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5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는 메모지에 짧은 보도문을 손으로 썼습니다. 상륙이 실패했을 때 내보낼 글이었습니다.
"셰르부르-르아브르 지역의 상륙은 만족할 만한 발판을 얻지 못했고, 나는 병력을 물렸습니다." 끝 문장은 이렇습니다. "이 시도에 탓이 있다면 모두 나의 것입니다." 메모의 날짜는 6월 5일이 아니라 "7월" 5일로 잘못 적혀 있습니다.
이 메모는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새벽 연합군은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의 다섯 해변에 내렸고, 그날을 지금은 D-데이(D-Day)라고 부릅니다. 이 상륙은 왜 2년 넘게 미뤄졌고, 왜 하필 노르망디와 6월 6일이었을까요? 그날 하루는 해변마다 어떻게 달랐고, 숫자는 왜 자료마다 다를까요?
2년 넘게 미뤄진 상륙
1941년 12월 말 워싱턴에서 아르카디아 회담(Arcadia Conference)이 열렸습니다. 여기서 연합국은 독일을 더 위험한 적으로 보는 전략을 바탕에 깔았습니다. 그렇다면 언젠가 영국과 미국이 북서유럽에 크게 상륙하는 일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1942년 초부터 영국에 병력을 모으는 볼레로(Bolero)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프랑스 해협 해안에 넓은 교두보를 잡고 안으로 뚫고 들어간다는 라운드업(Roundup) 구상이 뒤에 오버로드(Overlord) 작전이 됐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독일 심장부를 노리는 큰 상륙에 쉽게 나서지 않았습니다. 1942년 8월 프랑스 디에프(Dieppe)에서 영국·캐나다군의 기습이 참담하게 끝난 일이 이 망설임을 굳혔습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총리는 남유럽 가장자리부터 치자고 주장했고, 이 길이 1942년 11월 북아프리카 상륙으로 이어졌습니다. 1942~1943년의 지중해 작전은 오히려 영국에서의 병력 증강을 늦췄습니다.
계획 조직은 1943년 3월에 생겼습니다. COSSAC이라 부른 연합 계획단이고, 프레더릭 모건(Frederick Morgan) 중장이 이끈 영국·미국·캐나다 장교들이 1943년 7월 상륙 계획을 냈습니다. 8월 퀘벡의 쿼드런트 회담(Quadrant Conference)은 상륙 날짜로 1944년 5월을 제안했습니다.
그때까지 독일과의 싸움을 가장 많이 짊어진 나라는 소련이었습니다. 1943년 11월부터 12월까지 열린 테헤란 회담 뒤, 서방 연합국은 1944년 여름에 독일에 맞선 제2전선을 열기로 약속했고, 12월 24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를 최고사령관으로 골랐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은 제2전선이 동쪽 소련의 부담을 덜고, 프랑스 해방이 서유럽에서 독일의 자리를 약하게 할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노르망디에 발판을 잡으면 1940년 덩케르크 철수 뒤 처음으로 북유럽에 연합군이 다시 서게 됩니다.
이름도 둘로 나뉩니다. 오버로드는 땅·바다·하늘을 묶은 작전 전체의 암호명이고, 넵튠(Neptune)은 그 가운데 바다를 건너 상륙하는 단계의 암호명입니다. "D-데이"의 D는 중요한 작전의 첫날을 가리키는 표시일 뿐이라, 다른 작전에도 저마다의 D-데이가 있었습니다.
왜 노르망디였나
COSSAC은 후보를 두 곳으로 좁혔습니다. 하나는 파드칼레(Pas-de-Calais)와 피카르디 해안이고, 다른 하나는 캉(Caen)과 코탕탱(Cotentin)반도 사이 노르망디의 센만·칼바도스 해안이었습니다. 노르망디에는 큰 항구가 없었지만 넓은 해변이 있었고, 결국 이쪽이 뽑혔습니다.
항구가 없다는 약점은 물건으로 메웠습니다. 연합군은 '멀버리(Mulberry)'라 부른 인공 항구 두 개의 콘크리트·강철 부품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미국 해변용, 하나는 영국·캐나다 구역용이었습니다.
상륙 뒤의 연료 수요가 배로 나를 수 있는 양을 넘을 것이라, 바다 밑으로 까는 송유관 PLUTO(Pipeline Under the Ocean)도 준비했습니다. 전투만큼 군수(logistics)가 계획의 큰 몫이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큰 준비를 독일 정찰기에서 다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합군은 큰 미끼와 기만 작전으로, 주 상륙이 파드칼레에 올 것이라는 독일 지도부의 판단을 굳혔습니다. 미 의회조사국(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CRS) 자료에 따르면 독일 방어 병력의 대부분이 노르망디 상륙지에서 150마일 떨어져 있었습니다. 독일은 1944년 7월까지도 주력이 다른 곳에 내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람과 물자도 모였습니다. 1944년 상반기에만 물자와 장비 약 900만 톤이 북미에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왔고, 1943~1944년 미군 140만 명 넘게 상륙을 위해 들어왔습니다. 1944년까지 12개국 넘는 나라의 군인 200만 명 넘게 영국에서 기다렸습니다.
조수, 새벽, 날씨: 날짜를 고르는 조건
상륙 시각(H-hour)을 두고 육군과 해군의 생각이 갈렸습니다. 육군은 열린 해변을 건너는 시간을 줄이려고 물이 가장 높이 찬 만조에 내리자고 했습니다. 해군은 물이 빠진 간조에 해변 장애물 바깥에 배를 대고, 폭파 팀이 장애물을 치우자고 했습니다.
둘은 간조 뒤 세 시간 안, 새벽 직전부터 새벽 90분 뒤 사이에 첫 상륙을 하기로 타협했습니다. 이 조건이 맞는 날은 6월 5~7일과 18~20일 두 번뿐이었습니다. 계획자들은 날씨 탓에 갑자기 미룰 수도 있으니 이른 날짜가 바뀐 사정에 맞출 여유를 준다고 보았고, D-데이는 처음에 6월 5일로 정해졌습니다.
날씨는 정말로 나빠졌습니다. 낮은 구름은 폭격과 근접 항공 지원을 막을 정도였고, 파도는 상륙정을 덮칠 만했습니다. 이미 많은 배가 바다에 나와 있었지만 아이젠하워는 상륙을 24시간 미루고 기동부대를 불러들였습니다. 작은 배는 항구로 돌아가고 큰 배는 영국 해안 앞을 돌았으며, 군인들은 배에서 내리지 않았습니다.
준비 기간에도 희생이 있었습니다. 4월 28일 영국 데번셔의 슬랩턴 샌즈(Slapton Sands)에서 미 상륙함들이 독일 수상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차 상륙함(LST) 두 척이 가라앉고 한 척이 크게 부서졌으며, 미 해군·육군 700명 넘게 죽고 200명 넘게 다쳤습니다.
대서양 방벽과 두 가지 방어 생각
독일은 프랑스 북부 해안을 '대서양 방벽(Atlantic Wall)'이라 부른 요새들로 지키려 했습니다. 이름과 달리 이어진 벽은 아니었지만, 상륙 후보지들은 단단히 지켜졌습니다. 1943년 11월 B집단군 사령관으로 온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은 요새와 해변 장애물 공사를 크게 서둘렀습니다.
장애물은 상륙정을 막거나 부수려고 만든 것이었고, 많은 수가 지뢰를 달고 있었습니다. 만조가 되면 물 아래로 숨었습니다. 그렇다고 방어가 고르게 단단했던 것은 아닙니다. 독일 방어는 자주 미완성이었고 병력도 모자랐습니다.
방어를 어떻게 할지를 두고 독일 지휘부 안에서도 생각이 달랐습니다. 전쟁 뒤 독일 장교들을 신문한 기록에 따르면, 서부군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는 적이 내린 뒤 모아 둔 예비대로 빠르게 반격하는 방어를 생각했습니다. 롬멜은 해안에 띠처럼 병력을 두고 상륙 그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같은 회고에서 롬멜은 1943년 12월 해안을 둘러본 뒤 가장 그럴듯한 상륙지로 스헬데강 어귀, 솜강 어귀, 센만 서쪽을 꼽았습니다. 지뢰를 5,000만~1억 개 묻는 것을 마지막 목표로 삼았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그래도 독일 최고사령부가 상륙을 예상한 곳은 해협이 가장 좁은 파드칼레였습니다.
6월 6일: 밤의 공수와 새벽의 다섯 해변
6월 6일 자정을 조금 넘겨 공수 부대가 먼저 내렸습니다. 미 82·101공수사단과 영국 6공수사단의 낙하산병 1만 8,000명이 상륙 해변 뒤쪽에 떨어졌습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The National WWII Museum)은 공수 부대 약 2만 3,400명이 항공기와 글라이더 822대로 노르망디에 들어왔다고 적습니다.
영국 공수 부대의 첫 목표는 캉 운하와 오른(Orne)강의 다리들이었습니다. 해변에서 안으로 나가는 길을 지키고 독일의 반격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낙하산병들은 정해진 강하 지역에서 멀리 흩어졌습니다. 이 흩어짐은 오히려 독일 지휘부를 헷갈리게 해, 많은 이가 훨씬 큰 부대가 내렸다고 믿었습니다.
새벽, 노르망디 해안 앞에는 미국·영국의 배 7,000척 가까이가 16만 명 가까운 병력을 싣고 와 있었습니다. 함대는 하루 늦춘 뒤 소해정이 미리 열어 둔 다섯 항로를 따라 해협을 건넜습니다. 독일 지휘관들은 궂은 날씨의 영향을 크게 보았고 북동쪽 파드칼레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이 새벽에 허를 찔렸습니다.
순양함과 전함이 먼저 해안의 요새와 거점을 포격했고, 이어 항공기가 공격했습니다. 유타 앞의 전함 네바다(Nevada)는 14인치 포탄 337발과 5인치 포탄 2,700발 가까이를 쐈습니다. 그러나 해군과 육군 항공대의 포탄·폭탄 대부분은 독일 진지보다 훨씬 뒤에 떨어졌습니다.
오전 6시 30분부터 미국·영국·캐나다의 6개 보병 사단이 약 50마일 해안에 걸친 다섯 해변에 내렸습니다. 서쪽의 유타(Utah)와 오마하(Omaha)는 미국, 골드(Gold)·주노(Juno)·소드(Sword)는 영국과 캐나다의 몫이었습니다. 미 4보병사단은 유타에서 안으로 나아갔고, 영국·캐나다 사단들도 골드·주노·소드에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캐나다 보훈부에 따르면 주노에는 캐나다군 1만 4,000명이 내렸고, 그날 359명이 전사했습니다.
푸앵트 뒤 오크(Pointe du Hoc)는 유타와 오마하를 겨눌 수 있는 독일 포가 있던 높이 100피트의 절벽입니다. 미 2레인저대대 200명 넘게 이 절벽을 기어올랐는데, 꼭대기의 포는 나무 모형으로 바뀌어 있었고 진짜 포는 더 안쪽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연합군 항공대가 이날 1만 4,000회 넘게 출격했습니다.
오마하 해변의 아침
연합군 사상자가 가장 많이 나온 해변은 오마하였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첫 보병 물결보다 5분 먼저 수륙 양용 전차 64대가 해변에 올라야 했습니다. 이날 오마하에만 미군 3만 4,000명 넘게 내렸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 소장 샘 콕스(Sam J. Cox)의 글 H-Gram 031에 따르면 그 가운데 27대가 거친 바다에 가라앉았습니다. 다른 일곱 척의 전차 상륙정(LCT)에서 바다에 띄운 28대 가운데 해변까지 2~3마일을 헤엄쳐 닿은 것은 2대뿐이었고, 일부 지휘관은 스스로 판단해 전차를 해변까지 그대로 실어 갔습니다.
사전 포격도 짧았습니다. H-Gram 031은 오마하의 해안 포격이 30분뿐이어서, 단단히 숨긴 독일 포대 대부분을 없애기에 모자랐다고 씁니다. 같은 NHHC의 넵튠 글은 미국 구역 해변의 포격에 한 시간이 주어졌다고 적어, 두 글의 숫자가 다릅니다. 육군은 독일 예비대가 반응할 시간을 줄이는 쪽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봤습니다.
상륙 직전 B-24 폭격기 450대가 해변을 폭격하러 왔지만, 구름 탓에 폭탄 1만 3,000발이 해변을 넘어 너무 멀리 떨어졌습니다. 해변을 지킨 것도 예상한 약한 수비 사단이 아니라 352보병사단이었습니다. IWM은 미군이 오마하에서 패배에 가까웠던 까닭으로 사전 폭격·포격이 강한 거점을 없애지 못한 것과, 동부전선에서 경험을 쌓은 유능한 독일군을 함께 듭니다.
장애물을 치우는 팀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오마하에서는 16개 팀이 통로 16개를 열 계획이었지만 연 것은 5개였고, 모든 통로가 열린 것은 이틀 뒤였습니다. 밀물은 10분에 1피트씩 차올랐습니다. 해군 폭파대원은 오마하에서 31명이 전사하고 60명이 다쳤고, 유타에서는 6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다쳤습니다.
오전 8시 30분 무렵 오마하 해변은 부서진 상륙정과 전차, 차량, 치우지 못한 장애물로 가득했습니다. 해변과 밀물 속에는 수백 명의 주검이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해군 해안 지휘관(beachmaster)은 돌격 부대 말고는 더 이상 상륙하지 말라고 멈춰 세웠습니다.
구축함(destroyer)들은 그보다 조금 앞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8시 무렵부터 구축함들이 독일 진지를 쏘기 시작했고, 몇 척은 스스로 판단해 해변에서 800~1,000야드까지 다가갔습니다. 9시 50분에는 미 구축함 전부와 영국 구축함 세 척에 해변으로 다가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보다 앞서 상륙 초반에는 구축함 코리(Corry)가 기뢰에 걸려 30분이 안 되어 가라앉았고, 24명이 배와 함께 갔습니다.
해변의 병사들은 지휘관 다수를 잃은 채 해변 뒤 100피트 높이의 절벽을 싸우며 올랐습니다. 미 해외전쟁기념물위원회(American Battle Monuments Commission, ABMC)의 안내서는 미 1·29보병사단이 장애물투성이 해변에서 200야드까지 이어진 열린 땅을 지나 가파른 절벽을 올랐고, 그날 끝에 미군이 오마하를 위태롭게 쥐고 있었다고 씁니다. 1보병사단 참모장 스탠호프 메이슨(Stanhope Mason) 대령은 구축함의 포격이 없었다면 해변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숫자와 해석
D-데이 하루에 몇 명이 내렸을까요? 답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NHHC의 넵튠 글은 13만 2,500명 가까이, IWM은 13만 2,000명 넘게, 아이젠하워 대통령 도서관은 13만 3,000명 가까이라고 적습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의 안내서는 2017년판에서 15만 6,000명, 2024년판에서 16만 명 가까이로 적었습니다.
NHHC 개요의 "16만 명 가까이"는 새벽에 해안 앞 배에 실려 있던 인원이고, 다른 자료들은 땅에 내린 인원으로 적습니다. 왜 서로 다른지는 어느 자료도 따로 풀어 적지 않습니다.
사상자는 더 어렵습니다. 박물관의 2024년판 안내서는 연합군 사상자(전사·부상·실종)를 1만 300명 넘게로 적고, 그 가운데 약 2,400명을 오마하로 셉니다. 2017년판은 포로까지 합친 나라별 숫자로 미국 6,603명(전사 1,465명), 영국 2,700명, 캐나다 1,074명(전사 359명)을 적었습니다. 독일 쪽은 4,000~9,000명으로 추정했습니다.
전사자만 따로 세면 더 갈립니다. H-Gram 031은 흔히 약 1만 명 사상에 2,500명 사망으로 보지만, 최근 연구는 대부분 오마하에서 나온 약 4,500명 사망을 말한다고 적습니다.
D-데이 병력과 사상자의 숫자는 대부분 어림값이고, 자료마다 크게 다릅니다. 미 육군 공식 전사의 저자 고든 해리슨(Gordon A. Harrison)도 부대별로 정확한 손실 숫자는 앞으로도 나오기 어렵다고 보았고, 5군단 부대사는 1사단과 29사단을 포함한 군단의 D-데이 손실을 2,374명으로 적었습니다.
해석은 어떨까요? IWM은 D-데이를 전쟁사에서 가장 큰 상륙 침공이라고 부르고, CRS도 역사상 가장 큰 상륙 공격으로 여겨진다고 적습니다. D-데이 뒤에는 다른 전선들의 노력도 있었습니다. 오버로드 직후 시작된 소련의 바그라티온(Bagration) 작전은 독일 중부 집단군을 무너뜨렸습니다.
D-데이 하루에만 눈길이 쏠리면 노르망디 전역 전체의 뜻이 가려지기 쉽습니다. NHHC 개요는 넵튠과 그 뒤의 힘든 돌파가 서유럽 해방과 1945년 5월의 승리를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고 씁니다. 하루의 상륙과 석 달의 전투, 그리고 동부전선을 함께 놓고 봐야 그날의 자리가 보입니다.
그 뒤: 노르망디 전투와 기억
상륙은 시작이었습니다. 6월 11일까지 교두보가 굳어져 연합군 32만 6,000명 넘게, 장비 10만 톤 넘게 해협을 건넜습니다. 6월 말까지는 병력 85만 명 넘게와 물자 57만 톤이 노르망디 해변에 내렸습니다. 차량은 박물관이 15만 대 가까이, 아이젠하워 도서관이 14만 8,000대로 적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상륙 뒤가 더 위험했습니다. D-데이에 잃은 가장 큰 미 해군 배는 구축함 코리였지만, 미 해군에게는 그 뒤 한 주가 D-데이 자체보다 큰 손실이었습니다. 병력과 물자의 흐름을 지키던 배들이 주로 기뢰에 가라앉았습니다.
땅에서는 석 달 동안 노르망디 곳곳에서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영국·캐나다군이 캉을, 미군이 셰르부르(Cherbourg)를 해방했고, 미군은 생로(Saint-Lô) 근처에서 돌파했습니다. 연합군은 프랑스·폴란드 부대와 함께 팔레즈(Falaise) 포위망에서 독일군을 에워쌌습니다. 높은 산울타리와 움푹한 길로 이뤄진 노르망디의 보카주(bocage)는 뚫기 어려워 방어하는 독일군에게 유리했습니다.
캐나다 보훈부에 따르면 노르망디 전투 전체에서 캐나다군 9만 명 넘게 싸웠고, 5,000명 넘게 죽고 1만 3,000명 넘게 다쳤습니다. 파리는 8월 25일 해방됐습니다. 8월 말 독일군은 프랑스에서 물러나고 있었지만, 9월이 되자 연합군의 기세도 느려졌습니다. 독일은 1945년 5월 8일에 항복했습니다.
오마하 해변에서 병사들이 절벽을 올라 닿은 고원, 콜빌쉬르메르(Colleville-sur-Mer)에는 지금 노르망디 미군 묘지가 있습니다. 외국 땅에 있는 미국의 2차 대전 상설 묘지 14곳 가운데 하나이고, 프랑스 정부가 이 땅을 영구히 대가 없이 내주었습니다. 묘비 9,388기가 줄지어 서 있고, 실종자 1,557명의 이름은 이름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묘지는 1956년 7월 18일에 봉헌됐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이 싸움을 "대성전(the great crusad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6월 5일에 써 둔 실패 메모는 끝내 쓰이지 않았고, 지금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도서관이 그 메모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멀버리와 송유관이 보여 준 보급의 무게를 오늘의 군수 개념으로 이어 봅니다.
- 구축함과 호위함: 같은 군함인데 이름은 왜 다를까: 오마하 앞바다에 다가간 구축함이라는 배의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2차 대전에서 시작된 기술들을 따라가 레이저 무기의 자리까지 갑니다.
- 덩케르크 철수: 1940년 연합군이 대륙을 떠난 장면입니다. 노르망디는 그 뒤 처음으로 돌아간 자리였습니다.
- 벌지 전투: 노르망디 뒤 1944년 12월, 독일이 아르덴에서 벌인 반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