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평한 들판 한쪽에 수십만이라고 기록된 군대가 늘어서 있습니다. 맞은편에는 그보다 훨씬 적은 군대가 비스듬히 줄을 섰습니다. 기원전 331년 가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흔히 "적은 군대가 큰 군대를 이긴 싸움"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런데 큰 군대가 정말 얼마나 컸는지부터 기록마다 다릅니다. 이 글은 전투가 왜 일어났고 어떻게 흘러갔는지, 마케도니아 군대의 무엇이 달랐는지, 그리고 옛 기록을 읽을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원사료 번역과 학자들의 주석으로 따라갑니다.
왜 티그리스 강 너머에서 만났나
원정은 그리스에서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토스에 그리스 도시들의 대표를 모아 자신을 그리스의 전권 장군으로 세우는 결의를 얻었습니다. 대표들은 페르시아가 예전에 그리스에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받으러 가는 원정에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페르시아에서 다리우스가 왕위에 오른 것도 필리포스 2세가 죽고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왕이 된 무렵이었습니다.
그다음 그는 군대를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데려가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넜습니다. 함께 건넌 병력은 보병 3만 2천, 기병 4,500이었습니다. 옛 저자들은 해를 아테네 관리의 이름으로 셌습니다. 그해를 오늘날 달력으로 옮기면 기원전 334년 7월부터 333년 5월까지입니다.
두 왕은 이미 한 번 맞붙었습니다. 기원전 333년, 아마 11월에 있었던 이소스 전투입니다. 다리우스는 그 싸움에서 알렉산드로스가 무기 길이에서 크게 유리했다고 보고 칼과 창을 전보다 훨씬 길게 만들었습니다.
협상도 시도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 서쪽 땅 전부와 은 3만 탈란톤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선물보다 영광을 택했습니다.
전투 전날까지
전장의 이름부터 헷갈립니다. 많은 옛 저자가 이 싸움을 "아르벨라 전투"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은 아르벨라가 아니라 가우가멜라였습니다. 가우가멜라는 아르벨라에서 600스타디온쯤 떨어진 곳이었고, 아르벨라는 지금의 에르빌입니다.
땅은 온통 평평했습니다. 페르시아 쪽은 고르지 않은 땅을 미리 골라 전차가 잘 구르고 말이 잘 달리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다리우스가 고른 무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전차였습니다. 바퀴 축과 멍에에 낫 같은 칼날을 단 전차 200대입니다.
날짜를 알려 주는 것은 하늘입니다. 전투 열하루 전, 기원전 331년 9월 20일에 월식이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점성가들의 지침서에서 이런 월식은 왕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9월 20일에 11일을 더하면 10월 1일이 됩니다.
전날 밤 파르메니온을 비롯한 나이 든 장군들은 들판을 가득 채운 페르시아 진영의 불빛에 놀라 밤에 치자고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승리를 훔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답을 두고, 대낮에 완전히 져야 다리우스가 전쟁을 그만둘 것이라는 계산으로 읽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전투는 어떻게 흘러갔나
마케도니아 전열은 페르시아 전열보다 짧았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양쪽 날개를 뒤로 비스듬히 물려 두었습니다. 수가 많은 적이 옆으로 돌아 짧은 전열을 감싸지 못하게 하려는 배치였습니다. 그는 오른쪽 날개를 직접 맡았고, 다리우스는 가운데에서 그와 마주 섰습니다.
먼저 낫 달린 전차가 달려왔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미리 명령을 내려 두었습니다. 전차가 오면 팔랑크스 보병이 방패를 붙이고 창으로 방패를 두드려 말을 놀라게 하고, 그래도 오면 대열에 틈을 열어 지나가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말 때문에 많은 전차가 돌아서 자기 편 쪽으로 몰려갔고, 남은 전차는 병사들이 연 틈으로 흘러 지나갔습니다.
왼쪽에서는 위기가 왔습니다. 페르시아 오른쪽 날개의 마자이오스는 기병 3천을 마케도니아 전열 옆으로 돌려 보냈고, 이들은 마케도니아의 짐 진지까지 쳐들어갔습니다. 파르메니온이 맡은 왼쪽 날개는 밀렸고, 그는 진지와 짐을 잃게 생겼다며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는 오른쪽에서 동료 기병과 팔랑크스 일부로 쐐기 모양을 만들어, 페르시아 전열 가운데의 다리우스 쪽으로 곧장 돌격했습니다. 기병이 앞장서고 팔랑크스가 홍수처럼 뒤따랐습니다. 다리우스가 물러나자 페르시아군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왼쪽에서 버티던 파르메니온도 테살리아 기병을 이끌고 마침내 그쪽 페르시아군을 몰아냈습니다.
마케도니아 군대는 무엇이 달랐나
핵심은 팔랑크스(phalanx)라고 부르는 밀집 대형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처음 조직한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앞의 왕 필리포스 2세입니다. 그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 속 전사들이 방패를 겹쳐 붙어 싸우던 모습을 본떠 대형과 장비를 고안했습니다. Loeb 판 편집자 주석은 보병으로 팔랑크스를 만든 것과 사리사(sarissa)라는 긴 창을 준 것을 가장 중요한 군사 개혁으로 꼽습니다.
창은 얼마나 길었을까요? 폴리비오스는 옛 길이 단위인 큐빗으로, 처음 설계는 16큐빗이고 실제 쓰임에 맞춰 14큐빗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앞의 몇 줄이 창을 수평으로 들면 맨 앞 병사 앞으로 창끝이 다섯 개나 나왔습니다. 그 뒤의 줄은 창을 앞 사람 어깨 위로 비스듬히 세워, 머리 위로 날아오는 것을 막는 지붕처럼 썼습니다.
창끝이 겹겹이 나온 벽을 떠올리면 됩니다. 실제로는 벽처럼 서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뒷줄이 몸무게로 밀어 돌격의 힘을 보탰습니다.
제 모습을 지키는 동안 이 대형의 정면 돌격은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약점도 뚜렷했습니다. 도랑, 나무, 언덕, 물길이 없는 평평하고 트인 땅이 있어야 하고, 앞줄은 뒤로 돌아설 수 없었습니다.
이 설명은 가우가멜라보다 한참 뒤, 로마와 마케도니아가 싸우던 시대에 쓰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팔랑크스와 모든 점이 같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정면에는 강하지만 돌아서기 어렵다는 점은, 알렉산드로스가 양쪽 날개를 뒤로 물려 옆을 지킨 가우가멜라의 배치와 함께 읽어 볼 만합니다.
마케도니아 군대의 다른 반쪽은 기병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나갈 때 기병 부대를 보병 팔랑크스보다 앞에 세웠고, 오른쪽 날개의 동료 기병(Companion cavalry)을 직접 이끌었습니다. 왼쪽 날개에서 버틴 것은 테살리아 기병입니다.
가우가멜라에서 팔랑크스는 전차를 흘려보낸 뒤 기병을 뒤따라 밀고 나갔고, 기병은 다리우스가 있던 가운데로 파고들었습니다. 보병과 기병이 각자 다른 일을 맡아 한 전투 안에서 함께 움직였다는 점이 기록에서 드러나는 이 군대의 모습입니다.
기록마다 다른 숫자와 장면
가우가멜라를 자세히 적은 그리스·로마 저자들의 책은 전투 때 쓰인 것이 아닙니다. 그날의 일을 적은 동시대 기록은 바빌로니아의 천문 일지 하나뿐입니다. 기록에 남은 숫자도 크게 갈립니다. 페르시아 병력과 양쪽 전사자를 저자별로 놓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록 | 페르시아 병력 | 페르시아 쪽 전사자 | 마케도니아 쪽 전사자 |
|---|---|---|---|
| 아리아노스 | 기병 4만, 보병 100만, 낫 달린 전차 200대("전해진다") | 약 30만("전해진다") | 약 100명 |
| 디오도로스 | 보병 80만, 기병 20만 이상, 낫 달린 전차 200대 | 9만 이상 | 약 500명 |
| 플루타르코스 | 100만 명 | ||
| 쿠르티우스(Loeb 판 주석) | 기병 4만 5천, 보병 20만 | 4만 | |
| 유스티누스(Loeb 판 주석) | 50만 | ||
| 옥시링쿠스 파피루스 1798(Loeb 판 주석) | 5만 3천 | 보병 1천, 기병 200 |
디오도로스 Loeb 판의 편집자는 주석에서 쿠르티우스의 숫자가 "더 그럴듯하다"고 평했습니다. 아리아노스가 적은 마케도니아 쪽 병력은 기병 7천, 보병 약 4만입니다. 어느 쪽이든 마케도니아군이 적었다는 데는 기록이 같지만, 얼마나 차이가 났는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표의 숫자 하나하나가 그날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라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전투 뒤 들판에는 묻히지 못한 시신이 너무 많았습니다.
장면도 엇갈립니다. 아리아노스의 기록에서는 겁에 질린 다리우스가 먼저 돌아서 달아납니다. 디오도로스의 기록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던진 창이 다리우스 곁의 마부를 맞히자, 멀리 있던 병사들이 왕이 쓰러진 줄 알고 먼저 달아납니다. 다리우스를 "영리한 전략가"라고 부른 것도 디오도로스입니다.
동시대 기록도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에사길라 신전의 관리들이 하늘의 현상과 그때의 일을 날마다 적은 천문 일지입니다. 이 쐐기 문자 점토판은 지금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있습니다. 일지에는 "군대가 다리우스를 버리고 도시로 돌아갔다"는 줄이 있어 아리아노스의 서술과 엇갈립니다.
이 일지를 소개한 학술 서평의 필자 요나 렌데링은 전투 두 주 뒤에 쓰인 바빌로니아 기록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두 기록을 맞추려고 그 줄을 "다리우스가 군대를 버렸다"로 옮기는 풀이도 있지만, 그는 문법을 무시해서는 풀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같은 장면이 누가 언제 적었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집니다.
전투가 남긴 것
알렉산드로스는 전사자를 묻고 아르벨라로 들어갔다가 곧 바빌론으로 향했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은 그를 반겼고, 그는 30일 넘게 머물렀습니다. 그는 마르두크 신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고, 바빌론 사람들의 집을 약탈하지 않겠다고 알렸습니다.
다리우스는 먼 속주 쪽으로 물러나 메디아의 엑바타나에서 흩어진 병사를 다시 모으고 무장시켰습니다. 그러나 뒤에 박트라 쪽으로 물러나다 박트리아의 총독 베수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전투 소식을 듣고 많은 도시가 마케도니아의 힘이 커지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가우가멜라가 남긴 것을 한 문장으로 줄이기는 어렵습니다. 군사사의 눈으로 보면, 긴 창 보병과 기병이 한 전투 안에서 서로 다른 일을 맡은 군대가 기록상 훨씬 큰 군대를 이긴 사례입니다. 사료의 눈으로 보면, 뒤 시대의 이야기와 그날의 점토판이 서로 다른 장면을 전하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둘 다 이 전투를 읽는 데 필요한 눈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포에니 전쟁과 칸나에: 한니발의 포위와 로마의 회복. 이 글의 폴리비오스가 견준 로마 군대가 어떻게 싸웠는지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무기와 조직이 함께 바뀌며 전쟁의 모습을 바꾼 현대의 예들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긴 창에서 빛까지, 새 무기가 자리를 잡기까지 걸린 시간을 다른 시대에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