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18일, 대구역에 박격포탄 한 발이 떨어졌습니다. 대구 북쪽 가산까지 스며든 북한군이 쏜 것이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정부는 부산으로 옮겨 갔고, 대구 일대에는 피난령이 내려졌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채 안 된 때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한반도 남동쪽 끝까지 밀려 있었고, 남은 것은 낙동강을 따라 그은 선 하나였습니다. 그 선은 어떻게 생겼고, 어디가 가장 위험했으며, 무엇이 그 선을 버티게 했을까요?

국가기록원이 복원한 작전명령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미 육군과 미 해군의 역사 자료, 1950년 영국 의회의 기록을 함께 놓고 8월과 9월의 낙동강을 따라갑니다.

낙동강까지 밀린 여름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했습니다. 국군은 기습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유엔군의 참전 지원이 있었지만 전력이 모자라 남진을 막지 못했고, 8월 1일에는 낙동강 선까지 물러났습니다.

물러서는 일도 명령서로 움직였습니다.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91호(7월 31일)는 제1·2군단에 북한군을 막으면서 7월 31일과 8월 1일 밤을 틈타 낙동강 남쪽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이어 제94호(8월 2일)는 8월 3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950년 11월 영국 상원 보고에 담긴 경과로도, 8월 3일 무렵에는 낙동강 서쪽 땅을 거의 다 내준 상태였습니다.

북한군은 8월 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잇는 선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그보다 앞선 7월 20일, 김일성은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연합군 쪽에서도 같은 무렵 짧은 명령 하나가 나왔습니다. 7월 29일,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Walton Walker) 중장은 흔히 "버티거나 죽거나(stand or die)"로 불리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안에는 "더 이상 후퇴는 없다", "우리 뒤에는 물러설 선이 없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1950년 7월 29일 미 8군 사령관 워커의 '버티거나 죽거나' 명령, 8월 1일 낙동강 선까지 후퇴(크게 표시), 8월 3일 철수 시한과 강 서쪽을 거의 내줌, 8월 5~19일 영산의 낙동강 돌출부 전투, 8월 11일 방어선을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으로 조정, 8월 16일 낙동강변 융단폭격, 8월 17일 303고지 부근에서 미군 포로 41명 처형, 8월 18일 대구역에 박격포탄과 피난령, 8월 20일 다부동 위기 해소(크게 표시), 8월 29일 영국 제27여단 부산 도착, 8월 31일 밤~9월 1일 북한군 9월 공세 시작(크게 표시), 9월 5~13일 영천 전투, 9월 12일 밤 곤계봉 탈환, 9월 14일 장사상륙작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크게 표시), 9월 16일 미 8군 공격 시작, 9월 17일 포항 탈환, 9월 24일 교두보 전체에서 공격. 점의 색으로 북한군 행동, 국군·유엔군 행동, 중요한 날을 나눈다
1950년 7월 29일부터 9월 24일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방어선의 모양과 크기

방어선은 낙동강을 따라 남쪽 마산에서 왜관을 지나 동해안 영덕까지 이어졌습니다. 낙동강은 한국에서 가장 긴 강이고, 이 강이 방어선의 대부분을 이루었습니다. 2013년 낙동강 전투 기념식에서 미 8군 사령관 버나드 챔푸(Bernard Champoux) 중장은 당시 유엔군이 "세 방향이 에워싸이고 등은 바다였다"고 말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설명하는 개념 도표. 위가 북쪽이다. 한반도 남동쪽 끝을 네모로 줄여 그렸고, 오른쪽(동쪽)과 아래쪽(남쪽)은 바다, 왼쪽(서쪽)은 위아래로 흐르는 낙동강이다. 방어선은 왼쪽 아래 마산에서 왜관을 지나 오른쪽 위 영덕까지 굵은 선으로 이어진다. 안쪽에 왜관, 다부동, 대구, 영천, 포항, 경주, 밀양, 부산 점이 있다. 북한군의 화살표 네 개가 들어온다: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로,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로, 창녕 서쪽 낙동강 돌출부(영산)로, 남해안을 따라 마산·부산으로. 바다 쪽에서 부산 항구로 들어오는 보급 화살표가 있다. 지도가 아니며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강을 서쪽 벽으로, 바다를 등으로 삼은 좁은 땅이었습니다. 기관 자료의 설명을 선과 화살표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크기는 자료마다 다른 말로 적혀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240 km의 선으로 설명합니다. 같은 기념식 연설에서는 가로 50마일, 세로 80마일의 땅이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낙동강 방어선 전투 항목은 국토의 약 10%에 불과한 땅이라고 씁니다. 하나는 선의 길이, 하나는 상자의 크기, 하나는 땅의 비율이라 재는 대상부터 다릅니다.

영어로는 이 선을 "Pusan Perimeter(부산 교두보)"라고 부릅니다. 기자들이 낙동강 뒤의 방어선을 그렇게 불렀고, 강이 대구와 부산 앞의 마지막 자연 장애물이었다는 설명이 미 8군 공보 기사에 남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낙동강 방어선, 부산교두보라는 이름을 함께 씁니다.

8월 공세: 네 갈래의 공격

북한군은 한 곳만 노리지 않았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부동 전투 항목이 정리한 북한군의 작전 개념은 네 갈래입니다.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를 치고,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로 나아가고,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를 쳐서 유엔군의 병참선을 끊고, 남해안을 따라 마산~부산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네 축선을 한꺼번에 쳐서 방어선을 뚫고 부산을 차지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가장 무거운 짐은 대구 북쪽에 실렸습니다. 8월 초 북한군은 가용 부대의 절반인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두었습니다. 그 지역을 지킨 것은 국군 제1·제6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 모두 3개 사단뿐이었고 이웃 사단끼리 서로 이어지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남쪽의 낙동강 돌출부에서도 싸움이 붙었습니다. 8월 5일 북한군 제4사단이 현풍과 남지 쪽에서 강을 건너 영산으로 들어왔고, 노린 곳은 밀양이었습니다. 미 8군이 보낸 미 제2사단 9연대, 미 제25사단 27연대, 미 해병 제1여단이 함께 맞서 8월 19일까지 북한군을 강 서쪽으로 밀어냈습니다. 북한군 제4사단은 그 뒤 반격이 시작될 때까지 낙동강 전선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950년 11월 영국 상원 보고는 이 무렵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미국에서 증원군이 왔어도 유엔 지상군은 수에서 크게 밀렸고, 8월 내내 낙동강 너머와 북쪽 포항에서 쉬지 않고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부동: 대구로 가는 길목

다부동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일대, 북쪽에서 대구로 내려오는 길목입니다. 8월 11일 육군본부는 방어선을 303고지(왜관 북쪽 작오산)~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줄였습니다.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지키게 되었고, 작전명령 제119호는 제1사단이 8월 12~13일 사이 새 선으로 옮기도록 한 명령이었습니다.

8월 16일에는 미 극동공군사령부가 낙동강변에 이른바 융단폭격을 했습니다.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본 미 8군 사령부가 강 건너 북한군 주력을 누르려고 건의한 폭격이었습니다. 백과사전은 그 성과가 명백하게 확인되지 않았지만 북한군 지휘관들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준 것으로 판단되었다고 적습니다.

그래도 대구의 위기는 이틀 뒤 가장 커졌습니다. 대구역에 박격포탄이 떨어진 8월 18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39호에는 적의 주력이 제1사단 정면에서 군위-다부동-칠곡 방면으로 내려오려 한다는 판단이 담겼습니다. 미 육군 기사에는 이 무렵 대구 근처의 '볼링장(Bowling Alley)' 싸움을 겪은 미군 관측장교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다부동~가산 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끝까지 막았고, 미 8군이 제때 보낸 예비대도 큰 몫을 했습니다. 8월 20일 북한군은 유학산 정면을 치던 제15사단을 영천 쪽으로 돌렸습니다. 백과사전 항목은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위기가 풀렸다고 씁니다.

전투의 기간은 자료에 따라 다르게 잡힙니다. 국가기록원은 다부동 전투를 1950년 8월 3일부터 9월 22일까지로 적어, 9월까지 이어진 싸움을 한데 묶습니다.

바다와 하늘로 온 것

방어선 안의 병사와 탄약은 대부분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의 자료는 미국이 바다를 쥐지 못했다면 유엔군은 거의 틀림없이 바다로 밀려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바다로 꾸준히 들어온 보급과 증원군, 특히 미 해병 제1임시여단이 교두보를 "간신히" 버티게 했다는 평가입니다.

하늘에서도 바다가 거들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항공모함에서 뜬 함재기가 북한군의 보급선을 쳤고, 미 해군 호위 항모에서 뜬 해병 항공기가 근접 항공 지원을 했습니다. 배 한 척이 비행장 노릇을 하는 원리는 항공모함: 배 한 척이 공항이 되려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매끄럽지는 않았습니다. 9월 1일 지원 요청을 받고 달려온 항모 기동부대(TF-77)의 첫 공격은, 그전부터 한국에서 근접 항공 지원을 괴롭혀 온 통제 문제를 곧 다시 겪었습니다. 다음 날 해군 항공 통제관들이 땅에 내려 미 육군 제2보병사단과 함께 문제를 풀었습니다.

땅 위에서는 전차와 다리가 문제였습니다. 9월 낙동강의 싸움에서 전차는 정원이 모자란 미군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관에서는 1950년 8월 유엔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왜관철교 상행선의 트러스 한 칸과 교각 일부를 폭파했습니다. 그 철교는 10월에 임시로 다시 열렸고, 2008년 10월 등록문화재가 되었습니다.

9월 공세와 가장 위험한 보름

8월 31일 밤부터 9월 1일 사이, 북한군은 그때까지 가장 큰 공세를 열었습니다. 큰 손실을 입고 보급선이 흔들린 뒤였지만 몇 곳에서 방어선을 뚫었고, 그 구멍은 반격에 나선 미 해병대가 막았습니다. 미군 지휘관들은 곧 상황을 "위급"하다고 보았습니다.

미 육군 한국 측은 9월 1일부터 15일까지를 전쟁 전체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15일로 꼽습니다. 이때 북한군은 한 미군 사단을 둘로 가르고 사령부와 일선 부대 사이의 통신을 거의 끊기도 했습니다. 사상자와 병력 부족 때문에 정원이 모자란 중대가 수천 피트의 거친 산지를 맡는 일이 흔했고, 방어선은 촘촘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연구자 앨런 밀렛(Allan R. Millett)은 2015년 미 육군 기사에서 이것을 북한군이 미 8군을 이기려 한 마지막 큰 시도로 보았습니다. 부산~대구 사이 연락선을 끊고 미 8군을 마지막 방어선까지 물러나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체로 맑은 하늘 덕에 아주 가까운 항공 지원이 가능했고, 북한군도 큰 손실을 입었지만 유엔군과 달리 보충 병력이 오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동쪽에서는 영천과 포항이 흔들렸습니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 사이의 교통 중심지였습니다. 국군 제2군단의 제7·제8사단은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영천을 노린 북한군 제15사단을 물리쳤습니다.

더 동쪽에서는 국군 수도사단이 8월 9일부터 9월 14일까지 안강·포항·경주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막았습니다. 9월 5일에는 북한군이 국군을 뚫고 포항을 위협했습니다. 폭우로 유엔 공군의 폭격이 멈춘 틈에 북한군이 곤계봉을 다시 잡았고, 9월 12일 밤 제17연대가 그곳을 되찾았습니다.

새 얼굴도 왔습니다. 영국 정부는 8월 20일 홍콩의 보병 부대를 보내기로 발표했고, 미들섹스 연대 1대대와 아가일·서덜랜드 하일랜더스 1대대로 된 제27여단이 약 1,300마일을 건너 8월 29일 부산에 닿았습니다. 영국 상원 보고는 이 여단이 국군·미군에 합류한 첫 지상 부대였다고 적습니다. 9월 5일 여단은 대구 남서쪽 약 8마일의 낙동강 구간을 맡았습니다.

전선 뒤의 사람들

8월 17일, 교두보의 대치가 가장 거셀 때 미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 2대대 소속 미군 포로 41명이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303고지 근처에서 북한군에게 처형되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 가까이에 303고지 추모 공원이 있고, 해마다 한미 두 나라의 군과 지역 인사들이 작은 추모식을 엽니다.

학생들도 전선에 섰습니다. 국군 제3사단의 22·26연대와 제1사단의 15연대는 7월 중순부터 보충병 대부분을 학도병으로 채웠고, 8월 초 대구에서 새로 만든 25연대도 대부분 학도병이었습니다. 이들은 기계·안강·다부동·포항 등 여러 곳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7월 14일 대구에서 학생들만으로 편성된 제3사단 학도의용군 71명은 포항 시가를 두고 싸우다 48명이 전사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수로는, 전쟁 전 기간 학도의용군 이름으로 실전에 나선 학생이 2만 7700여 명입니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에는 주로 학도병으로 된 부대가 포항 북쪽 장사리에 상륙했습니다. 인천 상륙을 돕는 후방 교란 작전이었습니다.

전선 뒤의 도시도 흔들렸습니다. 대구역에 포탄이 떨어진 날 정부는 부산으로 옮겼고, 대구에는 피난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시기를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종이 몇 장 덕분이기도 합니다. 국가기록원이 2016년에 복원해 공개한 낙동강 방어선 작전명령서는 거친 갱지에 등사로 찍어 나눠 준 것이었고, 작전지도도 간략하게 그려 썼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정일권 참모총장이 손으로 쓴 명령서도 있습니다.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 군사연구부장은 1950년에 국군이 만든 자료가 많이 남지 않아 이 기록물이 매우 드물다고 말했습니다.

반격으로 바뀐 9월

인천 상륙은 낙동강과 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백과사전 낙동강 방어선 전투 항목은 맥아더 원수가 구상하던 인천상륙작전도 낙동강 방어선이 유지될 때에야 성립할 수 있었다고 씁니다. 인천에 갈 부대도 낙동강에서 빼내야 했습니다. 인천 계획에는 제1임시해병여단의 중심인 제5해병연대가 필요했는데, 워커 중장은 북한군의 공격 위험이 남은 동안 이 여단을 내주기를 꺼렸습니다.

결국 해병 여단은 9월 5일 전선에서 빠지기 시작해 9월 8일 부산에서 배에 올랐습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고, 다음 날인 9월 16일 미 8군이 교두보를 벗어나려는 큰 공격을 열었습니다. 이 공격은 처음엔 곧 막혔지만, 북한군의 저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미 8군은 인천 쪽으로 북서진했습니다.

동해안에서는 국군 제1군단이 9월 17일 포항을 되찾았습니다. 인천 상륙 9일 뒤인 9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은 교두보 전체에서 공격해 북쪽으로 물러나던 북한군을 무너뜨렸습니다. 영국 제27여단은 서울로 향한 미군 주 공격의 옆을 지켰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와 남은 평가

자료별 숫자를 견주는 도표. 위 칸은 방어선의 크기를 세 자료가 어떻게 적었는지 보여 준다: 국가기록원은 마산-왜관-영덕 240 km의 선, 2013년 미 8군 사령관 연설은 가로 50마일·세로 80마일의 상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국토의 약 10%. 가운데 칸은 다부동 전투의 기간이다: 국가기록원 8월 3일~9월 22일의 긴 막대, 백과사전 다부동 항목은 8월 20일 위기 해소에 표시. 아래 칸은 2021년 미 육군 기념 기사가 적은 미군 사상자 가로 막대다: 부상 12,377명, 전사 4,280명, 실종 2,107명, 포로 401명. 한국군 사상자는 더 많았다고만 적혀 있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방어선을 재고 세는 방식이 자료마다 다릅니다. 자료에 적힌 값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방어선의 크기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낙동강까지 물러난 날은 8월 1일(백과사전)로도, 8월 3일(작전명령 제94호의 철수 시한, 영국 상원 보고)로도 적힙니다. 다부동 전투의 기간도 위에서 본 것처럼 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대치가 이어진 기간은 미 육군 기사에 "거의 두 달", NHHC 자료에 "두 달"로 나옵니다.

사상자는 더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2021년 미 육군 기념 기사는 낙동강 교두보에서 미군 부상 12,377명, 전사 4,280명, 실종 2,107명, 포로 401명을 적습니다. 한국군 사상자는 이보다 많았다는 말만 있고 숫자는 없습니다. 숫자 하나하나가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은 어느 자료든 같습니다.

평가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결이 다릅니다. 국가기록원은 이 전투가 대구를 지켜 6·25전쟁의 최대 위기를 넘기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총반격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봅니다. 백과사전 집필자는 방어에서 공격으로, 후퇴에서 반격으로의 "대전환"이라 부르고, 낙동강 선이 뚫렸다면 "제2의 덩케르크"가 될 뻔했다고 씁니다. 같은 백과사전의 영천전투 항목은 영천을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옮겨 간 전환점으로 봅니다.

기억하는 방식도 남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2009년 낙동강 전투 전승 행사를 만들었고, 행사는 왜관에서 열립니다. 이 전쟁의 첫 다섯 달을 미군 쪽 기록으로 자세히 읽고 싶다면 미 육군 군사사 센터가 펴낸 로이 애플먼(Roy E. Appleman)의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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