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12월 22일, 조지아주 서배너에 들어온 윌리엄 T. 셔먼 소장이 워싱턴의 링컨 대통령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서배너를 대포 150문과 넉넉한 탄약, 면화 약 25,000꾸러미와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달여 전 애틀랜타를 떠난 군대가 조지아를 가로질러 대서양에 닿았다는 소식이기도 했습니다.

선물이라는 말과 달리, 이 행군은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말이 많은 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급선을 끊고 길에서 먹을 것을 구하며 걸은 6만여 명의 군대, 불에 달궈 구부린 철로, 군대를 따라 자유를 찾아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한 장면에 겹칩니다. 셔먼은 왜 바다로 갔고, 군대는 어떻게 걸었으며, 무엇이 남았을까요? 자료마다 숫자와 평가가 다른 까닭도 함께 봅니다.

근거는 미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의 전적지 자료,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와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의 공개 글, 역사학자의 기고, 그리고 셔먼의 회고록에 실린 명령문입니다.

애틀랜타까지

1864년 3월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모든 연방군을 맡으며 남부연합의 저항을 꺾고 전쟁을 끝낼 합동 공세를 명령했습니다. 그랜트는 버지니아에서 로버트 E. 리의 군대를 상대했고, 조지아 공세는 셔먼이 맡았습니다.

셔먼은 테네시주 채터누가 근처에 모인 세 군, 10만 명을 지휘했습니다. 맞선 쪽은 조지프 E. 존스턴이 이끄는 남군 테네시군 53,000명이었습니다. 그랜트의 명령은 존스턴의 군대를 깨뜨리고 적지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목표가 된 애틀랜타는 공업 도시였고, 무엇보다 철도 네 개가 만나는 교차점이었습니다. 이 철도들이 남부의 대서양 쪽 주들과 서쪽의 남부연합을 이어 주었습니다.

5월 7일 시작한 싸움은 9월까지 북부 조지아에서 거의 날마다 이어졌습니다. 7월 17일에는 존 벨 후드가 존스턴을 대신해 남군을 맡았습니다. 마지막 포위 동안 셔먼 군이 도시로 들어가는 철도를 끊었고, 남군은 9월 1일 애틀랜타에서 물러났습니다. 셔먼은 다음 날 도시에 들어갔습니다.

왜 바다로 갔나

애틀랜타를 얻었지만 후드의 군대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후드는 북쪽으로 올라가 셔먼의 보급선인 웨스턴 앤드 애틀랜틱 철도와 이를 지키는 작은 수비대들을 쳤고, 그 뒤 앨라배마로 옮겨 테네시 쪽 진격을 준비했습니다.

셔먼이 낸 안은 군을 둘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정예 62,000명은 자신이 데리고 부수며 나아가는 행군을 하고, 나머지로 조지 H. 토머스가 테네시에서 후드를 막는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역사학자 존 F. 마살렉에 따르면 링컨과 그랜트는 먼저 남군을 깨뜨리기를 바랐지만, 셔먼이 그랜트를 설득했고 그랜트가 다시 대통령을 설득했습니다. 그랜트의 승인이 나자 셔먼은 애틀랜타로 돌아가 진군을 준비했습니다.

셔먼이 노린 것은 싸움터의 군대만이 아니었습니다. 국립공원청의 셔먼 해설은 그가 남부연합의 경제와, 전쟁을 이어 가려는 심리적 의지를 노렸다고 봅니다. 목표는 여럿이었습니다. 리의 군대 뒤쪽으로 다가가 버지니아의 그랜트를 돕는 것, 그리고 기반 시설을 부수는 것입니다.

선거도 맞물려 있었습니다. 링컨은 1864년 11월 8일 재선됐고, 국립공원청은 애틀랜타 점령과 존스턴 군 추격이 그 재선을 도왔다고 적습니다. 진군은 그로부터 일주일 남짓 뒤에 시작됐습니다.

1864년 11월~12월 연표

1864년 5월부터 1865년 5월까지 셔먼의 원정을 세 칸으로 나눈 연표 도표. 첫 칸 애틀랜타 전역: 5월 7일 전역 시작, 7월 17일 후드가 존스턴을 대신함, 9월 1일 남군이 애틀랜타에서 철수(셔먼은 9월 2일 입성), 11월 8일 링컨 재선. 가운데 칸 바다로의 진군: 11월 9일 특별 야전 명령 120호, 11월 15~16일 애틀랜타 출발, 11월 20~21일 메이컨 근처 양동, 11월 22일 그리스월드빌, 11월 24일 밀리지빌 출발, 12월 9일 에버니저 개울, 12월 10일 서배너 도착, 12월 21일 서배너 항복, 12월 22일 크리스마스 선물 전보. 마지막 칸 캐롤라이나 원정: 1865년 1월 12일 스탠턴과 흑인 지도자들의 만남, 1월 16일 특별 야전 명령 15호, 2월 1일 서배너 출발, 2월 17일 컬럼비아, 3월 11일 페이엣빌, 3월 19~21일 벤턴빌, 4월 18일 베넷 하우스 휴전, 4월 26일 존스턴 항복, 5월 24일 워싱턴 대열병식
애틀랜타 전역부터 존스턴의 항복까지. 날짜는 미국 공공 기관의 기록이고, 기록마다 다른 날짜는 둘 다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출발 일주일 전인 11월 9일, 셔먼은 특별 야전 명령 120호(Special Field Orders No. 120)로 행군 방식을 정해 두었습니다. 군대는 11월 16일 애틀랜타를 떠났습니다. 마살렉은 출발일을 11월 15일로 적습니다.

처음 방향은 일부러 흐렸습니다. 두 날개는 남군이 서배너, 메이컨, 오거스타 가운데 어디가 목적지인지 짐작만 하게 움직였습니다. 11월 20~21일 메이컨 근처 월넛 개울에서 벌어진 작은 싸움도 중부 조지아를 지나는 주력의 움직임을 가리는 양동이었습니다. 진짜 목적지는 조지아의 수도 밀리지빌이었습니다.

11월 22일, 진군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투가 그리스월드빌에서 벌어졌습니다. 메이컨에서 오거스타로 가던 조지아 주 민병 세 여단이, 통나무와 울타리 가로대로 진지를 쌓은 찰스 월컷 준장의 여단과 우연히 부딪쳤습니다. 민병은 세 번 돌격했고 추정 사상자는 712명(북군 62명, 남군 650명)입니다. 싸움이 끝난 뒤 연방군 병사들은 맞선 쪽이 노인과 소년들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밀리지빌에서는 주 의회가 징병 나이를 16~65세로 넓혔고, 주지사 조지프 E. 브라운은 주 기록을 지키려고 수도를 메이컨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연방군은 주 건물을 망가뜨리고 책과 문서를 없앤 뒤 11월 24일 그곳을 떠났습니다. 애틀랜타를 나선 지 일주일 만이었습니다.

12월 10일 군대는 서배너 앞에 닿았습니다. 남군 방어선 때문에 바다의 연방 해군과 곧바로 닿을 수 없었고, 오른쪽 날개가 오지치강 어귀의 매캘리스터 요새를 차지하면서 도시를 에워쌀 수 있게 됐습니다.

남군 윌리엄 하디의 부대가 빠져나가자 서배너 시장이 도시를 넘겼습니다. 의회도서관 블로그는 공식 항복을 12월 21일로 적고, 풀라스키 요새 공원의 해설은 셔먼이 들어온 12월 22일까지 도시가 넘어가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 전보는 12월 22일에 갔습니다.

보급선 없이 걷는 군대

진군을 네모와 화살표로 단순화한 그림. 실제 지도가 아니다. 왼쪽의 애틀랜타 네모에서 오른쪽의 서배너 네모까지 위아래 두 줄기 화살표가 나간다. 위 줄기는 왼쪽 날개(슬로컴 소장, 14·20군단)로 가운데의 밀리지빌 네모를 지난다. 아래 줄기는 오른쪽 날개(하워드 소장, 15·17군단)다. 위쪽으로 오거스타, 아래쪽으로 메이컨을 향하는 점선 화살표가 '양동'이라고 적혀 있다. 기병(킬패트릭 준장)은 두 날개를 오간다. 아래 상자에는 특별 야전 명령 120호의 요점(나란한 네 길, 전체 보급 행렬 없음, 하루 약 15마일, 땅에서 징발, 집에 들어가지 않기, 파괴 권한은 군단장만)과 공식 보고 병력 62,204명, 대포 65문, 마차 약 2,500대, 구급차 600대가 적혀 있다
두 날개, 네 길, 보급 행렬 없음. 특별 야전 명령 120호와 셔먼 회고록의 병력표를 도형으로 옮겼고, 실제 지도가 아닙니다 (도표)(도표)

특별 야전 명령 120호는 군을 두 날개로 나눴습니다. 오른쪽 날개는 O. O. 하워드 소장의 15군단과 17군단, 왼쪽 날개는 헨리 W. 슬로컴 소장의 14군단과 20군단이었습니다. 저드슨 킬패트릭 준장의 기병은 셔먼에게서 따로 명령을 받았고, 행군은 될 수 있는 한 나란한 네 길로 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전체 보급 행렬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군단마다 탄약 마차와 식량 마차만 두었고, 행렬은 보통 오전 7시에 떠나 하루 약 15마일을 걸었습니다. 공식으로 보고된 병력은 보병 55,329명, 기병 5,063명, 포병 1,812명을 합쳐 62,204명입니다. 대포는 65문으로 줄였고 마차 약 2,500대와 구급차 600대가 뒤따랐습니다.

먹을 것은 길에서 구했습니다. 원칙은 "땅에서 넉넉히 징발한다"는 것이었고, 여단마다 신중한 장교가 이끄는 징발대를 꾸려 마차에 적어도 열흘 치 식량과 사흘 치 말먹이를 늘 채워 두게 했습니다.

같은 명령에는 선도 그어져 있었습니다. 병사는 주민의 집에 들어가거나 무단 침입하지 않고, 방앗간·집·조면기를 부술 권한은 군단장에게만 있으며,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는 부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징발대는 욕설과 위협을 하지 않고 집집마다 살아갈 몫을 남기도록 했습니다. 다만 다리를 태우거나 길을 막는 등 적대 행위가 있는 곳에서는 그 정도에 맞춰 부수라고 적었습니다.

실제로는 그 선이 자주 무너졌습니다. 징발병은 곧 "버머(bummers)"라고 불렸고, 주력 행렬에서 5마일 넘게 나가 시골에 가장 큰 피해를 주면서 군에 가장 많은 식량을 댔습니다. 셔먼 스스로도 징발대의 약탈과 폭력이 많았을 것이라고 인정했지만, 대개 사람이 아니라 재산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집이 상했고 일부는 불탔지만, 거의 손대지 않은 집도 있었습니다.

철도는 일부러 부쉈습니다. 병사들은 침목을 뽑아 쌓아 태우고 그 불에 쇠 레일을 달궈 구부려 다시 못 쓰게 했고, 구부러진 레일은 "셔먼의 넥타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파괴는 남부연합의 보급선을 꺾었지만, 노예였거나 막 풀려난 사람들을 포함한 지역 민간인에게 자주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길을 막은 남군은 적고 약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조지프 휠러의 기병 3,500명이었고, 킬패트릭의 연방 기병 5,000명이 이를 밀어냈습니다. 셔먼은 전신선을 끊어 자기 움직임이 적에게 알려지지 않게 했습니다.

자유를 찾아 따라온 사람들

진군이 이어질수록 노예였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군대를 따라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연방군을 해방자로 맞았고, 행군에 필요한 일을 하는 일꾼이 되거나 그저 행렬 뒤를 따랐습니다. 명령 120호도 군단마다 될 수 있으면 흑인으로 꾸린 개척대(pioneer battalion)를 두어 길을 고치게 했습니다. 작가 J. D. 디키는 진군 동안 1만 명 넘는 노예가 농장을 떠났다고 씁니다.

셔먼은 따라오는 사람들이 행군 속도와 병사들의 식량에 짐이 될까 걱정했습니다. 명령 120호는 몸이 성한 흑인을 데려갈 수 있다고 하면서도, 군의 첫째 의무는 무기를 든 사람을 챙기는 것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해방군 안에도 그 시대의 인종 차별이 퍼져 있었습니다.

1864년 12월 9일, 연방군 제퍼슨 C. 데이비스 소장의 후위가 불어난 에버니저 개울을 부교로 건넜습니다. 뒤따르던 피난민 행렬은 신호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후위의 마지막 부대가 건너자 다리가 풀렸습니다. 남군 기병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물에 뛰어들었고, 몇몇은 뗏목이나 물에 들어간 병사들에게 구조됐지만 많은 사람이 빠져 죽거나 남군에 잡혔습니다.

몇 명이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마살렉은 행렬을 약 650명으로 적고, 조지아 역사협회(Georgia Historical Society)의 표지석은 수백 명이 익사했다고 적습니다. 셔먼은 데이비스를 감쌌습니다.

사람들의 항의가 이어진 뒤인 1865년 1월 12일,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턴이 서배너에서 셔먼과 지역 흑인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나흘 뒤인 1월 16일 특별 야전 명령 15호(Special Field Orders No. 15)가 나왔습니다. 찰스턴 남쪽의 섬들, 바다에서 30마일 안쪽 강가의 버려진 논, 플로리다 세인트존스강 가의 땅을 해방된 사람들의 정착지로 떼어 두는 명령이었습니다.

가족마다 받을 수 있는 경작지는 40에이커 이하였고, 섬과 정착지의 일은 해방된 사람들 스스로 맡게 했습니다. 감독관 R. 색스턴 준장이 문서로 된 점유 권리(possessory title)를 주었고, 셔먼은 정착민에게 노새도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조지아 역사협회의 표지석은 이 명령이 걸친 해안 땅이 40만 에이커가 넘었다고 적습니다.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865년 5월 29일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사면 선언으로 이 조치가 되돌려졌고, 그해 하반기에 수천 명이 나눠 받은 땅에서 갑자기 쫓겨났습니다. 법적 권리증을 가진 적은 수를 빼면 해방민은 그 땅을 잃었습니다.

서배너에서 캐롤라이나로

셔먼은 1865년 2월 1일 서배너를 떠나 북쪽 캐롤라이나로 향했습니다. 2월 17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 컬럼비아를 차지했고, 같은 날 남군은 찰스턴에서 물러났습니다. 섬터 요새 공원의 해설은 셔먼이 컬럼비아를 점령하고 약탈했다(captured and sacked)고 적습니다. 보급선과 연락이 끊긴 남군은 섬터 요새를 포함한 찰스턴 항구를 내주었습니다.

마살렉은 캐롤라이나에서 파괴가 다시 시작됐고,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조지아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고 봅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반란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아 피해가 덜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3월 11일 노스캐롤라이나의 페이엣빌을 차지한 뒤, 셔먼 군은 3월 16일 애버러스버러와 3월 19~21일 벤턴빌에서 존스턴의 남군과 싸웠습니다. 벤턴빌에서는 남군의 다섯 번 공격이 연방군을 몰아내지 못했고, 존스턴은 밤에 물러났습니다. 추정 사상자는 4,133명(북군 1,527명, 남군 2,606명)입니다.

4월 18일 존스턴은 베넷 하우스에서 셔먼과 휴전에 서명했고, 4월 26일 공식으로 항복했습니다. 조지아·플로리다·캐롤라이나의 모든 남군이 함께 항복한 이 일은 전쟁에서 가장 큰 남군 항복이었습니다. 5월 24일 셔먼의 군대는 워싱턴에서 대열병식을 했습니다.

조지아에서 캐롤라이나까지 이어진 원정이 남부의 산업과 농업, 기반 시설에 준 피해는 컸습니다. 셔먼은 나중에 그 파괴를 1억 달러로 어림했습니다.

숫자와 평가가 갈리는 곳

자료별 숫자 비교 도표. 첫 줄 병력: 국립공원청 인물 기록 60,000명, 역사학자 마살렉 62,000명, 셔먼 회고록의 공식 보고 62,204명, 의회도서관 블로그 30,000명씩 두 무리. 둘째 줄 애틀랜타 출발: 11월 16일(국립공원청 연표, 국립문서보관소 블로그), 11월 15일(마살렉). 셋째 줄 서배너: 12월 21일 함락·항복(국립공원청 인물 기록, 의회도서관 블로그, 마살렉), 12월 22일 셔먼 입성(풀라스키 요새 공원). 넷째 줄 에버니저 개울: 피난민 행렬 약 650명(마살렉), 수백 명 익사(조지아 역사협회 표지석). 다섯째 줄 거리와 폭: 300마일, 곳에 따라 폭 40마일(국립문서보관소 블로그), 300마일(디키)
같은 행군, 다른 숫자. 자료마다 적힌 값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같은 행군인데도 자료마다 숫자가 다릅니다. 병력은 국립공원청 인물 기록이 60,000명, 마살렉이 62,000명, 회고록의 공식 보고가 62,204명이고, 의회도서관 블로그는 30,000명씩 두 무리로 적습니다. 출발일도 11월 16일과 11월 15일로 갈립니다.

날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배너는 12월 21일 항복으로 적은 곳과 12월 22일 셔먼의 입성을 기준으로 적은 곳이 있습니다. 애틀랜타 역시 남군이 물러난 9월 1일과 셔먼이 들어간 9월 2일이 함께 쓰입니다. 국립문서보관소 블로그는 행군 거리를 300마일, 부서진 땅의 폭을 곳에 따라 40마일로 적습니다.

평가는 더 크게 갈립니다. 국립공원청은 진군을 전쟁의 참화를 민간인에게 가져간 가혹한 전술로 설명하고, 국립문서보관소 블로그는 셔먼이 총력전(total war)을 펼쳤다고 씁니다. 셔먼 자신도 "전쟁은 잔인함"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마살렉은 다르게 봅니다. 셔먼이 파괴하는 전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양쪽의 생명 손실을 가장 적게 하며 전쟁을 빨리 끝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셔먼을 "미국 총력전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6주 진군의 사상자를 3,000명이 안 되는 것으로 어림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진군이 오늘까지 야만으로 기억된다고 덧붙입니다.

디키는 셔먼 자신이 이 전략을 "하드 워(hard war)"라고 불렀다고 적습니다. 그가 보기에 셔먼의 평판은 쓰는 사람에 따라 영웅과 악당 사이를 오갔습니다. 1880년대부터 남부의 태도가 크게 바뀌었고, 1960년대부터는 "잃어버린 대의(Lost Cause)" 해석이 학계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디키의 결론은 셔먼을 온전히 기릴 수도, 온전히 깎아내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리면 민간인을 상대로 한 약탈과 방화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깎아내리면 농장 노예제를 무너뜨린 그의 몫을 못 본 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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