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무기를 개발 중입니다." 기사에서 자주 보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책상 위의 계산도, 시험장 하늘을 날아 본 시제품도 똑같이 "개발 중"입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몇 년일 수도, 몇십 년일 수도 있습니다.
그 거리를 아홉 칸으로 나눠 부르는 말이 기술성숙도(technology readiness level, TRL)입니다. 이 자가 무엇을 재는지, 우주 개발에서 어떻게 무기 사업으로 건너왔는지, 그리고 숫자 하나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아홉 칸짜리 자
TRL은 어떤 기술이 얼마나 무르익었는지 재는 측정 체계입니다. 기술마다 단계별 기준에 견주어 평가하고 등급을 하나 매깁니다. 단계는 아홉 개이고, TRL 1이 가장 낮고 TRL 9가 가장 높습니다.
맨 아래 세 칸은 머릿속과 종이 위, 그리고 첫 실험의 일입니다. TRL 1은 기본 원리를 관찰하고 보고한 단계이고, TRL 2는 그 원리를 어디에 쓸지 떠올린 단계입니다. TRL 2는 실험으로 증명한 것이 거의 없어 짐작에 가깝습니다. TRL 3에 이르러 분석과 실험으로 개념을 증명하고, 흔히 개념 증명 모형을 만듭니다.
가운데 칸에서는 시험하는 곳이 바뀝니다. TRL 4는 실험실에서 부품들을 맞춰 보는 단계입니다. TRL 5와 6은 실제와 비슷하게 꾸민 관련 환경(relevant environment)으로 나갑니다. 미 국방부 표는 관련 환경에서 시제품을 보이는 TRL 6을 준비 정도가 크게 올라서는 단계로 봅니다.
위쪽 세 칸은 실제 세계입니다. TRL 7은 실제 체계의 시제품을 항공기, 차량, 우주 같은 운용 환경에서 보여야 합니다. TRL 8은 완성된 체계가 시험과 시연으로 자격을 얻는 단계이고, 거의 모든 경우 이것이 실제 체계 개발의 끝입니다. TRL 9는 성공한 임무 운용으로 실제 체계가 입증된 단계입니다.
아홉 칸은 키를 재는 눈금보다 학년에 가깝습니다. 한 칸 올라가려면 그 칸의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실제로는 다릅니다. 학년은 해마다 하나씩 오르지만 TRL은 칸마다 걸리는 시간이 제각각이고, 한 칸에 십 년 넘게 머문 기술도 있습니다.
모든 칸의 바탕은 시연, 곧 시험으로 보여 준 능력입니다. 기술의 성능을 번호 붙은 성숙 수준에 견주는데, 칸이 올라갈수록 시연의 충실도와 복잡도가 높아집니다. 발표 그림만으로는 칸을 올릴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시뮬레이션과 시험이 각 칸에서 어떻게 다른지는 시뮬레이션과 실제 시험: 멋진 CG가 성능 증명은 아닌 이유에서 더 자세히 다룹니다.
우주 개발에서 시작된 자
이 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나왔습니다. 미 회계감사원(GAO)의 기술 성숙도 평가 지침(GAO-20-48G)에는 한 NASA 연구자가 1974년에 첫 기술 성숙도 척도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때는 일곱 단계였고, 그 단계들은 1989년에야 공식으로 정의됐습니다.
출발점을 잡는 방식은 자료에 따라 조금 다릅니다. NASA의 기술 성숙도 평가 지침은 TRL의 단계들이 1980년대 NASA 본부에서 처음 서술됐다고 설명합니다. 지금 NASA에서 TRL은 NPR 7123.1 같은 NASA 문서에 정의돼 있습니다.
단계 수도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TRL은 아홉 단계 척도입니다. 기본 개념을 다룬 문서 연구에서 시작해, 제품의 운용 환경에서 실제로 쓰여 스스로를 입증한 기술로 끝납니다.
우주 기관의 말투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NASA의 단계 설명에서 TRL 7은 작동 모형이나 시제품을 "우주 환경"에서 보이는 단계입니다. 성공한 임무에서 "비행으로 입증"되면 TRL 9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무기 사업으로 건너간 자
미 국방부는 1990년대에 기술 성숙도 평가(technology readiness assessment, TRA)를 들였습니다. TRL이 눈금이라면 TRA는 그 눈금을 대고 실제로 재는 일입니다. 더 큰 체계의 성능에 결정적인 기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증거를 모아 따지는 체계적인 과정입니다.
재는 대상은 핵심 기술(critical technology)입니다. 새로운 기술이거나 기존 기술을 새롭게 쓰는 것이면서, 체계가 정해진 비용과 일정 안에서 운용 성능 요구를 맞추는 데 꼭 필요한 기술 요소를 가리킵니다. 오래 써 온 기술이라도 쓰는 방식이나 환경이 바뀌면 다시 따져 볼 대상이 됩니다.
GAO는 기술을 규율 있게 평가하는 일이 사업 성공의 바탕이라는 점을 1999년에 이미 밝혔다고 돌아봅니다. 그해 나온 보고서 "Best Practices: Better Management of Technology Can Improve Weapon System Outcomes"는 새 기술을 제품에 넣기 전에 성숙시키는 것이 최종 제품의 성공을 정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미성숙한 기술을 제품에 넣으면 개발 중 비용 초과와 지연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판단도 함께 냈습니다.
그 보고서의 사례를 표로 보면 이렇습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핵심 기술의 TRL과 그 뒤 비용·일정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나란히 놓았습니다.
| 사업 | 시작 때 핵심 기술의 TRL | 비용 증가 | 일정 지연 |
|---|---|---|---|
| 코만치 헬리콥터 | 3~5 | 101% | 120% |
| 브릴리언트 대기갑 자탄 | 2~3 | 88% | 62% |
| 휴스 HS-702 위성(태양 전지 배열) | 6 | 없음 | 없음 |
| 포드 재규어 자동차 | 8 | 없음 | 없음 |
표만 보면 TRL이 낮을수록 비용과 일정이 크게 늘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GAO는 코만치 헬리콥터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비용과 일정이 크게 늘어난 까닭은 여럿이고 기술 미성숙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사업 범위·예산·속도를 바꾼 것도 영향을 줬다는 것입니다. 이 표를 TRL 숫자 하나가 비용을 정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TRA는 1990년대부터 미 국방부와 NASA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다른 정부 기관도 이 방법을 받아들였고, 항공우주, 해양, 석유·가스, 전자, 중장비 산업에서도 씁니다.
한 기술이 아홉 칸을 지나는 데 걸린 시간
칸 하나를 오르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NASA의 평가 지침에는 한 기술이 아홉 칸을 모두 지난 해를 적은 예시 표가 있습니다. 화성에 정밀하게 내리기 위한 지형 상대 항법(terrain relative navigation, TRN)입니다. 내려가면서 찍은 지형 사진을 궤도에서 찍어 둔 지도와 맞춰 자기 위치를 찾는 기술입니다.
출발은 1989년입니다. 화성 표본 귀환 임무 연구에서 정밀 착륙 개념을 탐구한 것이 TRL 1이었습니다. TRL 2와 3은 2004년과 2005년에 왔고, 2007년에는 관측 로켓 비행에서 모은 자료를 비행 뒤에 처리해 알고리즘을 시험하면서 TRL 4가 됐습니다.
2013년에는 실시간 착륙 비전 시스템을 시제 컴퓨터 하드웨어에 구현해 실험실에서 처리 시간 요구를 맞췄습니다. 이것이 TRL 5입니다. 2015년에는 시제품을 유인 헬리콥터에 싣고 여러 지형 위에서 실시간으로 시험했고(TRL 6), 같은 해 수직 이착륙 로켓에 붙여 정밀 착륙 시연을 두 번 해냈습니다(TRL 7).
비행용 장치는 2018년에 완성돼 환경 시험을 거쳐 우주선 통합 작업으로 넘어갔습니다. 2020년 4월 비행 체계 시험을 포함한 검증을 모두 마치면서 TRL 8이 됐습니다. 그리고 2021년, 2020 화성 탐사 로버 임무가 최종 하강에서 이 기술을 쓰면서 TRL 9에 올랐습니다.
TRL 1에서 TRL 9까지 32년이 걸렸습니다. 그 가운데 TRL 1에서 TRL 2까지가 15년입니다. 반면 TRL 6과 7은 같은 해에 이뤘습니다. 칸 사이의 간격은 이렇게 고르지 않습니다.
규칙 속의 TRL
TRL은 기술자들끼리 쓰는 말에서 그치지 않고 규칙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NASA의 평가 지침은 보통 기술이 비행 체계에 통합되려면 TRL 6 이상, 곧 관련 환경에서 시연된 기술이어야 한다고 적습니다.
미국의 무기 획득에는 마일스톤 B라는 관문이 있습니다. 공학·제조 개발 단계로 들어가는 때이고, 큰 자원을 들이기로 하는 획득 사업의 공식 시작으로 봅니다.
2024년판 미국 법전 10편 4252조는 주요 국방 획득 사업이 이 승인을 받기 전에 결정권자가 몇 가지 요소를 고려했는지 확인하게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업(또는 하위 사업)의 기술이 관련 환경에서 시연되었다"는 것입니다. 미 국방부의 TRL 표에서 관련 환경이라는 말은 TRL 5와 6의 이름에 들어 있습니다.
유럽 연구 사업도 같은 눈금을 씁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Horizon 2020 2014~2015년 작업 계획은 일반 부록에 TRL 1~9의 정의를 실었습니다. 과제 설명이 TRL을 가리키면 따로 정하지 않은 한 이 정의를 따릅니다. 여기서 TRL 4는 "실험실에서 검증된 기술", TRL 9는 "운용 환경에서 입증된 실제 체계"입니다.
다만 이름은 같아도 문구가 조금씩 다릅니다. 일부 조직은 TRL 정의를 자기 제품 개발에 맞게 고쳐 씁니다. 서로 다른 기관이 말한 "TRL 6"을 견줄 때는 어느 기관의 표를 따랐는지 먼저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숫자 하나가 말해 주지 않는 것
첫째, TRL은 한 시점의 사진입니다. GAO는 TRA를 특정 시점의 평가, 곧 스냅사진이라고 부릅니다. 등급이 얼마나 오래 유효한지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전문가들은 기술의 종류와 바뀌는 속도에 따라 1~6개월로 봅니다. 오래된 발표에 적힌 단계를 오늘의 단계로 읽으면 어긋날 수 있습니다.
둘째, TRL은 사업의 성패를 재는 자가 아닙니다. TRA가 하는 일은 기술의 성숙도를 따지는 것이지, 사업에 위험 수준을 매기거나 비용·일정·성능 목표를 이룰 수 있는지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 위험을 없애 주지도 않습니다. 대신 제대로 하면 걱정거리를 드러내고, 그 위험을 어떻게 다룰지 현실적으로 의논할 바탕이 됩니다.
셋째, 기술이 된다는 것과 많이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따로 쓰는 자가 있습니다. 제조 성숙도(manufacturing readiness level, MRL)는 제조 관점에서 성숙도를 재는 열 단계 척도이고, 제조 성숙은 흔히 기술 성숙이나 설계 안정성에 발맞춰 갑니다. GAO 지침에는 통합 성숙도(IRL)와 체계 성숙도(SRL)의 표도 실려 있습니다.
넷째, 재는 사람도 변수입니다. GAO는 획득 사업에 널리 퍼진 낙관이 평가 결과나 그 해석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계약 전에는 업체 쪽 사업 관리자가 핵심 기술의 성숙도를 지나치게 낙관할 수 있습니다.
레이저와 맞닿는 점: 발진기의 성숙도
이 낱말은 한국의 레이저 무기 발표에도 나옵니다. 방위사업청은 한 보도자료에서 레이저대공무기 천광의 핵심 구성품인 레이저 발진기(oscillator)를 국산화했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개발을 시작할 때 기술성숙도가 부족했고 드론·무인기 위협이 빠르게 늘어, 체계개발 때는 해외에서 들여온 발진기를 썼습니다. 앞으로 천광 양산 물량부터 국내 기술로 만든 발진기를 쓸 예정입니다.
보도자료에는 TRL 숫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천광이나 발진기가 몇 단계였는지는 이 자료로 알 수 없습니다. 사업의 흐름은 지금 공개된 레이저 무기 사례에서 이어집니다.
기술 성숙은 사업을 멈출 때도 이유로 나옵니다. 미 해군은 재정 제약, 전투 체계 통합의 어려움과 함께 다른 무기 개념의 기술 성숙 전망을 들어 2021년 말 레일건 연구개발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그 과정은 전자기 레일건: 전기로 물체를 가속한다면에 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시뮬레이션과 실제 시험: 멋진 CG가 성능 증명은 아닌 이유: 실험실, 관련 환경, 운용 환경의 시험이 어떻게 다른지 봅니다.
- 지금 공개된 레이저 무기 사례: 공개된 레이저 무기 사업들이 어느 단계까지 와 있다고 발표했는지 봅니다.
- 전자기 레일건: 전기로 물체를 가속한다면: 개발하다 멈춘 사업에서 기술 성숙이 어떤 이유로 등장했는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