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8월 20일, 그리니치 표준시로 새벽 3시에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정전이 발효했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마주 선 정전선은 약 1,400 km였습니다. 1980년 9월에 시작된 전쟁이 8년 가까이 지나서야 멈춘 것입니다.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처음에 지휘관들에게 침공을 빨리 끝내고 손실을 줄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 전쟁이 왜 8년을 끌었고, 왜 바다의 유조선과 멀리 떨어진 도시, 화학무기로까지 번졌을까요? 침공과 역전, 바스라 앞의 소모전, 바다와 도시의 싸움, 정전까지 차례로 따라갑니다.
혁명과 샤트알아랍 수로
1979년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친미 성향의 샤(국왕)가 물러났습니다. 그 자리에 최고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샤트알아랍(Shatt al-Arab)이라는 수로가 있습니다. 상선이 드나드는 물길이고, 전쟁 동안 유엔의 중재가 번번이 막힌 문제도 전쟁 책임과 이 수로의 통제권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인정된 두 나라의 국경은 1975년 이란과 이라크가 맺은 국경·선린 조약에 적힌 선입니다.
이라크는 왜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의 정리로는 사담이 혁명 뒤 이란의 혼란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1990년에 나온 미 해병대 교범 FMFRP 3-203은 다른 사정도 적습니다. 호메이니가 이라크 시아파의 봉기를 부추기고 이라크 쿠르드의 반란을 돕고 있었고, 사담은 샤트알아랍만 되찾으려 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인구는 처음부터 크게 달랐습니다. 이란은 4,500만 명, 이라크는 1,600만 명이었습니다. FMFRP는 사담이 전쟁 대부분 동안 사상자를 줄이려 한 까닭으로 여론의 지지를 지키려는 계산과 적은 인구를 꼽습니다.
1980년 9월: 빠르게 끝날 줄 알았던 침공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군이 이란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력은 이란 남부의 후제스탄주를 향했고, 12개 사단 가운데 7개가 침공에 나섰습니다. 목표는 호람샤르, 아바단, 데즈풀, 아흐바즈 네 도시였습니다.
숙청을 겪은 이란 육군은 약 15만 명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라크군은 호람샤르에서 처음으로 거센 저항을 만났고, 10월 24일에야 도시를 장악했습니다.
유엔은 곧바로 움직였습니다. 9월 23일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이 헌장 99조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에 이 위협을 알렸습니다.
9월 28일 안보리 결의 479는 두 나라에 무력 사용을 즉시 멈추고 분쟁을 평화적으로 풀라고 했습니다. 유엔 평화유지활동 기록은 이 결의가 효과를 거의 내지 못했다고 짧게 적습니다.
1982년의 역전
이란에서는 파스다란(Pasdaran)이 정부의 주된 군사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바시즈(Basij)라는 준군사 조직도 생겼습니다. 1981년 11월 29일 보스탄에서 이란은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밀고 들어가는 이른바 인간 파도 공격을 처음 썼습니다.
1982년 봄 전세가 뒤집혔습니다. 이란군은 아바단 포위를 풀고 곧 호람샤르를 되찾았습니다. 1982년 6월 이라크군이 국경으로 물러나면서 전쟁의 첫 단계가 끝났습니다.
사담은 철수가 끝나기 전부터 협상을 제의했지만 호메이니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982년 7월에는 이란군이 이라크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공세는 이란 쪽에 큰 손실을 남기고 실패했습니다.
바스라 앞의 소모전
전쟁은 8년에 걸친 교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란은 전쟁 내내 이라크 남부의 도시 바스라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지켰고, 이라크에서는 1984년 무렵 정적 방어(static defense) 전략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란의 공세는 대부분 우기인 12월에서 4월 사이에 몰렸고, 그때마다 바스라 둘레의 방어선을 뚫으려 했습니다.
1986년 2월 10일 밤, 이란군이 샤트알아랍을 건너 이라크의 알파우반도를 차지했습니다. 1987년 1월 9일에는 바스라 둘레에서 카르발라 5 전투가 시작돼 2월 2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란 사상자가 7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FMFRP의 저자들은 그 숫자가 맞을 수도 있지만 이란의 손실이 더 적었을 것으로 보고, 이라크 사상자는 약 1만 명으로 봅니다.
무기를 들여오는 길도 두 나라가 달랐습니다. 이란은 금수와 제재 때문에 샤 시절 미국에서 들여온 첨단 항공기와 함정을 정비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이라크는 소련, 그리고 프랑스 같은 서방 나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FMFRP에 따르면 미국은 이라크가 옛 샤 정부와 맺은 알제 협정(Algiers Accord)을 지지한다고 밝힌 뒤 이라크를 돕기로 했고, 이란으로 가는 무기를 막는 스톤치 작전(Operation Staunch)을 폈습니다.
바다로 번진 전쟁: 유조선 전쟁
1984년 3월 이라크 공군이 프랑스제 쉬페르 에탕다르 전투기와 엑조세 대함 순항미사일(anti-ship cruise missile, ASCM)로 이란의 하르그섬 석유 수출 시설을 공격했습니다. 이란은 걸프를 오가는 중립국 배를 공격해 보복했고, 이라크는 하르그를 드나드는 유조선을 노렸습니다. 이것이 유조선 전쟁(Tanker War)의 시작입니다.
NHHC 집계로 1987년 말까지 이라크는 배를 283번, 이란은 168번 공격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여러 나라의 상선 선원 116명이 죽고 37명이 실종됐으며 167명이 다쳤습니다. 실제로 가라앉은 배는 드물었습니다. 처음에는 걸프의 석유 흐름이 끊길까 걱정이 컸지만, 공격이 실제로 한 일은 주로 보험료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1986년과 1987년에 상선과 유조선을 노린 공격이 더 잦아지자, 여러 나라가 따로 소해정과 호위함을 걸프로 보냈습니다. 1986년 11월 쿠웨이트가 자국 유조선을 지켜 달라고 외국에 요청했고, 소련이 먼저 응했습니다. 미국은 1987년 3월 쿠웨이트 유조선 11척에 미국 국적을 달게 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래야 미 해군이 그 배들을 법에 맞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미 해군의 호송 작전 어니스트 윌(Earnest Will)은 1987년 7월 24일부터 1988년 9월 26일까지 이어졌습니다. NHHC는 이를 2차 대전 뒤 가장 큰 해군 호송 작전으로 적습니다. 7월 22일 아랍에미리트를 떠난 첫 호송 선단에서, 유조선 브리지턴호가 24일 이란의 계류 접촉 기뢰에 부딪쳤습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Studies in Intelligence 글은 이 작전이 비판자들에게 미국의 중립 포기로 비쳐 논란이 됐다고 정리합니다.
바다의 사건은 미국 군함에도 닿았습니다. 1987년 5월 미 프리깃 스타크호가 이라크 항공기가 쏜 엑조세 두 발에 맞아 승조원 37명이 숨졌고, 이라크는 사고였다며 사과했습니다. 1988년 4월 14일에는 프리깃 새뮤얼 B. 로버츠호가 기뢰에 부딪쳐 10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이 기뢰는 1908년 러시아 설계를 바탕으로 한 이란제 사다프 02 기뢰였습니다.
나흘 뒤인 4월 18일 미 해군은 보복으로 사마귀 작전(Operation Praying Mantis)을 폈습니다. 하루 동안 이란의 감시 플랫폼 두 곳을 부수고 이란 함정 두 척을 가라앉혔으며 한 척을 크게 부쉈습니다. 그보다 앞선 1987년 10월 19일에도 미국은 님블 아처 작전(Operation Nimble Archer)으로 이란의 석유 플랫폼을 포격했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2003년에 이 공격이 자위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판결했습니다.
화학무기와 도시 전쟁
1983년 11월 3일 이란은 처음으로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쓰고 있다고 유엔에 알렸습니다. 사무총장이 보낸 전문가들은 1984년 3월 26일 보고서에서 만장일치로 결론을 냈습니다. 그들이 조사한 이란 지역에서 항공 폭탄 형태의 화학무기가 쓰였고, 작용제는 겨자 작용제와 신경 작용제 타분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쓰였는지는 주어진 시간과 자원으로 정하지 못했습니다.
화학무기 사용은 그 뒤로 넓어졌습니다. NHHC는 이라크가 이란의 반격을 막으려고 화학무기를 널리 썼다고 적습니다. 그전까지 이란 군인을 향해 포, 로켓, 항공기로 쓰던 화학무기를, 1987년 6월 28일에는 처음으로 이라크 항공기가 이란의 민간 표적에 떨어뜨렸습니다.
1988년 3월 16일에는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도시 할라브자가 화학 공격을 받았습니다. 화학무기가 무고한 주민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미국 백악관은 2003년 3월 기념 성명에서 이라크 공군이 겨자 작용제와 신경 작용제를 섞어 떨어뜨렸다고 적었습니다. 독일 연방정부 인권 담당관도 2013년 성명에서 이라크군의 공격으로 약 5,000명이 죽었다고 밝혔습니다. 정치적 책임은 사담 후세인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주장도 있었습니다. FMFRP 3-203의 부록에서 저자들은 보도된 작용제의 종류를 근거로 이란이 이 공격을 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5,000명 사망 보도도 의심했습니다. 이 글이 확인한 정부 성명들은 그 뒤에도 이라크군을 공격 주체로 적습니다.
화학무기금지기구(OPCW)는 이를 민간인을 상대로 한 화학무기 사용 가운데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은 사례로 기리고, 이 공격이 세계를 움직여 화학무기금지협약 협상을 마무리 짓게 했다고 말합니다. 협약은 1997년 발효했습니다.
도시도 싸움터가 됐습니다. 1984년 6월 9일 사무총장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가 두 나라에 민간인이 사는 도시를 일부러 공격하지 말라고 호소했고, 두 나라가 받아들였습니다. 유엔 조사단이 바그다드와 테헤란에 자리 잡았고, 이른바 "도시 전쟁" 휴전은 약 9개월 이어졌습니다.
휴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의 도시에 스커드 지대지 미사일을 많이 쏘기 시작했고, 1987년 가을 걸프에서 미국과 이란이 충돌한 뒤로 도시 전쟁은 더 커졌습니다. 높이 올라갔다 떨어지는 이런 미사일의 원리는 탄도미사일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결의 598과 정전
1987년 7월 20일 안보리는 결의 598을 채택했습니다. 결의는 즉시 정전하고, 땅·바다·하늘의 모든 군사 행동을 멈추며, 국제적으로 인정된 국경까지 모든 군대를 물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엔 감시단을 보내고 포로를 돌려보내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전문(前文)에서는 전쟁의 시작과 계속, 민간 도시 폭격, 중립 선박과 민항기 공격, 특히 1925년 제네바 의정서를 어긴 화학무기 사용을 개탄했습니다.
이라크는 결의를 환영했습니다. 이란은 거부하지는 않으면서도 "근본적인 결함과 모순"이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사이에도 전쟁은 이어졌습니다. 1988년 이란은 예상과 달리 이라크로 쳐들어가지 않았고, 이라크군은 4월 17일 알파우를 되찾았습니다. 7월 3일에는 미 해군의 이지스 순양함 빈센스가 이란항공 655편을 격추했습니다. 반다르아바스에서 두바이로 가던 정기편 에어버스 A300이었고, 승객과 승무원 290명이 모두 숨졌습니다.
NHHC의 정리로는 빈센스의 지휘실이 이 민항기를 함정을 공격하러 오는 이란 F-14 전투기로 잘못 판단했습니다. 미 해군의 공식 조사는 함장이 받은 정보와 짧은 판단 시간으로 보아 신중하게 행동했다고 결론짓고 징계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해군 안에서도 현장에서 이 비행기를 민항기로 맞게 본 다른 함장들처럼, 함장의 행동이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란은 지금도 이 격추가 고의였고 전쟁범죄라고 봅니다.
이란은 1989년 5월 17일 국제사법재판소에 미국을 제소했습니다. 미국이 여객기를 파괴하고 배상을 거부해 민간 항공에 관한 국제 협약을 어겼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1996년 2월 22일 "완전하고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렀다며 소송을 거뒀습니다.
1988년 7월 17일 이란은 결의 598을 받아들인다고 유엔 사무총장에게 공식으로 알렸습니다. 정전은 8월 20일 발효했고, 두 나라 외무장관의 직접 회담은 8월 25일 제네바에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정전을 지켜본 것은 유엔 이란-이라크 군사감시단(UNIIMOG)이었습니다. 가장 많을 때 약 400명, 그 가운데 군사 감시요원이 약 350명이었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국제적으로 인정된 국경까지 완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감시단은 1991년 2월 28일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 사이인 1990년 8월에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점령했습니다. 안보리는 결의 678로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까지 물러나지 않으면 다국적 연합군이 모든 필요한 수단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숫자로 남은 것, 남지 않은 것
NHHC는 이 전쟁에서 양쪽 모두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적습니다. FMFRP는 두 나라가 손실 숫자를 자기 목적에 맞게 꾸준히 조작했다고 지적합니다. 이 교범이 옮겨 적은 1988년 4월 무렵의 추정은 이란 사망 45만~73만 명, 이라크 15만~34만 명입니다.
교범을 쓴 미 육군대학원 전략연구소의 두 연구자는 이란의 공세가 주로 우기에 몰렸던 점 등을 들어 미국 남북전쟁 같은 규모의 피해는 일어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이 범위와 해석은 한 교범의 것이고, 이 글이 확인한 공식 자료 가운데 전쟁 전체의 사상자를 따로 집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NHHC의 "양쪽 모두 수십만 명"과 나란히 읽어야 합니다.
추정의 폭만큼 분명한 숫자도 있습니다. 1987년 말까지 유조선 전쟁에서 숨진 상선 선원 116명, 스타크호의 37명, 이란항공 655편의 290명이 그렇습니다. 할라브자에서는 수천 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숫자 하나하나가 사람이라는 점은 범위로 적힌 추정에도 똑같이 해당합니다.
결의 598은 사무총장에게 전쟁 책임을 조사할 공정한 기구를 맡기는 문제를 두 나라와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1991년 12월 사무총장은 이 책임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더 따져서 얻을 것이 없고 평화를 위해 해결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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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클랜드 전쟁: 대서양 끝의 해전과 상륙: 바다의 싸움을 다룬 또 다른 냉전기 전쟁사 글입니다.
- 걸프 전쟁(1991): 사막의 방패에서 사막의 폭풍까지: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뒤에 이어진 전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