅니다. 건설대가 놓은 선로는 Prologue가 642마일, 미 육군 수송병과가 650마일입니다. 군용 선로로 쓴 철도 수도 Prologue는 동부 17개·서부 23개, 육군 연구는 동부 16개·서부 19개입니다. 하웁트가 대령이 된 날짜도 4월 27일과 4월 22일로 갈리는데, 두 자료가 적은 직함도 서로 다릅니다.
같은 NPS 안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피터스버그의 차량을 군용 철도 쪽은 "275량이 넘는다"고, 시티포인트 쪽은 "275량"이라고 적습니다. 전쟁 직전의 전신 회사는 헌팅턴 도서관 자료가 세 회사, IEEE 공학기술사 위키(ETHW)가 1850년대 말 여섯 회사의 카르텔이라고 씁니다. 에커트 전보도 요약에서는 약 16,000통, 자세한 셈에서는 15,922통입니다.
어긋나지 않는 숫자도 있습니다. 전쟁 끝에 USMRR이 가진 기관차 419대와 차량 6,330량은 두 자료가 같습니다. Prologue는 여기에 운영한 철도 2,105마일, 새로 짓거나 고친 다리 26마일, 비용 3천만 달러 가까이를 더합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USMRR은 세계에서 가장 큰 철도 체계였습니다. 숫자를 인용할 때는 어느 기관의 값인지 함께 적어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끝난 뒤에 남은 것
1865년 8월 8일 행정명령으로 USMRR의 철도 통제가 끝났고, 남부의 철도는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미 육군 수송병과 연구는 북군이 전역 사이의 이동과 작전 조율에 철도와 전신을 쓴 것이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그 뒤 미 육군에서 철도 운영은 2차 대전 때 수송병과가 생길 때까지 공병 쪽이 맡았습니다.
철도와 전신을 한 묶음으로 본 법도 전쟁 중에 나왔습니다. 1862년 7월 1일 링컨이 승인한 태평양 철도법(Pacific Railway Act)은 미주리강에서 태평양까지 철도와 전신선을 함께 짓도록 돕고, 정부가 그 선을 우편과 군사 등에 쓸 수 있게 했습니다. 1869년 철도가 처음으로 미국의 동서 해안을 이었습니다.
전신 업계도 바뀌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마지막 합병의 물결이 일었고, 1866년 웨스턴 유니언이 미국의 전신을 독점하게 됐습니다.
종이 기록도 남았습니다. USMRR의 기록은 전쟁 뒤 병참감실로 넘어갔고, 지금은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가 100세제곱피트가 넘는 273개 계열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 연방의 철도 통제를 꽤 빠짐없이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열차 번호와 출발·도착 시각을 적은 차장 보고서 같은 일상 기록도 그 안에 있습니다. 에커트의 전보 장부와 함께, 이 전쟁을 산업의 전쟁으로 만든 바퀴와 전선의 흔적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미국 남북전쟁 한눈에: 1861년부터 1865년까지 — 이 글의 배경이 되는 전쟁 전체의 흐름을 한 장의 연표로 봅니다.
- 강선 소총과 미니에 탄: 남북전쟁의 사상자가 많았던 배경 — 같은 시대의 보병 무기가 무엇을 바꾸었는지 다룹니다.
- 빅스버그와 아나콘다 계획: 미시시피강을 둘러싼 싸움 — 철도와 함께 강과 바다의 길을 둘러싼 싸움을 봅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 오늘의 군수가 무엇을 다루는지 봅니다.
- 군 통신의 신뢰성: 연결이 끊겨도 버텨야 하는 시스템 — 전신 이후 군 통신이 무엇을 견뎌야 하는지 다룹니다.
- 광섬유는 어떻게 빛을 가두나: 코어와 클래드 — 전신은 전선으로 신호를 보냈습니다. 오늘 신호를 실어 나르는 유리 실이 빛을 붙잡는 원리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