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6월 4일 아침, 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Enterprise)의 갑판에서 TBD 뇌격기 14대가 차례로 출격했습니다. 그 가운데 롬바크(Severin L. Rombach)와 글렌(W. F. Glenn)이 탄 한 대를 포함한 9대는 두 시간 남짓 뒤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하다가 승무원과 함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까지 일본의 큰 항공모함 네 척이 모두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은 1942년 6월 3일부터 7일까지 하와이 제도 북서쪽 끝의 작은 환초, 미드웨이 둘레의 바다에서 벌어졌습니다. 진주만 공격 여섯 달 뒤, 수가 적던 미국 함대는 어떻게 일본의 공격을 미리 알고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답의 큰 몫은 무선 감청과 암호 해독에 있고, 나머지는 항공모함끼리 싸운 낯선 하루에 있습니다.

진주만 뒤 여섯 달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의 미국·영연방·네덜란드 영토를 공격했습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필리핀, 중부·서부 태평양의 여러 섬을 차지한 첫 단계 작전은 1942년 3월까지 거의 끝났습니다.

5월 7~8일에는 산호해(Coral Sea)에서 이 전쟁의 첫 항공모함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항공모함 렉싱턴(Lexington)을, 일본은 경항공모함 쇼호(Shoho)를 잃었고, 일본은 상륙 시도를 접었습니다. 이때도 미국의 암호 분석가들은 일본의 전투 서열과 작전 통신을 연합군 지휘관에게 넘겼습니다.

산호해의 결과는 곧 미드웨이로 이어졌습니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싸움을 전술적으로는 무승부로 봅니다. 하지만 일본 항공모함 쇼카쿠(Shokaku)와 즈이카쿠(Zuikaku)는 여기서 입은 피해와 손실로 미드웨이 작전에 빠졌습니다. 전 미 국가안보국(NSA) 역사가 헨리 쇼렉(Henry F. Schorreck)은 그 결과 야마모토가 항공 타격력이 3분의 1 줄어든 채 미드웨이로 나섰다고 적었습니다.

미드웨이 환초는 하와이 제도 북서쪽 섬들 가운데 하나로, 샌프란시스코에서 3,200마일 넘게 떨어진 외딴곳입니다. 1942년 6월 이곳에는 PBY 카탈리나 비행정과 B-17 폭격기, 그리고 미국인 4,000명이 있었습니다.

"AF"는 어디인가

그때 미 해군은 태평양에 감청 부대 둘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하나는 진주만에 있었고, 진주만 부대는 '하이포(Hypo)'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일본 해군의 무선을 가로채 교신 분석과 암호 해독으로 주요 함대와 육상 항공 부대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정보는 두 갈래였습니다. 전문의 본문을 풀어 얻는 해독 정보(Decryption Intelligence, DI)가 있었고, 받는 곳과 서명 같은 겉모습에서 얻는 교신 정보(Traffic Intelligence, TI)가 있었습니다. 전문을 번역하고 작전의 유형을 살피면 일본의 다음 작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3월부터 일부만 풀린 일본 전문에 'AF'라는 지명 부호가 나타났습니다. 3월 13일 미국 분석가들은 일본 해군의 일반 암호를 풀었고, AF를 일단 미드웨이로 보았습니다. 하이포의 조지프 로슈포르(Joseph J. Rochefort) 중령과 태평양 함대 정보참모 에드윈 레이턴(Edwin T. Layton) 소령도 AF가 미드웨이라고 믿었습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Chester W. Nimitz) 제독은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는 하와이의 오아후섬을 유력한 표적으로 보면서 미국 서해안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이 의심을 푼 방법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물 부족 전문입니다. 로슈포르와 레이턴의 말로는 5월 중순, 미드웨이 기지가 증류 설비가 고장 나 물이 급하다는 전문을 암호 없이 보내게 하자고 니미츠에게 제안했습니다. 일본은 이 전문을 잡았고, 도쿄의 정보 보고에 "AF는 물이 모자란다"는 문장이 실렸습니다. 다만 이 일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공격 날짜를 알아낸 과정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의 개요는 5월 22일 멜버른 부대가 AF가 미드웨이임을 완전히 확인했고, 하이포가 날짜 암호를 찾아 6월 4일 공격을 예측했다고 씁니다. 쇼렉은 5월 25일 세 정보 부대가 일본 지휘관들에게 간 마지막 작전 명령 한 통을 함께 풀어 6월 4일을 확인했다고 적었습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The National WWII Museum)은 하이포가 알려 준 날짜를 "6월 4일이나 5일"로 적습니다.

5월 28일 일본은 암호 체계를 바꿨고, 그 뒤 해전이 끝날 때까지 새 정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확신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태평양 함대 사령부 일지의 5월 27일 마지막 줄에는 일본이 대규모 무선 기만으로 미국을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걱정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남은 기록도 많지 않습니다. 미드웨이 점령 의도를 보여 준 번역 전문 수천 건 가운데 지금까지 찾은 것은 100건이 안 됩니다.

야마모토의 계획, 니미츠의 준비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Isoroku Yamamoto)는 전쟁 첫 여섯 달은 잘 해내겠지만 18개월을 넘기면 결과를 장담하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가진 힘을 모두 써서 지켜야 하는 곳을 쳐야 한다고 봤고, 그곳이 미드웨이였습니다.

4월 16일 야마모토는 몇 달의 논의 끝에 일본 군 수뇌부(Imperial General Staff)를 설득해 미드웨이·알류샨 작전을 승인받았습니다. 4월 18일 미국의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은 물리적 피해는 작았지만 심리적 충격이 컸습니다. 이 공습은 더 멀리 방어선을 쳐야 한다는 일본의 생각을 굳히고 작전 날짜를 앞당겼습니다.

계획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먼저 알래스카 쪽 알류샨 열도로 양동을 걸고, 이어 미드웨이에 상륙합니다. 미 태평양 함대가 달려오면 섬 서쪽에 보이지 않게 기다리던 일본 항공모함·전함 부대가 덮쳐 없앤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공하면 태평양 함대를 적어도 1년 동안 없애고, 미국의 움직임을 일찍 알려 줄 앞선 기지를 얻는 계획이었습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은 일본이 미드웨이를 진주만을 칠 기지로 삼아 그 지역의 우위를 굳히고 협상으로 평화를 끌어내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일본은 모두 약 200척과 항공기 700대를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전함 11척, 항공모함 8척, 순양함 23척, 구축함(destroyer) 65척, 잠수함 20척이 있었습니다.

중심은 아카기(Akagi), 가가(Kaga), 소류(Soryu), 히류(Hiryu) 네 척의 큰 항공모함과 항공기 229대로 이뤄진 기동부대였습니다. 5월 26일 경항공모함 둘을 포함한 북방 부대가 알류샨으로 떠났고, 이튿날 미드웨이로 가는 부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틀 뒤에는 야마모토가 탄 전함 야마토(Yamato)의 본대가 본토를 떠났습니다.

미국은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였습니다. 요크타운(Yorktown)은 고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해군 조선소가 밤낮없이 매달렸습니다. 5월 28일 레이먼드 스프루언스(Raymond A. Spruance) 소장의 16기동부대가 엔터프라이즈와 호닛(Hornet)을 중심으로 진주만을 떠났고, 이틀 뒤 프랭크 잭 플레처(Frank Jack Fletcher) 소장의 17기동부대가 요크타운을 중심으로 뒤따랐습니다.

두 부대는 6월 2일 미드웨이 북동쪽 약 350마일에서 만났고, 플레처가 전술 지휘를 맡았습니다. 세 항공모함은 순양함의 수상기까지 더해 바다에 항공기 234대를 띄울 수 있었고, 미드웨이에는 110대가 더 있었습니다. 미 잠수함 25척도 미드웨이 둘레에 배치됐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움직임을 놓쳤습니다. 프렌치 프리깃 숄스(French Frigate Shoals)에 미국 배가 와 있어, 일본은 비행정에 연료를 넣어 진주만을 정찰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감청은 적어도 미국 기동부대 하나가 바다에 나와 있다고 짐작했지만, 야마모토의 엄격한 무선 침묵 탓에 이 정보는 항공모함 부대에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나구모(Nagumo) 제독의 항공모함 부대도 준비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해전 뒤 나구모가 낸 전투 보고는 사람이 많이 바뀌어 배마다 전투 효율이 크게 떨어졌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적 항공모함이 어디에 몇 척 있는지 끝까지 몰랐다고 덧붙였습니다.

1942년 6월 초 미드웨이 둘레의 세력 배치를 네모와 화살표로 그린 개념도. 가운데에 미드웨이 환초가 있고, 섬에 항공기 110대, 둘레에 미 잠수함 25척이 있다는 메모가 있다. 북서쪽에서 나구모의 항공모함 부대(아카기, 가가, 소류, 히류, 항공기 229대)가, 남서쪽에서 상륙 부대를 태운 점령 부대가 섬으로 다가온다. 서쪽 멀리에는 전함 야마토에 탄 야마모토의 본대가 싸움에 끼지 않고 머물고, 위쪽에는 경항공모함 둘을 포함한 북방 부대가 5월 26일 알류샨으로 떠난다. 오른쪽에는 진주만(16기동부대 5월 28일, 17기동부대 5월 30일 출항, 하이포 암호 분석 부대)에서 올라온 미국 16·17기동부대(엔터프라이즈, 호닛, 요크타운, 항공기 234대)가 6월 2일 미드웨이 북동쪽 약 350마일에서 만나고, 6월 4일 항공기를 일본 항공모함 쪽으로 보낸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으며, 양쪽 배가 50~150마일 떨어져 싸웠다는 메모가 있다
누가 어디서 왔나. 지도가 아니라 흐름을 보여 주는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6월 4일 아침

싸움은 6월 3일에 시작됐습니다. 미드웨이에서 뜬 항공기들이 서쪽 약 600마일에서 일본 수송선을 찾아 공격했지만, B-17 폭격기는 피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PBY 비행정 넷이 어둠 속에서 수송선을 어뢰로 공격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유조선을 맞혔습니다.

4일 해가 뜬 직후, 미드웨이의 초계기가 일본 항공모함 둘을 찾아내고 "많은 비행기가 320도 방향 150마일에서 미드웨이로 오고 있다"고 알렸습니다. 오전 6시 30분 무렵 일본 항공모함의 항공기들이 미드웨이의 시설을 폭격했습니다. 섬을 지키던 해병대 전투기는 큰 손실을 입었지만, 섬의 시설 피해는 가벼웠습니다.

그 뒤 두 시간 동안 미드웨이에서 뜬 해병대 정찰폭격기와 해군 뇌격기가 거듭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했습니다. 공격대는 일본의 초계 전투기와 함대의 대공 사격에 거의 전멸했고, 육군 항공대 폭격기들도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일본 항공모함 위에서는 어려운 결정이 이어졌습니다. 나구모의 보고를 보면 일본은 미드웨이를 한 번 더 치기로 하고, 함상 공격기에 실린 어뢰를 육상 공격용 폭탄으로 바꾸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곧 정찰기의 보고로 미국 항공모함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이미 폭탄으로 바꾸던 공격기는 바로 띄울 수 없었고, 나구모는 미드웨이를 치고 돌아오는 항공기를 먼저 받은 뒤 큰 공격을 하기로 했습니다.

오전 9시 30분부터 10시 30분 사이, 미국 세 항공모함의 TBD 데버스테이터(Devastator) 뇌격기가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했습니다. 뇌격기 부대는 일본 전투기와 대공 사격에 거의 전멸했지만, 적 전투기를 끌어내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의 급강하 폭격기에 하늘을 열어 줬습니다. 엔터프라이즈의 SBD 돈틀리스(Dauntless)는 가가와 아카기에, 요크타운의 SBD는 소류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아카기 쪽에서 본 그 순간은 이랬습니다. 폭격기 셋이 약 2,000 m 높이에서 약 50도로 내려와 약 500 m에서 폭탄을 떨어뜨렸고, 둘째 폭탄이 배 가운데 승강기 가까이에 맞았습니다. 기록은 이 한 발을 "치명적 명중"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류의 반격과 요크타운

아침에 살아남은 일본 항공모함은 히류 하나였습니다. 히류는 오전 11시 급강하 폭격기를 띄웠고, 이 공격은 정오 무렵 요크타운을 잠시 멈춰 세웠습니다. 세 시간 반 뒤 히류의 뇌격기가 두 번째로 요크타운을 쳤고, 승조원들은 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날 오후 요크타운의 정찰기가 히류를 찾아냈고, 엔터프라이즈가 급강하 폭격기를 보냈습니다. 오후 5시 무렵의 이 공격으로 히류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항공모함 부대를 모두 잃은 야마모토는 미드웨이 침공을 접었고, 일본 함대는 서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나구모의 보고는 이날의 전과를 "엔터프라이즈급 항공모함 2척 격침"이라고 적었습니다. 실제로 이 해전에서 가라앉은 미국 항공모함은 요크타운 한 척이었습니다.

5일 스프루언스의 16기동부대는 서쪽으로 일본 함대를 쫓았고, 요크타운을 살리려는 작업도 이어졌습니다. 그날 이른 시각 아카기와 히류는 일본 구축함들이 가라앉혔습니다. 6일 마지막 공중 공격에서는 엔터프라이즈와 호닛의 급강하 폭격기가 중순양함 미쿠마(Mikuma)를 가라앉혔습니다.

이 공격에 함께 간 엔터프라이즈의 뇌격기는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4일 뇌격 비행대 셋이 무너진 뒤 스프루언스가 대공 사격의 위험을 들어 분명히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항공기를 거둔 16기동부대는 동쪽으로 돌아 접촉을 끊었습니다.

요크타운의 끝은 바다 밑에서 왔습니다. 6일 일본 잠수함 I-168이 구조 작업 중이던 요크타운에 어뢰를 맞히고, 구축함 해먼(Hammann)을 가라앉혔습니다. 요크타운은 7일 새벽 옆으로 뒤집혀 가라앉았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연표 도표. 첫 칸은 출항: 5월 26일 북방 부대가 알류샨으로, 5월 27일 항공모함 넷의 기동부대를 앞세운 미드웨이 부대가 출항, 5월 28일 16기동부대(엔터프라이즈, 호닛)가 진주만을 떠나고 일본이 암호 체계를 바꿈, 5월 29일 야마모토의 본대 출항, 5월 30일 17기동부대(요크타운) 출항, 6월 2일 두 기동부대가 미드웨이 북동쪽 약 350마일에서 만남. 둘째 칸은 6월 3~4일: 3일 미드웨이 항공기가 서쪽 약 600마일의 수송선을 공격하고 밤에 PBY의 어뢰가 유조선을 맞힘, 4일 오전 6시 30분 무렵 일본 항공기가 미드웨이를 폭격했으나 피해는 가벼움, 9시 30분~10시 30분 뇌격기 공격과 급강하 폭격기의 가가·아카기·소류 타격, 11시~정오 무렵 히류의 급강하 폭격기가 요크타운을 잠시 멈춤, 세 시간 반 뒤 히류의 뇌격기가 다시 쳐서 요크타운을 버림, 오후 5시 무렵 엔터프라이즈 급강하 폭격기가 히류에 치명상을 주고 일본이 서쪽으로 돌아섬. 셋째 칸은 6월 5~7일: 5일 스프루언스의 추격과 아카기·히류 자침, 6일 마지막 공중 공격으로 미쿠마 침몰과 16기동부대의 회항, 6일 잠수함 I-168이 요크타운에 어뢰를 맞히고 구축함 해먼을 가라앉힘, 7일 새벽 요크타운 침몰. 미국 현지 시각이고 일본 보고의 도쿄 시각은 넣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출항부터 요크타운의 침몰까지.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개요의 미국 현지 시각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항공모함 싸움의 도구들

미드웨이에서는 큰 배끼리 포를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닷새의 싸움은 미국 본토만 한 넓이에 걸쳤고, 일본과 미국의 배는 50~150마일 떨어져 싸웠습니다. 이 거리를 건너 공격을 나른 것은 항공모함의 항공기였습니다.

항공모함에 실리는 항공기 무리를 항모 항공단(carrier air wing)이라고 합니다. 2005년 미 해군대학 학술지(Naval War College Review)에 실린 토머스 윌든버그(Thomas Wildenberg)의 논문을 보면, 그때 미국 항공모함은 평균 72대를 전투·정찰·폭격·뇌격의 네 비행대로 나눠 실었습니다. 일본 항공모함은 평균 63대를 21대씩 전투·함상 공격·폭격의 세 비행대로 실었습니다.

차이를 만든 것은 갑판 계류(deck park)였습니다. 미 해군 항공모함 랭글리(Langley)는 처음에 영국식 절차를 따라, 착륙할 때 갑판을 비우고 내린 비행기를 곧바로 아래 격납고로 내렸습니다. 리브스(Joseph M. Reeves)의 지도 아래 랭글리 승조원들은 비행기를 갑판에 세워 두는 갑판 계류, 충돌 방지망, 여러 색 셔츠로 역할을 나눈 비행갑판 팀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방식 덕분에 미국은 항공모함이 한 척 적고도 미드웨이에서 일본과 거의 같은 수의 항공기를 띄웠습니다. 늘어난 비행대 덕에 미국은 세 항공모함을 한꺼번에 칠 수 있었습니다.

단점도 있었습니다. 공격대 전체를 한 번에 띄워야 했고, 미드웨이에서는 기종마다 다른 항속·순항 속도와 먼 거리 때문에 함께 공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윌든버그는 이렇게 조금씩 나뉘어 들어간 공격과 부족한 엄호를 뇌격 비행대들이 거의 전멸한 까닭으로 꼽습니다.

정찰에서도 두 해군은 달랐습니다. 윌든버그는 일본이 항공모함 정찰의 중요성을 내다보지 못하고 공격 임무에만 힘을 쏟았으며, 일본 항공모함에는 정찰 부대가 배정되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4일 오후 히류를 찾아낸 것이 요크타운의 정찰기였다는 점과 견주어 볼 만합니다. 색깔 셔츠로 나뉜 오늘의 갑판 승무원과 항공모함 함대는 항공모함: 배 한 척이 공항이 되려면에서 이어 볼 수 있습니다.

숫자 읽기, 그리고 운이었나

잃은 항공모함의 수는 분명합니다. 미국은 1척, 일본은 4척을 잃었고, 일본의 네 척은 모두 진주만 공격에 나섰던 배였습니다. NHHC는 이보다 무거운 손실로, 다시 채울 수 없는 훈련된 조종사 100명 넘게를 꼽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자료마다 센 범위가 다릅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은 일본이 약 3,057명, 미국이 약 362명을 잃었다고 적습니다. 나구모의 전투 보고에는 항공모함 네 척의 전사자만 따로 적혀 있습니다. 아카기 221명, 가가 약 800명, 히류 416명, 소류 718명이고, 더하면 약 2,155명입니다.

이 표는 네 척의 승조원만 센 것이라 박물관의 전체 숫자와 바로 견줄 수 없습니다. 잃은 항공기는 미국이 144대이고, 일본은 박물관이 "수백 대"라고만 적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의 숫자를 자료별로 견준 막대 도표. 잃은 항공모함은 일본 4척(아카기, 가가, 소류, 히류), 미국 1척(요크타운). 처음 항공기는 일본 항공모함 네 척에 229대, 미국은 바다에 234대와 미드웨이에 110대로 모두 344대(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전사자는 일본 전체 약 3,057명(국립 2차 대전 박물관), 일본 항공모함 네 척만 약 2,155명(나구모 전투 보고의 네 척 합계), 미국 전체 약 362명(국립 2차 대전 박물관). 보고의 표는 아카기 221명, 가가 약 800명, 히류 416명, 소류 718명이고 두 숫자는 센 범위가 다르다는 메모가 있다. 잃은 항공기는 미국 144대, 일본은 '수백 대'라고만 적혀 정확한 숫자가 없다. 칸마다 눈금이 다르다
항공모함, 항공기, 전사자의 수. 자료마다 센 범위가 달라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왜 이겼느냐는 물음에는 답이 여러 갈래입니다. NHHC 개요는 통신 정보 능력, 날카로운 분석, 신중한 항공모함 전술, 그리고 "적지 않은 운"을 함께 꼽습니다. 세 항공단의 성과는 나중에 고르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조종사와 승조원의 용기와 희생이 그날을 이겼다는 설명도 덧붙입니다.

운을 크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윌든버그는 미국 항공모함끼리 협조가 부족해 비행대가 따로따로 도착했고, 급강하 폭격기 두 무리가 바로 그때 함께 나타난 것은 "매우 우연"이었다고 씁니다. 많은 사람이 이를 "순전한 운"이라 부른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실제로 호닛의 세 번째 급강하 폭격대는 끝내 일본 항공모함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윌든버그의 결론은 운이 아닙니다. 그는 교전이 시작된 뒤 미국을 이기게 한 것은 결국 더 나은 교리였다고 봅니다. 갑판 계류로 늘린 비행대가 세 항공모함을 한꺼번에 칠 수 있게 했다는 앞의 설명이 그 근거입니다.

정보의 몫을 두고는 니미츠 자신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쇼렉이 옮긴 그 말은, 일본의 움직임을 미리 알지 못했고 기동부대가 산호해만큼 멀리 흩어져 있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아주 다르게 끝났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긴 것

NHHC 개요는 이 해전으로 일본의 태평양 공세가 탈선했고, 뉴칼레도니아·피지·사모아로 나아가려던 계획이 미뤄졌다고 적습니다. 태평양의 해상 세력 균형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박물관은 미국이 이때부터 여러 해에 걸친 섬 건너뛰기 상륙과 더 큰 해전들로 일본 제국을 줄여 나갈 자리에 섰다고 설명합니다.

바다의 주인공도 바뀌었습니다. 윌든버그는 미드웨이를 항공모함이 전함을 대신해 바다의 우위를 정하게 된 군사 혁신(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RMA)의 마지막 단계로 봅니다.

정보 조직도 달라졌습니다. 그 뒤 태평양 전쟁에서는 통신 정보를 받은 지휘관이 이를 무시하면 군법회의에 넘겨질 수 있었습니다. 1943년에는 태평양 합동 정보 센터(Joint Intelligence Center, Pacific Ocean Area)가 세워졌습니다.

해석의 무게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1973~1975년 미국 국방장관을 지낸 제임스 슐레진저(James R. Schlesinger)는 2003년 미드웨이 61주년 기념 만찬 연설에서, 미드웨이가 없었다면 루스벨트 대통령이 유럽 우선 정책을 이어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 해군의 기념 자료는 이 싸움이 태평양의 2차 대전 흐름을 바꿨다고 기억합니다.

미드웨이 환초는 오늘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2000년 이곳은 미드웨이 해전 국립 기념지(Battle of Midway National Memorial)가 됐고, 샌드섬(Sand Island)의 옛 탄약고와 토치카, 포대는 국가 사적으로 남았습니다. 세계 레이산알바트로스의 75%가 지금 이곳에 둥지를 틉니다.

숫자 뒤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NHHC는 이 해전에서 숨진 미국인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고, 엔터프라이즈 제6뇌격비행대 칸에는 도입에 나온 글렌과 롬바크의 이름도 있습니다. 일본 쪽 네 항공모함의 전사자 역시 배마다, 계급 묶음별로 나뉘어 기록돼 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항공모함: 배 한 척이 공항이 되려면: 갑판 계류와 색깔 셔츠 팀이 자라난 오늘의 항공모함을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근접신관부터 무인체계까지 군사기술의 흐름을 바꾼 순간을 연표로 묶고, 끝에서 레이저 무기의 자리를 살핍니다.
  • 유틀란트 해전: 드레드노트 함대끼리의 단 한 번 대결: 항공모함 이전, 전함 함대끼리 맞붙은 1차 대전의 해전입니다.
  • 과달카날 전역: 비행장 하나를 둘러싼 6개월: 미드웨이 뒤 태평양 전쟁의 다음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