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16년 8월 2일, 이탈리아 칸나에 근처의 평평한 들판에서 로마는 단 하루 만에 군대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칸나에 전투입니다. 이긴 쪽은 북아프리카의 도시 카르타고에서 온 장군 한니발이었고, 그가 이끈 보병은 로마군의 절반쯤이었습니다.

적은 병력으로 어떻게 더 큰 군대를 둘러쌌을까요? 그렇게 크게 진 로마는 왜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두 물음의 답은 칸나에 하루가 아니라 로마와 카르타고가 기원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세 번 맞붙은 포에니 전쟁(Punic Wars) 전체에 걸쳐 있습니다.

이야기의 바탕은 고대 역사가 폴리비오스(Polybius)와 리비우스(Livy)의 기록입니다. 두 사람의 숫자는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숫자마다 누구의 기록인지 함께 적습니다.

가로 연표 도표. 기원전 264~241년 제1차 포에니 전쟁, 218~201년 제2차 포에니 전쟁, 149~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막대로 그려져 있다. 제2차 전쟁 안에 218년 11월 알프스 넘기, 217년 파비우스 독재관, 216년 8월 2일 칸나에, 202년 10월 자마가 표시되어 있고, 146년에 카르타고 파괴가 적혀 있다
포에니 전쟁 세 번의 연표. 제2차 전쟁이 끝난 해는 자료에 따라 201년 또는 202년으로 적힙니다 (도표)(도표)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첫 전쟁

첫 전쟁(기원전 264~241년)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이 해협의 도시 메세네에서 불이 붙었습니다. 이 도시를 차지하고 있던 용병 집단 마메르티니가 궁지에 몰리자, 한쪽은 카르타고에 도시를 넘기려 했고 다른 쪽은 로마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로마는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해협을 건너라고 명했습니다.

로마는 바다에서 초보였습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처음으로 함대를 짓기로 하고 5단 노선(quinquereme) 100척과 3단 노선(trireme) 20척을 만들었습니다. 본으로 삼은 것은 해협에서 좌초해 붙잡은 카르타고 배 한 척이었습니다.

배가 서툴고 느리다는 약점은 장치 하나로 메웠습니다. 뒤에 "까마귀(corvus)"라고 불린 이 장치를 적의 배에 걸고 건너가, 갑판 위에서 맞붙어 싸웠습니다. 폴리비오스는 그 결과 해전이 땅 위의 싸움처럼 됐다고 적었습니다.

전쟁은 쉬지 않고 24년 이어졌습니다. 강화 조건에 따라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전체에서 물러나고, 포로를 몸값 없이 돌려주고, 20년에 걸쳐 에우보이아 탈렌트 2,200을 나눠 내야 했습니다.

사군툼과 알프스: 두 번째 전쟁

두 번째 전쟁(기원전 218~201년)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시작됐습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장군 하스드루발 사이의 조약에는 "카르타고인은 무장하고 에브로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한니발이 로마가 보호한다고 여긴 도시 사군툼을 치자, 로마는 이 공격과 에브로 건너기를 문제 삼았습니다. 폴리비오스는 이 둘을 전쟁의 "시작"으로는 인정했지만 "원인"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한니발은 보병 약 9만, 기병 1만 2천을 이끌고 에브로강을 건넜습니다. 가는 길에 그 땅을 맡긴 부하에게 보병 1만과 기병 1천을 남겼고, 같은 수의 병사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알프스의 낭떠러지에서는 많은 사람을 잃었고, 말과 짐 나르는 짐승은 그보다 훨씬 많이 잃었습니다.

신카르타고를 떠나 다섯 달을 걸었고, 알프스를 넘는 데만 15일이 걸렸습니다. 대학 주석은 이 넘기를 기원전 218년 11월로 적습니다. 포강 평야에 내려왔을 때 남은 병력은 아프리카 보병 1만 2천, 이베리아 보병 8천, 기병 6천 이하였습니다. 한니발 자신이 라키니움의 기둥 비문에 새긴 숫자입니다.

이탈리아에 들어온 한니발은 트레비아와 트라시메누스에서 로마군을 잇달아 이겼습니다. Dickinson 대학 주석은 칸나에까지 세 싸움에서 그가 무너뜨린 병력을 집정관 군대 여덟 개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싸움을 피한 장군 파비우스

연이은 패배 뒤 로마는 기원전 217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dictator)으로 뽑았습니다. 그때 그는 58세였습니다. 독재관은 집정관과 달리 절대 권한을 가진 장군이었습니다.

파비우스는 결전을 피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군대를 지키는 것을 첫째로 삼았고, 병사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흩어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진영에서 멀리 나온 적을 기회가 될 때마다 잡았습니다. 평야로 내려가지 않은 데에는 카르타고 기병이 훨씬 강했다는 까닭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겁쟁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폴리비오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그보다 더 분별 있게 대처할 수는 없었다고 인정하게 됐다고 적었습니다. 그래도 이듬해 원로원은 적과 싸우기로 했습니다.

칸나에의 하루

한니발은 먼저 칸나에라는 마을의 성채를 차지했습니다. 로마군이 둘레에서 거둔 곡식과 보급품을 모아 두던 곳이었습니다.

로마군은 두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이끌었고, 관례대로 하루씩 번갈아 지휘했습니다. 아이밀리우스는 땅이 평평하고 나무가 없어 기병이 강한 적과 싸우기 나쁘다며 반대했습니다. 바로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폴리비오스는 그 까닭을 바로의 경험 부족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폴리비오스의 평가입니다.

폴리비오스가 적은 병력은 이렇습니다. 로마군은 동맹군을 합쳐 보병 약 8만, 기병 6천 남짓이었습니다. 카르타고군은 기병 약 1만, 보병은 4만을 크게 넘지 않았습니다. 보병은 로마가 두 배쯤 많았고, 기병은 카르타고가 더 많았습니다.

로마군은 중대(maniple)를 예전보다 촘촘히 붙이고, 중대마다 깊이를 앞폭의 여러 배로 만들었습니다. 한니발은 왼쪽 강가에 이베리아·켈트 기병을, 오른쪽 끝에 누미디아 기병을 두었습니다. 보병은 아프리카 중보병을 둘로 나눠 양쪽에 세우고 그 사이에 이베리아·켈트 보병을 놓았습니다.

그다음 가운데의 이베리아·켈트 중대를 앞으로 내밀어, 적을 향해 볼록한 초승달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양 끝으로 갈수록 줄은 얇아졌습니다. 아프리카 보병은 예비로 남겨 두었습니다.

칸나에 전투를 세 칸으로 단순화한 배치도. 첫 칸: 로마 보병의 깊은 덩어리와 마주한 카르타고 쪽은 가운데 이베리아·켈트 보병이 초승달처럼 앞으로 나와 있고, 그 양옆에 아프리카 보병, 양 끝에 기병이 있다. 둘째 칸: 초승달이 밀려 들어가고 로마군이 따라 들어가 양옆에 아프리카 보병을 두게 된다. 셋째 칸: 아프리카 보병이 양옆을 치고 카르타고 기병이 로마군의 뒤로 돌아 둘러싼다. 실제 지도가 아니라는 메모가 있다
칸나에 전투의 세 단계. 폴리비오스의 서술을 네모와 화살표로만 줄였고, 실제 지형과 거리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도표)(도표)

싸움은 세 단계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강가에서 카르타고 기병이 로마 기병을 이겼습니다. 이어서 가운데의 이베리아·켈트 보병이 로마 군단에 밀려 물러나며 초승달이 깨졌고, 로마군은 깊이 따라 들어가다가 어느새 양옆에 아프리카 중보병을 두게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 보병이 양쪽에서 로마군의 옆을 쳤습니다. 하스드루발이 이끈 기병은 로마 군단의 뒤로 돌아가 여러 곳을 잇달아 쳤습니다. 앞과 옆과 뒤가 막힌 로마군은 점점 안으로 몰려 둘러싸였습니다. 작은 군대가 훨씬 큰 군대를 감싼 것입니다.

두 군대의 무기와 조직

두 군대는 짜임새부터 달랐습니다. 폴리비오스의 『역사』 6권에 따르면 로마 군단의 병사는 나이와 무장에 따라 네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가장 젊고 가난한 이들은 벨리테스(velites)가 되어 칼과 투창, 작은 방패를 들었습니다. 그다음 나이는 하스타티(hastati), 한창때는 프린키페스(principes), 가장 나이 많은 이들은 트리아리(triarii)였습니다.

하스타티는 갑옷 한 벌을 갖춰 입었고,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도 같은 무장을 했습니다. 다만 트리아리는 던지는 창(pila) 대신 긴 창을 들었습니다. 벨리테스를 뺀 각 부류는 열 개 중대로 나뉘었고, 이 중대를 마니풀루스(manipulus)라고도 불렀습니다.

로마 군단의 네 부류를 나란히 놓은 개념도. 벨리테스(가장 젊고 가난함, 칼·투창·작은 방패), 하스타티(그다음 나이, 갑옷 한 벌과 투창), 프린키페스(한창때, 하스타티와 같은 무장), 트리아리(가장 나이 많음, 투창 대신 긴 창). 아래에 벨리테스를 뺀 각 부류를 열 개 중대(마니풀루스)로 나눈다는 설명이 있다
폴리비오스가 적은 로마 군단의 네 부류. 나이와 무장으로 나눴고, 병력 수는 넣지 않았습니다 (도표)(도표)

카르타고군은 여러 민족이 섞인 군대였습니다. 칸나에의 아프리카 보병은 앞선 싸움에서 거둔 로마 무기 가운데 좋은 것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베리아인과 켈트인은 방패는 비슷했지만 칼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베리아 칼은 베기만큼 찌르기에도 치명적이었고, 켈트(갈리아) 칼은 베기만 할 수 있어 크게 휘둘러야 했습니다.

폴리비오스는 칸나에의 승리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것이 많은 기병이었다고 봤습니다. 보병이 적의 절반이라도 기병이 압도적인 편이 모든 면에서 대등한 것보다 낫다는 것을 이 싸움이 보여 주었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이 말은 자기 시대의 싸움을 본 역사가의 판단입니다. 오늘날의 군대에 그대로 옮길 수 있는 규칙은 아닙니다.

사상자 숫자는 왜 자료마다 다른가

칸나에에서 얼마나 죽었는지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고대 기록 두 가지와 현대 학자의 짐작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잘 보입니다.

자료로마 쪽한니발 쪽
폴리비오스보병 약 7만 사망, 약 1만 포로, 약 3천 탈출. 기병 6천 가운데 70명이 바로와 함께 탈출켈트인 약 4천, 이베리아인·아프리카인 1,500, 기병 200 사망
리비우스보병 45,500, 기병 2,700 사망(합쳐 48,200). 로마인과 동맹군이 거의 반반(이 쪽에는 없음)
현대 역사가(Dickinson 주석)3만 명 안팎 사망6천 가까이

두 고대 기록부터 서로 맞지 않습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여기에 더해 로마군의 규모 자체를 고대 기록보다 작게 보는 편이며, 로마 쪽 사망자를 3만 명 안팎으로 잡습니다. 어느 숫자를 고르든 로마가 그때까지 내보낸 가장 큰 군대가 무너졌다는 점은 같습니다.

로마의 회복과 전쟁의 끝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이 싸움으로 해안의 나머지 거의 전부를 손에 넣었고, 타렌툼은 곧바로 항복했습니다. 그래도 원로원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썼습니다. 시민을 달래고 도시 방어를 굳히고 침착하게 상황을 논의했습니다.

칸나에 뒤 한 달 안에 로마는 군단 넷을 다시 내보냈습니다. 풀려난 노예와 죄수로 채운 군단이었습니다. 한니발은 병력이 모자라고 보급이 필요해 로마를 포위하지 못하고 지나쳤습니다. 이 결정은 고대에도 큰 논쟁거리였습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가 정치 체제의 장점과 현명한 판단으로 이탈리아에서 우위를 되찾고 끝내 카르타고를 이겼다고 봤습니다. 로마 체제를 높이 산 역사가의 해석입니다.

마지막 큰 싸움은 아프리카에서 벌어졌습니다. 기원전 202년 10월, 카르타고에서 서쪽으로 닷새 길인 자마 근처의 전투에서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이겼습니다.

한니발은 80마리가 넘는 코끼리를 맨 앞에 세웠지만, 훈련이 덜 된 어린 코끼리들이 겁을 먹고 카르타고 쪽 줄을 짓밟았습니다. 스키피오의 누미디아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을 몰아낸 뒤 뒷줄을 쳤습니다. 칸나에에서 로마를 무너뜨린 기병의 힘이 이번에는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전쟁은 기원전 201년에 끝났고, 자료에 따라서는 자마의 해인 202년까지로 적기도 합니다. 강화 조건은 무거웠습니다. 카르타고는 3단 노선 10척을 뺀 군함과 코끼리를 모두 넘기고, 아프리카 밖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으며, 아프리카 안에서도 로마와 상의 없이 싸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50년에 걸쳐 1만 탈렌트도 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전쟁(기원전 149~146년)은 이 가운데 "로마의 허락 없이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에서 비롯됐습니다. 카르타고가 몰린 끝에 이 조항을 어긴 것이 전쟁과 도시의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146년에 완전히 무너졌고, 뒤에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때 다시 세워졌습니다.

칸나에가 남긴 것

칸나에는 뒤 시대 군인들이 거듭 돌아본 싸움입니다. Dickinson 주석은 한니발의 칸나에 전술이 흔히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대규모 전투 기동으로 여겨진다고 적습니다.

1차 대전 때 독일 전략을 짠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한니발의 본을 따르면 독일이 이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모든 지상군 지휘관이 섬멸전을 찾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현대전에서 칸나에의 고전적인 예를 되풀이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칸나에에서 이긴 한니발은 전쟁에서 졌습니다. 한 번의 큰 승리가 곧 전쟁의 승리는 아니었던 셈입니다. 로마는 새 군단을 모았고, 한니발은 병력과 보급이 모자라 로마를 포위하지 못했습니다.

한니발이 로마를 포위하지 못한 까닭에 보급이 들어 있었다는 점은 오늘날의 무기 이야기와도 이어집니다.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군수·보급·정비 글이 그 이야기입니다. 로마가 까마귀 장치로 바다의 약점을 메운 것처럼, 새 장치가 싸움의 모양을 바꾼 뒤 시대의 예는 군사기술의 전환점에 모았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로마 군단: 제국을 지탱한 조직과 길: 이 글에 나온 네 부류의 병사가 어떤 조직으로 묶였는지 이어서 봅니다.
  • 알렉산드로스와 가우가멜라: 마케도니아 군대는 무엇이 달랐나: 기병과 보병을 함께 쓴 다른 고대 전투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무기의 역사를 오늘날의 레이저까지 이어 보려면 이 글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