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여름 전쟁에 나선 장군들은 빠른 승리를 기대했습니다. 그해 겨울, 서부전선의 병사들은 빗물이 고인 도랑 속에서 첫 겨울을 나고 있었습니다. 영국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참호선이 이어졌고, 그 선은 1918년 봄까지 거의 같은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수백만 명이 공격에 나섰는데 왜 선은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먼저 떠오르는 답은 기관총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한 조각입니다.

참호선이 생긴 과정부터 여러 겹의 짜임, 공격이 막힌 까닭, 4년 동안 나온 시도들, 1918년에 전선이 다시 움직인 과정까지 차례로 봅니다. 바탕은 영국 국립육군박물관, 캐나다 전쟁박물관, 호주 전쟁기념관, 미국 국립 1차 대전 박물관이 공개한 자료입니다.

1914년 가을: 기동전이 땅속으로 들어가다

1차 대전에 앞선 50년 동안 무기 기술은 크게 나아졌습니다. 그 사이 몇몇 근대 전쟁이 있었지만, 화력이 전장을 지배하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적었습니다. 전쟁 초 군대가 트인 땅으로 나아가자 기관총, 빠르게 쏘는 포, 한꺼번에 쏘는 소총 앞에서 큰 사상자가 났습니다.

9월에는 영국 원정군(BEF)이 독일 제1군과 제2군 사이 틈으로 들어가 독일군을 엔강까지 밀어내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독일군은 엔강 북쪽 슈맹데담 능선의 높은 곳에 파고들었고, 9월 중순 그들을 몰아내려는 공격을 여러 번 막아 냈습니다. 그러자 양쪽은 서로 상대의 옆을 돌아가려 하며 북쪽 바다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9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이어진 이 싸움을 흔히 "바다로의 경주(Race to the Sea)"라고 부릅니다. 끝에 닿은 곳은 벨기에의 이프르였습니다. 10월 20일부터 11월 22일까지 이곳에서 해협 항구로 가려는 독일군의 큰 공격이 막혔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M)은 이프르의 연합군 승리가 트인 땅의 전쟁을 끝냈다고 봅니다. 양쪽이 파고들었고,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466마일(750 km)의 참호선이 곧 생겼습니다. 영국 원정군만 해도 그해 말까지 9만 명 넘는 사상자를 냈고, 처음 건너간 부대는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전쟁 전체로 보면 숫자는 훨씬 큽니다. 1914년 말, 다섯 달 싸움 만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4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옆을 돌기, 기습, 해안 상륙이 모두 실패하자 남은 길은 파고드는 것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사들이 들어앉은 도랑에 가까웠던 자리가 차츰 참호가 되었습니다.

참호전이 1914년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닙니다. 미국 남북전쟁과 러일전쟁에도 참호전이 조금 있었습니다. 다만 고정된 참호전이 싸움의 표준이 된 것은 1차 대전이었다고 호주 전쟁기념관은 정리합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서부전선 연표. 가로선 위에 다섯 해가 점으로 놓이고, 1914년 끝에서 1918년 앞까지 '거의 그 자리에 머문 시기'라는 회색 띠가 덮여 있다. 왼쪽 끝에는 기동전, 오른쪽 끝에는 기동이 돌아옴이라는 표시가 있다. 1914: 9월 독일군이 엔강 위에 파고듦, 9월 말~11월 바다로의 경주, 10월 20일~11월 22일 1차 이프르 전투, 해협에서 스위스까지 참호선. 1915: 3월 10일 뇌브샤펠, 들어갔지만 돌파 못 함, 4월 22일 이프르의 독가스, 영국의 포탄 부족. 1916: 베르됭과 솜의 긴 소모전, 7월 1일 영국군의 솜 공격, 9월 솜에서 첫 전차. 1917: 2~4월 독일군 힌덴부르크선으로 물러남, 4월 아라스와 대포병 사격, 6월 7일 메신의 지뢰, 캉브레에서 전차를 한꺼번에 씀. 1918: 3월 21일 독일 춘계 공세와 기동의 귀환, 8월 8일 아미앵의 모든 병과 공격, 9월 26일 힌덴부르크선 돌파, 11월 11일 휴전
1914~1918년 서부전선 연표. 회색 띠가 전선이 거의 그 자리에 머문 시기입니다 (도표)(도표)

참호선의 짜임: 한 줄이 아니라 여러 겹

지도에서는 한 줄로 그려도 실제 참호선은 여러 겹이었습니다. 맨 앞의 최전선 참호 뒤에 둘째 줄인 지원 참호, 셋째 줄인 예비 참호가 있었습니다. 연락호(communication trench)가 이 줄들을 앞뒤로 이었고, 맨 앞에는 두꺼운 철조망 띠가 놓였습니다.

여기에 방어 시설과 땅밑 대피소가 더해졌습니다. 초기 참호는 서둘러 판 단순한 것이라 비바람도 잘 막지 못했지만 곧 튼튼해졌습니다. 재료는 모래주머니, 나무 널, 엮은 나뭇가지, 철조망, 때로는 그냥 진흙이었습니다.

두 참호선 사이의 땅은 무인지대(No Man's Land)라고 불렀습니다. 오래된 말이었는데, 끊임없는 포격과 기관총 사격이 휩쓴 1차 대전에서 끔찍한 새 뜻을 얻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본 참호선 개념도. 맨 위에 상대편의 철조망과 참호, 그 아래 노란 띠의 무인지대, 그 아래 철조망 띠가 있다. 철조망 뒤로 최전선 참호, 지원 참호, 예비 참호가 세 겹의 물결선으로 놓이고, 지그재그 갈색 선 세 개인 연락호가 세 줄을 앞뒤로 잇는다. 줄마다 작은 검은 네모로 땅밑 대피소가 표시되어 있다. 맨 아래는 후방이다. 축척과 거리는 없고,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의 설명을 바탕으로 한 개념도라는 메모가 있다
참호선은 한 줄이 아니라 여러 겹이었습니다. 축척 없는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참호를 대하는 생각도 양쪽이 달랐습니다. 독일군은 북프랑스와 벨기에의 넓은 땅을 차지한 뒤 그 땅을 지키려고 방어 시설을 지었고, 평화가 오면 그 땅으로 흥정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독일 참호는 처음부터 튼튼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참호를 다음 "대공세(Big Push)"까지만 쓸 임시 시설로 보았습니다.

왜 뚫기 어려웠나: 들어가기와 뚫고 나가기

지휘관들에게 가장 큰 숙제는 하나였습니다. 사격이 휩쓰는 참호 사이를 병사들이 무사히 건너 적의 방어를 뚫게 하는 일입니다. 그 틈을 지킨 것은 소총, 기관총, 포병의 화력이었습니다.

소총은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이 쓴 무기였고, 포병은 가장 파괴적인 무기였습니다. 캐나다 전쟁박물관은 포병이 사상자의 대부분을 냈다고 적습니다. 참호는 공중에서 터지는 유산탄은 어느 정도 막았지만 고폭탄에는 약했고, 깊은 대피소는 큰 공성포가 아니면 부수기 어려웠습니다.

기관총은 1차 대전보다 반세기 먼저 나와 1914년에는 널리 쓰였습니다. 그런데도 전쟁 전 대부분의 군대는 그 역할을 미심쩍어했습니다. 준비된 진지에서 사격 범위를 겹쳐 방어에 쓰는 힘을 처음 알아본 것은 독일군뿐이었고, 다른 군대도 곧 이를 배웠습니다.

숫자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영국군의 비커스(Vickers) 기관총을 두고 NAM은 1분에 600발 넘게, 사거리 4,500야드라고 적습니다. 캐나다 전쟁박물관은 1분에 450~500발, 최대 사거리 4,500 m라고 적고, 믿을 만했지만 무거워서 전투 중 앞으로 옮기기 어려웠다고 덧붙입니다.

화력만으로 설명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캐나다 전쟁박물관이 꼽는 방어의 힘은 철조망, 깊이 있는 참호, 꾸준히 들어오는 증원 병력, 기관총과 포병입니다. 대부분의 공격은 방어선에 닿기 전에 꺾였고, 첫 진지를 넘은 공격도 증원을 받기 어려워 대개 곧 반격에 밀려났습니다.

1915년 3월 10일의 뇌브샤펠 공격이 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영국군의 첫 큰 공세였고, 병사들은 독일군 최전선 참호를 빠르게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명령과 증원이 늦었고, 처음 얻은 것을 키우기 전에 독일군의 반격이 길을 막았습니다. 사흘 뒤 손에 든 것은 좁은 땅이었고, 사상자는 영국군 7,000명, 인도군 4,000명을 넘었습니다.

이 싸움이 남긴 교훈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독일군 진지에 뚫고 들어갈 수는 있어도, 그 자리의 성공을 큰 돌파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적 참호 한 줄에 들어가는 것(break in)과 그 뒤 여러 겹을 지나 트인 땅으로 나가는 것(breakthrough)은 다른 일이었습니다.

1915년의 다른 전투도 비슷했습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영국·프랑스군은 병력과 포병에서 3대 1쯤 앞섰지만, 독일 방어군은 땅을 내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잃은 자리 일부를 되찾곤 했습니다. 뇌브샤펠 뒤 영국군 총사령관 존 프렌치는 실패를 포탄 부족 탓으로 돌렸고, 이 일은 1915년의 "포탄 위기(Shell Crisis)"로 번졌습니다.

참호 속의 날들

참호 생활은 긴 지루함 사이사이에 짧은 공포가 끼어드는 날들이었습니다. 적이 흔히 공격해 오는 새벽이면 병사들은 "스탠드투(stand-to)"로 깨어 최전선을 지켰습니다. 낮에는 저격수의 눈을 피해 모든 일을 땅 아래에서 했습니다.

밤이 가장 바쁘고 가장 위험했습니다. 어둠을 틈타 작업조가 무인지대로 나가 철조망을 고치거나 새 참호를 팠습니다. 큰 전투가 없는 날에도 저격과 포탄은 꾸준히 사람을 앗아 갔고, 이것을 "소모(wastage)"라고 불렀습니다.

캐나다군 쪽 기록에서 800명 규모 보병 부대의 소모율은 한 달 10%, 곧 80명이 죽거나 싸울 수 없게 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꾸준한 손실 때문에 증원 병력이 늘 필요했습니다.

환경도 적이었습니다. 덕보드(duckboard)라는 나무 널과 모래주머니로 물을 막으려 했지만 최전선 병사들은 진흙 속에서 지냈습니다. 참호는 자주 물에 잠겼고 이와 쥐가 들끓었습니다.

참호열, 참호 신염, 참호족 같은 병은 흔한 의료 문제가 되어 큰 인력 손실을 냈습니다. 참호족은 춥고 늘 축축한 곳에서 생기는 동상 비슷한 감염입니다. 이가 참호열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1918년에야 의사들이 밝혀냈습니다.

교착을 풀려는 시도들

양쪽은 4년 동안 이 벽을 넘을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하나가 가스였습니다. 독일군은 1914년 10월 뇌브샤펠을 차지할 때 심한 재채기를 일으키는 자극성 화학 물질 포탄을 프랑스군에게 처음 썼습니다. 1915년 4월 22일에는 이프르 돌출부에서 교착을 깨려는 바람으로 독가스를 썼습니다.

그러나 가스 구름이 연 틈을 이용할 예비 병력이 모자랐고, 독일군은 뚫고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 뒤 모든 쪽이 염소, 포스겐, 겨자 가스처럼 더 치명적인 가스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영연방군만 해도 18만 명 넘는 가스 사상자를 냈습니다.

땅 위가 막히자 땅 밑으로도 갔습니다. 무인지대 밑으로 갱도를 파 적 진지 아래에 폭약을 묻었고, 영국군에서는 이 일을 주로 웨일스와 더럼 광부들로 꾸린 공병 특수 부대가 맡았습니다. 1917년 6월 7일 메신 능선의 큰 폭발들은 독일군 약 1만 명의 목숨을 앗고 그 전선을 흐트러뜨렸습니다.

전차는 영국 육군이 참호전 교착의 기계적 해법으로 개발했습니다. 1916년 9월 솜에서 처음 나왔을 때는 고장이 잦고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1917년 캉브레에서 한꺼번에 많이 써서 처음으로 의미 있는 돌파를 했지만, 적의 사격에 약하고 고장이 잦은 점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오늘날 전차가 무엇으로 싸우는지는 주력전차 글에 있습니다.

포병의 쓰는 법도 바뀌었습니다. 전쟁 초 영국군은 먼저 포격하고 보병을 내보냈지만, 이 방식은 갈수록 덜 들었습니다. 솜 전투 전 독일군은 포격 동안 콘크리트 엄체호에 들어가 있다가 포성이 멎으면 나왔습니다.

영국군은 이동 탄막(creeping barrage)이라는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옮겨 가는 포탄의 줄 뒤를 보병이 따라 무인지대를 건너는 방식입니다. 항공기, 음향 탐지, 섬광 관측 같은 새 기술로 적 포병의 자리를 찾아 무력화하는 일도 커졌습니다.

1917년 4월 아라스에서는 전문 포병 부대가 대포병 사격(counter-battery fire)으로 독일 포를 노렸습니다. 공격은 처음 이틀 동안 최대 8 km 나아갔지만, 증원·포병·보급이 앞선 병사들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5월 16일 전투가 끝났을 때 전선은 다시 참호전 교착으로 돌아가 있었고, 사상자는 영국·캐나다군이 15만 명, 독일군이 10만 명을 넘었습니다. 포탄이 날아온 자리를 찾는 오늘날의 장비는 대포병레이다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보병의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전쟁 초 대부분의 병사는 소총과 대검만 들었지만, 차츰 수류탄, 총류탄, 박격포, 여러 기관총을 함께 썼습니다. 8~30명의 작은 부대가 이 무기들을 섞어 쓰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큰 공세 사이에는 작은 참호 습격이 이어졌습니다. 많은 장교는 습격이 보병 전술을 다듬고 병사들을 깨어 있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일반 병사들의 눈은 흔히 달랐습니다. 무섭고 쓸모없으며, 대개 부대의 가장 좋은 병사들을 잃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방어 쪽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1916년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전면 돌파는 할 수 없다고 보고 베르됭 일대의 제한된 진격을 골랐는데, 이 싸움은 양쪽을 함께 닳게 하는 소모전이 되었습니다. 1917년에는 2월에서 4월 사이 힌덴부르크선으로 물러났습니다. 전보다 훨씬 짧고 토치카와 깊은 철조망 띠로 지킨 진지였습니다.

1918년: 전선이 다시 움직이다

1917년 러시아가 전쟁에서 빠지자 독일 병력이 많이 풀렸습니다. 1918년 3월 21일 독일군은 미하엘 작전으로 춘계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약 1만 문의 포가 다섯 시간 동안 100만 발 넘게 쏜 뒤, 무장이 무거운 "돌격대(storm troopers)"가 전선의 약한 곳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돌격대는 저항 거점을 지나쳐 영국군 참호 체계를 뚫었습니다. NAM은 이 공세로 몇 해의 교착 끝에 기동전이 서부전선에 돌아왔다고 봅니다. 독일군은 64 km까지 나아갔지만, 4월 5일쯤 힘이 빠져 아미앵 동쪽에서 멈췄습니다.

멈춘 까닭은 지친 병사와 모자란 수송이었습니다. 부서진 땅 위로 병력·보급·포를 옮기기 어려웠고, 그 자리의 승리를 전략적 승리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영국군은 17만 8천 명, 프랑스군은 7만 7천 명, 독일군은 24만 명을 잃었습니다.

8월 8일에는 연합군이 아미앵에서 크게 공격했습니다. 영국군 제4군의 13개 사단을 포 2,000문 넘게, 전차 450대, 비행기 1,900대가 도왔습니다. 보병·포병·전차·항공기를 하나로 묶은 "모든 병과(all arms)" 공격이었고, 이번에는 독일 전선이 무너졌습니다.

아미앵에서 "백일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9월 26일 영국군이 힌덴부르크선을 뚫었고, 1918년 11월 11일 오전 5시 프랑스 콩피에뉴의 열차 객차에서 휴전 협정이 맺어졌습니다. 그날 오전 11시에 사격이 멈췄습니다.

"4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를 읽는 법

제목의 물음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캐나다 전쟁박물관의 표현은 참호선이 4년 동안 "거의 그 자리에(more or less stationary)"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1917년 아라스처럼 몇 km를 나아간 공격도 있었고, 1918년 봄에는 독일군이 64 km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들어간 자리를 돌파로 키우지 못하고 다시 밀려나는 일이 길게 되풀이되었다고 보는 편이 기록에 가깝습니다.

전선의 길이조차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재는 끝점도 해협, 북해, 니우포르트 근처로 다르고, 한 곳은 이어진 한 줄이 아니었다고, 다른 곳은 끊김 없이 이어졌다고 적습니다.

서부전선 참호선의 길이를 자료별로 견준 가로 막대 도표. 막대는 1마일을 1.609 km로 바꿔 같은 km 눈금에 그렸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 466마일(750 km),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미국 국립 1차 대전 박물관: 대략 475마일, 영국 해협에서 스위스 알프스까지, 이어진 한 줄은 아님. 호주 전쟁기념관: 약 475마일, 북해에서 스위스까지 S자 꼴. 캐나다 전쟁박물관: 700 km, 스위스 국경에서 니우포르트 근처 해협까지 이어짐. 아래에 자료마다 재는 끝점이 다르고 막대는 어느 숫자가 맞는지 정한 것이 아니라는 메모가 있다
같은 전선, 다른 숫자. 자료마다 적은 길이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까닭도 하나가 아닙니다. 기관총과 포병의 화력이 병사들을 땅속으로 몰아넣었다는 데는 여러 기록이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전차, 독가스, 새 전술 어느 것도 그것만으로는 어느 쪽에도 결정적 승리를 주지 못했습니다. 참호 체계는 전쟁이 이어질수록 더 복잡하고 질겨졌고, 1915~1918년 대부분 방어에 섰던 독일군은 이런 싸움에 특히 능했습니다.

보급과 생산도 같은 무게로 놓입니다. 1914~1915년에는 싸움의 세기가 생산을 넘어 양쪽 모두 포탄이 모자랐고, 싸우는 모든 나라가 경제를 전쟁에 맞춰 다시 짰습니다. 캐나다 전쟁박물관은 물자의 양과 많은 경우 질에서 앞선 것을 1918년 연합군 승리의 큰 요인으로 꼽습니다.

노동력·원료·석탄이 모자란 동맹국은 철도망이 무너져 가며 전선에 식량과 장비를 제대로 대지 못했습니다. 보급의 원리는 군수·보급·정비 글에서 이어집니다.

마지막은 배움입니다. 1915년의 실패에서 양쪽 모두 교훈을 얻었고, 영국군은 1917년 아라스에서 솜의 교훈을 살려 보병·전차 협동과 근접 항공 지원 같은 새 방법을 만들어 갔습니다. 1918년 아미앵의 "모든 병과" 공격은 그 배움이 하나로 묶인 장면입니다. 4년의 교착은 한 가지 무기의 이야기라기보다 화력, 증원, 보급, 배움이 맞물린 이야기였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베르됭 전투: 300일의 소모전: 1916년의 소모전을 한 전투로 따라갑니다.
  • 솜 전투: 첫날 기록이 남긴 질문: 포격 뒤 보병이 무인지대를 건넌 첫날의 기록을 읽습니다.
  • 최초의 전차와 캉브레 전투: 참호를 넘으려는 기계: 이 글에 짧게 나온 전차의 처음을 자세히 봅니다.
  • 1차 대전의 독가스와 화학무기 금지 협약: 가스가 쓰인 과정과 그 뒤의 금지 협약을 다룹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새 무기가 등장하고 자리 잡기까지의 길을 빛을 쓰는 무기에서 따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