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4일 새벽 3시 40분, 영국 구축함(destroyer) 시카리(SHIKARI)가 프랑스 북쪽 항구 덩케르크(Dunkerque, 영어로 Dunkirk)를 떠났습니다. 22분 먼저 떠난 익스프레스(EXPRESS)와 함께 병사 약 1,000명과 부두에서 일하던 영국 해군 요원을 태운 배였습니다. 이 철수의 마지막 배였습니다.

작전을 시작할 때 세운 목표는 이틀 동안 4만 5,000명이었습니다. 끝났을 때 영국 항구에 내린 사람은 30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라 불린 덩케르크 철수는 왜 필요해졌고, 그 사이 9일 동안 바다와 모래밭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큰 배와 작은 배가 일을 나눈 방식과 철수를 막은 것들, 남겨진 사람과 장비, 그리고 자료마다 다른 숫자까지 따라가 봅니다.

1940년 5월: 어떻게 바닷가까지 몰렸나

1940년 5월 10일 새벽, 독일군이 중립국이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로 쳐들어가며 서부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벨기에 국왕의 요청으로 벨기에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쪽의 스당(Sedan)에서 프랑스 전선이 뚫렸고, 독일 기갑 부대는 해협 쪽으로 내달려 5월 20일 영불해협 해안에 닿았습니다.

독일군은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왔습니다. 불로뉴(Boulogne)는 5월 25일, 칼레(Calais)는 26일에 함락됐습니다. 그 사이 5월 19일에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가믈랭(Gamelin)에서 베강(Weygand)으로 바뀌었습니다.

영국 총리 처칠(Winston Churchill)은 6월 4일 하원에서 그때의 처지를 설명했습니다. 북쪽 군대가 아미앵(Amiens) 쪽으로 프랑스 주력과 다시 이어지지 못하자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벨기에·영국·프랑스 군대는 거의 둘러싸였고, 물러날 곳은 항구 하나와 그 옆 모래밭이었습니다.

벨기에군도 곧 항복했습니다. 날짜는 영국 공군 박물관(RAF Museum) 연표에 5월 27일로, 프랑스 국방부 자료에 5월 28일로 적혀 있습니다.

다이나모 작전: 이틀에 4만 5,000명을 바란 계획

바다 쪽 준비는 공세가 시작되고 열흘쯤 뒤에 시작됐습니다. 도버 해군 사령관 램지(Bertram Ramsay) 중장이 1940년 6월 18일 해군성에 보고서를 냈습니다.

5월 19일 육군성 회의는 이미 "아주 큰 병력의 위험한 철수"를 논의했습니다. 그때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래도 바다의 움직임은 도버 사령관이 맡고 쓸 수 있는 배를 그에게 준다는 것은 정해 두었습니다.

모래밭이 문제라는 것도 일찍 알았습니다. 덩케르크 동쪽 모래밭은 아주 완만하게 얕아집니다. 그래서 병사를 모래밭에서 앞바다의 배까지 실어 나를 작은 배가 많이 있어야 했습니다. 모래밭만으로 다 태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할 수 있다면 항구도 함께 써야 한다고 봤습니다.

남은 항구는 많지 않았습니다. 불로뉴에서는 5월 23일 철수가 시작돼 24일 끝났고, 칼레에서는 싸우지 않는 인원만 빠져나왔습니다. 영국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을 철수시킨다면 쓸 수 있는 항구는 덩케르크 하나였습니다.

5월 26일 일요일 오후, 해군성은 상황이 빠르게 나빠졌다며 다이나모를 힘껏 실행하라고 알렸습니다. 목표는 이틀 안에 B.E.F. 4만 5,000명까지 태우는 것이었고, 그 뒤에는 적의 공격으로 철수가 끝날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공식 시작 명령은 18시 57분에 나왔습니다. 수송선은 그보다 앞선 15시부터 이미 덩케르크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목표는 며칠 사이에 계속 바뀌었습니다. 램지는 첫 24시간 동안의 작전을 "가망 없는 시도"라고 불렀습니다. 그 뒤 전선이 조금 버티자 B.E.F. 약 17만 5,000명을 사흘~나흘에 태울 수 있어 보였습니다.

프랑스군 철수도 더해졌습니다. 처음 이야기된 숫자는 2만 5,000명이었고, 4만~5만 명을 거쳐 나중에는 15만 명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처칠은 일주일 전만 해도 2만~3만 명쯤 다시 배에 태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하원에서 털어놓았습니다.

9일을 한 장의 연표로

덩케르크 철수 연표와 날마다 영국 항구에 내린 인원 도표. 위쪽 띠는 1940년 5월 10일부터 6월 4일까지이고 5월 10일 서부 공세 시작, 5월 19일 베강이 가믈랭을 대신함, 5월 20일 독일 기갑 부대 해협 도달, 5월 23~24일 불로뉴 철수, 5월 25일 불로뉴 함락, 5월 26일 칼레 함락과 18시 57분 다이나모 시작 명령, 5월 27일 또는 28일 벨기에군 항복(자료에 따라), 5월 29일 저녁 항구에 첫 큰 공습, 6월 1일 두 시간마다 공습, 6월 2일부터 밤에만 철수, 6월 4일 3시 40분 마지막 배가 적혀 있다. 아래쪽 막대는 램지 보고서 부록 II의 날마다 합계로 5월 26일 4,247명, 27일 5,718명, 28일 18,527명, 29일 50,331명, 30일 53,227명, 31일 64,141명, 6월 1일 61,557명, 2일 23,604명, 3일 29,641명, 4일 27,689명, 합계 338,682명이다. 6월 2일부터의 막대에는 밤에만 철수했다는 표시가 있고, 부록이 완전하지 않다는 메모가 있다
1940년 5~6월 연표와 날마다 영국 항구에 내린 인원(램지 보고서 부록 II) (도표)(도표)

연표 아래 막대는 날마다 영국 항구에 내린 인원입니다. 첫 이틀은 하루 5,000명 안팎이었습니다(5월 26일 4,247명, 27일 5,718명). 28일에는 1만 8,527명으로 늘었습니다.

29일부터 6월 1일까지 나흘 동안은 날마다 5만~6만 명대가 내렸습니다. 가장 많은 날은 5월 31일로 6만 4,141명이었습니다. 부록의 열흘 치를 더하면 33만 8,682명입니다.

6월 1일이 고비였습니다. 그날 덩케르크와 모래밭 앞, 바닷길의 배들은 두 시간마다 공습을 받았습니다. 독일군은 새로 기뢰를 치운 가운데 바닷길의 출구를 해안 포격으로 누를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6월 2일부터 낮 철수를 멈췄습니다.

그 뒤로는 밤에만 배를 보냈습니다. 6월 2일 2만 3,604명, 3일 2만 9,641명, 4일 2만 7,689명이 내렸습니다. 마지막 밤에는 2만 7,000명이 빠져나왔고, 프랑스 북부 해군 사령관도 작전을 끝난 것으로 보자는 데 동의했습니다.

5월 26일 저녁 명령부터 마지막 배까지는 8일 하고 9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달력으로 세면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열흘입니다.

부두와 모래밭: 큰 배와 작은 배의 일 나누기

방파제와 모래밭에서 배가 일을 나눈 방식을 보인 단순한 그림. 실제 지도가 아니다. 왼쪽에 덩케르크 항구와 동쪽 방파제가 있고, 구축함과 수송선이 방파제에 붙어 병사를 태운다. 항구 입구에서 동쪽으로 약 10마일(약 16 km) 뻗은 모래밭이 있고, 모래밭이 아주 완만하게 얕아져 큰 배는 앞바다에 머문다. 작은 배(군함의 보트, 구명정, 민간 동력선)가 모래밭과 앞바다 사이를 오가고, 네덜란드 연안선(skoot)이 작은 배와 앞바다 군함 사이의 중간 배 노릇을 한다. 브레 앞바다에는 트럭을 줄지어 세운 임시 부두가 있다. 큰 배는 영국 항구로 돌아가 병사를 내린다
동쪽 방파제와 모래밭: 큰 배와 작은 배의 일 나누기. 실제 지도가 아닌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철수는 두 곳에서 했습니다. 하나는 덩케르크 항구의 동쪽 방파제(East Pier)였고, 다른 하나는 항구 입구에서 동쪽으로 10마일(약 16 km) 뻗은 모래밭이었습니다. 방파제에는 구축함과 수송선이 붙어 병사를 태웠습니다.

배가 몰려 큰 표적이 되자, 덩케르크의 해군 선임 장교는 구축함을 한 번에 한 척씩만 대게 했습니다. 방파제의 좁은 통로도 병목이었습니다. 태우는 속도를 높이려고 걸음을 재촉하자, 며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병사 수천 명이 두 시간 넘게 방파제 끝까지 뛰었습니다.

모래밭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큰 배는 앞바다에 머물고, 작은 배가 그 사이를 오갔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배를 지킬 해군 수병이 모자라 빈 배가 바다로 떠내려가는 일이 흔했고, 한꺼번에 몰린 병사들 때문에 물에 잠겨 가라앉는 배도 많았습니다. 두 문제는 나중에 고쳐졌습니다.

군도 손을 보탰습니다. 브레(Bray) 앞바다로 트럭을 줄지어 세우고 널판을 깐 긴 임시 부두를 만들었습니다. 패들 기선 같은 배가 대기에는 흔들렸지만, 작은 배에 병사를 태우는 데는 아주 쓸모 있었습니다.

큰 배와 작은 배 사이를 이은 것은 네덜란드 연안선이었습니다. 네덜란드식 연안 동력선 40척이 'skoot'라는 이름으로 소함대를 이뤘습니다. 모래밭에 대기에는 커서 주로 작은 배와 앞바다 군함 사이에서 중간 배 노릇을 했고, 어떤 배는 작전 동안 1,000명 넘게 날랐습니다.

민간 배도 나섰습니다. 런던 소방대의 소방정 매시 쇼(MASSEY SHAW)가 덩케르크로 건너갔고, 램스게이트와 마게이트의 구명정 선원들도 자기 배를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민간 동력선은 엔진이 낡고 종류가 제각각이었고, 대부분 지난여름부터 묶여 있었습니다. 엔진을 돌리는 것부터 일이었습니다.

배의 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램지는 900척 가까운 배와 보트를, 처칠은 "온갖 종류의 배 1,000척 가까이"를 말했습니다. 철수한 병력의 약 4분의 1은 상선대(Merchant Navy) 선원이 모는 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무엇이 철수를 막았나

적의 방해는 다섯 가지였습니다. 항공기로 뿌린 기뢰, 거센 공습, 어뢰정, 해안포, 잠수함입니다. 바닷길에는 자기 기뢰(magnetic mine)가 깔렸고, 때로 100대가 넘는 항공기가 한꺼번에 와서 남은 부두 하나와 모래 언덕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기뢰는 많이 깔렸지만, 기뢰에 맞았다고 확실히 알려진 영국 배는 둘뿐이었습니다. 램지는 배의 자기를 줄이는 처리(degaussing)를 한 배들이 이 바다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이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고 봤습니다. 적이 자기 기뢰가 아니라 항공기로 까는 계류 접촉 기뢰를 가졌다면 결과가 아주 달랐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가장 큰 위협은 하늘이었습니다. 5월 29일 저녁 항구에 배가 처음으로 많이 몰리자 큰 공습이 왔습니다. 어뢰정은 구축함 둘과 트롤선 둘에 피해를 냈고, 잠수함이 낸 피해는 없어 보였습니다.

날씨는 도왔습니다. 북풍이 조금만 불어도 파도가 일어 모래밭에서 태우는 속도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북쪽에서 센 바람이 불었다면 모래밭 철수는 불가능했을 텐데, 작전 내내 그런 날은 없었습니다.

영국 공군은 영국 남동부의 11전투비행단으로 엄호했지만 연료 때문에 덩케르크 위에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바다에 있던 많은 함장은 작전이 한창일 때 공군 엄호가 보잘것없어 보여 실망하고 놀랐다고 보고했습니다. 보고서에 실린 공군부 각주는 다른 사정을 적습니다. 해안에서 모든 공중전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고, 많은 적 공습이 실제로 요격됐다는 것입니다.

엄호가 완전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적이 주도권을 쥐고 공격 시간을 골랐고, 작전 지역은 영국 레이다 기지가 해 주는 요격 관제 범위 밖이었습니다. 초계기를 띄워 두고 적과 마주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공중전에서는 처음으로 초단파(VHF) 무선 전화로 전투기를 관제했습니다. 다만 새 장비가 모자라, 모든 비행대가 같은 주파수를 쓰도록 덜 효율적인 단파(HF) 무선으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항공기 손실은 자료마다 크게 다릅니다. 영국 공군 박물관 연표는 덩케르크 상공에서 영국 공군이 전투기 106대를 포함해 177대를, 독일 공군이 132대를 잃었다고 적습니다. 램지 보고서의 11전투비행단 표는 "격추로 평가한" 적기를 262대로 셌고, 처칠은 적어도 4대 1의 손실을 입혔다고 말했습니다.

남겨진 사람과 장비, 바다에서 잃은 것

모두가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 약 4만 명은 배에 타지 못하고 포로가 됐습니다. 대부분 68·12보병사단과 플랑드르 요새 지구의 부대로, 독일군의 전진을 늦추는 일을 맡았던 병사들입니다. 프랑스 국방부는 이들의 싸움을 작전이 성공한 이유의 하나로 적습니다.

장비도 남았습니다. 연합군은 대포 약 2,000문, 차량 6만 대, 많은 탄약과 연료와 보급품을 두고 떠났습니다. 처칠은 영국군이 대포 1,000문 가까이와 모든 수송 수단, 북쪽 군대의 모든 장갑 차량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병사는 돌아왔지만, 그 병사들이 쓸 대포와 차량과 군수(logistics) 물자는 프랑스에 남았습니다.

사람의 손실도 컸습니다. 그동안의 싸움에서 영국군 전사·부상·실종은 3만 명을 넘었습니다. 철수 중에도 배가 가라앉았고, 바다에서 잃은 사람은 4,000~5,000명에 이릅니다.

영국 배의 손실도 컸습니다. 구축함 칸의 41척 가운데 6척이 가라앉고 23척이 다쳤고, 수송선 29척 가운데 6척, 트롤선 33척 가운데 10척이 가라앉았습니다. 오가는 배가 많아 물에 빠진 병사 대부분을 건졌지만, 폭탄이나 어뢰를 맞고 빨리 가라앉은 배는 예외였습니다. 램지는 돌아오는 길에서만 병사 약 2,000명을 잃었을 것으로 봤습니다.

프랑스 해군도 함께 잃었습니다. 5월 29일 오후 프랑스 구축함 부라스크(Bourrasque)는 프랑스 병사를 태우고 가다 벨기에 앞바다에서 포격을 받았고, 폭발 뒤 빠르게 가라앉았습니다. 타고 있던 700~800명 가운데 거의 3분의 2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폭발의 원인은 프랑스 국방부 자료에 "아마 기뢰"로, 램지 보고서 부록에는 폭탄으로 적혀 있습니다.

33만인가 34만인가: 숫자가 다른 까닭

자료별 숫자 비교 도표. 철수 인원 전체는 램지 보고서 편지 약 330,000명, 램지 부록 II 합계 338,682명(완전하지 않은 목록), 영국 공군 박물관 연표 338,226명, 영국 공군 박물관 다른 쪽 338,000명, 처칠 하원 연설 335,000명 넘게, 프랑스 국방부 340,000명 넘게이고, 눈금은 320,000명에서 시작한다. 프랑스군은 램지 부록 IV 영국에 내린 123,095명(그 가운데 프랑스 배 20,525명), 프랑스 국방부 120,000명이다. 모래밭 몫은 램지 5월 28일~6월 1일 248,000명 가운데 100,000명 이상, 프랑스 국방부 거의 3분의 1이다. 배 수는 램지 900척 가까이, 처칠 1,000척 가까이다. 항공기는 영국 공군 박물관 영국 공군 177대 손실(전투기 106대 포함)과 독일 공군 132대 손실, 램지 보고서 11전투비행단 표의 격추로 평가한 적기 262대, 배의 사격으로 떨어뜨린 적기 35대, 처칠 적어도 4대 1이다. 아래 표는 램지 부록 I의 영국 배 손실로 구축함 칸 41척 가운데 6척 침몰·23척 손상, 수송선 29척 가운데 6척 침몰·8척 손상, 기뢰 제거함 36척 가운데 5척 침몰·4척 손상, 트롤선 33척 가운데 10척 침몰·2척 손상, 드리프터 24척 가운데 4척 침몰이다
같은 9일, 다른 숫자. 보고서·연설·박물관·국방부 자료의 값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철수 인원도 하나가 아닙니다. 램지는 보고서 첫머리 편지에 "약 33만 명"이라고 썼고, 부록의 날마다 합계는 33만 8,682명입니다. 영국 공군 박물관 연표는 33만 8,226명, 박물관의 다른 쪽은 33만 8,000명입니다. 처칠은 6월 4일 "33만 5,000명 넘게"를, 프랑스 국방부는 "34만 명 넘게"를 말합니다.

숫자를 읽을 때 볼 단서는 기록 안에 있습니다. 램지 부록은 몇몇 배가 인원을 적지 않아 목록이 완전하지 않다고 스스로 밝힙니다. "33만 5,000명 넘게"라는 숫자는 작전이 끝난 바로 그날 하원에서 나왔습니다. 프랑스 국방부는 작전 기간을 5월 28일~6월 4일로 잡지만, 영국 쪽 기록은 5월 26일부터 셉니다.

프랑스군의 몫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램지 부록 IV에는 영국에 내린 프랑스군이 12만 3,095명이고, 그 가운데 2만 525명을 프랑스 배가 날랐다고 적혀 있습니다. 프랑스 배로 프랑스 항구에 곧장 간 인원은 알 수 없다는 단서도 붙어 있습니다. 프랑스 국방부는 철수한 프랑스군을 12만 명, 벨기에군을 수천 명으로 적습니다.

프랑스 쪽 배도 적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구축함 9척, 그리고 불로뉴~셰르부르 해안에서 모은 트롤선·드리프터 같은 작은 배 167척이 주로 모래밭 앞에서 일했습니다.

모래밭에서 태운 몫도 갈립니다. 램지는 항구와 모래밭을 모두 쓸 수 있던 5월 28일~6월 1일에 내린 24만 8,000명 가운데 10만 명 넘게가 모래밭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국방부는 전체의 거의 3분의 1이 모래밭에서 철수했다고 적습니다. 제목의 "33만 명"은 이 여러 숫자 가운데 아래쪽 값에 가깝습니다.

"구출"과 "재앙" 사이

6월 4일 처칠은 하원에서 이 철수를 "구출의 기적(a miracle of deliveranc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구출에 승리의 성격을 붙이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했고, "철수로 전쟁에서 이기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일어난 일은 "엄청난 군사적 재앙"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연설 끝부분에는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전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국 1기갑사단과 51하일랜드사단은 프랑스에 남아 프랑스군과 함께 계속 싸웠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간 프랑스 병사 대부분은 며칠, 때로는 몇 시간 만에 브레스트(Brest)와 셰르부르(Cherbourg)로 돌아가 다시 싸움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6월 17일 프랑스 정부가 휴전을 청했고, 휴전은 6월 22일 르통드(Rethondes)에서 서명됐습니다. 그 사이 셰르부르에서 또 한 번의 철수가 있었습니다. 6월 18일 오후 4시 마지막 배가 떠날 때까지 영국·연합군 16만 명과 대포 300문 넘게를 실었습니다.

덩케르크라는 도시에도 상처가 남았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파괴율은 90%였고, 전쟁 전 건물 3,362채 가운데 1,524채가 완전히 부서지고 805채가 크게 상했습니다. 1940년의 폭격과 전쟁 끝 무렵 폭격이 각각 얼마나 부쉈는지는 가리기 어렵습니다. 재건은 1949년 9월 4일 시작해 1963년에 끝났습니다.

이 9일은 일찍부터 이야기가 됐습니다. 1949년 로베르 메를(Robert Merle)은 덩케르크 전투에서 나온 소설 『쥐드코트의 주말(Week-end à Zuydcoote)』로 공쿠르상을 받았고, 1964년 앙리 베르뇌유(Henri Verneuil)가 이 소설로 같은 이름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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