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 7월 말, 잉글랜드 콘월의 리저드(Lizard) 앞바다에서 낯선 배들이 보였습니다. 빠른 배 한 척이 소식을 싣고 달렸고, 해안을 따라 봉화가 잇달아 올랐습니다. 플리머스 항구에 있던 잉글랜드 함대가 서둘러 바다로 나섰습니다.

나타난 것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Philip II)가 보낸 함대, 아르마다(Armada)였습니다. 아르마다는 함대라는 뜻이고, 우리말로는 흔히 '무적함대'라고 부릅니다. 이 함대를 마주한 잉글랜드 지휘관 존 호킨스(John Hawkins)는 편지에서 그 안의 배 50척을 "강하고 무적인(forcible and invincible)" 배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스페인 항구로 돌아간 배는 절반 안팎이었습니다. 해협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바다와 날씨는 이 원정을 얼마나 바꿔 놓았을까요? 당시 사람들이 쓴 편지와 진술, 오늘의 문서보관소와 박물관 설명을 함께 놓고 따라가 봅니다.

펠리페 2세는 왜 함대를 보냈나

계획은 단순했습니다. 함대가 영국 해협을 올라가 네덜란드에서 싸우던 스페인 육군을 태우고, 그 군대로 잉글랜드에 쳐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원정은 종교의 이름으로 이뤄졌습니다. 잉글랜드는 개신교 나라가 되어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톨릭 나라 스페인의 펠리페를 교황이 부추겼습니다.

정치적 까닭도 겹쳐 있었습니다. 스페인이 다스리던 네덜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의 잉글랜드가 반란군을 돕고 있었습니다. 1587년에는 가톨릭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처형됐고, 잉글랜드 선원들은 신대륙의 스페인 배와 도시를 공격했습니다. 잉글랜드 쪽에도 자기 배가 스페인 제국과 교역할 수 없다는 불만이 있었습니다.

침공 준비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자료마다 조금 다릅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의 수업 자료는 1585년, 그리니치 왕립 박물관(Royal Museums Greenwich)의 연구 안내는 산타크루스 후작이 이끈 1586년을 듭니다. 1585년에는 잉글랜드 군대가 네덜란드 반란군을 도우러 바다를 건넜고, 1586년에는 엘리자베스의 해군에 새 군함 9척이 지어졌습니다.

1587년 4월 19일, 군함 23척을 이끈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스페인의 카디스(Cadiz) 항구를 공격해 스페인 배 33척을 부쉈습니다. 드레이크는 이 일을 "스페인 왕의 수염을 그슬렸다"고 불렀습니다. 수염 끝만 태웠다는 그 말처럼 준비는 늦춰졌을 뿐 멈추지 않았고, 함대는 1588년에 출항 준비를 마쳤습니다.

출항 몇 달 전 지휘관이 바뀌었습니다. 아르마다 구상을 처음 낸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산(Álvaro de Bazán)이 1588년 1월 30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뒤를 이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Duke of Medina Sidonia)은 경험이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맡은 일은 함대를 네덜란드까지 데려가는 것이었고, 함대가 닿으면 그곳의 파르마 공작(Duke of Parma)이 침공 전체를 지휘할 예정이었습니다.

잉글랜드도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1587년 12월 해군 대제독 하워드 경(Lord Howard of Effingham)에게 방어를 맡겼고, 드레이크가 그의 부제독이 됐습니다. 하워드는 이름난 뱃사람은 아니었지만, 드레이크처럼 경험 많은 사람의 말을 듣는 지휘관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엘리자베스는 네덜란드 문제를 두고 파르마 공작과 협상을 이어 갔습니다.

함대는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워드와 드레이크의 약 94척은 서쪽 플리머스에서 해협으로 들어오는 적을 맞기로 했고, 헨리 시모어(Henry Seymour)의 약 35척은 도버 근처 다운스(Downs)에서 칼레를 지켜보며 파르마의 군대가 건너오는 것을 막기로 했습니다.

잉글랜드 함대의 인원은 모두 약 1만 6천 명이었고, 육지에도 큰 군대가 모여 있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이 준비를 알고 있던 잉글랜드 정부는 새 배와 요새, 경고 봉화를 지어 두었습니다.

리스본에서 칼레까지

날짜를 따라가기 전에 달력 이야기를 짚어야 합니다. 그때 잉글랜드는 지금과 조금 다른 옛 달력(율리우스력)을 썼고, 오늘 우리가 쓰는 달력은 새 달력(그레고리력)입니다. 그래서 같은 리저드 발견이 한 박물관 쪽에는 7월 19일로, 다른 쪽에는 7월 29일로 적혀 있습니다. 이 글은 새 달력 날짜로 씁니다.

메디나 시도니아의 함대는 1588년 5월 말 리스본(Lisbon)을 떠났습니다. 출항일은 국립문서보관소 자료에 5월 28일, 그리니치의 연구 안내에 5월 30일로 적혀 있습니다. 북쪽으로 가던 함대는 곧 사나운 날씨를 만나 흩어졌고, 6월 19일 스페인의 항구 코루냐(Corunna)로 피했습니다. 배를 고치느라 한 달이 늦어졌고, 함대는 7월 22일에야 다시 해협으로 향했습니다.

7월 29일 리저드 앞에서 함대가 발견됐고, 다음 날 하워드와 드레이크의 함대가 플리머스를 나섰습니다. 하워드가 7월 31일(옛 달력 7월 21일) 플리머스 앞바다의 아크(Ark)호에서 쓴 편지에는 스페인 함대가 120척이며 큰 배가 여럿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는 "함대가 너무 강해" 그 가운데로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썼고, 덧붙인 글에서 큰 탄과 화약을 서둘러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7월 31일 플리머스 앞에서 첫 교전이 있었습니다. 결판은 나지 않았지만 스페인 배 몇 척이 다쳤고, 그 가운데 두 척은 다음 날 잉글랜드에 붙잡혔습니다. 8월 1일 아르마다는 방어용 초승달(crescent) 모양 진형을 갖추고 해협을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8월 2일 도싯의 포틀랜드 빌(Portland Bill) 앞에서 다시 맞붙었습니다. 싸움은 격렬했지만 양쪽 다 피해는 적었고, 양쪽 모두 화약과 탄이 모자라기 시작하면서 끝났습니다. 8월 3일과 4일에는 와이트섬(Isle of Wight) 앞에서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잉글랜드 함대는 하워드, 드레이크, 호킨스, 마틴 프로비셔(Martin Frobisher)가 이끄는 네 무리로 나뉘어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도 결판은 나지 않았습니다. 화약과 탄이 몹시 모자라게 된 메디나 시도니아는 보급을 바라며 칼레(Calais)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8월 5일 그는 파르마에게 됭케르크(Dunkirk)에서 만날 준비를 하고 포탄을 많이 가져오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잉글랜드 배들도 정부에 화약과 탄, 식량을 보내 달라고 했지만 보내진 것은 없었습니다.

8월 6일 아르마다는 칼레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파르마의 군대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파르마는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Justin of Nassau)가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에 막혀 브뤼헤(Bruges)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사이 시모어의 배들이 합류해 잉글랜드 함대는 약 136척이 됐습니다.

1588년 아르마다 원정 연표 도표. 위 줄은 출항 전: 1585년 또는 1586년 침공 계획 시작(자료마다 다름), 1587년 4월 19일 드레이크의 카디스 공격과 배 33척 파괴, 1588년 1월 30일 산타크루스의 죽음과 메디나 시도니아의 지휘, 5월 28일 또는 30일 리스본 출항, 6월 19일 폭풍으로 코루냐에 피함, 7월 22일 코루냐 출발. 아래 줄은 해협과 그 뒤: 7월 29일 리저드 앞에서 발견, 7월 31일 플리머스 앞 첫 교전, 8월 1일 초승달 진형, 8월 2일 포틀랜드 앞 교전, 8월 4일 와이트섬 앞과 잉글랜드 네 무리, 8월 6일 칼레 앞 정박, 8월 7일 밤 화공선 8척, 8월 8일 그라블린 해전, 8월 9일 제일란트 여울과 바람의 변화, 8월 12일 포스만에서 잉글랜드 추격 멈춤, 9월 말 생존자 스페인 도착. 맨 아래 칸에 잉글랜드는 옛 율리우스력을 써서 날짜가 열흘 이르다는 설명과 예(리저드 발견이 새 달력 7월 29일, 옛 달력 7월 19일)가 있다.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1588년 원정 연표. 새 달력 날짜이며,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화공선과 그라블린

칼레 앞에서 잉글랜드는 멀리서 포를 쏘았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워드는 방법을 바꿨습니다. 파르마의 군대가 오기 전에 서둘러 움직이기로 하고, 낡은 배에 불탈 것을 가득 채워 불을 붙인 뒤 정박한 스페인 함대 쪽으로 띄워 보냈습니다. 이런 배를 화공선(fireship)이라고 합니다.

8월 7일 밤 화공선 8척이 다가왔습니다. 스페인 쪽은 처음에 긴 갈고리로 불붙은 배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 배에 남겨 둔 대포가 터지기 시작하자 모두 피하려 했습니다. 그리니치의 설명으로는 불이 옮겨붙은 스페인 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란 스페인 배들은 닻줄을 끊고 어둠 속에서 흩어져 플랑드르 해안 쪽으로 떠밀렸습니다.

그 소란 속에서 호킨스가 "으뜸 갤리어스"라고 부른 배는 키를 다쳐 칼레 근처 해안으로 노를 저어 올라갔습니다. 아일랜드에서 붙잡힌 스페인 대위 돈 루이스 데 코르도바(Don Lewes de Cordua)는 뒤에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가온 화공선이 6척이었고, 그 불이 아니었으면 칼레에 7,000명을 내려 파르마에게 보낼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8월 8일 잉글랜드 함대는 흩어진 아르마다를 뒤쫓아 그라블린(Gravelines) 앞바다에서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는 가까운 거리에서 나란히 달리며 하루 내내 싸웠습니다. 잉글랜드 배들은 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스페인 배에 바짝 붙었습니다.

아르마다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여러 척이 심하게 부서지고 몇 척은 해안으로 밀려났으며, 적어도 3척이 가라앉았습니다. 스페인 군사의 인명 손실도 매우 컸습니다.

다음 날인 8월 9일, 센 바람과 뒤쫓는 잉글랜드 배 사이에서 아르마다는 제일란트(Zeeland) 앞 얕은 여울로 밀려 얹힐 뻔했습니다. 그때 바람이 갑자기 바뀌어 스페인 배들은 겨우 위기를 넘겼습니다. 바람은 스페인을 살렸지만, 함대를 해협 쪽으로 되돌려 주지는 않았습니다.

범선, 대포, 초승달 진형: 그 바다의 무기

해협에 나온 스페인 배는 한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크고 힘센 갤리언(galleon), 갤리(galley), 갤리어스(galleass)가 있었고, 무장한 상선과 수송선, 작은 배 35척이 뒤를 받쳤습니다. 리스본에서 출항 직전에 보내온 정보 보고는 큰 배 약 73척, 갤리어스 4척, 갤리 4척을 적었습니다.

두 함대는 싸우고 싶은 방식이 달랐습니다. 스페인은 잉글랜드 배에 바짝 붙어 병사들이 그 배에 올라타 싸우게 하려 했습니다. 잉글랜드 배는 더 잘 움직였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대포를 쏘는 데 기댔습니다.

배에 탄 사람도 선원보다 병사가 많았습니다. 리스본 정보 보고는 선원과 따로 병사만 1만~1만 1천 명이라고 적었고, 호킨스의 편지는 병사 2만 명, 선원과 그 밖의 사람 8천 명이라고 적었습니다. 이 함대는 바다에서 이기는 것으로 끝나는 원정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에 쳐들어가는 계획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흔적은 바다 밑에서도 나왔습니다. 아일랜드 도니골의 키나고 만(Kinnagoe Bay)에 얹힌 라 트리니다드 발렌세라(La Trinidad Valencera)에서는 1556년에 부어 만든 커다란 공성포 두 문과 포차 바퀴 여럿이 나왔습니다. 공성포는 성과 요새를 치는 대포입니다. 북아일랜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s NI)은 이 유물을 아르마다가 잉글랜드 침공을 노렸다는 증거로 소개합니다.

초승달 진형은 함대를 지키는 방패였습니다. 아주 단단하게 지킨 이 진형이 해협을 올라가는 동안 작은 배들을 보호했고, 잉글랜드는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습니다. 칼레의 화공선이 닻을 내린 이 함대를 흩어 놓았지만, 스페인 배들은 그라블린 뒤 다시 대열을 갖췄습니다.

대포의 싸움은 곧 화약과 탄의 싸움이었습니다. 호킨스는 포틀랜드 앞의 길고 날카로운 싸움에서 화약과 탄을 크게 써서, 보충될 때까지 더 싸우지 않기로 했다고 적었습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화약과 탄을 끝없이 보내야 한다고 거듭 청했습니다. 스페인도 같은 사정이었고, 메디나 시도니아가 칼레로 간 것도 보급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람과 폭풍: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돌아서

그라블린 뒤에도 바람은 아르마다를 거슬렀습니다. 그 바다에 주로 부는 남서풍이 스페인 함대를 해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파르마에게 다시 갈 수도, 왔던 길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메디나 시도니아는 북해로 올라가 스코틀랜드 북쪽 끝을 돌아 대서양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잉글랜드 함대는 8월 10일과 11일 북해까지 뒤쫓아 스코틀랜드의 포스만(Firth of Forth) 앞까지 갔습니다. 8월 12일 탄약과 보급이 떨어져 가자 추격을 멈추고 항구로 돌아갔습니다. 이 무렵 잉글랜드도 공격할 탄이 모자라 거리를 두고 따라가기만 했습니다.

코르도바 대위는 메디나 시도니아가 남은 배를 모아 보니 잃은 배가 여섯 척뿐이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스페인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노르웨이 근처에서 큰 폭풍이 함대를 덮쳤습니다.

귀환길은 시련이었습니다. 북해와 대서양에서 큰 폭풍이 이어졌고, 그라블린에서 이미 다친 배가 많았습니다. 그리니치의 연구 안내는 약 19척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해안과 그 둘레에서 난파했고, 다른 배들은 어떻게 됐는지 지금도 모른다고 적습니다. 북아일랜드 국립박물관은 아일랜드 북·서해안에서만 20척 넘게 난파했다고 적어, 숫자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난파선 가운데 하나가 히로나(Girona)입니다. 이 배는 북아일랜드 앤트림의 자이언츠 코즈웨이(Giant's Causeway) 근처 라카다 곶(Lacada Point)에서 부서졌습니다.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은 9월 말에야 스페인 항구에 닿았습니다.

그렇다면 날씨가 승패를 갈랐을까요? 국립문서보관소 자료는 잉글랜드가 이긴 중요한 까닭의 하나로 바람이 스페인 배를 북쪽으로 밀어낸 일을 꼽습니다. 그리니치의 엘리자베스 1세 쪽은 해협의 전투와 화공선, 그라블린을 먼저 적고 "나쁜 폭풍이 스페인의 패배를 마무리했다"고 씁니다. 어느 쪽도 바람 하나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르마다의 길을 네모와 화살표로만 줄인 개념 도표. 리스본에서 코루냐, 리저드 앞, 플리머스 앞, 포틀랜드와 와이트섬, 칼레와 그라블린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북해, 스코틀랜드 북쪽, 아일랜드 서쪽으로 돌아 파란 선으로 스페인에 돌아간다. 회색 점선은 해협에서 뒤따른 잉글랜드 함대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으며 날짜는 새 달력이라는 메모가 있다
아르마다가 간 길. 지도가 아니라 순서만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숫자 읽기: 배는 몇 척, 사람은 몇 명

아르마다의 크기는 누가 언제 셌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1588년 5월 리스본발 정보 보고는 크고 작은 배 125~130척을 적었고, 7월 하워드의 편지는 120척, 아일랜드에서 붙잡힌 코르도바 대위는 140척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기관들도 국립문서보관소 130척, 그리니치 138척, 북아일랜드 국립박물관 130척으로 조금씩 다릅니다.

사람 수는 더 벌어집니다. 정보 보고는 선원을 빼고 병사 1만~1만 1천 명이라며 "훨씬 많다는 말이 돈다"고 덧붙였습니다. 호킨스의 편지는 리스본을 떠날 때 2만 8천 명이었다고 적었고, 오늘 국립문서보관소 자료는 선원과 병사 3만 명, 그리니치는 2만 5천 명이 넘는다고 적습니다.

1588년의 숫자는 모두 한쪽 당사자가 그때 쓴 것입니다. 정찰 보고는 출항 전에 소문과 함께 들어왔고, 하워드는 함대를 처음 본 다음 날 편지를 썼으며, 코르도바의 말은 붙잡힌 뒤 심문에서 나왔습니다. 무엇을 셌는지도 다릅니다. 정찰 보고는 전체 125~130척 가운데 큰 배를 약 73척으로 따로 적었으니, 큰 배만 세느냐 작은 배까지 세느냐에 따라서도 수가 바뀝니다.

스페인 함대의 크기를 자료별로 견준 막대 도표. 배의 수: 리스본 정보 보고(1588년 5월) 125~130척, 하워드 편지(1588년 7월) 120척, 코르도바 진술 140척,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130척, 그리니치 왕립 박물관 138척, 북아일랜드 국립박물관 130척. 탄 사람: 리스본 정보 보고 병사 1만~1만 1천 명(선원은 세지 않음), 호킨스 편지 2만 8천 명(병사 2만, 선원과 그 밖의 사람 8천), 국립문서보관소 3만 명, 그리니치 왕립 박물관 2만 5천 명 넘음. 주황 막대는 1588년 한쪽 당사자가 쓴 문서, 파란 막대는 오늘의 문서보관소·박물관 설명이다. 아래에 돌아간 배는 138척 가운데 약 67척(그리니치), 약 절반(국립문서보관소)이라는 줄이 있다
배와 사람의 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1588년 문서와 오늘 기관의 설명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잉글랜드 쪽 숫자도 하나가 아닙니다. 앞에서 본 대로 플리머스의 약 94척과 다운스의 약 35척이 합류해 약 136척이 됐지만, 코르도바는 플리머스 앞에서 여왕의 배 약 70척을 만났고 칼레에서 25척이 더 왔다고 진술했습니다.

손실도 범위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니치의 연구 안내는 5월 말 리스본을 떠난 138척 가운데 약 67척만 돌아왔다고 적습니다. 그리니치의 다른 쪽은 절반이 안 되는 배, 국립문서보관소 자료는 약 절반이 돌아갔다고 씁니다.

목숨을 잃은 스페인 선원과 병사는 많게는 1만 1천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히 센 값이 아닌 이 숫자 뒤에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메달, 초상화, 난파선: 남은 것

잉글랜드 사람들은 승리를 신의 뜻으로 읽었습니다. 많은 이에게 바람이 스페인 배를 북쪽으로 밀어낸 일은 신이 자기들 편이라는 증거였고, 그것을 기리는 그림과 메달이 만들어졌습니다. 한 메달에는 "신이 바람을 불어 그들이 흩어졌다(God Blew and they were Scattered)"는 글이 새겨졌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는 바로 이 문구를 수업 자료의 제목으로 삼아, 정말 신이 도왔는지 학생들이 증거를 나눠 보게 합니다.

침공을 기다리던 때의 말도 남았습니다. 잉글랜드 군대가 틸버리(Tilbury)에서 침공에 대비할 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약하고 연약한 여자라 해도 잉글랜드의 통치자라는 사실이 자신을 강하게 한다는 연설을 했습니다. 1588년 여름의 침공 실패를 기념한 아르마다 초상화(Armada Portrait)는 보존 처리를 마치고 그리니치의 퀸스 하우스(Queen's House)에 다시 걸렸습니다.

기록도 그림으로 남았습니다. 전투 뒤 곧 페트루초 우발디니(Petruccio Ubaldini)가 원정의 짧은 기록을 썼고, 로버트 애덤스(Robert Adams)가 해전의 장면들을 해도 11장에 그렸습니다. 오거스틴 라이더(Augustine Ryther)가 1590년 이 해도를 새겨 펴냈고, 국립해양박물관이 채색본 한 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1588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펠리페는 그 뒤에도 잉글랜드로 다른 아르마다를 보냈고,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은 1604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니치의 연구 안내는 이 패배로 잉글랜드 침공의 위협이 적어도 가까운 앞날에는 사라졌다고 봅니다. 잉글랜드에 가톨릭 군주를 다시 세우려던 사람들의 바람도 함께 꺾였습니다.

아일랜드 바다 밑에는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의 물건이 남았습니다. 히로나를 발굴한 자리에서는 금화 414개와 은화 789개, 금 장신구가 나왔습니다. 장신구 가운데에는 이름을 새긴 반지, 수도회의 십자가, 직책을 나타내는 목걸이가 있습니다. 북아일랜드 국립박물관이 보관하는 이 유물은 숫자로만 남은 손실 뒤에 저마다의 삶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음에 읽을 글

  • 화약 혁명: 머스킷과 대포가 군대를 바꾼 과정: 아르마다의 배에 실린 대포가 육지의 군대를 어떻게 바꿨는지 이어집니다.
  • 이순신과 한산도 대첩: 학익진 기록 읽기: 진형과 포가 맞선 조선 바다의 싸움을 기록으로 읽습니다.
  • 대함미사일: 바다 위에서 움직이는 배를 맞히는 문제가 오늘 어떤 기술로 이어졌는지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무기가 바뀔 때 전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20세기 기술로 따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