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2월 21일, 뫼즈(Meuse)강가의 요새 도시 베르됭(Verdun) 앞 프랑스군 참호와 요새 위로 독일군의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싸움은 그해 12월에야 멈췄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긴 전투였습니다.

열 달 동안 두 나라 병사는 언덕과 요새, 마을을 두고 싸웠고, 플뢰리(Fleury) 같은 마을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독일 병사도 프랑스 병사도 이곳을 '피의 방앗간(Blutmühle)', '베르됭의 지옥'이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손실은 거의 같았습니다.

독일은 왜 하필 요새가 늘어선 도시를 골랐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노렸을까요? 두 번째 물음은 지금도 연구자들이 답을 두고 다툽니다. 공격의 배경과 열 달의 흐름, 대포와 보급로가 맡은 몫, 자료마다 다른 사상자 수, 두 나라가 이 전투를 기억하는 방식을 차례로 따라가 봅니다.

왜 베르됭이었나

1914년 가을 마른 전투 뒤로 서부전선은 서로 참호를 파고 버티는 진지전이 됐습니다. 독일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이 진지전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소모전을 치르는 독일이 군사력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봤습니다.

팔켄하인이 본 가장 큰 적은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먼저 칠 상대로는 프랑스를 골랐습니다. 1914~1915년의 큰 손실로 프랑스군이 약해졌다고 봤기 때문이고, 그때까지 프랑스의 손실은 7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은 목표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영국군이 다 갖춰져 연합국이 더 강해지기 전에 프랑스군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팔켄하인은 대포로 프랑스 부대를 부수고 보병은 적게 써서 자기 쪽 손실을 줄이려 했습니다.

1915년 11월 30일, 팔켄하인은 1916년의 중심을 서부전선에 두겠다고 지휘관들에게 알렸습니다. 처음에 떠올린 곳은 벨포르(Belfort) 앞이었습니다. 12월 중순, 베르됭 구역을 맡은 독일 5군의 참모장 슈미트 폰 크노벨스도르프(Schmidt von Knobelsdorf)가 베르됭을 치자고 그를 설득했습니다.

요새 도시를 고른 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베르됭으로 물자가 들어오는 길은 바르르뒤크(Bar-le-Duc)에서 오는 도로 하나와, 큰 전투를 감당하기엔 모자란 작은 미터 궤간 철도뿐이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Joffre)는 1915년 8월 베르됭 요새들의 무장을 해제하기로 했고, 독일은 이를 아마 알고 있었습니다. 베르됭 기념관(Mémorial de Verdun)의 표현을 빌리면 요새는 "언덕 위의 빈 껍데기" 같았습니다.

독일 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DHM)은 다른 까닭도 듭니다. 이 도시가 프랑스의 자기 인식에서 갖는 상징적 뜻 때문에도 팔켄하인이 요새를 무릅쓰고 공세를 정했다는 것입니다. 공세는 돌파를 이루거나, 아니면 프랑스의 전쟁 의지를 꺾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프랑스군의 피를 말린다'는 말은 팔켄하인 자신에게서 나왔습니다. 다만 이 말은 전쟁이 끝난 뒤에 쓴 회고록에 나오고, 1916년의 목적이 정말 그랬는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베르됭 기념관은 연구자들의 해석을 세 갈래로 나눕니다. 첫째는 강한 포병으로 프랑스군에 되도록 많은 손실을 입히려 했다는 해석입니다. 둘째는 상징적인 패배를 안겨 프랑스군이 베르됭 시내와 뫼즈강 오른쪽(우안)의 요새들을 버리게 하려 했다는 해석이고, 셋째는 이 공세로 서부전선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는 해석입니다.

팔켄하인이 시내 점령까지 명령했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세를 준비한 5군 사령관 빌헬름 황태자와 참모장 크노벨스도르프의 목표는 분명히 시내 점령이었습니다. 공격이 시작된 뒤 황태자의 참모부는 팔켄하인의 전략 개념에서 벗어나 땅을 차지하는 데 매달렸고, 2월 말에 이미 독일의 손실은 프랑스의 손실과 비슷해졌습니다.

2월 21일: 포격과 두오몽 요새

독일은 보병 10개 사단, 약 15만 명을 모았습니다. 대포는 기념관 기준으로 참호용 박격포까지 합쳐 1,200문 가까이였고, IWM은 1,200문 넘게로 적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1톤 가까운 탄을 14 km 넘게 쏘는 42 cm 중박격포도 있었습니다. 베르됭 전선에는 철도 14개 노선이 닿아 병력과 장비를 빨리 모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쪽 진지는 다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독일 5군은 2월 12일에 공격하려 했지만 날씨가 나빠 미뤘습니다. 공격 전날 밤, 우안 전선에는 프랑스 보병 약 25,000명과 대포 140문이 미완성 진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포격은 2월 21일에 시작됐습니다. 시작 시각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기념관은 오전 7시 15분에 시작해 오후 4시에 멈췄고 그날 약 35만 발이 떨어졌다고 적고, IWM의 베르됭 쪽은 오전 4시로 적습니다. 독일군은 이 포격을 '트롬멜포이어(Trommelfeuer)'라고 불렀습니다.

포격이 끝나고 독일 보병이 나아갔지만, 첫날 저녁까지 코르(Caures) 숲과 에르브부아(Herbebois) 숲은 프랑스군 손에 남았습니다. 2월 24일 사모뉴·보몽·오른 마을이 넘어가면서 프랑스의 첫째·둘째 방어선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엿새 동안 프랑스군은 투입한 병력의 절반인 21,000명을 잃었고, 독일군은 곳에 따라 8 km 넘게 나아갔습니다.

2월 25일에는 두오몽 요새(Fort Douaumont)가 떨어졌습니다. 베르됭을 지키는 19개 요새 가운데 가장 크고 높은 요새이자 북동쪽 방어의 핵심이었습니다. 적이 훨씬 멀리 있다고 여긴 50명의 작은 수비대는 요새를 지키지 않았고, 독일 24보병연대가 요새를 차지했습니다.

이 소식은 독일 제국에서 큰 성공으로 축하받았습니다. 그러나 DHM은 이 점령이 군사적으로는 대수롭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반대로 프랑스 참모부는 곧 이 요새를 되찾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페탱과 '신성한 길'

2월 26일, 페탱(Pétain) 장군이 베르됭 방어를 맡은 프랑스 2군 사령관이 됐습니다. 페탱은 손에 있는 예비 사단과 조프르가 더 내주는 사단을 차례로 전선에 넣고 빼는 교대 방식을 세웠고, 이를 '노리아(noria)'라고 불렀습니다. 맨 앞 참호에 병력을 몰아넣지 않고, 서로 받쳐 주는 거점을 겹겹이 두어 깊이 있게 막았습니다.

교대에는 대가와 이점이 함께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많은 부분이 베르됭 전투를 겪게 됐지만, 한 부대가 전선에 오래 머물지는 않게 됐습니다. 프랑스군의 4분의 3이 베르됭에서 싸웠습니다.

교대도 보급도 길 하나에 달려 있었습니다. 바르르뒤크에서 베르됭으로 오는 이 도로는 곧 '신성한 길(Voie Sacrée)'로 불렸고, 독일의 포격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끊기지 않았습니다. IWM은 프랑스가 싸움을 이어 갈 수 있었던 까닭을 이 길로 들어온 탄약과 보급품에서 찾습니다.

길 위의 숫자를 보면 규모가 잡힙니다. 트럭 3,500대, 승용차 2,000대, 구급차 800대가 오갔고, 트럭이 14초마다 한 대씩 지나갔습니다. 싸움이 가장 거셌던 6~7월에는 5초마다 한 대였습니다. 한 주에 사람 9만 명과 장비 5만 톤이 이 길로 움직였습니다.

차들의 통고무 바퀴에 길은 몹시 닳았습니다. 대포와 병사만큼이나, 사람과 물자를 제때 옮기는 군수(logistics)가 이 싸움을 떠받쳤습니다.

뫼즈강 양쪽의 봄과 여름

3월 6일, 독일은 강 왼쪽(좌안)으로 공격을 넓혔습니다. 맞은편 강가에서 독일군의 움직임을 옆에서 때리던 프랑스 포병을 잠재우려면 좌안의 고지가 필요했습니다. 목표는 모르옴(Le Mort-Homme) 고지였고, 독일은 4월 9일 이곳을 차지했지만 더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3~4월 내내 비가 내려 싸움터는 진창이 됐습니다.

1916년 베르됭 개념 도표. 가운데로 뫼즈강이 위에서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왼쪽이 좌안, 오른쪽이 우안이다. 위쪽을 가로지르는 점선은 2월 21일의 독일군 전선이다. 좌안에는 모르옴(3월 6일부터 공격, 4월 9일 점령)과 304고지(5월 4~7일 점령), 우안에는 두오몽 요새(2월 25일 함락, 10월 24일 탈환), 보 요새(6월 7일 함락, 11월 재진입), 플뢰리(여러 번 주인이 바뀜, 8월 18일부터 프랑스), 프루아드테르(6월 23일 독일 공격이 멈춤)가 있다. 아래쪽 강가에 베르됭 시내가 있고, 왼쪽 아래 바르르뒤크에서 시내까지 굵은 선으로 '신성한 길'이 이어진다(트럭 14초마다 한 대, 6~7월에는 5초마다). 지도가 아니며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강을 사이에 둔 두 싸움터와 보급로 하나. 자료의 설명을 네모와 선으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5월 3일에는 독일 중포 500문이 304고지를 때렸고, 독일은 4일부터 7일 사이에 고지를 차지했습니다. 이 무렵 프랑스 쪽 지휘관이 바뀌었습니다. 페탱이 중부 집단군 사령관으로 올라가고 로베르 니벨(Robert Nivelle)이 뒤를 이었는데, 그 때를 기념관은 5월 초로, IWM은 4월 말로 적습니다.

두오몽 요새 안에서는 5월 8일 탄약고가 폭발해 독일 병사 679명이 숨졌습니다. 5월 22일 프랑스군은 처음으로 두오몽 요새를 되찾으려 했습니다. 요새는 그해 10월까지 독일 손에 남았습니다.

6월 1일, 독일군 4만 명이 큰 화염방사기 10대를 갖추고 보 요새(Fort Vaux) 쪽으로 공격했습니다. 엿새 동안 포위된 수비대는 6월 7일 아침 항복했습니다. 이것이 베르됭에서 독일이 거둔 마지막 성공이었습니다.

6월 20일, 독일은 대포 약 2,000문으로 다시 준비 포격을 시작했고 가스탄을 10만 발 가까이 쐈습니다. 6월 23일 5만 명이 공격해 티오몽 진지와 플뢰리 마을 거의 전부를 차지했지만, 프루아드테르(Froideterre) 진지 앞에서 멈췄습니다. 이 무렵 포스겐 가스까지 썼지만 진격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7월 11~12일, 독일은 포탄 33만 발을 쏜 뒤 4만 명을 보내 마지막으로 시내를 노렸습니다. 이 공격도 시내에 닿지 못했고, 그 뒤 독일은 국지적인 공격만 하며 방어로 돌아섰습니다. 플뢰리 마을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다가 8월 18일 프랑스 손에 완전히 돌아왔습니다.

솜 공세와 가을의 반격

6월 24일, 솜(Somme)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포격이 시작됐고 7월 1일 공세가 이어졌습니다. 베르됭의 압박을 덜려는 뜻도 담긴 공세였지만, 독일 전선을 뚫지 못한 채 또 하나의 소모전이 됐습니다. 그래도 독일은 솜 전선을 보강하려고 베르됭의 공세를 줄여야 했습니다. 같은 여름 러시아가 연 공세도 독일이 베르됭의 병력을 줄이게 했습니다.

영향은 거꾸로도 흘렀습니다. 1916년 내내 베르됭에 걸린 압박 때문에 솜 공격이 급해졌습니다. 그리고 베르됭 공격으로 프랑스가 내놓을 수 있는 병력이 크게 줄어, 솜에서는 영국이 주역을 맡게 됐습니다.

가을에는 프랑스가 반격했습니다. 대포 650문을 모은 프랑스군은 10월 24일 네 사단을 이동 탄막(creeping barrage) 뒤에서 앞으로 내보냈고, 두오몽 요새를 비교적 쉽게 되찾았습니다. 그날 보 요새 공격은 실패했습니다. 11월 2일 무전을 가로채 독일군이 요새를 비웠다는 것을 알았고, 이튿날 밤 프랑스군이 요새에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공세는 12월 15일에 시작됐습니다. 프랑스군은 대포 886문을 늘어놓고, 영하 20°C의 추위 속에 네 사단으로 두오몽 요새 둘레를 정리하며 루브몽과 브조보 마을을 되찾았습니다. 12월 18일 샹브레트 농장을 차지하면서 공세가 끝났습니다. 다만 IWM의 베르됭 쪽은 겨울 날씨와 솜의 결과로 전투가 12월 15일에 잦아들었다고 적습니다.

1915년 말부터 1916년 12월까지의 베르됭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1915년 11월 30일 팔켄하인이 1916년의 중심을 서부전선에 둠, 12월 중순 목표를 벨포르에서 베르됭으로 바꿈, 1916년 2월 12일 예정했던 공격을 날씨로 미룸, 2월 21일 첫 포격(베르됭 기념관은 오전 7시 15분, IWM은 오전 4시), 2월 25일 두오몽 요새 함락, 2월 26일 페탱이 프랑스 2군을 맡음과 신성한 길, 3월 6일 좌안 모르옴 공격, 4월 9일 모르옴 점령, 5월 4~7일 304고지 점령과 니벨의 지휘 인수(4월 말 또는 5월 초), 6월 1~7일 보 요새 포위와 항복, 6월 23일 프루아드테르에서 멈춘 독일 공격, 7월 1일 솜 공세 시작, 7월 11~12일 독일의 마지막 시내 점령 시도, 8월 18일 프랑스의 플뢰리 탈환, 10월 24일 두오몽 요새 탈환, 11월 2~3일 비어 있던 보 요새 재진입, 12월 15~18일 프랑스의 마지막 공세와 전투의 끝(12월 18일, IWM은 12월 15일). 점의 색으로 독일 쪽, 프랑스 쪽, 다른 곳, 시작과 끝을 나눈다
1915년 11월 30일부터 1916년 12월 18일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대포가 주인공이 된 싸움

베르됭의 숫자를 늘어놓으면 한 무기가 계속 눈에 띕니다. 첫날 약 35만 발, 5월 3일 304고지에 중포 500문, 6월의 준비 포격에 대포 약 2,000문, 7월 11~12일 33만 발입니다. 프랑스도 가을 반격에 650문, 12월 공세에 886문을 모았습니다.

프랑스가 베르됭의 대포 수를 크게 늘리면서 독일군도 끊임없는 포격에 똑같이 시달렸습니다. 1916년 말까지 고폭탄 2,600만 발과 독가스탄 10만 발이 아주 좁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DHM은 베르됭 같은 싸움을 '물량전(Materialschlacht)'이라고 부릅니다. 물량전과 함께 산업화된 전쟁의 새 단계가 열렸습니다. 어느 나라가 군인을 더 많이 동원하고 무기와 탄약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느냐가 결정적인 문제가 된 것입니다.

대포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보 요새 공격에는 화염방사기가, 6월의 공격에는 가스탄이 쓰였습니다. 가을의 니벨은 포병에서 앞섰고, 경기관총·소총 척탄·박격포·경야포를 든 전문 보병 분대를 바탕으로 한 새 전술을 썼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베르됭의 사상자 수는 자료마다 크게 다릅니다. 먼저 무엇을 세는지부터 다릅니다. 같은 IWM 안에서도 베르됭 쪽은 프랑스 377,000명, 독일 330,000명을 잃었다고 적고, 1차 대전 핵심 전투 쪽은 전사·부상만으로 독일 43만 명 넘게, 프랑스 약 55만 명을 적습니다. 어느 숫자를 고르든 그 하나하나는 돌아오지 못했거나 다친 사람입니다.

베르됭 기념관은 프랑스 전사 163,000명·부상 216,000명, 독일 전사 143,000명·부상 190,000명으로 나눠, 합쳐 70만 명 가까이가 죽거나 다쳤다고 적습니다. 한편 기념관의 첫머리 요약은 같은 70만 명을 전사·실종 306,000명과 부상 약 400,000명으로 나눕니다.

DHM은 죽은 사람만 셉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각각 약 25만 명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1984년 추모식을 다룬 독일역사연구소 워싱턴(German Historical Institute Washington)의 자료(GHDI)는 이 전투가 "70만 명 넘는 병사의 목숨"을 앗았다고 씁니다. 같은 '70만'이 어떤 자료에서는 죽거나 다친 사람 전체이고, 어떤 자료에서는 목숨을 잃은 사람인 셈입니다.

자료별 베르됭 손실 비교 가로 막대 도표. IWM 베르됭 쪽(손실): 프랑스 377,000명, 독일 330,000명. IWM 1차 대전 핵심 전투 쪽(전사·부상): 프랑스 약 550,000명, 독일 430,000명 넘게. 베르됭 기념관(전사 + 부상): 프랑스 전사 163,000명 + 부상 216,000명, 독일 전사 143,000명 + 부상 190,000명. 독일 역사박물관(사망만): 프랑스·독일 각각 약 250,000명. 아래에 한 숫자로 적은 합계 두 가지: 베르됭 기념관 '70만 명 가까이 죽거나 다침', GHDI '70만 명 넘는 병사의 목숨'. 파란색은 프랑스, 갈색은 독일, 옅은 부분은 기념관 수치의 부상자다
같은 전투, 다른 숫자. 자료마다 세는 범위가 다릅니다 (도표)(도표)

날짜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첫 포격 시각은 오전 7시 15분과 오전 4시로, 끝난 날은 12월 18일과 12월 15일로 갈립니다. 2월 21일부터 12월 18일까지는 301일, 12월 15일까지면 298일이라 제목의 '300일'은 어림수입니다. IWM은 베르됭 쪽에서 "근대사에서 가장 긴 전투", 핵심 전투 쪽에서 "1차 대전에서 가장 긴 전투"라고 범위를 달리해 부릅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기억

전투의 결과를 보는 눈도 갈립니다. IWM의 핵심 전투 쪽은 프랑스가 해가 끝나기 전에 방어적 승리를 거뒀다고 봅니다. 베르됭 기념관은 더 나아가, 독일이 베르됭의 실패와 솜·뫼즈 고지의 큰 손실로 전략 전체를 바꿔야 했다고 해석합니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방어에 선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전을 벌였고, 이것이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여 힘의 균형을 연합국 쪽으로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독일 쪽 기관의 서술은 다릅니다. DHM은 1916년 12월까지 어느 쪽도 이기지 못했고, 12월에는 프랑스도 성과 없이 공격을 끝냈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베르됭'은 전쟁의 무의미함을 뜻하는 말이 됐다고 정리합니다.

두 쪽 모두에 남은 것이 있습니다. IWM은 프랑스군을 무너뜨리려던 팔켄하인의 계획이 실패했고, 베르됭과 솜의 큰 손실이 겹쳐 독일군에 인력 위기가 왔다고 봅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상처가 전쟁 중과 전쟁 뒤의 정치·군사 결정, 그리고 국민 의식에 오래 남았습니다.

싸움터에는 사라진 마을이 있습니다. 플뢰리, 브조보, 오몽, 보몽, 퀴미에르, 보, 오른, 루브몽, 두오몽의 아홉 마을은 완전히 부서져 다시 세워지지 않았고, '프랑스를 위해 죽은' 마을로 선포됐습니다. 두오몽 납골당에는 병사 13만 명의 유해가 있고, 그 앞 묘지에는 16,000기가 넘는 무덤이 있습니다.

1984년 9월 22일, 1차 대전이 시작된 지 70년 뒤 프랑스의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대통령과 독일의 콜(Helmut Kohl) 총리가 베르됭의 전사자 추모식에 함께했습니다. 두 나라 국가가 울리는 동안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습니다. 베르됭은 이제 프랑스와 독일 모두에게 전쟁의 참상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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