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8월, 독일군 다섯 개 군이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9월 초에는 독일 1군의 선두가 파리 앞 60 km까지 왔고,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한 주 남짓 뒤 독일군은 엔강 뒤로 약 80 km를 물러났습니다.

무엇이 이 진격을 멈추게 했을까요? 이 글은 독일이 "서쪽 먼저"를 내건 계획, 곧 슐리펜 계획이 무엇이었는지에서 시작합니다. 그다음 8~9월에 벨기에와 프랑스, 그리고 멀리 동프로이센에서 무슨 일이 차례로 일어났는지 따라가고, 마른 전투 뒤 서부 전선이 참호선으로 굳는 데까지 갑니다.

이 계획의 실패는 오래 "후임자가 계획을 망쳤다"는 이야기로 전해졌지만, 정말 그런 계획이 있었느냐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습니다. 그 논쟁도 끝에서 나란히 소개합니다.

두 전선 전쟁이라는 걱정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러시아 사이에 있었습니다. 두 나라가 손을 잡았으니 전쟁이 나면 양쪽에서 동시에 싸워야 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참모본부가 두려워한 것이 바로 이 두 전선 전쟁이었습니다.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은 1891년부터 1905년까지 독일 육군 참모총장이었습니다. 독일 역사박물관(DHM)의 온라인 박물관 LeMO에 따르면, 그는 은퇴 직전 이 두 전선 전쟁에 대한 의견서를 냈습니다.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 그동안 먼저 프랑스를 쓰러뜨리고 그다음 서부의 군대를 동부로 옮긴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수의 셈도 깔려 있었습니다. 군대를 한 번에 한 전선에 모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상대 진영보다 수가 적은 것을 메우려 했습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될 때 동맹국 쪽은 약 350만 명, 협상국 쪽은 570만 명이 넘었습니다.

몰트케의 수정과 벨기에

슐리펜의 구상은 1914년 전에 교리처럼 굳었고, 후임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소 몰트케)가 이를 손봤습니다. 두 무리의 군대가 프랑스를 북쪽과 남쪽에서 감싸고, 집게는 파리 서쪽에서 닫혀 상대를 항복시킨다는 그림이었습니다.

두 칸으로 된 개념 그림. 왼쪽 칸 '구상'에서는 독일 상자에서 나온 굵은 화살표가 벨기에 쪽으로 크게 돌아 파리 서쪽으로 감싸고, 점선 화살표가 남쪽에서 파리로 와 집게를 이룬다. 오른쪽 칸 '1914년 9월'에서는 화살표가 파리 동쪽에서 남쪽으로 꺾이고, 파리 쪽에서 9월 5일 반격 화살표가 나온다. 아래에 두 경우 모두 프랑스를 먼저 이기고 군대를 동쪽 러시아로 옮기려 했다는 설명이 있다
파리 서쪽에서 닫히려던 집게와, 실제로는 파리 동쪽에서 남쪽으로 돈 독일군. 실제 지도가 아니라 상자와 화살표로 줄인 개념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이 그림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크게 돌려면 독일군이 중립국 벨기에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영국은 벨기에 중립을 보장한 나라였고, 그래서 8월 3~4일 독일군의 벨기에 진입은 영국의 선전포고로 이어졌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M)의 정리도 같은 줄기입니다. 독일의 전쟁 계획은 러시아가 천천히 동원하는 동안 프랑스를 빠르게 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했고 사흘 뒤 벨기에를 침공했으며, 영국은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습니다.

1914년 8월: 리에주에서 몽스까지

8월 1일 독일은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벨기에에 군대가 지나갈 권리를 최후통첩으로 요구하면서 룩셈부르크를 점령했고,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벨기에로 들어간 날은 기록에 따라 8월 3일이나 4일로 적혀 있습니다.

첫 고비는 벨기에의 요새 도시 리에주였습니다. 19세기 말에 세운 요새 둘레로 바깥 요새 12개가 고리처럼 서 있었습니다. 이곳을 빨리 손에 넣어야 독일 우익이 계속 나아갈 수 있었고, 그만큼 계획 전체가 리에주에 걸려 있었습니다.

빠른 점령의 기대는 벨기에군의 거센 저항으로 깨졌습니다. 포위는 독일 최고사령부가 예정한 것보다 많은 부대를 묶었고 더 오래 걸렸습니다. 도시는 8월 7일에 넘어갔지만, 마지막 바깥 요새는 중포를 쓴 뒤인 8월 16일 또는 17일에야 무너졌습니다.

전쟁은 군대끼리만 부딪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벨기에 주민은 점령군에 예상 밖으로 거세게 맞섰고, 독일 군정은 이를 가혹하게 눌렀습니다. 주민을 총살한 일도 있었고, 8월 25일에는 독일군이 벨기에 도시 뢰번(Leuven)의 큰 부분을 파괴했습니다.

남쪽에서는 프랑스도 공세를 폈습니다. 프랑스의 배치 계획 역시 공격 쪽이었고 알자스-로렌으로 밀고 들어갔지만, 8월 19일부터 22일 사이의 첫 공세는 막혔습니다. 그사이 8월 18일 독일 다섯 개 군의 큰 진격이 시작됐고, 이 진격은 대체로 계획대로 흘러갔습니다.

영국 원정군(BEF)은 처음에 보병 4개 사단(뒤에 6개)과 기병 1개 사단, 약 9만 명이었습니다. 독일·프랑스 군대와 견주면 아주 작은 규모였습니다. 8월 22일 몽스-콩데 운하를 따라 자리를 잡았고, 다음 날 부딪쳐 온 독일군을 정확한 소총 사격으로 막았습니다.

몽스에서 버텼어도 옆의 프랑스 5군이 물러나자 영국군도 뒤로 빠져야 했습니다. 8월 25일 프랑스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마른강까지 물러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뒤 열흘 동안 영국군은 더운 날씨 속에 싸우며 320 km를 물러났습니다.

동쪽에서 온 소식

슐리펜의 셈은 러시아가 느리게 움직인다는 데 기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독일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일찍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8월 17일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으로 큰 공세를 시작했고, 그곳의 독일 8군은 러시아 2개 군을 마주했습니다.

8군 사령관은 굼비넨 전투(8월 19~20일)를 도중에 그만두고 물러났습니다. 최고사령부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다시 불러낸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8군 사령관으로 세우고 리에주에서 이름을 얻은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옆에 붙였습니다.

8월 26일부터 30일 또는 31일까지 이어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8군은 수가 적은데도 러시아 2군을 에워싸 크게 이겼습니다. 포로가 된 러시아 군인은 자료에 따라 9만 명 넘게에서 9만 2천 명 넘게까지로 적혀 있습니다. 9월 8~15일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는 러시아 1군도 크게 졌습니다.

이 싸움은 서부와도 이어졌습니다. 타넨베르크 뒤 러시아 1군을 치기 위해 8군은 서부 전선에서 온 보병 5개 사단과 기병 1개 사단으로 보강됐습니다. 서쪽에서 먼저 끝을 보고 동쪽으로 간다는 순서와 달리, 서쪽 싸움이 끝나기 전에 서부의 사단이 동쪽으로 간 것입니다.

마른 전투

8월 30일 독일군은 마른강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9월 초 독일 군들의 자리는 계획의 그림과 달랐습니다. 영불 해협 해안까지 나아가지 않고, 이미 파리 동쪽에서 남쪽으로 꺾어 들어가 있었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은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독일군은 프랑스 5군과 영국 원정군이 이미 졌다고 믿고 파리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돌기로 했고, 그 바람에 옆구리가 9월 5일의 반격에 드러났습니다. 조프르는 파리 앞에서 서둘러 새 군을 꾸리고, 파리에서 베르됭까지 전 전선의 반격을 명령했습니다.

마른 전투 개념 그림. 아래쪽에 마른강, 위쪽에 엔강이 가로로 흐르고, 왼쪽 아래에 파리, 오른쪽 아래에 베르됭이 있다. 가운데에 독일 1군과 2군 상자가 있고 둘 사이에 약 40 km 틈이 표시돼 있다. 아래에서 연합군 화살표가 9월 8일부터 틈으로 들어가고, 두 독일 군에서 위쪽 엔강 뒤로 약 80 km 물러나는 점선 화살표가 나간다. 맨 아래에 9월 11일 우익의 다른 독일 군들도 후퇴 명령을 받았다는 설명이 있다
독일 1군과 2군 사이에 생긴 약 40 km의 틈. 축척과 위치는 실제와 다른 개념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뜻밖의 반격은 독일 1군과 2군 사이에 약 40 km 너비의 틈을 냈습니다. 9월 8일부터 영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이 틈으로 들어오자, 몰트케는 전투를 그만두라고 명령했습니다. 독일군은 엔강 뒤로 약 80 km 물러났고, 영국·프랑스군은 머뭇거리며 뒤따랐습니다.

9월 11일에는 우익의 다른 독일 군들도 후퇴 명령을 받았습니다. 마른 전투의 기간은 자료에 따라 9월 5~12일, 6~12일, 5~10일로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LeMO는 이 전투에서 독일 공세의 힘이 닳은 것이 드러났고 예비대도 모자랐다고 적었습니다.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독일 공세의 기세는 꺾였고, 독일 역사박물관의 표현으로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몰트케는 9월 14일 물러났고 프로이센 전쟁부 장관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그 자리를 이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전투를 "마른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1914년의 무기와 조직

1914년 8월에 나간 군대는 앞선 시대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독일·프랑스 군인은 1870~1871년 보불전쟁 때와 거의 같은 머리 장비를 썼습니다. 독일 보병은 압착 가죽으로 만든 뾰족 투구를, 프랑스 군인은 붉은 천 모자 케피를 썼습니다.

이 장비는 새 전쟁에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기관총과 빨리 쏘는 포 같은 새 무기가 첫 몇 주 동안 예상 밖으로 큰 손실을 냈습니다. 소총탄과 포탄 파편에 죽거나 크게 다친 군인이 너무 많아, 1915년 프랑스군이 먼저 철모를 들였고 독일군은 1916년에 따랐습니다.

포의 무게도 중요했습니다. 리에주의 마지막 요새들이 무너진 것은 중포를 쓴 뒤였습니다. 한편 영국군이 몽스에서 독일군을 막은 것은 잘 훈련된 군인의 정확한 소총 사격이었습니다.

통신도 승패에 끼어들었습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무선 통신을 풀어 상대의 작전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힌덴부르크는 북쪽의 러시아 1군이 하루 행군 거리에 있었는데도 그쪽 경계에 기병 1개 사단만 두었습니다. 독일 포병의 우세와 러시아군의 굼뜸도 더해졌습니다.

군대의 크기와 성격도 나라마다 달랐습니다. 영국은 주로 해외 제국을 지키려고 만든 작은 직업 군대로 전쟁에 나갔습니다. 정규군 25만 명 남짓에 국방 의용군 25만 명, 예비군 20만 명을 더해 훈련된 군인이 약 70만 명이었는데, 독일·프랑스·러시아의 대규모 징병 군대에 비하면 아주 작았습니다.

바다로의 경주와 참호선

1914년 8월 1일부터 11월 22일까지의 표 모양 연표. 왼쪽 칸은 날짜, 가운데 칸은 서부 전선(룩셈부르크 점령, 벨기에 진입과 영국 참전, 리에주, 다섯 군의 진격, 몽스, 마른까지의 후퇴 명령, 마른 도착, 정부의 보르도 이전, 마른 전투, 몰트케 교체, 바다로의 경주, 1차 이프르 전투), 오른쪽 칸은 동부 전선(러시아 공세, 굼비넨, 타넨베르크, 마주리아 호수)이다. 마른 전투 줄은 붉은색으로 강조돼 있다
1914년 8~11월의 서부·동부 전선. 독일 역사박물관과 영국 국립육군박물관 기록에 적힌 날짜만 옮겼고, 자료마다 다른 날짜는 그렇다고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엔강까지 물러난 독일군은 강 북쪽의 높은 능선 슈맹 데 담에 자리를 잡고, 9월 중순 이들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여러 번 막았습니다. 이제 양쪽은 정면이 아니라 옆으로 돌아 감싸려 했습니다. 9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서로의 옆구리를 노리며 전선이 북쪽 해안으로 차츰 늘어난 이 시기를 흔히 "바다로의 경주"라고 부릅니다.

팔켄하인은 영국 원정군의 보급선에 중요한 해협 항구를 잡아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고, 연합군도 해안 쪽에서 상대를 감싸려 했습니다.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은 10월 9일에 넘어갔습니다. 벨기에 부대는 니우포르트의 수문을 열어 땅을 물에 잠기게 했고, 해안에서도 전선이 굳었습니다.

10월 20일부터 11월 22일까지 영국 원정군은 이프르에서 해협 항구로 뚫고 나가려던 독일의 큰 공세를 막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대가는 컸습니다. 그해 말까지 영국 원정군의 사상자는 9만 명이 넘었고 처음 건너간 부대는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이프르를 끝으로 탁 트인 곳에서 움직이며 싸우는 전쟁이 끝났습니다. 양쪽이 땅을 팠고, 곧 영불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참호선이 이어졌습니다. 그 길이는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의 두 쪽에서도 750 km, 600 km 넘게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동부의 승리에도 전쟁은 프랑스를 빨리 이긴다는 독일의 계획에서 멀어졌습니다. 서부 전선이 굳자 보급과 지원, 곧 군수(logistics)가 전략 판단의 한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빨리 끝난다는 생각은 환상으로 드러났습니다.

슐리펜 계획은 정말 있었나

여기까지는 "슐리펜 계획이 있었고, 마른에서 실패했다"는 익숙한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줄거리 자체를 두고 1999년부터 큰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영국 군사사 학술지(British Journal for Military History)의 2016년 서평 한 편이 그 갈래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먼저 의견서 자체입니다. 슐리펜의 의견서는 1906년 2월에 완성됐지만 그가 참모총장에서 물러난 1905년 12월 31일로 날짜를 거슬러 적었습니다. 제목은 "프랑스와의 전쟁"이었고, 4,700단어가 넘는 글에서 러시아는 고려에서 빼려고 한 번 나올 뿐 동쪽 국경을 지킬 대책은 없었습니다.

서평에 따르면 1905~1906년 독일의 병력은 이 의견서의 서부 작전에도 모자랐고, 1914년의 두 전선 전쟁에는 더욱 모자랐습니다. 그런데도 패전 뒤 살아남은 일부 고위 참모 장교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1914년 계획은 슐리펜의 것이었는데 몰트케가 끝까지 해내지 못했고, 특히 우익에서 좌익으로 병력을 옮겨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세대의 역사가가 이 이야기를 조금씩 바꿔 되풀이했습니다.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는 1999년 논문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로 1914년 8~9월 독일 계획에 관한 그때까지의 설명을 거의 다 뒤집으려 했습니다. 그는 그런 이야기가 참모본부의 잘못을 덮으려고 지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학계의 비판적 검토를 부른 것에 더해, 특히 독일에서 큰 반발을 샀습니다.

독일에서는 계획을 어떻게 읽느냐가 1차 대전의 전쟁 책임 논쟁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주버는 슐리펜의 계획이 전체 뜻에서 공격적이라고 읽을 수 없고, 공세 작전은 결국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대쪽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니카 몸바워(Annika Mombauer)는 1914년 계획이 슐리펜의 의견서와 얼마나 달랐든 실제 효과와 공격 의도는 같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소의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P. Gross)는 새로 찾은 1893~1914년 독일 배치 계획 요약을 바탕으로 2008년 "There Was a Schlieffen Plan"을 냈고, 주버는 2010년 "There Never Was a 'Schlieffen Plan'"으로 답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계획도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서평이 소개한 연구들은 프랑스의 계획이 영국의 지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필요와 그 불확실성에 크게 묶여 있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계획은 서로 거의 맞물리지 않았다고 봅니다. 1914년의 계획이 슐리펜의 구상을 얼마나 따랐는지, 그 실패를 몰트케 한 사람에게 돌릴 수 있는지는 이렇게 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이 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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