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하나를 얻는 데 두 달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1215년 잉글랜드의 로체스터 성은 성탑의 한 모서리가 무너진 뒤에도 버텼고, 먹을 것이 떨어지고 나서야 문을 열었습니다. 중세의 성 공격은 돌을 던지는 기계의 싸움이면서, 이처럼 시간과 굶주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그 몇 세기 동안 공격하는 쪽의 기계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이 줄을 당겨 돌을 던지던 기계는 무거운 추가 떨어지는 힘으로 던지는 평형추 투석기가 되었고, 평형추 투석기는 다시 화약 대포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성벽도 두 겹 성벽을 거쳐, 화약 시대에는 아예 다른 모양의 요새로 바뀌었습니다.

그 흐름을 기록에 남은 사건과 오늘 남아 있는 성으로 따라가 봅니다. 투석기라는 기계가 어떻게 돌을 던졌는지도 함께 살핍니다.

공성이란 무엇이었나

도시나 요새를 빼앗으려고 쓰던 군사 방법을 공성(siege)이라 합니다. 프랑스 군사박물관(Musée de l'Armée)의 전시는 15세기 초 공성에 두 종류의 포가 함께 쓰였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는 나무 틀에 기계의 힘을 실어 돌을 던지는 포였고, 다른 하나는 화약이 타는 힘으로 큰 돌 포탄을 쏘는 대포였습니다.

기계식 포는 아무나 다루지 못했습니다. 박물관은 이 기계를 다룬 전문 기술자 엔지뇌르(engineurs)를 "오늘날 엔지니어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성을 치는 일은 처음부터 기술자의 일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그렇다고 공성이 언제나 성벽을 부수는 싸움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로체스터 성의 기록이 좋은 예입니다. 1127년 무렵 지은 성탑이 있는 이 성을 1215년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지키자, 존 왕이 성을 둘러쌌습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의 설명에 따르면 존 왕의 군대는 먼저 바깥 성벽 밑으로 파 들어갔고, 돼지 40마리의 기름으로 성탑 밑 굴에 불을 질러 성탑의 남쪽 모서리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래도 지키는 이들은 버텼습니다. 두 달을 견딘 끝에 그들을 항복하게 만든 것은 굶주림이었습니다.

사람이 당기던 투석기에서 평형추로

투석기의 역사는 5~6세기 중국에서 시작합니다. 처음 투석기에는 추가 없었습니다. 추 대신 여러 가닥의 줄을 매달고, 여러 사람이 그 줄을 당겼습니다. 이런 기계를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은 사마르칸트 가까운 펜지켄트(Pendzhikent) 궁전의 벽화로, 7세기 말이나 8세기 초의 것입니다.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기계 둘레에 설 수 있는 사람 수도 정해져 있었고, 줄을 당기는 사람들도 다칠 위험이 있었습니다. 타넬 사이므레(Tanel Saimre)가 2006년 에스토니아 고고학 학술지(Estonian Journal of Archaeology)에 낸 논문은 이런 까닭으로 사람 대신 평형추(counterweight)를 쓰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평형추 투석기의 가장 이른 기록은 12세기 중엽 이슬람 나라들과 비잔티움, 유럽의 지중해 지역에서 나옵니다. 그림으로는 12세기 말 이집트의 것이 처음입니다. 추를 다는 생각이 동방에서 들어왔는지 유럽에서 따로 나왔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영어에서 트레뷰셋(trebuchet)은 평형추로 움직이는 공성 기계를 가리킵니다. 처음에는 그런 기계 가운데 가장 크고 힘센 것만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움직이는 방식은 단순합니다. 도는 축 위에 긴 막대를 얹는데, 축이 막대를 긴 팔과 짧은 팔로 나눕니다. 짧은 팔에는 무거운 추를, 긴 팔에는 돌을 담는 끈을 답니다. 장전하면 긴 팔 끝이 땅에 닿고 추는 높이 들립니다.

방아쇠를 놓으면 추가 떨어지면서 긴 팔과 끈이 빠르게 휘둘려 올라갑니다. 알맞은 순간에 끈이 돌을 놓습니다. 높이 들린 추가 가진 위치 에너지가 날아가는 돌의 운동 에너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놀이터의 시소를 떠올리면 그림이 잡힙니다. 실제로는 많이 다릅니다. 시소는 두 사람이 번갈아 무게를 싣지만, 투석기는 한 번 떨어지는 추의 힘을 긴 팔과 끈 끝으로 모아 한 번에 씁니다. 원리만 보면 오래된 장대 끈(pole-sling)과 비슷하고, 사람의 근육 대신 추의 무게를 쓴 것입니다.

평형추 투석기의 원리를 막대와 원으로만 그린 두 칸 도표. 왼쪽은 장전한 모습으로, 받침 위의 축이 긴 막대를 긴 팔과 짧은 팔로 나누고, 긴 팔 끝은 땅에 닿아 있으며 짧은 팔 끝의 추는 들려 있다. 오른쪽은 놓은 뒤의 모습으로, 추가 떨어지고 긴 팔과 끈이 위로 휘둘려 끈이 탄을 놓는다. 아래에 추의 위치 에너지가 탄의 운동 에너지로 바뀐다는 설명이 있다. 치수와 비율은 넣지 않았다
평형추 투석기가 움직이는 차례. 치수와 비율은 일부러 넣지 않았습니다 (도표)(도표)

기록 속 투석기

13세기부터 투석기는 유럽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13세기 초 독일·덴마크 세력의 정복 때부터 이런 기계가 여러 번 쓰였습니다. 그곳에서 투석기에 관심이 큰 것도 그 때문이고, 사이므레 자신도 투석기를 실험용으로 다시 만들어 시험했습니다.

『리보니아 연대기』는 1219년 12월 튜턴 십자군이 메소텐(Mesoten) 요새를 포위한 일을 적었습니다. 연대기에 따르면 "마침내 더 큰 기계가 세워져 큰 돌들이 요새로 날아갔습니다". 요새 안의 사람들은 돌의 크기를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돌이 이어지며 방벽의 널빤지와 통나무가 떨어져 나가자 사람들은 방벽을 떠났고, 피할 곳이 없자 결국 항복을 청했습니다.

16세기에도 투석기가 다시 등장한 기록이 있습니다. 1521년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테노치티틀란(오늘의 멕시코시티)을 포위했을 때 대포 탄약이 떨어지자, 투석기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첫 발은 실패였습니다. 투석기가 전쟁에 쓰인 마지막 기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벽 쪽의 변화: 겹겹의 성

공격하는 기계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지키는 쪽의 성벽에도 긴 역사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그 오래된 기준이었습니다. 유네스코는 447년에 둘째 방어선을 더한 테오도시우스 2세의 6,650 m 육지 성벽을 군사 건축의 으뜸 기준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13세기 말에는 두 겹 성벽이 군사 건축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성벽 안에 다시 성벽을 두른, 동심원 모양의 성입니다. 웨일스 북부의 보마리스(Beaumaris) 성과 할렉(Harlech) 성은 이 이중 성벽 동심원 구조를 매우 짜임새 있는 중심 설계와 합친 예로 세계유산에 올라 있습니다.

이 성들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재위 1272~1307년) 때 이루어진 식민화와 방어 공사의 예입니다. 공사는 1283년에 시작했고, 1294년 마도그 압 슬리웰린(Madog ap Llewelyn)이 일으킨 웨일스인의 봉기로 때때로 멈췄습니다. 카나번(Caernarfon)은 1330년, 보마리스는 1331년까지 공사가 이어졌습니다.

이 성들을 설계하고 공사를 지휘한 이는 왕의 수석 건축가 제임스 오브 세인트 조지(James of St George, 1230년 무렵~1309년)였습니다. 이 성들에는 바비칸, 도개교, 방비된 성문, 탑, 커튼월 같은 중세 성의 형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프랑스 옥시타니 지방의 카르카손(Carcassonne)도 두 겹 성벽의 도시입니다. 주로 13세기에 갖춰진 거대한 방어 체계가 장벽으로 나뉜 두 겹의 성벽으로 도시를 감쌉니다. 다만 오늘 보는 모습에는 19세기 후반 근대 보존학을 세운 사람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비올레르뒤크(Viollet-le-Duc)의 긴 복원이 섞여 있습니다. 그의 손길은 두 겹 성벽에도 닿았습니다.

화약이 바꾼 것

첫 화약 대포는 1320년대에 이미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투석기는 거의 두 세기 동안 대포와 겨룰 수 있었습니다. 대포는 늘 불씨와 화약이 있어야 했고, 화약은 습기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투석기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쓸 수 있었고, 거의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나무와 돌로 만들었습니다.

대포가 투석기를 넘어선 것은 더 발전한 15세기의 대포가 나온 뒤였습니다. 이 무렵 흔히 단조 철로 만든 대포는 매우 커질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군사박물관에 따르면 1409년에서 1411년 사이 브라반트 공작 앙투안 드 부르고뉴(Antoine de Bourgogne)가 35톤이 넘는 봄바드(bombard, 큰 돌 포탄을 쏘는 대포)를 만들게 했습니다.

화약포는 차츰 널리 쓰이며 기계식 포를 밀어냈습니다. 마지막 기계식 포는 16세기 전반에 사라졌습니다.

15세기 초 공성에 함께 쓰인 두 종류의 포를 나란히 놓은 비교 도표. 왼쪽 기계식 포는 힘의 출처가 떨어지는 추나 당기는 줄, 재료는 나무와 돌, 날씨는 어떤 날씨에도 쓸 수 있음, 다루는 사람은 전문 기술자 engineurs. 오른쪽 화약포는 힘의 출처가 화약이 타는 힘, 재료는 단조 철이나 청동 포신과 화약, 날씨는 화약이 습기를 견디지 못함, 예로 1409~1411년 35톤이 넘는 봄바드. 아래 띠에 1320년대 첫 대포, 거의 두 세기 동안 겨룸, 16세기 전반 마지막 기계식 포가 사라짐이 적혀 있다
기계식 포와 화약포. 이 글의 출처가 적은 차이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영국 왕립무기고 박물관(Royal Armouries)의 포트 넬슨 전시관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그레이트 터키시 봄바드(Great Turkish Bombard)"를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은 큰 돌 탄을 쏘던 봄바드를 "중세의 무거운 파괴 무기"라고 소개합니다.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무니르 알리(Munir Ali)에게 주문한 이 포는 포신과 약실을 따로 부어 만들어 나사처럼 맞물리게 했습니다.

화약 무기가 널리 쓰이자 성의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유네스코는 화약이 들어오면서 군사 기술과 건축이 크게 바뀌었고, 그 변화가 알라 모데르나(alla moderna), 곧 능보식(bastioned) 요새의 설계에 드러난다고 적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 방식이 태어난 곳은 거의 오로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땅이었습니다.

베네치아가 16~17세기에 지은 방어 시설은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의 여섯 곳으로 1,000 km 넘게 이어지며 세계유산에 올라 있습니다. 이 능보식 체계는 뒤에 유럽 곳곳으로 퍼졌습니다.

두 줄짜리 연표 도표. 위 줄 '공격하는 쪽'에는 5~6세기 중국의 사람이 당기는 투석기, 7세기 말~8세기 초 펜지켄트 벽화, 12세기 중엽 평형추 투석기의 첫 기록, 1219년 메소텐 공성, 1320년대 첫 대포, 1409~1411년 35톤 넘는 봄바드, 1521년 테노치티틀란의 투석기, 16세기 전반 기계식 포가 사라짐이 있다. 아래 줄 '지키는 쪽'에는 447년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둘째 방어선, 1127년 무렵 로체스터 성탑, 1215년 로체스터 공성, 13세기 카르카손의 두 겹 성벽, 1283~1331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성, 16~17세기 베네치아의 능보식 요새가 있다. 세기만 알려진 것은 흐린 띠로 대강의 자리에 두었다
공격하는 쪽과 지키는 쪽의 연표. 이 글의 출처에 나온 연대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남은 것과 모르는 것

성은 많이 남았지만 투석기는 남지 않았습니다. 덴마크 중세 센터(Middelaldercentret)는 남아 있는 중세 투석기가 하나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이 센터가 다시 만든 투석기도 중세의 그림과 글을 따라 지은 것입니다.

칼이나 갑옷과 달리 공성 기계는 너무 커서 온전히 남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간접 증거에 기댑니다. 2000년 에스토니아 빌랸디(Viljandi) 성 발굴에서 찾은 투석기용 둑이 그런 예이고, 글로 남은 기록과 복원 실험이 나머지를 채웁니다.

복원 실험이 중요한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사이므레는 투석기가 꽤 복잡한 기계라서 직접 다뤄 봐야 그 움직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얻은 경험은 기록이 비워 둔 곳을 채우고, 간단한 역학 분석은 기록 속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읽게 해 줍니다.

결국 중세 공성전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세 갈래에서 옵니다. 돌로 남은 성, 글로 남은 연대기, 그리고 오늘 다시 만들어 본 나무 기계입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그림이 다 그려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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