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년 5월, 프라하성의 창문 하나로 세 사람이 던져졌습니다.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이 황제의 총독 두 명과 서기 한 명을 밖으로 내던진 것입니다. 세 사람은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서 시작된 싸움은 30년을 이어졌고, 끝내 유럽 왕국 대부분이 끼어들었습니다.

이 전쟁을 흔히 가톨릭과 개신교가 맞선 종교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틀린 이름은 아니지만, 역사학자들은 여기에 저마다 단서를 답니다. 반란 하나가 어떻게 대전쟁이 됐는지, 군대를 먹이는 방식이 왜 그토록 많은 민간인을 굶주리게 했는지, 1648년의 평화가 무엇을 바꿨는지를 독일·오스트리아·스웨덴의 공공 기관 자료와 조약문으로 따라갑니다.

프라하성 창문에서 시작된 반란

무대는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입니다. 그때 유럽에서 가장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였고, 오늘날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체코, 북이탈리아, 남덴마크, 동프랑스, 서폴란드까지 걸쳐 있었습니다. 황제는 일곱 선제후가 뽑았습니다. 뽑힌 황제도 제후 약 60명, 백작과 수도원장 140명, 제국 도시 약 60곳과 권력을 나눠 가졌습니다.

이 나라 안에는 두 진영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가톨릭인 합스부르크 황실이고, 다른 쪽은 개신교 제후들이 묶은 연합이었습니다. 1618년 보헤미아의 개신교 신분들이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맞서 일어났고, 그 시작이 앞에서 본 창문 투척입니다.

창문 투척 자체는 피를 흘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총독 둘과 서기가 모두 살아남았고, 크게 다친 사람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학자 헤어프리트 뮌클러(Herfried Münkler)는 이 일보다 그 뒤의 선택을 봅니다.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는 신분들과 협상하지 않고 힘으로 누르는 길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상비군도 전쟁을 치를 돈도 없었습니다. 뮌클러의 견해로는 마드리드의 펠리페 3세가 돈과 군대로 돕지 않았다면 이 전쟁은 돈이 없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1619년 보헤미아 신분들은 페르디난트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뽑았습니다. 이듬해 프라하 근처 백산(White Mountain)에서 황제와 가톨릭 군대가 보헤미아 신분군을 이겼고, 프리드리히 5세는 달아났습니다. 반란자 27명이 처형됐고, 개신교 지배층은 나라를 떠나야 했으며, 보헤미아는 다시 가톨릭이 됐습니다.

네 마디로 본 30년

30년 전쟁 연표 도표. 위쪽 막대는 1618년부터 1648년까지를 같은 비율로 그렸고, 1단계 보헤미아·팔츠 전쟁(1618~1623), 2단계 덴마크·니더작센 전쟁(1625~1629), 3단계 스웨덴 전쟁(1630~1635), 4단계 스웨덴·프랑스 전쟁(1635~1648)으로 나뉜다. 단계의 처음과 끝은 그 단계에 적힌 첫 사건과 마지막 사건의 해이고, 사건이 없는 해는 회색이다. 아래 네 칸에 사건이 있다. 1단계: 1618년 프라하 창문 투척과 보헤미아 신분 봉기, 1619년 페르디난트 폐위와 프리드리히 5세 선출, 1620년 백산 전투와 프리드리히 5세의 도주, 1622/23년 틸리의 가톨릭 동맹군이 반란을 끝냄. 2단계: 1625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 참전, 1626년 데사우와 루터에서 발렌슈타인과 틸리 승리, 1629년 복원 칙령과 뤼베크 평화로 덴마크가 빠짐. 3단계: 1630년 구스타브 아돌프의 우제돔 상륙, 1631년 마그데부르크 파괴와 브라이텐펠트의 스웨덴 승리, 1632년 뤼첸에서 구스타브 아돌프 전사, 1634년 발렌슈타인 암살과 뇌르틀링겐의 스웨덴 패배, 1635년 프라하 평화(스웨덴과 프랑스는 빠짐). 4단계: 1635년 프랑스의 대스페인 선전포고, 1641년 함부르크에서 뮌스터·오스나브뤼크 회의를 정함, 1644/45년 실제 협상 시작과 휴전 없음, 1645년 얀카우의 스웨덴 승리와 빈 쪽 진격,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 맨 아래에 평화 조약이 1648년 5월 15일부터 10월 24일 사이에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맺어졌고, 당대 사람들은 1618년부터 셌으며 어떤 이는 외국 병사가 수비대에서 떠난 1650년을 끝으로 봤다는 줄이 있다
30년을 네 마디로 나눈 연표. 막대는 실제 길이 비율대로 그렸습니다 (도표)(도표)

"30년 전쟁"이라는 이름은 뒤에 붙은 것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창문 투척이나 1618년 혜성이 나타난 때부터 해를 셌습니다. 끝을 1648년으로 본 사람도 있고, 외국 병사가 수비대에서까지 물러난 1650년으로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면 32년이지만, 이 셈은 곧 둥근 숫자에 밀렸습니다.

긴 전쟁을 네 마디로 나누는 방식도 오래됐습니다. 1782년 할레의 요한 크리스토프 크라우제(Johann Christoph Krause)가 쓴 짧은 교과서가 보헤미아·팔츠 전쟁, 니더작센·덴마크 전쟁, 스웨덴 전쟁, 스웨덴·프랑스 전쟁의 네 시기로 나눴습니다. 오늘 독일 연방정치교육원(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bpb)의 연표도 같은 네 묶음을 씁니다.

첫 마디에서는 황제 쪽이 이겼습니다. 1622년과 1623년,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Johann T'Serclaes von Tilly)가 이끄는 가톨릭 동맹군이 하이델베르크와 팔츠를 차지했습니다. 이어 제국 안의 개신교 제후들을 이겨 팔츠·보헤미아 반란을 끝냈습니다.

둘째 마디는 덴마크의 차례였습니다. 1625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가 개신교 쪽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듬해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von Wallenstein)의 황제군과 틸리의 군대에 데사우와 루터에서 졌습니다. 1629년 황제는 1552년 뒤 세속화된 옛 가톨릭 교회 재산을 되돌리라는 복원 칙령을 내렸습니다. 같은 해 뤼베크 평화로 덴마크는 전쟁에서 빠졌습니다.

셋째 마디는 스웨덴이 엽니다. 1630년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가 발트해 둘레의 황제 세력을 끝내려고 우제돔섬에 상륙했습니다. 1631년 틸리의 군대가 엘베강의 도시 마그데부르크를 부수고 약탈했고, 구스타브 아돌프는 브라이텐펠트에서 틸리를 이긴 뒤 라인강까지 나아갔습니다. 뮌클러는 정기적인 프랑스 보조금이 없었다면 스웨덴 왕이 독일에서 오래 싸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봅니다.

1632년 구스타브 아돌프는 뤼첸에서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싸우다 죽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여섯 살의 외동딸 크리스티나가 여왕이 됐고,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Axel Oxenstierna)가 1644년까지 섭정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1634년에는 발렌슈타인이 해임된 뒤 에거에서 암살됐고, 스웨덴군은 뇌르틀링겐에서 황제군·가톨릭 동맹군·스페인군에 결정적으로 졌습니다. 1635년 황제와 작센 선제후가 프라하 평화를 맺었지만, 스웨덴과 프랑스는 이 평화에 들지 않았습니다.

넷째 마디는 그래서 시작됩니다. 1635년 프랑스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1641년 함부르크에서 황제, 스웨덴, 프랑스가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평화 회의를 열기로 했지만, 실제 협상은 1644년과 1645년 사이에야 시작됐고 그동안 휴전은 없었습니다. 1645년 스웨덴군은 얀카우에서 황제군을 이기고 빈 앞까지 나아갔습니다.

용병, 군세, 기병 갑옷: 그 시대의 군대

군대에 드는 돈을 마련한 방식을 다섯 단계로 그린 도표. 1 돈 없는 군주: 상비군이 없고 혼자서는 전쟁 비용을 대지 못함(뮌클러, 페르디난트 2세). 2 전쟁 기업가: 군주 대신 군대를 세움, 발렌슈타인은 공작령을 받음(슈미트). 3 군대가 머문 땅에서 먹고삶: 머무는 곳에 돈과 물자를 요구하고 같은 편 땅인지 적의 땅인지 가리지 않음(아드리안스). 예: 1626년 에벨레벤은 날마다 빵 12,400파운드, 고기 9,300파운드, 맥주 6,200마스를 황제군 진영에 보냄. 4 농가가 필요한 것을 잃음: 소와 말을 빼앗기고 끌 소를 잡아먹고 씨앗까지 먹음(아드리안스, 뮌클러). 5 굶주림 뒤 전염병: 굶주려 약해진 사람들에게 병이 퍼져 사망률이 가파르게 오름(뮌클러). 아래 왼쪽 막대는 군대 규모로, 1620년대 약 15만 명, 1631년 뒤 25만 명 넘게(윌슨). 오른쪽은 군대 뒤 행렬로, 흔히 군대의 두 배였고 병사 가족, 외과의, 장인, 상인, 이발사, 요리사가 함께 다녔다(아드리안스)
"전쟁이 전쟁을 먹인다": 군대에 드는 돈이 마을의 굶주림으로 이어진 고리 (도표)(도표)

이 전쟁의 군대는 오늘날의 국가 군대와 짜임이 달랐습니다. 싸운 것은 군벌이 아니라 전쟁 기업가(Kriegsunternehmer)를 고용한 통치자들이었습니다. 전쟁 기업가는 군대가 없는 군주에게 군대를 마련해 주는 사람입니다. 발렌슈타인이 대표적인 예로, 황제에게서 프리틀란트, 자간, 메클렌부르크 공작령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군대를 먹이는 돈이었습니다. 발렌슈타인은 "전쟁이 전쟁을 먹여야 한다"는 원칙을 사업 모델로 삼았습니다. 군대가 머무는 땅에는 늘 받던 현물에 더해 큰돈을 요구했고, 그 땅이 적의 것인지 같은 편의 것인지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 부담을 군세(Kontribution)라고 불렀고, 전쟁이 길어질수록 군대가 자주 머문 곳의 군세는 더 무거워졌습니다.

그 무게가 어느 정도였을까요? 튀링겐의 작은 마을 에벨레벤에서 백작의 궁정 고문관 폴크마르 하페(Volkmar Happe)가 남긴 1626년 기록에는 날마다 빵 12,400파운드, 고기 9,300파운드, 맥주 6,200마스(Maß)를 황제군 진영에 보내야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곳곳에서 소와 말을 빼앗기자 밭을 갈 수 없었고, 굶주림은 더 커졌습니다.

군대 뒤에는 긴 행렬(Tross)이 따라다녔습니다. 이 행렬은 흔히 군대의 두 배나 됐고, 병사의 가족과 다친 사람을 돌보는 외과의, 장인과 상인, 이발사, 요리사가 함께 움직였습니다. 군대의 크기도 자랐습니다. 1631년부터 싸움이 제국 전체로 번지면서, 싸우는 사람의 수가 1620년대 약 15만 명에서 25만 명 넘게 늘었습니다.

전장의 장비는 스웨덴 왕립무기고(Livrustkammaren) 소장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17세기 전반 아마 독일에서 만든 흉갑 기병(cuirassier)의 반신 갑옷이 그 하나입니다. 얼굴 가리개가 달린 투구, 총알을 막는 가슴판과 등판, 팔과 허벅지 보호대를 높은 가죽 장화와 함께 입었습니다. 흉갑 기병은 칼과 안장 권총집에 넣은 권총으로 무장했습니다.

총알은 왕도 비켜 가지 않았습니다. 1632년 11월 6일 뤼첸에서 구스타브 아돌프는 머스킷 탄에 팔꿈치가 부서졌고, 여러 번 다친 끝에 전장에서 죽었습니다.

스웨덴 왕립무기고가 전시한 그의 고운 아마 셔츠는 추위 때문에 셋을 겹쳐 입은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뒤에 기념품 수집가들이 큰 조각을 뜯어 가기도 했습니다. 왕이 탔던 말 슈트라이프(Streiff)는 뤼첸에서 다쳐 얼마 뒤 죽었고, 뤼첸의 유품은 왕실 의상실에 따로 보관됐습니다.

스웨덴은 이 전쟁의 큰 주역이었고, 그 과정에서 군사 강국이 됐습니다. 왕실이 뤼첸의 유품을 남긴 것은 그를 신앙과 왕국과 백성을 위해 전장에서 죽은 개신교의 영웅 왕으로 보이려는 뜻이었습니다.

민간인이 치른 값과 자료마다 다른 숫자

자료별 숫자 비교 도표. 위쪽 막대는 잃은 인구의 비율로, 오스트리아 연방총리실은 인구의 3분의 1(신성 로마 제국), 뮌클러는 약 3분의 1(오늘날 독일 땅), 아드리안스가 전하는 흔한 추정은 약 3분의 1(제국, 1618~1648), 윌슨은 적어도 5분의 1(신성 로마 제국)이다. 슈미트는 사망자를 500만~800만 명으로 적고, 두흐하르트는 예전 추정이 모두 믿을 만하지는 않다고 적는다는 메모가 있다. 가운데는 아드리안스가 전하는 인구 추정(백만 명)으로, 슈미트는 1871년 국경 기준 1600년쯤 1,500만~1,700만(어쩌면 2,100만), 50년 뒤 1,000만~1,300만, 고트하르트는 1914년 국경 기준 1618년 약 1,600만, 1650년 1,000만이다. 아래는 엘베강의 두 도시로, 마그데부르크는 전쟁 초 약 3만 명에서 끝 무렵 500명 미만, 함부르크는 4만 명에서 6만 명이다. 마그데부르크는 1631년 5월 틸리의 군대에 약탈당했고 함부르크는 물자와 무기를 사고팔며 공격을 받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전쟁, 다른 숫자. 자료마다 기준 지역과 값이 다릅니다 (도표)(도표)

군세와 약탈이 이어지면 마을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끌 소를 잡아먹고 봄에 뿌릴 씨앗까지 먹은 뒤, 굶주림에 약해진 사람들에게 전염병이 덮쳤습니다. 그때 사망률이 가파르게 올랐고 땅 전체가 비어 버린 곳도 많았습니다.

그러면 모두 몇 명이 죽었을까요? 이 물음에는 하나의 답이 없습니다. 남은 낱낱의 기록에서 미루어 셈할 수밖에 없고, 자료마다 기준 지역도 다릅니다.

  • 오스트리아 연방총리실: 신성 로마 제국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 뮌클러: 오늘날 독일 땅 인구의 약 3분의 1이 죽었다.
  • 역사학자 게오르크 슈미트(Georg Schmidt): 500만~800만 명이 죽었고 집과 건물의 절반 넘게가 부서졌다.
  • 피터 H. 윌슨(Peter H. Wilson): 제국 인구가 적어도 5분의 1 줄었고, 18세기 초에야 전쟁 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인구 추정도 범위로 나옵니다. 프라우케 아드리안스(Frauke Adrians)가 bpb에 정리한 바로는, 1871년 독일 국경을 기준으로 한 슈미트의 추정은 1600년쯤 1,500만~1,700만 명(어쩌면 2,100만 명)에서 50년 뒤 1,000만~1,300만 명입니다. 1914년 국경을 기준으로 한 역사학자 악셀 고트하르트(Axel Gotthard)의 추정은 1618년 약 1,600만 명에서 1650년 1,000만 명입니다. 하인츠 두흐하르트(Heinz Duchhardt)는 예전의 추정이 모두 믿을 만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피해는 고르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피해는 포메른과 메클렌부르크에서 브란덴부르크, 안할트, 튀링겐, 팔츠를 지나 바덴까지 이어진 띠에 몰렸습니다. 반면 북서 독일의 몇몇 곳은 거의 손을 타지 않았고, 뮌스터가 그 예입니다.

엘베강의 두 도시가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전쟁이 시작될 때 마그데부르크에는 약 3만 명, 함부르크에는 4만 명이 살았습니다.

1631년 5월 마그데부르크는 불탔고 주민 수천 명이 틸리의 군대에 희생됐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곳에는 500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물자와 무기를 사고팔던 함부르크는 양쪽 지휘관 모두 건드리지 않았고, 인구가 6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30년 전쟁은 겪은 사람들의 기록으로 고통이 촘촘히 남은 첫 전쟁 가운데 하나입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인구의 10~15%쯤이었지만, 오늘날 약 250명의 일기와 연대기와 편지가 알려져 있습니다. 울름 북쪽 15 km 마을 바이덴슈테텐의 구두장이 한스 헤벨레(Hans Heberle)는 1646년 여름 "이것이 23번째 피란"이라고 적었습니다.

다만 이런 기록도 그대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슈미트는 기록한 사람들이 적은 것을 다 직접 겪지는 않았고, 선전 소책자에서 옮기거나 들리려고 부풀린 대목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것을 짚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종교 전쟁이었나: 갈리는 해석

당대 사람들은 전쟁을 신의 심판으로 읽었습니다. 1618년 늦가을 저녁 하늘에 큰 혜성이 떴고, 이 혜성은 신의 분노가 다가온다는 표시로 읽혔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신앙을 두고 싸운 전쟁이었을까요? 역사학자들의 답은 갈립니다.

윌슨은 가장 널리 퍼진 해석이 이 전쟁을 1517년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종교 전쟁 시대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전쟁으로 본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17세기에는 "종교"와 "세속"을 나누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함께 짚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전쟁에서 종교의 자리를 보려면 21세기의 생각부터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뮌클러는 종교 전쟁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봅니다. 그의 설명으로는 이 전쟁이 종교 전쟁이기도 했지만, 나라 안의 권력 배분을 둘러싼 전쟁이자 유럽의 정치 질서를 둘러싼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드는 예가 있습니다. 개신교 쪽의 전통적 우두머리였던 작센 선제후는 1618년부터 1631년까지 황제 편에 섰습니다. 가톨릭 추기경 리슐리외(Richelieu)가 이끈 프랑스는 가톨릭 황실에 맞섰습니다.

슈미트는 한발 더 나갑니다. 그는 오늘의 눈으로 보면 이 전쟁이 신앙 전쟁이 아니며, 주로 권력 정치의 이익을 두고 싸웠다고 봅니다. 스웨덴 왕립무기고의 전시 설명은 그 사이에 섭니다. 흔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 전쟁으로 묘사되지만, 편이 자주 바뀐 유럽 패권 다툼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해석 자체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bpb의 편집자 글에 따르면 19세기 독일의 역사 서술은 이 전쟁을 국가적 상처로 꾸몄고, 그 해석은 프로이센의 강대국 야심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쓰였습니다.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의 평화

전쟁은 어떻게 끝났을까요? 윌슨은 양쪽이 지쳐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주요 참전국들이 더 싸우면 이미 얻은 것을 잃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황제는 1643년 중립 지역으로 정한 베스트팔렌의 두 도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의 협상에 동의했습니다.

협상은 5년을 끌었습니다. 베스트팔렌 평화(Peace of Westphalia)는 1648년 5월 15일부터 10월 24일 사이에 두 도시에서 맺은 여러 조약을 함께 부르는 이름입니다. 보헤미아 귀족의 반란으로 시작한 싸움은 그 무렵 합스부르크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대륙 패권 다툼이 돼 있었습니다.

황제와 프랑스 왕이 맺은 조약의 영역문은 첫 조항에서 "기독교적이고 보편적인 평화"를 선언합니다. 둘째 조항은 분쟁이 시작된 뒤 저지른 모든 일에 영원한 망각과 사면을 둡니다. 베네치아 대사 알로이시우스 콘타리니(Aloysius Contarini)가 이 협상을 중재했습니다. 프랑스는 메스, 툴, 베르됭 주교령의 주권을 얻었고, 황제는 브라이자흐와 위·아래 알자스 방백령에 대한 권리를 내놓았습니다.

같은 조약문은 날짜를 두 번씩 적습니다. 함부르크에서 회의를 정한 날은 1641년 12월 25일 "N.S." 또는 15일 "O.S."로, 두 도시에 모이기로 한 날은 1643년 7월 11일 N.S. 또는 1일 O.S.로 나옵니다. 두 표기는 꼭 열흘씩 차이가 납니다. 같은 날을 두 가지 셈법으로 적은 것이어서, 이 시대의 날짜를 읽을 때는 어느 표기인지 함께 봐야 합니다.

평화의 결과는 제국 밖까지 미쳤습니다. 1648년 1월에 먼저 맺은 뮌스터 평화로 네덜란드 공화국이 외교적으로 인정받았고, 스위스 주들도 황제와 제국에 대한 의무에서 공식적으로 풀려났습니다. 두흐하르트는 평화를 보증한 프랑스와 스웨덴을 뚜렷한 승자로 꼽습니다. 윌슨은 지위와 땅의 절반을 잃은 팔츠 가문, 재산을 잃은 보헤미아인과 망명자들, 그리고 오래 고통받은 보통 사람들을 진짜 패자로 봅니다.

서명이 곧바로 평화를 가져오지는 않았습니다. 1월 30일과 10월 24일의 서명 뒤에도 한동안은 전쟁 때와 조금씩만 다른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은 1659년 피레네 평화에서야 끝났습니다. 제국 안에서는 1654년부터 이 평화가 제국 기본법 구실을 했고, 제국은 1806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국제 관계 이론에서는 이 평화를 흔히 주권 국가들이 이루는 근대 국제 질서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베스트팔렌 체제"라고 부르는 해석입니다. 여기에도 학자들의 견해가 갈립니다.

  • 윌슨: 그 방향의 한 걸음이었지만, 조약문에는 그런 말이 거의 없다. 오히려 제국을 굳혀 1806년까지 이어지게 했다.
  • 뮌클러: 평등한 국가들의 체제가 합스부르크의 제국적 우위를 대신했다.
  • 슈미트: 주권과 평등에 바탕한 질서를 만들지 않았다. 다만 종교 조항에 개인의 자유권이 적힌 것은 그때 유럽에서 드문 일이었다.
  • 두흐하르트: 새 유럽 평화 질서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국가 체계는 새로 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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