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7월 1일 오전 7시 30분, 프랑스 북부 솜(Somme)강 북쪽의 완만한 농지에서 영국군 보병이 참호 밖으로 나섰습니다. 일주일 동안 150만 발 넘는 포탄을 쏟아부은 뒤였습니다. 그날이 저물 때까지 영국군 사상자는 57,470명, 그 가운데 전사자는 19,240명이었습니다.
영국 군사사에서 하루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날입니다. 오늘 영국에서 솜은 1차 세계대전의 헛됨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됐습니다. 그러나 전투는 그 뒤로도 141일 동안 이어졌고, 싸운 것도 영국군만이 아니었습니다.
왜 하필 솜강이었고, 그 많은 포탄은 왜 철조망을 끊지 못했을까요? 첫날 뒤 넉 달 반 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자료마다 다른 숫자와 엇갈리는 기억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왜 솜강이었나
1914년 8월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유럽의 싸움은 벨기에와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거의 1,000 km의 참호선에서 멈춰 섰습니다. 기관총과 저격수, 포병이 지키는 진지를 뚫고 결정적으로 돌파하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18개월이 흘렀습니다.
1915년 12월 연합국 지휘관들은 이듬해 여름 솜강 지역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함께 공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프랑스 총사령관 조프르(Joseph Joffre)가 1915년 말에 짠 큰 계획, 곧 1916년에 모든 전선에서 독일을 몰아붙인다는 계획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장소를 고른 주된 까닭은 서부 전선에서 두 나라 군대가 맞닿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이 이 공격의 주역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1916년 2월 21일 독일군이 요새 도시 베르됭(Verdun)을 공격했고, 늦봄까지 그 방어에 힘을 쏟은 프랑스는 솜에 보낼 몫을 줄여야 했습니다. 이제 영국이 앞장서야 했습니다. 조프르는 베르됭에서 독일군을 끌어내려고 영국군 총사령관 헤이그(Douglas Haig)에게 되도록 빨리 공세를 시작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앞장선 영국군은 대부분 새 얼굴이었습니다. 1914년 전쟁장관 키치너(Kitchener)가 지원병으로 "신군(New Armies)"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안에는 같은 동네의 친구·친척·직장 동료가 함께 입대한 친구 대대(Pals battalions)도 있었습니다. 솜 전투는 그때까지 영국군이 벌인 가장 큰 공세였고, 직업 군인이 아닌 민간인 지원병이 대부분인 시민 군대가 치른 첫 공세였습니다.
계획은 두 사람이 짰습니다. 헤이그가 전투 전체의 방향을, 롤린슨(Henry Rawlinson)이 첫날 공격할 제4군을 맡았습니다. 롤린슨은 더 제한된 공격을, 헤이그는 더 먼 목표를 원했습니다. 영국군 전체가 그렇듯 두 사람 모두 이만한 규모의 공세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의 포격
포격은 1916년 6월 24일 시작됐습니다. 독일군 앞의 철조망을 끊고, 참호 방어 시설과 포병을 부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전투 전 일주일 동안 쏜 포탄은 150만 발이 넘습니다.
영국군은 독일군이 이 포격에 무너져, 보병이 무인지대(no man's land)를 건너가 독일 참호를 그냥 차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실제로는 대포가 너무 넓은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포탄의 약 3분의 2는 유산탄(shrapnel)이었는데, 유산탄은 콘크리트 엄체호(dugout)에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30%까지가 터지지 않았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모자란 것은 포탄이 아니라 대포였습니다. 포탄은 넉넉했지만 큰 포탄을 쏘는 중포가 부족했고, 헤이그가 큰 전진을 바란 탓에 이 제한된 화력이 독일군 첫째와 둘째 방어선에 나뉘었습니다. 롤린슨의 판단과는 반대였습니다. 독일 포병도 제압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첫날 결정적인 문제가 됩니다.
보병 돌격은 원래 6월 29일이었지만 날씨가 나빠 48시간 미뤄졌습니다. 포격은 이틀 늘었지만 더 쏠 포탄은 없었습니다.
포격 기간은 자료마다 조금 다르게 적힙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과 영연방 전쟁묘지위원회(CWGC)는 7일이라고 씁니다. 독일 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DHM)은 같은 쪽 안에서 "일주일"과 "닷새"를 함께 쓰고, 미국 국립 1차 대전 박물관의 연표는 닷새라고 적습니다.
1916년 7월 1일 오전 7시 30분
공세는 7월 1일 오전 7시 30분에 시작됐습니다. 영국군 공격 전선은 북쪽 세르(Serre)에서 남쪽 몽토방(Montauban) 근처까지였고, 그보다 북쪽 고메쿠르(Gommecourt)에서는 견제 공격을 했습니다. 영연방군 13개 사단이 고메쿠르 북쪽부터 마리쿠르(Maricourt)까지 공격했고, 그 남쪽에서 프랑스군이 함께 나섰습니다.
대부분의 곳에서 포격은 철조망을 끊지도, 엄체호를 부수지도 못했습니다. 일부 고위 지휘관은 경험 없는 신군 병사가 복잡한 전술을 해내지 못하리라 보고, 보병에게 길고 촘촘한 줄로 나아가라고 명했습니다. 멀쩡한 대피호에서 나온 독일 기관총 사수들이 무인지대를 건너오는 영국 보병에게 사격을 퍼부었고, 제압되지 않은 독일 포병도 큰 피해를 냈습니다.
대부분의 공격선에서 영국 보병은 목표를 잡지 못했습니다. 독일 참호에 들어갔다가 밀려난 부대도 있었고, 곳에 따라 그대로 남은 철조망을 넘지 못한 부대도 있었습니다. 가운데의 티에발(Thiepval)에서는 제36(얼스터)사단이 슈바벤 보루(Schwaben Redoubt)를 잡았지만, 양옆이 나아가지 못해 물러나야 했습니다.
남쪽은 달랐습니다. 제30사단과 제18사단이 몽토방 둘레의 목표를 모두 잡았고, 제7사단이 마메츠(Mametz)를 차지했습니다. 이곳의 부대는 더 창의적인 전술을 썼고, 바로 오른쪽 프랑스 포병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솜강 남쪽의 프랑스군도 성과를 냈습니다.
북쪽 보몽아멜(Beaumont-Hamel) 앞에서는 뉴펀들랜드 연대(Newfoundland Regiment)가 오전 9시 15분쯤 공격했습니다. 뉴펀들랜드가 캐나다의 일부가 된 것은 1949년이고, 이 연대는 영국 제29사단에 속해 싸웠습니다. 최전선 뒤의 지원 참호에서 나선 이들은 아군 최전선까지만 200 m 넘게 가야 했고, 적 참호는 거기서 다시 500 m 넘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 싸움에 나선 뉴펀들랜드인은 약 800명이었습니다. 다음 날 점호에 답한 사람은 68명이었고, 700명 넘게가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됐습니다. 지금도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에서 7월 1일은 캐나다의 날이면서 보몽아멜을 기억하는 메모리얼 데이입니다.
하루가 끝났을 때 영국군 사상자는 57,470명, 그 가운데 전사자는 19,240명이었습니다. 사상자(casualties)에는 죽은 사람뿐 아니라 다치거나 포로가 되거나 실종된 사람이 함께 들어갑니다. 그래도 프랑스군이 아직 베르됭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공세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141일의 소모전
첫날 결정적인 돌파가 없었고, 그 뒤 두 달은 서로를 닳게 하는 소모전이 됐습니다. 영국군의 공격과 독일군의 반격이 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7월 14일 새벽 공격으로 영국군은 롱괴발(Longueval)과 바장탱르프티(Bazentin-le-Petit) 사이의 독일 전선 6,000야드(5,486 m)를 잡았습니다. 롱괴발은 그달 말에 정리됐지만, 이웃한 델빌 숲(Delville Wood)의 독일군은 8월 27일까지 버텼습니다.
7월 23일 새벽에는 호주 제국군(Australian Imperial Force)이 포지에르(Pozières) 마을을 공격해 첫날 마을 대부분을 잡았습니다. 솜에서 호주군이 치른 첫 큰 싸움이었습니다. 독일군의 포격과 반격 속에 몇 주를 버틴 호주 제1·2·4사단은 9월 초 교대될 때까지 약 23,0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9월 15일 플레르-쿠르셀레트(Flers-Courcelette) 전투에서는 새 무기가 처음 나섰습니다. 전차(tank)입니다. 같은 날 캐나다 군단은 2,000 m 폭의 공격에서 쿠르셀레트를 잡았고 플레르도 떨어졌지만, IWM 기록으로 이날 전진은 3마일(4.8 km) 폭에서 약 2,500야드(2,286 m)에 그쳤습니다.
9월 26일 티에발 능선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7월 1일의 원래 목표였던 티에발은 9월 말에야 떨어졌고, 슈바벤 보루의 싸움은 10월 14일에야 끝났습니다. 그사이 비가 싸움터를 수렁으로 바꾸고 있었습니다.
캐나다군은 레지나 참호(Regina Trench)를 두고 오래 싸웠습니다. IWM은 그 싸움이 11월 10일까지 이어졌다고 쓰고, 캐나다 보훈부(Veterans Affairs Canada)는 11월 11일에 그곳을 차지했다고 적습니다. 캐나다군은 한 주 뒤 전투의 마지막 공격에서 데지르 참호(Desire Trench)도 잡았습니다.
마지막 작전은 11월 13~19일 앙크르(Ancre)강 일대에서 있었습니다. 11월 15일 샹티이(Chantilly) 연합국 회의를 앞두고 늦게라도 성과를 보여 주려는 기대가 컸습니다. 제51(하이랜드)사단이 첫날의 목표였던 보몽아멜을 잡았지만, 또 다른 첫날 목표 세르는 끝내 독일군 손에 남았습니다.
날씨가 나빠지면서 큰 작전은 11월 18일에 끝났습니다. 7월 1일은 141일에 걸친 이 전투의 첫날일 뿐이었습니다. 이듬해 봄 독일군은 새로 준비한 힌덴부르크선(Hindenburg Line)으로 물러났고, 1918년 3월까지 솜 지역에는 큰 전투가 없었습니다.
포탄, 기관총, 깊은 엄체호, 첫 전차
1916년 서부 전선의 방어 진지는 철조망과 기관총, 포병으로 지켜졌습니다. 독일군은 거의 2년 동안 솜 일대를 차지하며 방어 시설을 땅속 요새로 키워 놓았습니다. 반대로 공격하는 영국 병사들은 차지한 참호를 곧바로 굳힐 공사 자재까지 무겁게 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진지를 여는 열쇠는 중포였지만, 1916년 7월의 영국군에는 중포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넓게 퍼진 대포, 엄체호에 듣지 않는 유산탄, 불발탄이 함께 있었습니다. IWM은 7월 1일의 비극이 일주일의 포격이 독일 포병과 기관총을 제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전투가 이어지며 영국군의 방식도 바뀌었습니다. 포병 기법이 빠르게 나아졌고, 공격 부대를 밤에 자리로 옮기거나 기관총으로 작은 포처럼 탄막을 쏘는 방법이 도입됐습니다. 7월 14일과 9월 15일의 큰 성공은 이런 변화 속에서 나왔습니다.
캐나다군이 9월 15일 쿠르셀레트에서 쓴 이동 탄막(creeping barrage)도 새로 나온 방법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앞으로 옮겨 가는 포격 뒤를 보병이 따라가면, 수비병은 포격을 피해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그만큼 병사가 포격에 바짝 붙어야 해서 아군 포탄에 다친 병사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전차가 있었습니다. 9월 15일 오전 5시 30분, 마크 I 중전차 "데어데블 1(Daredevil 1)"이 델빌 숲 모퉁이를 돌아 나간 것이 전차의 첫 실전으로 기록됩니다. 전차를 몰던 승무원들은 젊었고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날 싸운 전차의 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IWM은 보병을 도울 49대 가운데 36대가 출발점에 닿았다고 씁니다. 보빙턴 전차박물관(The Tank Museum)은 49대를 배정해 32대가 출발선에 닿았고, 18대가 실제로 싸움에 들어갔으며 나머지는 고장 나거나 포탄 구덩이나 참호에 빠졌다고 적습니다.
결과에 대한 평가도 조심스럽습니다. 캐나다 보훈부는 이 전차들이 원시적이고 수가 적고 기계적으로 믿기 어려웠지만, 놀라게 하는 효과만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씁니다. 전차가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돌파를 앞당기지는 못했다는 것이 IWM의 정리입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솜 전투의 전체 사상자는 흔히 "양쪽 합쳐 100만 명 넘게"로 말합니다. 그 안을 나눠 보면 기관마다 숫자가 꽤 다릅니다. 어느 숫자가 맞는지 하나를 고르기보다, 누가 어떤 숫자를 적었는지 나란히 보는 편이 낫습니다.
같은 IWM 안에서도 두 글의 숫자가 다릅니다. 마지막 단계를 다룬 글은 영국군 419,654명, 프랑스군 204,253명, 독일군 50만~60만 명이고, 지휘를 다룬 글은 연합군 60만 명, 독일군 50만 명 넘게입니다. 미국 국립 1차 대전 박물관 연표에서는 영국 419,000명, 프랑스 194,000명, 독일 650,000명입니다.
독일 역사박물관은 독일군과 영국군이 각각 약 50만 명, 프랑스군이 20만 명을 잃었다고 씁니다. 캐나다 보훈부는 연합군 사상자를 65만 명 넘게로 보고, 연합군과 독일군이 각각 약 20만 명의 목숨을 잃었다고 적습니다. 독일군은 이 전투를 "피의 목욕(das Blutbad)"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라별 숫자도 있습니다. 캐나다군은 24,000명 넘게가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됐고, 포지에르의 호주 세 사단은 약 23,0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첫날 영국·영연방군 숫자는 IWM 57,470명(전사 19,240명), 캐나다 보훈부 57,000명 넘게, 독일 역사박물관 거의 58,000명(전사 거의 2만 명)으로 적힙니다.
얻은 땅도 기준이 제각각입니다. IWM의 한 글은 영국군이 깊이 6마일(10 km), 길이 20마일(32 km)의 땅을 얻었다고 쓰고, 통계를 다룬 다른 글은 7마일 나아갔다고 씁니다. 캐나다 보훈부는 약 10 km, 독일 역사박물관은 10 km가 안 되는 깊이, 미국 국립 1차 대전 박물관은 6마일입니다.
그래도 11월에 영국군은 바폼(Bapaume)에서 아직 3마일(5 km) 떨어져 있었고, 남쪽 프랑스군은 페론(Péronne) 앞에서 멈췄습니다. 독일 역사박물관은 연합군이 모두 104개 사단, 약 250만 명을 투입했다고 적습니다.
영화와 기념비
1916년 8월 21일, 영국 극장에 공식 기록 영화 『솜 전투(The Battle of the Somme)』가 걸렸습니다. 공식 촬영 기사 맬린스(Geoffrey Malins)와 맥다월(John McDowell)이 전투 준비와 처음 며칠을 찍었고, 병사의 실제 전투를 담은 첫 장편 영화였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 약 2천만 명이 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영화에는 연출된 장면이 있습니다. 무거운 장비를 진 촬영 기사들은 병사들이 참호 위로 넘어 나가는 순간을 찍을 수 없었고, 그 장면은 7월 12~19일 사이 생폴(St Pol) 근처 박격포 학교에서 따로 찍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관객 대부분은 재연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장면들은 그 뒤 1차 대전 전체를 대표하는 그림이 됐고, 실제 전쟁을 허구로 다시 꾸미는 "전쟁 영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전쟁 중 영국 정부는 고른 기자와 문인에게 전투를 다루게 했고, 처음으로 공식 사진가를 전선에 보냈습니다. 그 기록들 속에서 솜은 힘들지만 가치 있는 일로 그려졌습니다.
티에발 마을에는 솜 실종자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루티언스(Edwin Lutyens)가 설계해 1928~1932년에 짓고 1932년 8월 1일 제막한 이 기념비에는, 1918년 3월 20일 전에 솜 지역에서 죽어 무덤을 알 수 없는 영국·남아프리카군 7만 2천 명 넘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90% 넘게가 1916년 7~11월에 죽었습니다.
티에발 기념비는 1916년 공세가 공동 작전이었음을 기려 영국·프랑스 전투 기념비 역할도 합니다. 발치의 작은 묘지에는 영연방과 프랑스 병사의 무덤이 같은 수로 있고, 해마다 7월 1일 이곳에서 큰 의식이 열립니다.
보몽아멜의 뉴펀들랜드 기념지는 1차 대전 전장을 거의 그때 모습대로, 포탄 구덩이와 참호를 손대지 않고 남긴 몇 안 되는 곳입니다. 가장 높은 곳의 청동 순록상 아래, 청동판 셋에 무덤을 알 수 없는 뉴펀들랜드인 800명 넘는 이름이 있습니다.
첫날이 남긴 질문
오늘 영국의 기억에서 솜은 전쟁의 헛됨과 낭비, 교착과 무의미한 소모를 상징합니다. 영국 장군들, 특히 헤이그가 불필요한 사상자를 냈다는 비난도 이 기억과 함께 이어집니다. IWM은 이런 시각이 1916년 7월 1일의 재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전쟁 중의 시각은 이와 달랐습니다. 덜 우호적인 견해는 전쟁이 끝난 뒤 퍼지기 시작했고,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처칠(Winston Churchill)의 1927년 책과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의 1933년 회고록이었습니다. 두 정치인은 비용이 큰 서부 전선에서 벗어난 전략을 주장해 왔기에, 전투 지휘를 비판할 개인적인 까닭도 있었습니다.
1967년부터 전투 시기의 공문서가 역사가들에게 공개됐지만, 지휘를 두고 엇갈린 견해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의 몫과 독일군의 경험까지 넓게 보는 연구는 최근에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사이 관심은 7월 1일 하루로 더 좁아졌고, 역사가 데이비드 레이놀즈(David Reynolds)는 영국 대전의 의미가 "하나의 신성한 날"로 깎여 줄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쪽 견해도 있습니다. IWM은 솜이 국제 동맹의 필요를 채우려고 치른 전략상 필요였고, 목적은 땅을 얻는 것보다 프랑스에 있는 독일군을 치명적으로 약하게 하는 데 있었다고 봅니다.
한 프랑스 장교는 영국 보병을 두고 아주 용감하지만 "값비싼 수업"을 받는 중이라고 썼습니다. 그 수업에서 배운 것이 1918년 연합국 승리에 이바지했다는 것이 이 견해입니다.
독일 쪽에 남은 영향도 함께 거론됩니다. 1917년 3월 독일군이 힌덴부르크선으로 스스로 물러난 것은 솜에서 받은 타격의 직접 결과였고, 독일 정부가 허가한 무제한 잠수함전은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불렀습니다.
그런 한편 비슷한 하루 사상자는 서부 전선의 거의 모든 전투에서 흔했고, 1914년과 1918년의 기동전 때는 오히려 더 높았습니다.
첫날의 숫자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 숫자를 어떤 이야기 안에 놓을지가 100년 넘게 이어진 질문입니다. 헛된 희생의 상징인지, 동맹 전쟁의 값비싼 한 단계인지는 지금도 견해가 갈립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참호전: 서부전선은 왜 4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나: 솜의 철조망과 엄체호가 어디서 왔는지 봅니다.
- 베르됭 전투: 300일의 소모전: 솜 공세를 앞당긴 프랑스의 싸움입니다.
- 최초의 전차와 캉브레 전투: 참호를 넘으려는 기계: 9월 15일에 처음 나선 전차의 다음 이야기입니다.
- 주력전차: 성능은 포 크기로만 결정될까: 데어데블 1에서 한 세기 뒤, 오늘의 전차를 무엇으로 보는지 풉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포탄은 넉넉한데 대포가 모자랐던 솜처럼, 싸움 뒤편의 문제를 오늘의 말로 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전차가 처음 나선 때로부터 한참 뒤, 또 다른 새 무기가 자라 온 길을 따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