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는 성벽과 함대를 가진 도시 아테네와, 중장보병이 강한 도시 스파르타가 있었습니다. 둘은 한때 같은 편에 서서 페르시아를 물리쳤습니다. 그 연합은 곧 둘로 갈라졌고, 마침내 그리스의 도시들이 저마다 편을 골라 27년 동안 싸우게 됩니다.
이 싸움을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이라고 부릅니다. 아테네 사람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전쟁이 터진 순간부터 기록을 남겼고, 그 책은 오늘의 대학 강의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다룹니다. 이 글은 그 기록과 예일 대학 공개 강의를 따라 전쟁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흘러갔고, 무엇을 남겼는지 살핍니다.
바다의 힘과 땅의 힘이 오래 맞붙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전쟁은 그 물음에 대한 오래된 사례이기도 합니다.
왜 일어났나: 커지는 아테네, 두려워하는 스파르타
전쟁 전에 두 편은 30년 동안 싸우지 않기로 한 평화조약을 맺어 두었습니다. 그 맹세는 기원전 445년에 이뤄졌습니다. 이 평화는 30년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스파르타 민회가 조약이 깨졌다고 결의한 것은 조약 14년째였습니다.
불씨는 작은 도시들에서 일었습니다. 이오니아만 어귀의 도시 에피담노스를 두고 코린토스와 케르키라가 다퉜고, 아테네는 케르키라와 방어 동맹을 맺었습니다. 코린토스의 식민 도시이면서 아테네에 공납을 바치던 포티다이아에서도 다툼이 생겼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이런 사건을 다 적은 뒤,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테네의 힘이 커지고, 그것이 스파르타에 일으킨 두려움이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가 전쟁을 결의한 것도 동맹국의 말에 설득돼서라기보다 아테네의 힘이 커지는 것이 두려워서였다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오늘의 학자가 모두 이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예일 대학의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 교수는 아테네 힘의 성장이 충돌의 가능성을 보인 것은 맞지만, 전쟁을 원하지 않은 사람이 양쪽에 많았으니 피할 수 없는 전쟁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30년 평화조약에 들어 있던 중재 조항이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열쇠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주장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도 스스로 인정합니다.
27년의 흐름
스파르타에서 전쟁 쪽으로 기운 회의는 아마 기원전 432년 7월에 열렸습니다. 실제 싸움은 기원전 431년, 테베가 아테네의 동맹 도시 플라타이아를 기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 뒤 펠로폰네소스군이 아테네 땅 아티카로 쳐들어옵니다.
투키디데스의 책에는 서기 연도가 없습니다. 사건은 "전쟁 몇 년째"로 세고, 한 해를 여름과 겨울로 나눠 차례대로 적었습니다. 연표의 415년과 413년은 그 "17년째", "19년째"를 431년 시작에 맞춰 서기로 바꾼 것입니다.
전쟁 10년째에는 니키아스 평화(Peace of Nicias)가 맺어졌습니다. 이 조약은 기원전 421년에 효력을 냈지만 곧 무너졌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이 휴전 기간도 전쟁에 넣어야 한다고 보았고, 아테네가 장벽과 항구 페이라이에우스를 내줄 때까지를 모두 27년으로 셌습니다.
전쟁 17년째에 아테네는 큰 원정군을 시칠리아로 보냈고, 19년째에 그 원정은 무너졌습니다. 그 뒤 기원전 413~404년을 "데켈레이아 시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파르타 왕이 아테네에서 14마일 떨어진 데켈레이아에 요새를 두고 머문 시기입니다. 전쟁은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항복으로 끝났습니다.
바다의 힘과 땅의 힘
두 동맹은 힘의 바탕부터 달랐습니다. 스파르타는 동맹국에 공납을 거두지 않고, 동맹 도시에 소수가 다스리는 과두정을 세워 자기 이익에 따르게 했습니다. 아테네는 동맹국의 배를 차츰 거두고 그 대신 돈을 내게 했습니다. 키오스와 레스보스만은 예외였습니다.
전쟁이 다가오자 페리클레스(Pericles)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자기 편의 힘을 하나하나 셈해 보였습니다. 중장보병 1만 3천 명, 수비대와 본국 경비에 1만 6천 명, 기마궁수를 포함한 기병 1,200, 보병 궁수 1,600, 그리고 쓸 수 있는 갤리선 300척입니다.
숫자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예일 강의에서는 아테네의 삼단노선(trireme)을 400척으로 듭니다. 스파르타 쪽 첫 침공 병력으로는 펠로폰네소스와 보이오티아의 중장보병 6만 명이라는 숫자가 있는데, 강의가 고대 작가 플루타르코스에게서 가져온 것입니다. 투키디데스의 300척에는 "쓸 수 있는"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도 같은 셈을 했습니다. 개전을 앞둔 연설에서 그는 배에서는 스파르타가 뒤지고,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걸리며, 돈은 더 모자란다고 말했습니다. 중장보병과 인구에서는 앞서니 아테네 땅을 짓밟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는 제국 안에 다른 땅이 많고 필요한 것을 바다로 들여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걱정이었습니다.
배를 움직이는 데는 사람과 기술과 돈이 같이 들었습니다. 코린토스 사람들은 올림피아와 델포이 신전의 돈을 빌려, 더 높은 삯으로 아테네의 외국인 선원을 빼 올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페리클레스의 대답은 배를 부리는 일이 기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가할 때 가끔 해서는 익힐 수 없고, 다른 일을 할 틈이 없을 만큼 고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르는 시간과 그 삯을 댈 돈이 함대의 힘을 정한 셈입니다. 오늘의 군대에서 같은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는 군수·보급·정비 글에서 이어집니다.
땅에서 싸우는 방식도 볼 만합니다. 중장보병(hoplite)은 방패를 들고 옆 사람과 방패를 맞대어 줄을 지어 섰습니다. 만티네이아 전투 대목에서 투키디데스는, 모든 군대가 싸움에 들어가면 오른쪽 날개가 밀려 나간다고 설명했습니다.
까닭은 두려움입니다. 병사마다 방패가 없는 쪽 몸을 오른쪽 옆 사람의 방패로 가리려 합니다. 이 쏠림은 오른쪽 맨 끝 병사에서 시작됩니다.
비가 오는 날 우산 하나를 여럿이 쓰면 다들 조금씩 한쪽으로 몸을 붙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실제 대열에서는 붙이는 쪽이 늘 오른쪽으로 정해져 있었고, 그 쏠림이 대열 전체의 모양을 바꿀 만큼 컸다는 점이 다릅니다.
역병과 시칠리아 원정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단순했습니다. 밖에 나가 싸우지 말고 도시 안으로 들어와 지키며, 진짜 힘이 있는 함대를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동맹국을 단단히 붙들라는 당부도 했습니다. 아테네의 힘이 동맹국이 내는 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전략에는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해안에 기습 상륙을 하는 계획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2년째, 펠로폰네소스군이 다시 아티카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돼 아테네에 역병이 돌았습니다. 투키디데스 자신도 이 병에 걸렸고, 다른 사람이 앓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의 기록으로는 두 번째 유행까지 대열의 중장보병만 4,400명 넘게, 기병 300명이 죽었습니다. 그 밖에 죽은 사람의 수는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예일 강의는 역병이 결국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 갔다고 봅니다.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죽을 때 아테네 금고는 바닥나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시작되고 2년 6개월을 더 살았습니다. 조용히 기다리고, 함대에 힘쓰고, 새 정복을 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당부였는데 아테네 사람들은 그 반대로 했다고 투키디데스는 평가했습니다.
강의의 평가는 조금 다릅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방어적이고 합리적이었지만, 공세 계획이 없었고 전쟁이 늘 합리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새 정복의 가장 큰 시도가 시칠리아 원정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전쟁 17년째에 앞서보다 큰 군대를 꾸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향했습니다. 원정은 19년째 시라쿠사의 큰 항구에서 벌어진 해전과 퇴각 끝에 무너졌습니다. 함대도 군대도 모두 무너졌고, "많은 사람 가운데 적은 수만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투키디데스의 기록입니다.
끝과 남긴 것
시칠리아의 참패 뒤 전쟁은 동쪽 바다로 옮겨 갔습니다. 아테네 동맹이던 이오니아 도시들이 등을 돌렸고, 페르시아가 끼어들었습니다. 페르시아가 내준 돈은 스파르타 쪽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도 아테네는 시칠리아 참패 뒤 10년을 더 버텼습니다.
마지막 결정타는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Lysander)가 이끈 함대가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아테네 함대를 깨뜨렸습니다. 크세노폰의 『헬레니카』에 따르면 그곳의 해협 폭은 2마일이 채 안 됐습니다. 이 해전은 기원전 405년의 일로 봅니다.
『헬레니카』가 전하는 평화 조건은 넷이었습니다. 장벽과 페이라이에우스 요새를 허물 것, 12척만 남기고 함대를 넘길 것, 망명자를 돌아오게 할 것, 전쟁과 평화에서 스파르타를 따를 것입니다. 성벽 안에서는 날마다 굶어 죽는 사람이 늘고 있었고, 아테네 민회는 결국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리산드로스가 페이라이에우스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피리 가락에 맞춰 성벽을 허물었습니다. 크세노폰은 그들이 그날을 그리스 자유의 시작으로 여겼다고 적었습니다.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전쟁 뒤 스파르타는 다른 도시를 해방하는 대신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산드로스는 여러 도시에 친스파르타 과두정을 세우려 했고, 많은 도시가 이에 화를 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트라시불로스가 스파르타에 맞서 민주정을 되살렸습니다.
이 전쟁이 남긴 가장 오래가는 것은 아마 투키디데스의 책일 것입니다. 그는 자기 책을 한때의 박수를 받으려는 글이 아니라 "영원한 재산"으로 썼다고 밝혔습니다. 바다의 힘과 땅의 힘, 동맹과 돈, 예상하지 못한 역병이 전쟁의 길을 어떻게 바꾸는지가 그 안에 있습니다.
다만 그 기록도 한 사람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예일 강의처럼 그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따져 읽는 학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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