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용사 기념비(Vietnam Veterans Memorial)에는 목숨을 잃은 미국인 58,3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름은 시간 순서대로 놓였습니다. 2008년 미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 NARA)로 넘어온 미군 사망 기록 파일에서 가장 이른 사망 날짜는 1956년 6월 8일입니다. 미국이 정규 지상 전투 부대를 보낸 1965년보다 9년이나 앞섭니다.
베트남 전쟁은 언제 시작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전쟁입니다. 미국 법은 베트남에서 복무한 사람의 "베트남 시대"를 1955년 11월 1일부터 셉니다. 이 글의 제목이 1955년에서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끝은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 전차가 사이공 대통령궁 문을 지난 날입니다.
프랑스가 물러난 1954년부터 사이공의 1975년까지를 연표 한 장으로 따라갑니다. 근거는 미 국무부 역사실, 국립문서보관소, 호주 전쟁기념관 같은 공개 기록입니다. 미국과 동맹국 쪽 기록이 대부분이어서 북베트남 쪽의 시각은 적게 담겼습니다.
프랑스가 떠난 자리
전쟁의 뿌리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있습니다. 프랑스는 1949년까지 베트남에 자치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국방과 외교를 계속 쥔 채 제한된 독립만 내주었습니다. 그보다 앞선 1946년, 프랑스와의 협상이 깨지자 북부에서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Viet Minh)과 프랑스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프랑스를 도왔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넘어지는 도미노에 빗대어,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동남아시아의 나머지 나라도 따라간다고 설명했습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꾸리고 서독을 다시 세우는 데 프랑스의 협력이 필요했던 사정도 있었습니다.
1954년 5월 7일, 라오스 국경 가까운 골짜기의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수비대가 넉 달 동안의 포위 끝에 무너졌습니다. 프랑스는 이 지역에서 물러났고, 미국은 그 뒤 20년 동안 베트남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
17도선으로 나뉜 나라
1954년 중반 제네바에 프랑스와 베트남, 미국, 중국 대표가 모였습니다. 합의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휴전과 함께 나라를 북위 17도선을 따라 임시로 나누는 것이었고, 둘째는 남북 모두 바깥 동맹에 들지 않고 1956년에 총선거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둘째 합의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이 빠져나가자 남쪽에 따로 정부를 세웠고, 국무부 역사실의 표현으로는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남베트남의 지도자로 "임명"했습니다. 선거는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조직력과 농촌의 지지에서 앞선 공산 측이 이길 것으로 보였고, 지엠이 선거를 거부하자 미국은 그를 지지했습니다.
이 무렵은 지금도 미국 법에 날짜로 남아 있습니다. 미 법전 38편이 정한 "베트남 시대"는 베트남에서 복무한 퇴역 군인의 경우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5월 7일까지입니다. 그 밖의 경우에는 1964년 8월 5일부터입니다.
고문단에서 지상군으로
1959년 무렵 남베트남의 공산 게릴라인 베트콩(Viet Cong)과 베트민이 남부에서 큰 봉기를 시작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이것을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으로 봅니다. 미 육군은 1961년 첫 무장 헬기와 고정익기를 보내 남베트남군을 지원했고, 1963년에는 남베트남에 있는 미국 군사 고문이 21,000명에 이르렀습니다. 증강된 사단 하나와 맞먹는 규모입니다.
1963년은 정치가 크게 흔들린 해였습니다. 지엠은 자기 장군들에게 쫓겨나 살해됐는데, 국무부는 이것이 케네디 행정부의 묵인 아래 일어났다고 적습니다. 3주 뒤 케네디 대통령도 암살됐습니다.
1964년 8월, 통킹만에 있던 미 구축함 매덕스(Maddox)와 터너 조이(Turner Joy)가 8월 2일과 4일 두 번 북베트남 초계정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했습니다. 8월 7일 의회는 통킹만 결의를 통과시켰습니다. 상원의 반대는 두 표뿐이었고 하원은 만장일치였습니다. 이 결의는 존슨과 닉슨 행정부가 전쟁을 이어 간 법적 근거가 됐습니다.
두 번째 공격은 나중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의 해설에 따르면, 2007년에 공개된 2002년 미 국가안보국(NSA) 보고서는 8월 2일 공격은 확인했지만 8월 4일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결의는 1971년 1월에 폐지됐습니다.
1965년 2월 13일 북베트남을 겨눈 폭격 작전 롤링 선더(Rolling Thunder)가 시작돼 1967년 봄까지 이어졌습니다. 존슨은 정규 지상 전투 부대를 잇달아 보내기 시작했고, 3월에는 해병 전투 부대가 다낭에 들어갔습니다. 그해 말까지 미국이 보낸 병력은 20만 명이었습니다.
미국만 간 것은 아닙니다. 호주는 1962년 7~8월 육군 훈련단 30명을 시작으로 참전했고,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부대를 보냈습니다.
1954~1975년 연표
연표에서 눈여겨볼 것은 간격입니다. 디엔비엔푸에서 통킹만까지는 10년이 걸렸지만, 통킹만에서 미군 20만 명까지는 1년 남짓이었습니다. 1968년 구정 공세 뒤로는 무게중심이 전쟁을 끝내는 협상과 철수로 옮겨 갑니다.
헬리콥터, 폭격, 레이저 유도 폭탄
남베트남은 헬리콥터가 활약하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긴 도로망이 없었고, 있는 도로도 자주 공격받았습니다. 정글과 산, 늪, 넓은 삼각주가 이어졌습니다. 미 육군 수송 병과의 역사 연구는 미 지상군에 유리했던 세 가지로 전술 기동력, 화력, 군수 지원을 꼽고, 셋 다 헬리콥터로 얻었다고 평가합니다.
공중기동을 시험하려고 만든 사단이 1965년 7월 1일 제1기병사단(공중기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사단이 됐고, 그해 9월 남베트남에 도착했습니다. 헬기는 병력을 내려놓고 다시 태워 오는 일, 떨어진 조종사 구조, UH-1과 AH-1의 근접 항공 지원, 정찰, 부상자 후송까지 맡았습니다. 같은 연구의 집계로 의무 후송 헬기 승무원들이 목숨을 구한 부상병은 약 39만 명입니다. 헬기가 공중에 뜨고 방향을 잡는 원리는 헬리콥터 로터와 동축반전로터: 꼬리 로터 없는 헬기는 왜 가능할까 글에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폭격이 이어졌습니다. 1965~1967년의 롤링 선더, 1972년 5월의 라인배커(Linebacker), 같은 해 12월의 이른바 크리스마스 폭격이 대표적입니다. 라인배커보다 앞선 1972년 4월에는 레이저로 비춘 밝은 점을 스스로 따라가는 폭탄이 쓰인 예가 있습니다.
존스홉킨스 응용물리연구소(APL)의 기술 잡지는 자주 인용되는 예로 탄호아 다리를 듭니다. 미국은 6년 동안 이 다리에 폭탄 수백 발을 떨어뜨리며 항공기와 조종사를 잃었습니다. 다리는 1972년 4월, 적은 수의 레이저 유도 폭탄에 무너졌습니다. 레이저 유도 폭탄은 정밀유도무기(precision-guided munition, PGM)의 한 갈래이고, 그 뒤의 흐름은 정밀유도폭탄: 평범한 폭탄에 무엇이 더해질까 글에서 이어집니다.
구정 공세와 여론
1968년 1월 말, 음력 설인 뗏(Tet) 연휴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곳곳을 한꺼번에 공격했습니다. 첫 단계는 1월 30일과 31일이었고,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바깥 담까지 뚫렸습니다. 5월 4일 시작한 둘째 단계는 6월까지, 8월에 시작한 셋째 단계는 6주 동안 이어졌습니다.
결과는 보는 쪽에 따라 다르게 읽힙니다. 공세가 끝났을 때 양쪽 모두 손실을 입었고, 양쪽 모두 승리를 주장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남베트남 민족해방군(National Liberation Forces, NLF) 병력을 거의 다 없애고 잃었던 땅을 모두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생생한 보도를 본 미국 국민은 승리가 가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고, 존슨 행정부에 대한 지지가 약해졌습니다. 1968년 3월 31일 존슨은 재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AWM)의 평가도 비슷합니다. 공산 측에게 구정 공세는 군사적 패배였지만 선전에서는 승리였고, 미국의 군사 계획가들은 결정적인 승리가 가능하기는 한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베트남화와 파리 협정
1969년 1월 취임한 닉슨은 그해 6월 8일 미드웨이섬에서 남베트남의 티에우(Nguyen Van Thieu) 대통령을 만나 첫 철수를 발표했습니다. 그 뒤 미군 철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줄어드는 만큼 남베트남군의 힘을 키우는 계획을 "베트남화(Vietnam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전쟁은 이웃 나라로도 번졌습니다. 1970년 4월 30일 닉슨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에게 캄보디아의 북베트남군 기지로 들어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결정은 미국 대학가에 격렬한 시위를 불렀고, 5월 4일 켄트 주립대에서 학생 4명이 숨졌습니다.
1972년 3월 말 북베트남이 세 갈래의 대공세를 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부활절 공세라고 부릅니다. 닉슨은 5월 4일 북베트남 항구에 기뢰를 깔고 라인배커 작전을 시작하기로 했고, 협상이 막히자 12월 14일 B-52 폭격을 명령했습니다.
평화 협정은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서명됐습니다. 미국은 이 협정으로 전쟁에서 빠지고 포로들을 돌려받았습니다. 하지만 남북 베트남 어느 쪽도 협정을 지키지 않았고 전쟁은 이어졌습니다. 호주는 1973년 1월 11일 총독의 선포로 참전을 공식적으로 끝냈습니다.
사이공 함락과 남은 것
닉슨은 북베트남이 협정을 어기면 강하게 대응하겠다고 티에우에게 거듭 약속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이유로 다시 전쟁에 들어가기를 꺼린 의회와 여론, 경제 사정, 그리고 닉슨을 약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을 듭니다. 북베트남군은 1975년 3월 중부 고원에서 큰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4월 30일 전차가 사이공 대통령궁 문을 지나면서 전쟁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전쟁은 미국 정치에 제도를 하나 남겼습니다. 1973년의 전쟁권한법(War Powers Resolution)은 대통령이 군을 해외에 보낼 수 있게 하되, 48시간 안에 의회에 보고하고 의회가 60일 안에 승인 여부를 정하게 했습니다. 미 하원 역사실은 이 법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널리 퍼진 불만과 선포 없는 전쟁을 막자는 여론에서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닉슨은 거부권을 썼지만 의회가 1973년 11월 이를 뒤집었습니다.
기록도 남았습니다. 1967년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지시해 만든 내부 보고서, 이른바 펜타곤 페이퍼는 1971년 6월 일부가 언론에 새어 나갔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는 뒤에 48상자, 약 7,000쪽의 기밀 해제본 전체를 공개했습니다.
몸에 남은 흔적도 있습니다.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는 미군이 적이 숨는 나무와 열대 숲을 없애려고 뿌린 전술 제초제로, 미군은 이것과 다른 제초제를 수백만 갤런 뿌렸습니다. 미 보훈부는 일부 암과 다른 병이 복무 중 노출과 관련 있다고 보고, 자격이 되는 퇴역 군인에게 의료와 보상을 제공합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와 날짜
시작과 끝부터 기준마다 다릅니다. 미국 법은 두 가지 시작 날짜를 쓰고, 미 육군 수송 병과의 연구는 미국의 적극 참여를 1961~73년으로 적습니다. 호주는 1962~1973년, 한국은 1964~1973년입니다.
미군 사망자 수도 한 가지가 아닙니다. 국립문서보관소의 국방 사상자 분석 체계(Defense Casualty Analysis System, DCAS) 베트남 파일에는 2008년 4월 29일 기준 58,220건이 들어 있고, 1998년 12월의 예전 파일에는 58,193건이 있었습니다. 문서보관소는 이 표들에 "공식 통계가 아닌 참고용"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기념비에 새긴 이름은 58,318명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희생은 훨씬 크지만, 숫자는 조사 방법과 기간에 따라 크게 갈립니다. 2008년 의학 학술지 BMJ에 실린 연구는 세계보건조사 자료로 1955~2002년 베트남의 폭력적인 전쟁 사망을 약 380만 명으로 추정했습니다. 이 값은 그 47년 동안의 전쟁 사망 전체입니다.
조사 대상 13개 나라 전체로 보면 1965~1974년이 해마다 20만 5천 명으로 전쟁 사망이 가장 많은 10년이었고, 대부분 베트남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이 20만 5천 명은 13개 나라를 합친 값이고 베트남 한 나라의 값이 아닙니다.
1965~1975년만 놓고 보면 세계보건조사의 추정은 약 170만 명이고, 베트남의 생애사 조사를 분석한 다른 연구는 966,000명을 얻었습니다. 그 연구의 저자들도 사망이 많았던 농촌이 조사에 덜 잡혀 자기 값이 낮게 나왔을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동맹국 쪽에서는 호주인 6만 명 넘게 복무해 523명이 숨지고 2,400명 가까이 다쳤고, 한국은 8년 동안 모두 312,853명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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