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2년 8월 22일, 잉글랜드 중부의 노팅엄(Nottingham)에서 찰스 1세(Charles I)가 왕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왕이 자기 나라의 의회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 이 의식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싸움은 1651년까지 세 차례 이어졌습니다.

왕은 왜 의회와 칼을 맞대게 됐을까요? 이 글은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머스킷과 창으로 짠 군대가 전쟁터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리고 왕의 처형과 공화국을 거쳐 무엇이 남았는지를 따라갑니다.

이름에는 "잉글랜드"가 붙어 있지만 싸움은 잉글랜드 안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가 함께 얽혔고, 그래서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은 "영국 내전(British Civil Wars)"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English Heritage)는 이 싸움을 세 왕국 전쟁(Wars of the Three Kingdoms)이라는 더 큰 다툼의 일부로 설명합니다.

1629년부터 1661년까지의 가로 연표 도표. 1629~1640년 의회 없는 통치, 1639·1640년 주교 전쟁, 1641년 10월 아일랜드 반란, 1642년 8월 22일 노팅엄의 왕의 깃발, 1642년 10월 에지힐, 1644년 7월 마스턴 무어, 1645년 6월 네이즈비, 1646년 6월 옥스퍼드 항복, 1648년 8월 프레스턴,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 처형, 1650년 9월 던바, 1651년 9월 우스터, 1653년 호국경, 1660년 5월 왕정복고, 1661년 1월 잉글랜드 군대 창설 영장이 표시되어 있다. 첫 번째(1642~46), 두 번째(1648), 세 번째(1650~51) 내전이 띠로 칠해져 있다
잉글랜드 내전의 주요 사건 연표. 날짜는 영국 국립육군박물관과 Battlefields Trust 자료를 따랐습니다 (도표)(도표)

의회 없이 다스린 11년

찰스 1세는 1600년 11월 19일 제임스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 헨리 프레더릭이 먼저 죽어 1625년 3월 왕위를 이었고, 1626년 2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돈과 정치, 종교 문제로 의회와 자주 부딪쳤습니다.

1629년부터 1640년까지 찰스는 의회를 아예 부르지 않았습니다. 법을 만들고 세금을 허락하는 일에 의회가 끼지 못한 셈입니다. 돈이 필요하면 평판이 나쁜 방법을 썼는데, 해군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거둔 선박세(ship money)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의회가 없으니 사람들의 불만을 풀어 줄 통로도 없었습니다.

종교가 불신을 키웠습니다. 그 무렵 잉글랜드는 대체로 개신교 나라였고, 가톨릭에 대한 두려움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가톨릭은 억압, 그리고 프랑스·스페인 같은 오랜 적과 함께 떠올랐습니다. 찰스는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공주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와 결혼했고, 잉글랜드 교회에 "가톨릭 같다"는 말을 듣는 의식을 들여왔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위기

불씨는 북쪽에서 먼저 붙었습니다. 1637년 찰스가 스코틀랜드에 종교 변화를 밀어붙이자 곧바로 반발이 일었습니다. 왕은 1639년과 1640년 두 번 군대를 보냈는데, 이것을 주교 전쟁(Bishops' Wars)이라 부릅니다. 두 번 모두 스코틀랜드 군대에 졌고, 그 군대가 잉글랜드 북부를 차지했습니다.

군대에 줄 돈조차 떨어진 왕은 결국 의회를 다시 불렀습니다. 왕은 1640년에 모인 의회가 돈을 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의회는 왕의 권한을 줄이는 법부터 만들었습니다. 그해 12월 7일에는 선박세를 불법 세금으로 선언했고, 민병 법안으로 나라의 군대를 쥐려고도 했습니다.

1641년 10월에는 아일랜드에서 가톨릭교도가 반란을 일으켜 얼스터(Ulster)의 개신교도를 학살했습니다. 부풀려진 잔학 이야기가 잉글랜드로 퍼지며 정치 위기가 더 깊어졌습니다. 아일랜드로 보낼 군대를 모아야 하는 일이 왕과 의회의 충돌로 번졌습니다. 왕이 그 군대로 잉글랜드의 반대파를 누를까 두려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642년 1월 찰스는 반대파를 이끈 의원 다섯 명을 체포하려다 실패했습니다. 그는 런던을 떠나 요크로 갔고, 4월 23일에는 헐(Hull)의 무기고에 들어가려다 문 앞에서 막혔습니다. 그해 8월 22일 노팅엄의 깃발로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첫 번째 내전: 에지힐에서 마스턴 무어까지

전쟁 초기의 땅 나눔은 비교적 뚜렷했습니다. 의회는 곧 잉글랜드 동부와 남동부 대부분을 쥐었고, 왕을 따르는 쪽은 주로 서부와 북부, 웨일스에 있었습니다. 왕당파(Royalists)의 근거지는 옥스퍼드였습니다. 싸움은 충성이 갈린 그 사이의 땅에서 가장 많이 벌어졌습니다.

1642년 10월 23일 에지힐(Edgehill) 전투는 승부 없이 끝났습니다. 11월 13일에는 런던으로 가던 왕당파가 턴엄 그린(Turnham Green)에서 막혔습니다.

1643년은 왕당파가 앞선 해였습니다. 7월 26일 루퍼트 왕자(Prince Rupert)가 브리스톨을 차지하면서 왕당파의 기세가 가장 높았습니다. 그러나 글로스터 포위가 실패했고, 9월 뉴버리(Newbury)에서는 비겼습니다.

1644년에는 스코틀랜드가 끼어들었습니다. 그해 봄 스코틀랜드 서약파 군대(Army of the Covenant)가 의회 편으로 잉글랜드에 들어왔습니다. Battlefields Trust는 이 스코틀랜드군이 의회의 최종 승리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봅니다. 1644년 7월 2일 요크 근처의 마스턴 무어(Marston Moor)에서 루퍼트가 졌고, 북부의 왕당파 세력이 꺾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름을 알린 사람이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입니다. 헌팅던의 작은 지주이자 의원이던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마스턴 무어에서 그는 왼쪽 날개의 기병을 맡았고, 규율 잡힌 기병이 전투 끝에 결정적인 돌격을 해냈습니다. 그래도 의회 쪽도 지휘관끼리 시기하고 다투느라 발이 묶이기 일쑤였습니다.

신형군과 네이즈비

의회의 해법은 군대를 새로 짜는 것이었습니다. 1645년 의회파의 옛 군대 셋에서 남은 병력으로 신형군(New Model Army)을 만들고, 토머스 페어팩스(Thomas Fairfax) 경을 사령관으로, 크롬웰을 기병 담당 중장으로 두었습니다. 처음 정원은 약 2만 4천 명이었지만, 보병 1,200명·기병 600명 같은 연대 정원을 실제로 채운 일은 드물었습니다.

신형군은 그때까지의 군대와 달랐습니다. 한 지역에 묶이지 않은 전국 군대였고, 병사는 상근으로 일하며 급료를 꼬박꼬박 받았습니다. 장교는 집안이 아니라 능력으로 올라갔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이 군대가 장래 영국 상비군의 본보기가 됐다고 설명합니다.

결판은 1645년 6월 14일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Naseby)에서 났습니다. 두 군대는 얕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섰고, 양쪽 모두 가운데에 보병, 날개에 기병을 두었습니다. 루퍼트의 기병은 의회군 왼쪽 날개를 뚫고 뒤쪽의 포병과 짐수레까지 내달렸습니다. 가운데 보병 싸움에서 처음엔 왕당파가 앞서는 듯했지만, 오른쪽 날개의 크롬웰 기병이 왕당파 왼쪽 날개를 무너뜨린 뒤 가운데 보병을 쳤습니다.

몇 명이 싸웠는지는 같은 박물관 안에서도 숫자가 다릅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의 네이즈비 쪽은 왕당파 약 1만 명(그 가운데 기병 4천)과 의회군 1만 2천 명을 적습니다. 같은 박물관의 내전 개관 쪽은 왕당파 9천 명, 의회군 1만 3천 5백 명입니다. 어느 숫자든 의회군이 더 많았다는 점은 같습니다.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왕당파 약 1천 명이 죽고 5천 명까지 포로가 됐으며, 보급품과 포를 모두 잃었습니다. 왕의 서류함과 편지도 넘어갔는데, 그 안에는 왕비가 유럽의 가톨릭 세력에게 도움을 구한 편지가 있었습니다. 1646년 5월 5일 찰스는 뉴어크에서 스코틀랜드군에 항복했고, 6월 옥스퍼드의 왕당파 본부가 항복하며 첫 번째 내전이 끝났습니다.

머스킷, 창, 기병: 그 시대 군대의 짜임

1642년 잉글랜드에는 상비군(standing army)이 없었습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의 연구 안내에 따르면 그때까지 군대는 특정한 목적으로 모았다가 해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양쪽 모두 큰 군대를 모아 몇 해씩 유지했습니다. 30년 전쟁(1618~48)에서 싸우고 돌아온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장교들이 경험을 보탰고, 고장을 지키는 민병(Trained Bands)은 제 고장 밖으로 나가 싸우기를 자주 꺼렸습니다.

보병(Foot)은 연대로 짰습니다. 한 연대의 약 3분의 2는 화승식 머스킷(matchlock musket)을 들었고, 나머지는 끝에 쇠를 박은 16피트(약 4.9 m) 길이의 창(pike)을 들었습니다. 머스킷은 매우 부정확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창병은 기병의 돌격에서 머스킷병을 지켰습니다. 빽빽하게 세운 창끝으로는 어떤 말도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내전 시대 군대의 짜임을 나타낸 개념도. 왼쪽의 보병 연대 상자는 약 3분의 2가 화승식 머스킷, 나머지가 16피트 창으로 나뉘어 있고, 머스킷은 부정확하지만 가까이서 치명적, 창은 기병으로부터 머스킷병을 지킨다고 적혀 있다. 오른쪽에는 기병(칼, 권총 한 쌍, 투구, 버프 코트 등이 이상적이지만 실제로 다 갖춘 사람은 적음), 용기병(말을 타고 가서 내려 싸우는 보병), 포병(둔하고 옮기기 어려워 들판보다 포위전에 쓸모)이 있다. 아래에 1645년 신형군 정원 약 2만 4천 명, 연대 정원 보병 1,200, 기병 600, 용기병 1,000이고 실제로는 거의 채우지 못했다는 메모가 있다
내전 시대 군대의 짜임. 비율은 영국 국립육군박물관 설명의 '약 3분의 2'를 나타냈고 사람 수를 세어 그린 것이 아닙니다 (도표)(도표)

기병(Horse)은 칼과 권총 한 쌍, 투구, 버프 코트(buff coat), 등과 가슴 갑옷, 고삐 쥔 손을 덮는 쇠 장갑을 갖추는 것이 이상이었습니다. 실제로 그것을 다 갖춘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용기병(dragoon)은 말을 타고 가서 내려 싸우는 보병이었고, 머스킷과 칼을 들었습니다. 포는 둔하고 옮기기 어려워 넓은 들판보다 성과 도시를 에워싸는 포위전에서 더 쓸모가 있었습니다.

포위전은 이 전쟁의 큰 몫이었습니다. 첫 번째 내전 동안만 도시와 마을, 작은 수비대를 에워싼 포위가 300번을 넘었습니다. 1646년 굿리치 성(Goodrich Castle) 포위는 "로어링 메그(Roaring Meg)"라는 큰 박격포의 힘을 빌려 의회가 이겼습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오늘 잉글랜드에서 보는 성의 폐허 가운데 많은 수가 이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설명합니다. 포위로 크게 부서진 성도 있고, 싸움이 끝난 뒤 일부러 허문 성도 있습니다.

전쟁은 돈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양쪽은 늘 돈이 모자라 세금과 강제 대출, 기부, 약탈로 버텼습니다. 왕당파 병사도 급료와 장비, 훈련은 의회파와 비슷했습니다.

다만 의회가 영국 해협의 주요 항구와 런던탑 같은 큰 무기고를 쥐고 있어서, 왕당파는 더 큰 군수(logistics) 제약 아래 싸웠습니다. 의회의 돈 모으는 방식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잘 짜여 신형군을 먹여 살렸습니다.

캐벌리어(Cavalier)는 깃털 달린 큰 모자를, 라운드헤드(Roundhead)는 둥근 쇠 투구를 썼다는 그림이 흔합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이것을 19세기에 생긴 통념이라고 설명합니다. 양쪽은 비슷해 보였고, 옷의 질은 어느 편이냐가 아니라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적과 아군을 가리기 어려워 모자에 흰 종이를 꽂거나 암호를 썼는데도 실수가 잦았고, 때로는 목숨을 잃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신형군은 뒤에 붉은 군복을 입었습니다.

왕의 재판과 공화국

첫 번째 내전에서 졌는데도 찰스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1648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왕당파 봉기가 잇달았고, 스코틀랜드군이 왕을 위해 잉글랜드 북부로 들어왔습니다. 두 번째 내전입니다. 신형군이 이것을 모두 꺾었고, 8월 17일 프레스턴(Preston)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졌습니다.

군대는 이제 정치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이미 1647년 퍼트니 토론(Putney Debates)에서 급진적인 병사들이 나라의 앞날을 두고 생각을 쏟아 냈습니다. 1648년 12월 6일 "프라이드의 숙청(Pride's Purge)"으로 온건파 의원들이 의회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일로 이듬해 1월 왕의 재판과 처형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1649년 1월 찰스는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받았고, "현 의회와 국민에게 반역적으로 악의를 품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크롬웰은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월 30일 찰스는 화이트홀의 연회장(Banqueting House) 밖에서 처형됐습니다. 반역으로 처형된 잉글랜드 군주는 그 하나뿐입니다. 의회 위원회가 웨스트민스터 사원 매장을 허락하지 않아, 그는 2월 8일 윈저의 세인트조지 예배당에 묻혔습니다.

1649년 5월 19일 의회는 잉글랜드를 공화국(Commonwealth)으로 선언했습니다. 그해 8월 크롬웰은 망명한 왕세자 찰스 2세(Charles II)의 지지 세력을 없애려고 아일랜드로 건너갔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이 원정이 드로이다(Drogheda)와 웩스퍼드(Wexford)의 학살로 시작됐고 가톨릭 병사와 민간인이 함께 대규모로 죽었다고 적습니다. 크롬웰은 그것이 전쟁법에 맞고, 다른 곳의 항복을 앞당겨 오히려 목숨을 구한다는 이유로 정당화했습니다. 이 침공으로 아일랜드의 가톨릭 토착 지주층이 무너지고, 그 땅은 영국 개신교 정착민에게 넘어갔습니다.

세 번째 내전은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났습니다. 1650년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에 내렸고, 크롬웰은 9월 3일 던바(Dunbar)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이겼습니다. 찰스 2세는 몸소 다른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들어왔지만 1651년 9월 3일 우스터(Worcester)에서 져 다시 망명했습니다. 이 전투로 잉글랜드 안의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쟁이 남긴 사람들과 숫자

1642년의 전쟁은 친구와 가족, 마을을 갈랐습니다. "전형적인" 왕당파나 의회파는 없었습니다. 종교적 신념, 왕권에 대한 불신, 지역의 다툼, 살림살이에 대한 불만, 왕이나 지주·가족·친구에 대한 충성이 저마다 편을 정하는 데 작용했습니다. 두 군대를 채운 사람 상당수는 고를 처지가 아니어서 지주나 지역 유지를 따라갔고, 포로가 되면 상대 군대에 끌려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이 소개한 최근 추정은 브리튼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전쟁과 관련된 죽음이 약 25만 명, 인구의 5% 가까이라고 봅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최대 20만 명, 인구의 4.5%라고 적습니다.

두 숫자는 다르지만, 둘 다 비율로 보면 1차 대전에 견줄 만하거나 그보다 큰 손실이라고 설명합니다. 1차 대전 때 죽은 인구는 2.6%였습니다.

비율로 보면 아일랜드의 피해가 훨씬 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아일랜드의 죽음이 아마 25만 명을 훨씬 넘었고, 전쟁 전 추정 인구의 15~20%쯤일 수 있다고 적습니다. 병사 쪽 기록도 빈틈이 많습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는 내전 때도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복무 기록은 없다고 안내합니다.

사망자 추정이 자료마다 다른 것을 나란히 놓은 도표. 왼쪽 카드는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이 소개한 최근 추정으로, 브리튼에서 전쟁과 관련된 죽음이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25만 명, 인구의 5% 가까이라고 적혀 있다. 가운데 카드는 잉글리시 헤리티지의 최대 20만 명, 인구의 4.5%이다. 오른쪽 카드는 같은 박물관이 아일랜드의 죽음을 25만 명을 훨씬 넘고 전쟁 전 추정 인구의 15~20%쯤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아래 띠에는 1차 대전 때 죽은 인구 비율 2.6%가 비교로 적혀 있다
내전의 사망자 추정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막대 길이로 크기를 비교하지 않고 숫자를 나란히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죽지 않은 사람에게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천 명이 불구가 됐고, 1643년 12월 24일 하원은 다친 병사와 유족을 도우려고 런던의 모든 교구 교회에서 모금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내전과 그 뒤의 정권들은 다친 병사와 전사자 가족에게 연금과 일시금을 주었습니다. 청원서는 대개 글을 아는 지인이 대신 써 주었지만, 청원자는 공개 법정에 나가 그 내용이 참이라고 직접 밝혀야 했습니다. 옥스퍼드·노팅엄·카디프·사우샘프턴 대학 연구진의 Civil War Petitions가 이 청원서들을 모아 공개하고 있습니다.

왕정복고와 남긴 것

공화국의 의회도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1653년 크롬웰은 신형군을 써서 의회를 해산하고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1658년 죽을 때까지 다스렸습니다. 호국경 시대의 의회와도 뜻이 맞지 않자,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소장(major-general)들을 통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이때 잉글랜드가 군사 독재가 됐다고 적고, 이 경험이 19세기까지 이어진 상비군에 대한 의심을 낳았다고 봅니다.

1658년 9월 크롬웰이 죽고 아들 리처드가 뒤를 이었지만, 리처드는 1659년 5월 물러났습니다. 정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끝에 1660년 2월 조지 멍크(George Monck) 장군이 스코틀랜드의 콜드스트림에서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찰스 2세가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으로 옛 적의 사면과 의회와 함께 다스리겠다는 뜻을 약속하자, 의회는 1660년 5월 1일 그에게 왕위를 청했습니다. 국장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던 크롬웰의 유해는 1661년 파헤쳐졌습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1649년부터 1660년까지 11년을 영국 역사에서 유일한 공화정 시기로 설명하고, 이를 공위기(Interregnum)라 부릅니다. 왕정은 돌아왔지만 예전 그대로는 아니었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이 내전 뒤 왕과 여왕이 다시는 영국 정치에서 으뜸이 되지 못했고, 절대 왕정의 가능성이 찰스 1세와 함께 사라졌다고 봅니다. 1688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 의회가 왕보다 앞선다는 것을 굳혔고, 내전의 불씨였던 군대 지휘권도 의회에 넘겼습니다.

군대도 남았습니다. 1661년 1월 26일 찰스 2세는 잉글랜드 군대를 만드는 영장을 냈고, 신형군 병사 상당수가 1660년 뒤에도 새 왕의 군대에서 복무했습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신형군을 훈련된 직업 군인으로 된 이 나라 첫 전국 군대이자 근대 영국 육군 전통의 시작으로 봅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신형군을 오늘 영국 육군의 바로 앞선 군대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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