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4월 9일 오후 1시쯤, 버지니아의 작은 마을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로버트 E. 리 장군이 윌머 매클레인의 집 거실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30분 뒤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 도착했습니다. 그날 아침 두 군대 둘레를 20마일 넘게 말을 타고 돈 뒤였습니다.

오후 3시에 회의는 악수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항복으로 남북전쟁이 끝났을까요? 미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의 애퍼매톡스 공원은 이 일을 "끝의 시작"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을 끝내는 조약은 끝내 없었고, 공식적인 종전은 1년 넘게 뒤의 일입니다.

공원 첫 쪽은 항복 뒤에 물음 두 개가 남았다고 적습니다. 나라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해방은 어떻게 실현될까. 이 글은 리의 군대가 피터즈버그를 떠난 마지막 여드레에서 시작해, 항복 조건과 가석방, 조각조각 끝난 전쟁, 그리고 그 두 물음에 답하려 한 재건(Reconstruction)이 1877년에 어떻게 멈췄는지까지 따라갑니다.

피터즈버그를 떠난 여드레

1865년 애퍼매톡스 작전 연표 도표. 세로선 위에 날짜별 점을 찍었다. 3월 29일 연방 기병과 5군단이 사우스사이드 철도 쪽으로 움직임. 4월 1일 파이브포크스에서 연방군 21,000명이 남부연합군 11,000명을 깨뜨림. 4월 2일 피터즈버그 총공격, 해가 진 뒤 리가 철수 명령. 4월 2~3일 남부연합군이 열 달 동안 지킨 참호를 떠나 어밀리아 코트하우스로. 4월 4일 어밀리아에 기다리던 식량이 오지 않아 행군 하루를 잃음. 4월 6일 세일러스크리크에서 물러나던 군대의 거의 4분의 1이 끊김. 4월 7일 그랜트가 팜빌에서 항복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냄. 4월 8일 애퍼매톡스 역, 연방군이 남쪽과 서쪽 길을 막음. 4월 9일 새벽 남부연합의 마지막 공격, 연방 보병 도착(그 가운데 약 5,000명이 USCT). 4월 9일 오후 1~3시 매클레인 집 거실에서 리와 그랜트가 만나 문서를 서명하고 맞바꿈. 4월 10일 두 번째 만남과 가석방증 인쇄 시작. 4월 15일 전 가석방증 28,231장 발급. 점의 색은 연방의 움직임(파랑), 남부연합의 철수(주황), 편지(회색), 항복과 가석방(초록)
피터즈버그에서 애퍼매톡스까지, 1865년 봄의 마지막 작전. 날짜는 미 국립공원청의 공원 쪽과 전투 요약에서 왔습니다 (도표)(도표)

마지막 작전의 뿌리는 1864년 6월입니다. 연방의 포토맥군이 제임스강을 건너 리치먼드와 피터즈버그의 남부연합 방어선을 줄곧 압박했습니다. 가을까지 피터즈버그로 들어가는 철도 넷 가운데 셋이 끊겼고, 사우스사이드 철도 하나만 남았습니다.

1865년 3월 29일 셰리든의 기병과 5군단이 그 철도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4월 1일 파이브포크스라는 길목에서 연방군 21,000명이 피킷이 이끄는 남부연합군 11,000명을 깨뜨렸습니다. 국립공원청 전투 요약(CWSAC)이 어림한 사상자는 3,830명입니다. 마지막 보급선이 위태로워지자 리는 다음 날 아침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피터즈버그와 리치먼드를 비워야 한다고 알렸습니다.

4월 2일 연방군이 피터즈버그 방어선 전체를 공격했고, 해가 진 뒤 리가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남부연합군은 열 달 동안 지킨 참호를 떠났습니다. 첫 목표는 어밀리아 코트하우스였습니다. 거기서 흩어진 부대가 모이고, 리치먼드에서 보낸 식량을 받을 계획이었습니다.

4월 4일 어밀리아에 닿은 리는 식량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차를 시골로 보내 먹을 것을 모았지만, 농민들도 내줄 것이 거의 없어 마차는 빈 채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잃은 행군 하루 동안 추격하던 연방군이 따라붙었고, 공원 쪽은 어밀리아를 이 작전의 전환점으로 봅니다.

이 작전의 기록에는 대포만큼 식량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군대를 먹이고 움직이는 일, 곧 군수(logistics)가 흔들리자 굶주린 병사들이 대열에서 떨어지거나 먹을 것을 찾아 대열을 떠났습니다. 4월 6일 세일러스크리크에서는 물러나던 남부연합군의 거의 4분의 1이 끊겼고, 대부분이 항복했습니다.

4월 7일 그랜트는 팜빌에서 리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리는 애퍼매톡스 역에 먼저 닿아 린치버그에서 보낸 식량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항복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4월 8일 밤, 더 짧은 길로 행군한 연방 기병과 제임스군이 남쪽과 서쪽 길을 막았습니다.

4월 9일 동트기 전, 남부연합군 약 9,000명이 마을 서쪽 들판에 늘어섰습니다. 8시 전에 시작한 공격은 처음에는 연방 기병을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30마일 넘게 강행군한 연방 보병 거의 25,000명이 도착했고, 그 가운데 약 5,000명이 미국 유색인 부대(United States Colored Troops, USCT)였습니다.

오전 10~11시 사이 남부연합 쪽에서 휴전의 흰 깃발이 나갔습니다. 리는 남은 약 33,000명의 병사를 헛되이 희생시키지 않고 항복하기로 했습니다. 국립공원청 전투 기록은 이것을 버지니아에서 이 전쟁의 마지막 교전으로 적습니다.

매클레인 집 거실의 항복

마을 몇 마일 안에 거의 95,000명의 전투원이 몰려 있었고, 주민 대부분은 피난을 떠났습니다. 매클레인 가족은 남아 있었습니다. 리의 참모 찰스 마셜 중령이 회의할 건물을 찾다가 윌머 매클레인을 만났고, 매클레인이 자기 집 거실을 내주었습니다.

두 장군은 먼저 멕시코 전쟁 때 함께 복무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습니다. 이야기를 본론으로 돌린 쪽은 리였습니다. 그랜트가 지난 이틀 동안 편지로 오간 내용을 바탕으로 조건의 초안을 빠르게 썼습니다.

조건의 핵심은 단순했습니다. 남부연합 병사는 무기와 장비와 깃발을 내놓고, 장교는 말과 권총과 개인 물건을 지닙니다. 장교와 병사 모두 가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고, 포로수용소로 보내지지 않습니다. 리가 기병과 포병 사병도 말과 노새를 가져가게 해 달라고 하자, 그랜트는 조건을 고치지는 않되 따로 명령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남은 병사가 몇이냐는 물음에 리는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랜트는 사흘 치 식량 25,000명분을 내주겠다고 했고, 리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랜트의 군사 비서 엘리 S. 파커 중령이 조건의 정식 사본을, 마셜이 리의 수락 편지를 썼습니다. 두 장군은 서로 다른 문서 두 장에 각각 서명해 맞바꿨습니다.

같은 날 매클레인 집 가까이에서는 다른 변화도 있었습니다. 이 집안에 노예로 묶여 있던 9명이 이제 따로 떨어져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집은 지금 그대로가 아닙니다. 1869년 경매로 팔린 뒤 전시용으로 옮기려고 해체했다가 계획이 무산되어 오래 흩어져 있었고, 국립공원청이 다시 지어 1949년 4월 9일에 처음 공개했습니다.

가석방: 포로수용소 대신 집으로

오늘날 가석방이라고 하면 교도소를 떠올립니다. 19세기에 가석방(parole)은 거의 전쟁 포로에 쓰는 말이었습니다. 포로를 가둬 두지 않으니 사람과 물자를 들여 포로를 가두고 먹이고 지키는 비용을 덜었습니다.

남북전쟁 중에도 1862년에 포로 교환 제도가 공식으로 생겼습니다. 이 제도는 1863년에 끝났습니다. 남부연합이 USCT의 흑인 병사를 군인으로 대하지 않겠다고 하자 연방이 남은 전쟁 동안 가석방과 교환을 멈췄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남과 북 양쪽의 수용소에서 수만 명의 포로가 혹독한 환경 속에 죽었습니다.

애퍼매톡스의 조건은 이 제도를 되살렸습니다. 정식 조건에는 항복한 사람이 가석방 약속과 사는 곳의 법을 지키는 한 미국 당국이 괴롭히지 않는다는 문구가 들어갔습니다. 다시 무기를 들지 않는 한, 리를 포함한 누구도 뒷날 기소되지 않게 지켜 주는 문장이었습니다. 이 문구는 몇 달 동안 이어진 다른 남부연합군의 항복에 선례가 됐습니다.

공원 쪽은 이 너그러움을 링컨과 잇습니다. 링컨은 둘째 취임 연설에서 말한 "누구에게도 악의 없이, 모두에게 자비를(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이라는 원칙에 따라 장군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라고 했습니다. 한편 매클레인 집 쪽은 이 조건이 백인 남부 주민을 달래려는 것이었다고도 적습니다.

4월 10일 두 장군이 다시 만났을 때, 리는 병사들이 가석방된 신분임을 증명할 문서를 달라고 했습니다. 아직 항복하지 않은 지역으로 돌아갈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인쇄공들이 밤낮으로 30,000장 넘게 찍었고, 4월 15일 전에 28,231장이 서명되어 발급됐습니다.

가석방증을 받은 흑인도 39명 있었습니다. 모두 노예 상태였거나 강제로 끌려온 자유 흑인으로, 군대에서 노역과 요리와 마차 몰기 같은 일을 했습니다. 가석방증이 있으면 연방 정부의 식량을 받고, 연방이 운영하는 철도와 증기선을 공짜로 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몇 명이 이 혜택을 썼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연방 쪽 흑인 병사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쟁 후반 흑인 180,000명 넘게 연방 육군에서 복무했고, 그 가운데 5,000명 넘게가 4월 9일 전투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20시간이 안 되는 사이 30마일을 걸어 리의 탈출로를 막았습니다. 항복 뒤 이들이 속한 25군단은 텍사스로 보내졌고, 콜레라와 괴혈병과 이질로 애퍼매톡스에 있었던 병사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조약 없는 끝: 남은 군대와 공식 종전

남북전쟁을 끝내는 조약은 서명된 적이 없습니다. 애퍼매톡스는 포위된 한 군대의 군사적 항복이었고, 남부연합 정부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조약은 나라와 나라가 맺는 것이므로, 미국은 조약으로 남부연합을 법적인 나라로 인정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큰 항복 넷과 작은 부대들의 항복으로 조각조각 끝났습니다. 4월 14일 링컨이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총에 맞아 다음 날 아침 숨졌습니다.

4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존스턴이 테네시군 30,000명을 셔먼에게 항복시켰고, 캐롤라이나·조지아·플로리다에 있던 지휘 아래 거의 50,000명도 함께 항복했습니다. 4월 18일에 맺은 첫 합의는 워싱턴의 행정부가 너무 너그럽다고 보아 애퍼매톡스와 같은 조건으로 다시 맺었습니다.

5월 4일 앨라배마에서 테일러가 40,000명을 항복시켰습니다. 5월 5일 데이비스와 내각이 조지아에서 흩어지면서 남부연합에는 정부가 없어졌고, 데이비스는 5월 10일 붙잡혀 먼로 요새에 거의 2년 갇혔습니다. 그는 재판 없이 풀려났습니다. 공원 FAQ에 따르면, 많은 학자는 반역 재판이 분리 독립이 헌법에 맞는지를 다투는 사건이 될까 정부가 걱정했다고 봅니다.

6월 2일 미시시피강 서쪽의 커비 스미스가 정식으로 항복했지만, 부대는 이미 흩어져 거의 60,000명 가운데 약 17,000명만 가석방증을 받았습니다. 6월 19일 연방군이 텍사스 갤버스턴에 들어가 2년 넘게 전에 선언된 해방을 집행했고, 25만 명 넘는 사람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오늘날 준틴스(Juneteenth)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바다에서는 북태평양에서 포경선을 공격하던 남부연합 군함 셰넌도어가 11월 6일 영국 리버풀에서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1866년 8월 20일,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미국 전역에 평화와 질서가 섰다는 선언을 냈습니다. 이 선언이 남북전쟁의 공식적인 끝입니다.

링컨의 죽음과 대통령의 재건

1863년부터 1877년까지 재건 연표 도표. 해마다 한 칸. 1863년 12월 링컨의 10% 계획. 1864년 의회가 웨이드-데이비스 법안을 통과시키고 링컨이 보류 거부. 1865년 3월 3일 전쟁부 안에 해방민국 설치, 4월 9일 애퍼매톡스 항복, 4월 14일 링컨 피격과 앤드루 존슨 대통령, 5월 대통령의 재건 시작, 12월 6일 수정헌법 13조 비준(노예제 폐지). 1866년 민권법이 거부권을 넘어 법이 됨, 6월 13일 수정헌법 14조 의회 통과, 8월 20일 대통령 선언으로 공식 종전. 1867년 3월 관직 보유법, 재건법으로 남부에 군정 구역 다섯. 1868년 2월 24일 하원이 126 대 47로 존슨 탄핵, 5월 16일 상원이 35 대 19로 유죄에 한 표 모자람, 7월 9일 수정헌법 14조 비준. 1870년 2월 3일 수정헌법 15조 비준(투표권), 2월 25일 하이럼 레블스가 첫 흑인 의원으로 선서. 1871년 KKK에 대한 법적·군사적 공세. 1872년 해방민국 폐지. 1873~1883년 대법원 판결들이 재건 법의 범위를 좁힘. 1877년 헤이스 취임, 연방군이 병영으로 돌아감
전쟁에서 재건으로, 1863~1877년. 날짜는 미 국립공원청, 국립문서보관소, 하원 역사실의 기록입니다 (도표)(도표)

전쟁 뒤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쟁은 전쟁 중에 이미 시작됐습니다. 링컨은 1863년 12월 첫 종합 재건 계획인 10% 계획(Ten Percent Plan)을 냈습니다. 남부연합 지도자를 뺀 남부인이 연방에 충성하고 해방을 지지한다고 맹세하면 사면하고, 한 주에서 유권자의 10%가 맹세하면 새 주 정부를 세울 수 있게 했습니다.

이 계획을 다룬 포너(컬럼비아대)의 국립공원청 해설은, 링컨에게 이것이 전후 설계도라기보다 남부연합을 약하게 하려는 시도에 가까웠다고 봅니다. 1864년 의회는 맹세한 유권자가 과반이 될 때까지 새 정부를 미루는 웨이드-데이비스 법안을 통과시켰고, 링컨은 서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거부했습니다. 1865년 4월 마지막 연설에서 링컨은 일부 남부 흑인, 곧 "매우 지적인" 사람과 연방군에 복무한 사람은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습니다.

링컨이 숨진 뒤 앤드루 존슨이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는 노예를 소유했던 테네시 출신이었지만 전쟁 동안 연방에 남은 상원의원이었습니다. 1865년 5월 그가 시작한 정책을 대통령의 재건(Presidential Reconstruction, 1865~67)이라고 부릅니다.

존슨은 남부연합 지도자와 부유한 농장주를 뺀 남부 백인을 사면했고, 이들 대부분도 뒤에 개별 사면을 받았습니다. 노예제 폐지, 분리 철회, 남부연합 빚 무효만 지키면 백인만 투표해 뽑은 새 주 정부가 자기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남부 곳곳에서 옛 남부연합 사람들이 주 의회와 연방 의회에 뽑혔습니다.

이 주 정부들이 만든 법이 블랙 코드(Black Codes)입니다. 흑인에게 해마다 노동 계약을 맺게 하고, 일이 없는 흑인을 부랑자로 정해 백인 지주에게 빌려줄 수 있게 하는 식이었습니다. 해방된 사람들을 옛 농장의 규율 아래로 되돌리려는 법이었고, 흑인들은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의회의 재건과 군정 구역

1865년 12월 의회가 열리자 의회는 남부 주에서 뽑혀 온 의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원 9명과 상원 6명으로 재건 합동위원회를 만들어 남부의 사정을 조사했습니다. 1866년 초 의회는 해방민국을 연장하는 법안과 민권법안을 존슨에게 보냈습니다.

민권법안은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을 국민으로 정하고 법 앞의 평등을 약속했습니다. 존슨은 두 법안을 거부했지만, 민권법은 대통령의 거부권을 넘어 법이 된 미국 역사상 첫 주요 법이 됐습니다. 이어 의회는 출생 시민권과 법의 평등한 보호를 헌법에 넣는 수정헌법 14조를 승인했습니다.

1866년 가을 선거에서 북부 유권자들은 존슨의 정책을 압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테네시를 뺀 남부 주들은 14조를 거부했습니다. 의회는 재건을 처음부터 다시 하기로 했습니다.

1867년 재건법(Reconstruction Acts)은 남부를 다섯 군정 구역(military districts)으로 나누고 연방군이 주둔하게 했습니다. 남부 주가 의회 의석을 되찾으려면 14조를 비준하고, 새 주 헌법을 승인하고, 흑인 남성의 투표권을 보장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급진·의회 재건(Radical or Congressional Reconstruction)은 1877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부에는 연방군이 남아 있었습니다. 미 하원 역사실은 미군이 흑인의 민권과 정치적 권리를 지키고 민주적 선거의 조건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적습니다.

대통령과 의회의 다툼은 탄핵으로 이어졌습니다. 의회는 1867년 3월 대통령이 상원 동의 없이 각료를 해임하지 못하게 하는 관직 보유법(Tenure of Office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존슨은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턴을 두 번 해임했고, 1868년 2월 24일 하원은 126 대 47로 존슨을 탄핵했습니다.

탄핵 조항 11개 가운데 8개가 관직 보유법 위반이었습니다. 1868년 5월 16일 상원 표결은 35 대 19로, 유죄에 필요한 3분의 2에 한 표가 모자랐습니다. 이 법은 1926년 대법원이 위헌으로 판결했습니다.

수정헌법 세 조항과 해방민국

해방된 사람들의 삶을 돕는 일은 전쟁 중에 시작됐습니다. 1865년 3월 3일 의회는 전쟁부 안에 해방민국(Freedmen's Bureau)을 세웠습니다. 정식 이름은 난민·해방민·버려진 토지국이고, 그해 5월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소장이 국장이 됐습니다.

해방민국은 1872년에 없어졌지만 일의 대부분은 1865년 6월부터 1868년 12월 사이에 했습니다. 식량과 옷을 나눠 주고, 병원과 난민 수용소를 운영하고, 농장주와 해방민 사이의 노동 계약을 감독했습니다. 학교를 세우는 자선 단체를 돕고, 노예 시절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받게 했고, 흑인 병사와 수병이 밀린 급여와 연금을 받도록 도왔습니다.

땅은 달랐습니다. 해방민에게 경제적 자유는 땅을 갖는 것이었지만, 존슨은 1865년 여름 연방이 쥐고 있던 땅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습니다. "40에이커와 노새"라는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해방민은 땅 없이 가난하게 남았습니다.

헌법은 세 번 바뀌었습니다. 수정헌법 13조는 1865년 1월 31일 의회를 통과하고 12월 6일 비준되어 노예제를 없앴습니다. 해방 선언은 반란 중인 지역에만 적용되어 나라 전체의 노예제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헌법 조항이 필요했습니다. 다만 13조는 "범죄에 대한 처벌"로서의 강제 노역은 예외로 남겼습니다.

14조는 1866년 6월 13일 의회를 통과하고 1868년 7월 9일 비준됐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한 모든 사람을 시민으로 정했고, 어떤 주도 법의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는 14조가 재건 동안 흑인 시민의 권리를 지키지 못했지만, 그때 나온 주장과 반대 의견이 20세기 변화의 바탕이 됐다고 정리합니다.

15조는 1869년 2월 26일 의회를 통과하고 1870년 2월 3일 비준됐습니다. 인종, 피부색, 과거의 예속 상태를 이유로 투표권을 거부하거나 줄이지 못하게 해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줬습니다.

바뀐 헌법은 곧 의사당에서 보였습니다. 1870년 2월 25일 오후 미시시피의 하이럼 레블스가 첫 흑인 연방 의원으로 상원에서 선서했고, 12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조지프 레이니가 첫 흑인 하원의원이 됐습니다. 남부의 재건 정부들은 남부 첫 주립 공립학교 제도를 세웠습니다.

한편 철도 지원 사업은 부패와 세금 증가를 낳아 점점 많은 백인 유권자를 돌아서게 했습니다.

재건의 끝: 1877년

재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점점 폭력에 기댔습니다. 쿠클럭스클랜(KKK) 같은 테러 조직이 지방의 공화당 지도자와 자기 권리를 주장한 흑인을 노렸습니다. 의회는 정치 폭력을 막는 국가의 행동을 허용하는 집행법(Enforcement Acts)들을 만들었고, 1871년 그랜트 행정부의 법적·군사적 공세가 KKK를 무너뜨렸습니다. 1872년 그랜트의 재선은 이 시기 가장 평화로운 선거였습니다.

그 뒤 재건은 기울었습니다. 1876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루이지애나만 공화당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해 헤이스와 틸던의 대통령 선거는 바로 이 주들의 다툼이 있는 개표에 달렸습니다. 의회는 특별 위원회를 만들었고, 근소한 공화당 다수였던 위원회가 다툼이 있는 선거인단 표를 모두 헤이스에게 줬습니다.

헤이스는 선거인단 한 표 차로 대통령이 됐습니다.

포너의 해설은 그 뒤의 흥정을 "1877년 흥정(Bargain of 1877)"이라고 부릅니다. 헤이스는 남은 남부 주의 민주당 지배를 인정하고, 민주당은 의회의 당선 확정을 막지 않기로 했습니다. 헤이스가 취임하고 연방군이 병영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연방 정부가 해방민의 권리를 지킬 책임을 받아들인 시대라는 뜻에서의 재건이 끝났습니다.

법정에서도 재건은 좁아져, 1873년부터 1883년까지 대법원 판결들이 그 법적 성과를 꾸준히 깎았습니다. 1873년 도살장 사건에서 시작해, 1876년 미국 대 크룩섕크 판결은 1873년 루이지애나 콜팩스 학살 가해자들의 유죄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1883년 민권 사건 판결은 1875년 민권법 가운데 사기업의 차별을 금지한 조항을 무효로 했습니다.

1890년대 초 옛 남부연합 주들은 문해 시험과 "할아버지 조항" 같은 장치를 법에 넣어 흑인의 투표를 막았고,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은 "분리하되 평등"한 시설을 합법으로 만들었습니다. 19세기에 뽑힌 마지막 흑인 의원이 1901년 의회를 떠난 뒤로 1928년까지 흑인 의원은 뽑히지 않았습니다. 흑인 투표권 박탈에 가장 직접 맞선 것은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었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와 기간

자료별 숫자 비교 도표. 첫 줄 4월 9일 전투의 연방 사상자: 국립공원청 전투 요약(CWSAC) 164명(남부연합 500명, 합계 664명), 공원의 USCT 쪽 약 300명. 둘째 줄 세일러스크리크의 남부연합 손실: 작전 쪽 거의 8,000명과 장군 8명, CWSAC 7,700명(연방 1,148명, 합계 8,848명). 셋째 줄 마지막 리의 군대: 전투 쪽 남은 병사 약 33,000명, 가석방 쪽 서명·발급된 가석방증 28,231장, 회의 때 리는 남은 병사 수를 몰랐고 그랜트는 사흘 치 식량 25,000명분을 내줌. 넷째 줄 재건의 기간: 포너의 국립공원청 해설 1865~1877년, 그 가운데 대통령의 재건 1865~67년, 재건 시대 국립역사공원과 테마 연구 1861~1900년을 1860년부터 1900년까지의 눈금 위 막대로 그림. 다섯째 줄 흑인 공직자: 포너 해설은 의회 약 16명, 주 의회 600명 넘게, 지방 공직 수백 명, 하원 역사실은 1877년까지 지방·주·연방 공직 약 2,000명, 1870~1901년 의회의 흑인 하원의원 20명과 상원의원 2명. 막대는 줄마다 따로 비율을 맞췄다
같은 일, 다른 숫자. 미국 정부 기관의 쪽마다 적힌 값과 기간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애퍼매톡스와 재건의 숫자도 같은 정부 기관 안에서 쪽마다 다릅니다. 4월 9일 전투에서 연방 쪽 사상자는 CWSAC 요약이 164명(남부연합 500명, 합계 664명)으로, 공원의 USCT 쪽은 "약 300명"으로 적습니다. 공원의 전투 쪽은 전투 전체의 사상자를 "1,000명 미만"이라고만 씁니다.

세일러스크리크에서 남부연합이 잃은 병력은 작전 쪽이 "거의 8,000명과 장군 8명", CWSAC가 7,700명(연방 1,148명, 합계 8,848명)입니다. 마지막 리의 군대는 전투 쪽이 약 33,000명, 가석방 쪽의 발급된 가석방증은 28,231장입니다. 정작 회의 자리의 리도 남은 병사 수를 몰랐습니다.

흑인 연방 병사는 공원의 USCT 쪽이 "180,000명 넘게", 국립공원청 "Civil War Facts" 쪽이 178,975명입니다. 흑인 공직자는 포너 해설이 재건 동안 의회 약 16명, 주 의회 600명 넘게, 지방 공직 수백 명으로 적고, 하원 역사실은 1877년까지 남부의 지방·주·연방 공직에 약 2,000명이 있었다고 씁니다. 1870년부터 1901년까지 의회의 흑인 의원은 하원의원 20명과 상원의원 2명이었습니다.

날짜와 기간도 그렇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의 같은 쪽에 14조 비준일은 1868년 7월 9일로, 국무장관이 37개 주 가운데 필요한 28개 주의 비준을 증명서로 선포한 날은 7월 28일로 나옵니다.

재건의 기간은 포너 해설이 1865~1877년인데, 재건 시대 국립역사공원과 2017년 국립공원청 테마 연구는 1861~1900년으로 넓게 잡습니다. 어느 쪽이 틀렸다기보다 무엇을 셌는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재건으로 보는지가 다릅니다.

엇갈리는 평가

포너의 해설은 재건을 미국 역사에서 아마 가장 논쟁이 많은 시대라고 부릅니다. 예전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복수심에 찬 급진 공화당이 패배한 남부에 "흑인 우위"를 씌운 추한 시기로 그렸습니다. 근래에는 인종 간 민주주의의 칭찬할 만한 실험으로 더 공감 있게 봅니다.

예전 그림이 어디서 왔는지도 해설에 나옵니다. 1870년대 북부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재건은 실정(失政)과, 국가 권력으로 아래 계층을 끌어올리려 한 잘못된 시도의 상징이 됐습니다. 같은 해설은 "흑인 우위"는 존재한 적이 없지만, 흑인이 정치 권력을 얻은 것은 이 시대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로, 나라의 전통과 크게 갈라선 일이었다고 적습니다.

말 한마디에도 관점이 들어 있습니다. 민주당이 1870년대에 남부의 주 정부를 되찾은 과정을 당시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구원(redemp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원 역사실은 이 말을 그들이 쓴 말로 따옴표에 넣어 적고, 그 과정이 주로 폭력과 투표 방해로 이뤄졌다고 설명합니다.

재건이 남긴 것에 대해서는 기관들의 설명이 비슷한 쪽을 가리킵니다. 포너는 재건 수정 조항들이 짓밟혔지만 헌법에 남아 뒷세대가 깨울 "잠자는 거인"이 됐다고 쓰고, 1960년대 민권 혁명을 "두 번째 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적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도 15조를 한 세기 넘게 이어진 평등 투쟁의 한 걸음으로 봅니다.

애퍼매톡스의 너그러운 조건에 대한 설명도 한 가지가 아닙니다. 가석방 쪽은 화해를 바란 링컨의 원칙과 이어 설명하고, 매클레인 집 쪽은 백인 남부 주민을 달래려는 조건이었다고 적습니다. 2017년 테마 연구 보도자료가 재건을 "복잡하고 다툼이 많은 시기"라고 부른 것처럼, 이 시대는 지금도 한 줄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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