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요새의 곡물 창고, 하루 2오볼이라는 급료,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짓는 진영. 로마 군단을 떠올리면 방패를 들고 행진하는 병사부터 생각나지만, 기록을 읽다 보면 이런 살림의 이야기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로마는 어떻게 그렇게 넓은 땅에 군대를 오래 둘 수 있었을까요? 이 글은 공화정 시대 군단의 짜임새에서 출발해, 마리우스의 모병과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보상 제도, 그리고 군대를 받친 국경의 방벽과 길을 차례로 살핍니다. 근거는 당시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자료입니다.
시민이 무기를 들던 군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로마가 53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세상의 거의 전부를 한 지배 아래 두었다고 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제도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 설명의 한가운데에 군대가 있습니다.
공화정 로마의 군대는 시민의 군대였습니다. 기병은 모두 10년, 보병은 46세가 되기 전에 16년을 복무해야 했고, 위급할 때는 보병에게 20년을 요구했습니다. 재산 평가가 400드라크마에 못 미치는 사람은 모두 해군 쪽으로 보냈습니다.
군대를 움직이는 돈과 물자는 장군 혼자 쥐지 못했습니다. 군단에는 늘 보급이 필요한데, 원로원이 동의하지 않으면 곡물도 옷도 급료도 댈 수 없었습니다. 전쟁터의 군대가 수도의 정치와 보급으로 묶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나이로 나눈 세 줄: 마니풀루스
폴리비오스의 기록에서 군단 하나의 보병 정원은 4,200명이고, 아주 위급할 때는 5,000명까지 늘렸습니다. 여기에 기병 300명이 붙었습니다.
이 숫자는 폴리비오스가 본 공화정 시대의 기준이고, 위급하면 늘렸습니다. 제국 시대의 정원은 이 글의 자료로 확인하지 못해 적지 않습니다.
보병은 나이와 재산으로 네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가장 젊고 가난한 사람은 가벼운 무장의 벨리테스(velites), 그다음은 하스타티(hastati), 한창때인 사람은 프린키페스(principes), 가장 나이 든 사람은 트리아리이(triarii)가 됐습니다. 트리아리이는 600명, 프린키페스와 하스타티는 각각 1,200명이었고 나머지가 벨리테스였습니다. 군단이 커져도 트리아리이 수는 늘 그대로였습니다.
무장도 부류마다 달랐습니다. 벨리테스는 칼과 투창, 둥근 방패를 들었습니다. 하스타티는 갖춘 무장 한 벌을 입었고,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이도 같게 무장했습니다. 다만 트리아리이는 던지는 창 필룸 대신 긴 창을 들었습니다.
벨리테스를 뺀 세 부류는 각각 10개 중대로 나뉘었습니다. 이 중대를 마니풀루스(manipulus)라고 불렀습니다. 각 부류에서 공로에 따라 백인대장(centurion)을 10명 뽑고 다시 10명을 더 뽑아, 중대마다 백인대장 둘과 부관 둘을 두었습니다.
지휘관을 둘씩 둔 까닭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중대가 지휘관 없이 남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나 같은 진영, 끊기지 않는 보급
로마군은 언제 어디서나 한 가지 설계로 진영을 지었습니다. 그리스 군대는 땅의 생김새를 살려 진영을 맞추었습니다. 로마군은 반대로 참호를 파고 방어 공사를 하는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늘 같고 모두에게 익숙한 진영을 골랐습니다.
같은 꼴의 진영은 어떤 점이 좋았을까요? 모두가 늘 같은 자리를 쓰니, 병사는 자기 천막이 어느 거리, 거리의 어느 쪽에 있는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폴리비오스는 진을 치는 모습이 군대가 고향 도시로 돌아가는 것과 닮았다고 했습니다.
살림은 숫자로 남았습니다. 보병의 급료는 하루 2오볼, 백인대장은 그 두 배, 기병은 1드라크마였습니다. 보병은 한 달에 아티카 메딤노스로 3분의 2쯤 되는 곡물을 받았습니다.
로마 병사의 경우 곡물과 옷, 더 필요한 무기 값은 재무관이 급료에서 뺐습니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군수(logistics)가 제도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모병과 보상: 마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
역사가 살루스티우스는 유구르타 전쟁 때 장군 마리우스가 병사를 모은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마리우스는 조상들처럼 재산 등급에 따라 뽑지 않고 누구든 자원하게 했고, 그렇게 모인 사람은 대부분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번역본의 주석은 그 등급이 재산 기준으로 나눈 옛 등급이며, 가장 낮은 등급 아래의 재산 없는 사람들은 본래 군 복무에서 빠져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마리우스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당시에도 말이 갈렸습니다. 좋은 사람이 모자라서였다는 쪽도 있었고, 인기를 얻으려 했다는 쪽도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업적록(Res Gestae)』에 군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군대 서약으로 그에게 묶인 로마 시민은 약 5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복무를 마친 30만 명 남짓을 식민시에 정착시키거나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땅이나 돈을 주었다고 적었습니다.
그의 제안으로 군사 금고도 세워졌습니다. 20년 이상 복무한 병사에게 보상금을 주려는 금고였고, 그는 자기 재산에서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냈다고 밝혔습니다. 이 숫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스스로 남긴 기록이라는 점도 함께 기억해 둘 만합니다.
국경을 지킨 군단과 보조군
제정 시대의 군단은 제국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홉째 해를 이야기하며 군단이 어디에 있었는지 늘어놓습니다. 가장 큰 힘은 라인강의 8개 군단이었고, 히스파니아에 3개, 아프리카와 이집트에 2개씩, 시리아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4개가 있었습니다.
도나우강 쪽 판노니아와 모이시아에 2개씩, 그 네 군단 뒤편의 달마티아에 2개가 더 있었습니다. 모두 더하면 25개 군단입니다.
군단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속주에는 동맹 함선과 기병대, 보조군 대대가 군단보다 크게 적지 않은 규모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주 옮겨 다녀서 타키투스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 모습은 오늘날 유적에서도 보입니다. 유네스코는 로마 제국의 국경망이 서쪽 대서양 해안에서 동쪽 흑해까지, 북쪽 스코틀랜드 중부에서 남쪽 사하라 사막의 북쪽 끝까지 이어졌고, 대부분 제국이 가장 넓었던 2세기에 지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브리타니아 북쪽의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서기 122년 황제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한 방벽입니다. 길이는 같은 유네스코 자료 안에서도 130 km(타인강 하구에서 솔웨이만까지)와 118 km로 달리 적혀 있습니다. 140년대에는 그보다 북쪽에 약 60 km의 안토니누스 방벽이 섰습니다.
잉글리시 헤리티지의 하우스스테즈 요새 자료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138년까지 방벽은 완성됐고 방벽을 따라 15개 요새에 1만 명 가까운 수비군이 있었습니다. 하우스스테즈를 지킨 것은 군단병이 아니라 보조군이었습니다. 정복된 민족에게서 모은 보병과 기병으로, 이 요새는 처음부터 800명 보병 부대를 두도록 지었고, 요새의 곡물 창고는 하드리아누스 때 지은 첫 건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제국 곳곳에서 온 중무장 보병인 군단병과 정복된 민족 출신의 보조군이 함께 국경을 받친 것입니다.
국경은 싸움만을 위한 선이 아니었습니다. 라인강의 라인브롤에서 도나우강의 아이닝까지 이어진 550 km의 상부 게르마니아-라이티아 리메스는 군사 방벽이면서 경제와 문화의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길: 아피아 가도
군대가 국경에 머물려면 사람과 물자가 오갈 길이 있어야 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아피아 가도, 길의 여왕"은 그 출발점을 보여 줍니다. 아피아 가도는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권한으로 기원전 312년부터 지은 길로, 로마와 카푸아를 가장 곧은 길로 이었습니다.
이 길은 처음부터 군사 정복을 위한 전략 도로로 구상됐습니다.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자 베네벤툼, 타렌툼, 브룬디시움 쪽으로 늘어났습니다. 기원전 312년부터 서기 4세기까지 짓고 늘린 이 길은 800 km가 넘고, 고대 로마의 큰 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길로 꼽힙니다.
정복한 땅이 안정되자 아피아 가도는 곧 교역과 지역 발전의 중심 길이 됐고, 누구나 통행료 없이 쓸 수 있었습니다. 길이 이어 준 도시들은 자랐고 새 정착지가 생겨 농업과 교역이 살아났습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둘레의 요새와 행군 진영도 넓은 도로망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로마 군단이 남긴 것
이 글에서 본 기록들은 무기 하나보다 제도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정원을 정한 군단, 중대마다 둘씩 둔 지휘관, 어디서나 같은 진영, 급료와 곡물을 셈하는 규칙, 복무를 마친 병사에게 땅과 돈을 준 기록, 그리고 국경과 수도를 잇는 길이 함께 나옵니다.
한계도 기록에 같이 남아 있습니다. 공화정의 장군은 원로원이 보급을 끊으면 계획을 이룰 수 없었고, 마리우스의 모병을 두고는 당시에도 뜻이 갈렸습니다. 이 글의 원사료는 옛 역사가들과 황제 자신이 쓴 기록이라, 숫자를 읽을 때는 누가 쓴 기록인지 함께 보는 편이 좋습니다.
보급과 정비가 군대를 얼마나 오래 움직이게 하는지는 오늘날의 무기에서도 같은 물음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곡물 창고와 길의 물음이 오늘날 군대에서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무기와 조직이 크게 바뀐 순간들을 현대에서 찾아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한 무기가 오랜 시간에 걸쳐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다른 시대에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