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경상도 의령의 한 유생이 집안 재산을 풀어 사람을 모았습니다. 처음 모인 사람은 수십 명이었습니다. 늘 붉은 옷을 입고 강가를 오가며 싸운 그는 스스로를 '홍의장군'이라 일컬었습니다. 곽재우(郭再祐)입니다.
같은 해 여름에는 이런 무리가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함경도, 황해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묘향산의 노승은 전국 절에 글을 보내 승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나라가 징발한 군대가 아닌데, 이들은 왜 싸움터에 나섰을까요? 그리고 그 힘은 어디까지 미쳤을까요?
이 글은 임진왜란의 의병과 의승군을 다룹니다. 그들이 관군과 무엇이 달랐는지, 누가 어디서 일어났는지, 어떻게 싸우고 버텼는지, 왜 오래가지 못했는지를 봅니다. 길잡이는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입니다. 항목마다 쓴 연구자가 달라 병력 수가 어긋나는 곳이 많은데, 그런 곳은 숫자를 나란히 놓습니다.
의병이란, 관군과 무엇이 달랐나
의병(義兵)은 나라가 어려울 때 스스로 일어나 적과 싸운 민병입니다. 의병장과 그 아래 병사를 함께 부르는 말이고, 이 개념이 뚜렷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입니다.
관군과 가르는 기준은 누가 모았느냐입니다. 「의병」 항목이 옮긴 『선조수정실록』의 구분에 따르면, 고을 관아의 부름을 받지 않은 무리가 의병이고 수령이 백성을 징발해 원수의 지휘를 받게 한 무리가 관군입니다. 의병은 관리가 아니라 의병장 개인과 맺어진 무리라서 관군보다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였습니다.
다만 '스스로'라는 말에는 폭이 있습니다. 의병장이 직접 모은 자모의병(自募義兵)도 있었지만, 관리가 불러 모은 소모의병(召募義兵)도 많았고 강제성을 띤 경우도 많았습니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과 경상좌도 안집사 김륵(金玏)이 모은 의병이 그런 예입니다.
무엇을 지키려 했느냐로 나누기도 합니다. 「의병」 항목을 쓴 김강식은 고향 지역을 지키려는 향병(鄕兵)과 서울을 되찾고 잃은 땅을 회복하려는 근왕병(勤王兵)으로 나눕니다. 영남과 함경도 의병이 앞쪽, 호남 의병이 뒤쪽에 가깝다고 봅니다. 이 차이는 무엇보다 일본군의 침입을 직접 받으면서 일어났느냐 아니냐에서 왔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왜 1592년 여름에 한꺼번에 일어났나
1592년 4월 14일 전쟁이 시작되자 관군은 크게 무너졌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기사는 변란 뒤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미워해 적을 만나면 모두 흩어졌다고 적습니다. 같은 기사는 이어서 여러 도의 이름난 집안과 유생들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일어나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응모했다고 씁니다.
의병장은 대부분 양반, 그 가운데서도 문반 출신이나 전직 관료였습니다.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과 서얼도 많았습니다. 무인은 적었습니다.
백성 쪽의 까닭도 있었습니다. 관의 강제 징집에 끌려가 여러 전선을 떠도는 것보다, 평소 잘 알고 믿는 의병장 밑에서 싸우는 쪽을 바랐습니다. 고향 둘레에서 부모와 처자를 지키기에도 의병이 나았습니다.
조정의 태도도 한몫했습니다. 전쟁 직후 조정은 각 도에 선전관과 안집사를 보내 관군을 모으려 했지만 성과가 적었습니다. 그러자 의병을 격려하고 공적인 군대로 인정했으며, 의병장에게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 뒤로 일반 백성의 참여가 줄을 이었습니다.
마을의 짜임도 바탕이 되었습니다. 16세기에 널리 퍼진 향약(鄕約)이 사족과 향민을 이어 주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촌과 면 단위의 작은 모임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의병의 구성은 양반에서 천민까지 다양했습니다.
고을마다 일어난 의병장들
『선조수정실록』은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으로 호남의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영남의 곽재우·정인홍(鄭仁弘), 호서의 조헌(趙憲)을 듭니다. 「의병」 항목은 여기에 고령의 김면, 영천의 권응수, 보성의 임계영,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황해도의 이정암(李廷馣), 경기도의 우성전 등을 더합니다.
곽재우는 전쟁이 일어난 지 여드레 만인 4월 22일에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의령의 정암진(솥바위 나루)과 세간리에 본부를 두고 이웃 고을까지 오가며 싸웠습니다. 5월 하순 무렵 정암진을 건너려던 일본군을 막아 경상우도를 지켰고, 덕분에 그 지역 농민들은 평소처럼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해 10월 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 의병을 보냈습니다.
전라도의 고경명은 김천일, 박광옥과 뜻을 모아 격문을 돌렸고, 담양에 6,000여 명을 모아 전라좌도 의병대장이 되었습니다. 6월 1일 서울 쪽으로 북상하던 그는 일본군이 금산을 차지하고 호남을 노린다는 소식에 7월 1일 방향을 돌렸습니다. 7월 10일 금산에서 관군과 함께 싸우다 관군이 먼저 무너지면서 의병도 흩어졌고, 고경명은 아들 고인후와 함께 그곳에서 숨졌습니다.
충청도 옥천의 조헌은 1,600여 명을 모았습니다. 8월 1일 승려 영규(靈圭)의 승군과 함께 청주성을 되찾았습니다. 그 뒤 충청도순찰사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로 해산되었고, 남은 700명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 8월 18일 영규의 승군과 함께 싸우다 모두 전사했습니다. 이들이 숨진 금산의 자리는 1971년 칠백의총(七百義塚)으로 성역화되었습니다.
나주의 김천일은 300명으로 출발했습니다. 수원 독성산성을 거점으로 유격전을 벌였고, 8월에는 강화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강화도는 조정의 명령을 호남과 호서에 전할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이듬해 2월 행주산성 싸움에 강화도에서 나가 참가했고, 1593년 6월 진주성에 들어가 관군과 의병을 함께 거느리다가 성이 함락될 때 아들과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북쪽 끝 함경도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두 왕자를 잡아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함경북도병마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종성부사·경원부사 같은 지역 관리들도 함께했습니다. 쌍포 싸움과 이듬해 백탑교 싸움에서 이겨 관북 지방을 되찾았습니다.
승려들의 군대, 의승군
조선은 불교를 억눌렀고, 승려가 스스로 군사 조직을 꾸릴 수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도 승려들이 각지 의병과 함께 싸웠지만 승병으로서의 지휘 계통은 없었습니다.
달라진 계기는 묘향산의 승려 휴정(休靜)이었습니다. 별호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더 알려진 그는 의주로 피란한 선조를 찾아갔고, 늙고 병든 승려는 각자 수행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종군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1592년 7월 이후 나라는 승군을 이끌 직책을 두고 휴정을 불러들였고, 그는 73세에 8도 16종 도총섭(都摠攝)이 되었습니다.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머물며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냈습니다.
각지에서 승장이 일어났습니다. 황해도의 의엄(義嚴), 강원도의 유정(惟政), 호남의 처영(處英)은 모두 휴정의 제자였습니다. 유정은 흔히 사명대사(四溟大師)라고 부릅니다.
의승장 가운데 먼저 공을 세운 사람은 영규였습니다. 공주 청련암에 있던 그는 충청도에서 800여 명을 모았고, 조헌의 의병과 함께 청주성을 되찾았다가 금산에서 함께 전사했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떨쳐 일어남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1593년 1월 평양을 되찾을 때 유정이 이끈 승군은 모란봉 방면을 맡았습니다. 2월 행주산성에서는 처영이 승의병 1,000명을 이끌고 권율(權慄)을 따랐습니다. 이때 산성에 포진한 전체 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습니다. 의승군은 이순신(李舜臣)의 수군에도 참여했습니다.
싸우는 방식과 꾸려 가는 방식
의병이 일어난 땅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진격로를 따라가며 주요 요충지에만 군대를 두었기 때문에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생겼습니다. 이런 곳이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고경명처럼 큰 부대로 맞붙어 싸운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이었습니다. 곽재우는 강가를 오가며 기습했고, 김천일은 산성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관아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규율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황해도 연안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정암은 자원자의 이름을 「의병약서책(義兵約誓冊)」에 적고 군율 8조목을 정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민간에 폐를 끼치는 자를 참수한다는 조목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먹이고 무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의병장들은 자기 재산을 내놓아 무기를 만들고 군량을 댔습니다. 오늘날 군수(logistics)라고 부르는 보급의 짐을 의병장 한 사람 한 사람이 진 셈입니다. 경상좌도의 김륵은 고을마다 이장이나 유사를 책임자로 정하고, 백성의 살림 형편에 따라 군량을 나눠 걷었습니다. 의병 부대가 대개 작았던 데에는 무기와 군량을 구하기 어려웠던 사정도 있었습니다.
승군은 싸움 밖의 일을 더 많이 맡았습니다. 산성을 쌓고 지키는 일, 군량을 나르는 일, 지형을 잘 아는 점을 살린 정찰이 그것입니다. 유정은 팔공산성·금오산성·악견산성 등을 쌓았고, 1594년 의령에서는 절의 논밭에 보리를 심고 산성 둘레를 일궈 군량미 4,000여 석을 모았습니다.
숫자로 본 규모, 그리고 한계
의병은 모두 몇 명이었을까요? 「의병」 항목은 1593년 정월 명나라에 알린 전국 의병 총수를 2만 2600여 명으로 적습니다.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였고,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592년보다는 많이 줄어든 숫자였습니다.
무리마다의 숫자는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곽재우의 의병은 『선조수정실록』에 1천여 명, 「곽재우」 항목에 2,000인으로 나옵니다. 유정이 강원도에서 일으킨 승군은 「유정」 항목에 800여 명, 「승군」 항목에는 150명으로 시작해 평양 동쪽에 이를 때 700명이 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국 의승군은 「의승군」 항목에 수천 명, 「휴정」 항목에 5,000명, 「유정」 항목에 5,000명이 넘게, 「승군」 항목에 법흥진 승군 5,000명으로 적혀 있습니다.
숫자가 줄어든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관군이 차츰 회복되자 조정은 의병이 새로 일어나는 것을 억제하고 활동에도 제약을 두었습니다. 1592년 10월 이후에는 의병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 폐단을 일으켰고, 관군의 징발을 피하려고 모인 명목뿐인 의병도 있었습니다. 100여 진에 이른 의병 가운데에는 관군과 부딪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관군과의 갈등은 1592년 여름의 기록에도 이미 나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관군과 의병이 서로 갈등을 일으켰고 각 도의 장수 대부분이 의병장과 화합하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그 가운데 김성일은 양쪽을 잘 조율해, 영남 의병이 대우를 받고 패해 죽는 사람이 적었다고 같은 기사는 덧붙입니다.
결국 나라는 의병을 해체해 나갔고, 남은 의병은 흩어지거나 관군에 흡수되었습니다. 승군의 길은 달랐습니다. 승군은 끝까지 해체되지 않았고, 명군이 온 뒤로는 싸우면서 군량미 수송을 맡았으며, 서울을 되찾은 뒤에는 성을 쌓는 등 관군에 준하는 형태로 바뀌어 갔습니다. 1593년 8월에는 도총섭 아래 각 도마다 총섭 2명을 두어 조직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정유재란 무렵 나라는 초기 의병을 본떠 다시 사람을 모았습니다. 일본군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을 자원받아 꾸린 복수군(復讐軍)이 1596년 12월부터 넓게 조직되었지만, 「의병」 항목은 전과가 별로 없이 흐지부지되었다고 적습니다. 다시 일어난 의병도 대개 작았습니다. 그래도 곽재우는 1597년 8월 창녕 화왕산성에 들어가 네 고을 군사와 함께 성을 지켰습니다.
전쟁 뒤에 남은 것
의병의 경험은 제도로 이어졌습니다. 유성룡(柳成龍)은 군제 개혁에서 향병제를 주장했고, 이는 전쟁 중 지방 군현에 새로 짠 속오군(束伍軍)으로 이어졌습니다. 속오군은 촌마다 소부대를 편성했고, 평시에도 변란에 대비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국가가 향병을 직접 모으고 통제했습니다.
승군은 전쟁 뒤에도 산성을 지켰습니다. 병자호란 뒤에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승군 진영을 두었고, 이 승군 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습니다. 1605년 4월 전쟁의 공을 기록할 때 승군 34명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습니다.
승려를 보는 눈도 바뀌었습니다. 「휴정」 항목을 쓴 김용태는 승군의 공이 인정되면서 승려에 대한 비판이 줄고 불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1738년 밀양 표충사를 시작으로 휴정과 유정 등을 모시는 사당이 나라의 공인을 받았습니다.
평가는 하나가 아닙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의병이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의병」 항목은 의병을 관료 중심의 충의군(忠義軍)으로만 보면 백성들의 역할이 가려진다며 민병이나 향병이라는 말이 알맞다고 봅니다. 한편 같은 시대의 정탁(鄭琢)은 성심껏 싸우는 의병도 있지만 제 편의를 위해 들어와 고향만 지키는 자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임진왜란 한눈에: 1592년부터 7년의 전쟁: 의병이 일어난 전쟁 전체의 흐름을 다룰 글입니다.
- 이순신과 한산도 대첩: 학익진 기록 읽기: 의병이 고을을 지키던 1592년 여름, 바다에서 일어난 싸움을 다룰 글입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의병이 오래가지 못한 까닭 가운데 하나가 군량과 무기였습니다. 오늘날 군대가 버티는 힘을 무엇으로 묶어 부르는지 살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