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11월 18일, 모스크바를 떠난 지 한 달쯤 된 나폴레옹은 마레(Maret)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레오뮈르 눈금으로 영하 16도, 섭씨로 영하 20도쯤 되는 추위에 말이 거의 다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죽은 말은 3만 마리 가까이였고, 끌 말이 없어 대포 300문 넘게와 수많은 수레를 불태워야 했습니다.
다섯 달 전 니멘(Niemen) 강을 건널 때만 해도 많은 사람은 짧고 빠른 원정을 내다봤습니다. 그런데 12월에 강을 다시 건넌 병력은 출발 때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흔히 "러시아의 겨울이 이겼다"고 줄여 말하지만, 기록을 펼치면 보급과 말, 병, 그리고 물러서지 않은 러시아가 한데 얽혀 있습니다. 날짜와 숫자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 차이를 함께 놓고 원정의 여섯 달을 따라갑니다.
왜 러시아였나
1812년 봄, 두 나라는 이미 서로를 몰아붙이고 있었습니다. 4월 8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파리 주재 대사 쿠라킨을 통해, 프로이센과 스웨덴령 포메른에서 프랑스군이 모두 물러나야 어떤 논의든 시작할 수 있다고 전하게 했습니다. 나폴레옹 재단(Fondation Napoléon)이 펴낸 서한집 12권의 연표를 보면, 4월 25일에는 프랑스가, 4월 30일에는 러시아가 차례로 최후통첩을 냈습니다.
준비는 그보다 훨씬 먼저 시작됐습니다. 1812년 1월 27일 나폴레옹은 동생 제롬에게, 군대를 모으고 훈련하고 장비를 다시 갖추는 데 1년이 걸렸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6월 1일 황후 마리 루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 전쟁이 석 달이면 끝난다고 내다봤습니다.
뒷날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이 전쟁을 바라지 않았고 나머지는 운명이 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서한집 12권의 서문을 쓴 역사학자 마리피에르 레이(Marie-Pierre Rey)는 이 말을 그대로 받지 않습니다. 1년 넘는 준비 끝에 군대를 니멘 강가에 세운 것은 운명이 아니라 황제의 뜻이었다는 것이 레이의 견해입니다.
스무 나라에서 모은 군대
1812년 6월 니멘 강가에 늘어선 병력은 약 44만 명이었습니다. 이 대육군(Grande Armée)은 12개 군단으로 짜였고, 그 가운데 적지 않은 부대가 프랑스 밖에서 왔습니다. 동맹국이 보낸 인원은 아래 도표와 같습니다. 바르샤바 공국이 5만 명으로 가장 많았고, 나폴리·오스트리아·바이에른이 3만 명씩, 바덴이 8천 명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스위스 병사도 수천 명 있었습니다. 레이는 스무 나라 사람이 한 군대에 모였다고 적고, 이 다국적 군대가 원정 내내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고 봅니다. 조약에 적힌 수와 실제로 보낸 수가 다른 곳도 있습니다. 1812년 초 조약에서 프로이센은 2만 명과 말 1만 5천 마리를 내기로 했는데, 레이가 적은 프로이센 부대는 2만 9천 명입니다.
옷은 어땠을까요? 7월 13일 빌뉴스에서 나폴레옹은 구두 5만 켤레와 외투·웃옷·윗도리 6천 벌씩, 바지 6천 벌을 주문했습니다. 레이는 이 목록 어디에도 러시아의 겨울을 견딜 따뜻한 옷이 없다는 점을 짚습니다.
6월부터 12월까지 한 장의 연표
원정의 첫날부터 자료마다 다릅니다. 나폴레옹 재단의 주제 모음은 니멘 도하를 6월 22일로, 맥길 대학 도서관 연표는 6월 23일로, 재단의 서한집 연표는 6월 24일부터 7월 1일까지로 적습니다. 대군이 며칠에 걸쳐 강을 건넜으니 어느 날을 "건넌 날"로 잡느냐가 다를 수 있습니다.
러시아 쪽 기록은 날짜를 두 개씩 적습니다. 러시아 대통령 도서관(Президентская библиотека)의 보로디노 전시는 니멘 도하를 "6월 12일(24일)", 보로디노를 "8월 26일(9월 7일)"로 씁니다. 괄호 안 날짜가 프랑스 쪽 자료의 날짜와 같습니다.
굵직한 날짜만 추리면 이렇습니다.
- 6월 28일: 나폴레옹이 빌뉴스에 들어갑니다.
- 8월 16~18일: 스몰렌스크 둘레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이깁니다.
- 8월 29일(러시아 달력 17일): 새 총사령관 쿠투조프가 군에 닿습니다.
- 9월 7일: 보로디노 전투. 9월 14일 모스크바 입성, 다음 날부터 화재.
- 10월 19일: 모스크바를 떠납니다(재단의 주제 모음은 18일).
- 10월 24일: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재단 연표에서는 다음 날이 퇴각의 시작입니다.
- 11월 27~28일: 베레지나 강을 건넙니다.
- 12월 5일: 나폴레옹이 군을 떠납니다. 12월 12~14일 남은 부대가 니멘 강을 다시 건너고, 나폴레옹은 12월 18일 파리에 닿습니다.
그 사이 10월 23일 파리에서는 말레 장군이 쿠데타를 꾀했고, 나폴레옹은 11월 6일에야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끝나는 날도 하나가 아닙니다. 평화 조약 없이 끝난 원정이라, 맥길 연표는 외젠이 엘베강 뒤로 물러난 1813년 3월 6일을 끝으로 잡습니다.
화덕, 밀가루, 말먹이
나폴레옹은 3월 26일 베르티에에게, 니멘 강까지는 둘레 땅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쌓아 둔 보급품은 강을 건넌 뒤에야 쓰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원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어긋남이 쌓였습니다.
6월 초에는 단치히에서 밀가루 대신 곡물 1만 캥탈(quintal)이 보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고 보내야 할 것은 밀가루였다고 화를 냈습니다. 7월 2일에는 빵을 구울 화덕을 아직 짓지 못했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벽돌을 나를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레이에 따르면 식량과 말먹이가 모자라자 먹을 것을 찾아 나선 병사들이 부대에서 점점 멀리 떨어졌고, 많은 수가 매복과 코사크 기병의 공격에 쓰러졌습니다. 9월 3일 나폴레옹은 날마다 수백 명이 포로로 잡힌다고 베르티에에게 썼습니다. 보로디노 전투가 나흘 앞이었습니다.
보로디노와 불타는 모스크바
러시아군은 6월부터 계속 물러났습니다. 러시아 대통령 도서관 전시에 따르면 길어진 후퇴에 사회의 불만이 커졌고, 군과 백성이 쿠투조프를 총사령관으로 원하자 알렉산드르 1세가 그를 임명했습니다. 쿠투조프가 자리를 잡은 곳은 모스크바에서 120 km 떨어진 보로디노 마을 둘레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싸움을 모스크바 강 전투라고 부릅니다.
양쪽 병력부터 자료마다 다릅니다. 나폴레옹 재단 연표는 프랑스군 12만 4천 명과 러시아군 10만 4천 명이 맞섰다고 적습니다. 러시아 대통령 도서관은 나폴레옹 쪽을 13만 5천 명과 대포 587문, 쿠투조프 쪽을 12만 명과 대포 약 640문으로 셉니다.
결과를 적는 말도 다릅니다. 재단 연표에서는 하루의 격전 끝에 러시아군이 물러나 땅을 프랑스군에 남깁니다. 대통령 도서관 전시는 러시아군이 전선 전체에서 흩어지지 않았고, 쿠투조프가 밤에 모자이스크 쪽으로 물러나게 했으며 그 후퇴가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고 씁니다. 같은 하루를 한쪽은 물러난 날로, 다른 쪽은 버틴 날로 기록하는 셈입니다.
손실은 더 크게 갈립니다. 9월 9일 나폴레옹의 편지에 적힌 숫자는 프랑스군 2천 명, 러시아군 1만 2천 명입니다. 레이가 전하는 오늘날 추정은 대육군 2만 5천~2만 8천 명, 러시아군 약 4만 5천 명입니다. 러시아 대통령 도서관은 여러 추정을 들어 러시아군 손실을 전사·부상·실종 합쳐 4만 6천 명까지, 프랑스군은 전사 3만~4만 명으로 적고, 러시아 장군 4명이 죽고 23명이 다쳤다고 덧붙입니다.
9월 14일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날부터 불이 나서, 서한집 연표에 따르면 건물 약 9,500채 가운데 7,000채가 부서지고 피해는 350만 루블에 이르렀습니다. 레이의 해석으로는 로스톱친의 뜻으로 이루어진 이 파괴가 원정의 전환점이었고, 러시아 사람들을 차르 둘레로 더 굳게 묶었습니다.
전쟁의 성격도 달라졌습니다. 레이의 표현을 빌리면, 두 군대의 싸움이 온 백성이 침입자에 맞서 일어선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러시아 참모부는 대육군 병사들에게 탈영을 권하는 독일어 전단을 뿌렸습니다. 나폴레옹이 한때 떠올린 농노 반란을 부추기는 생각은 거센 민중의 애국심 앞에서 곧 접혔습니다.
퇴각과 베레지나
평화 제안은 오지 않았고, 대육군은 10월 19일 모스크바를 떠났습니다. 10월 24일 말로야로슬라베츠에서 다부가 외젠의 부대를 구해 냈지만, 다음 날부터 군은 왔던 길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레이는 10월 중순 러시아의 저항이 대육군을 아무도 퇴각이라고 부르지 못한 퇴각으로 몰았다고 표현합니다.
의미 있는 첫눈은 서한집 연표로 11월 3일, 맥길 연표로 11월 4일에 내렸습니다. 11월 18일의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말과 대포를 잃은 것만 적지 않았습니다. 편지에는 러시아군이 얼음 위에서 움직인 경험이 있고, 썰매 날과 그에 맞춰 꾸린 장비로 대포를 얼음이 없는 듯 옮긴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작은 골짜기 하나를 넘기려다 말 12~15마리와 12~15시간을 잃는 대육군과 견준 말입니다.
11월 25일 군은 보리소프의 베레지나 강가에 닿았습니다. 러시아군이 하나뿐인 다리를 부순 뒤였습니다. 에블레 장군이 이끈 가교병들이 다리 두 개를 놓았고, 11월 27일과 28일 군의 대부분이 건넜습니다. 서한집 연표에 적힌 도하 병력은 5만 명입니다.
이튿날 군은 다리를 부수기로 했고, 남자와 여자, 아이 약 1만 명이 동쪽 기슭에 남겨졌습니다. 나폴레옹 재단의 그림 해설은 전투원 2만 5천 명과 비전투원 3만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 뒤 "베레지나"가 프랑스어에서 참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같은 해설은 군이 몰살될 뻔한 자리를 빠져나왔다는 점에서 전술로는 나폴레옹의 승리였다고도 평가합니다. 한 사건에 두 평가가 함께 붙어 있습니다.
베레지나 뒤 편지들은 더 다급해집니다. 11월 30일 나폴레옹은 피로와 굶주림, 추위로 무리에서 떨어져 떠도는 병사를 4만 명으로 어림하고, 빌뉴스에 빵 10만 인분을 마련하라고 했습니다. 12월 4일 편지에서는 군이 지쳐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파리를 지키라 해도 못 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그는 군을 떠났습니다.
나폴레옹은 뒷날 이 패배를 러시아인의 노력이 아니라 사고 탓으로 돌렸습니다. 외국 무리가 불태운 수도, 놀랄 만큼 갑자기 닥친 혹독한 겨울 같은 것들입니다. 그의 편지를 엮은 서한집 12권에는 원정 해의 편지 2,551통이 실려 있고, 위에서 본 화덕과 말과 낙오병 이야기가 그 편지에서 나왔습니다.
빌뉴스의 무덤이 말하는 병
리투아니아 빌뉴스에는 퇴각하던 병사들이 묻힌 큰 무덤이 있습니다. 2002년 이곳에서 발굴한 주검은 3,000구가 넘습니다. 파스퇴르 연구소(Institut Pasteur) 연구진은 그 가운데 병사 13명의 치아에서 옛 DNA를 뽑아 어떤 병균이 있었는지 살폈습니다.
13명 가운데 4명에게서 파라티푸스를 일으키는 살모넬라균(Salmonella enterica Paratyphi C)이, 2명에게서 재귀열균(Borrelia recurrentis)이 나왔습니다. 재귀열은 몸니가 옮기고, 열이 났다 가라앉기를 되풀이하는 병입니다. 앞선 연구에서는 발진티푸스균과 참호열균이 확인됐습니다. 새 연구는 2025년 10월 24일 학술지 Current Biology에 실렸습니다.
이 결과로 "병이 원정을 무너뜨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연구진은 표본이 적어 이 병들이 높은 사망률에 얼마나 몫을 했는지 정할 수 없다고 밝힙니다. 표본 13명은 3,000구가 넘는 무덤에서 나왔고, 그 무덤 또한 원정에 나선 수십만 명 가운데 일부입니다. 연구진은 이 결과를, 병이 지침과 극한의 추위 같은 다른 요인과 함께 대육군의 무너짐에 몫을 했다는 생각을 받치는 새 증거로 내놓았습니다.
몇 명이 떠나고 몇 명이 돌아왔나
원정 전체의 숫자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레이는 6월 니멘 강가에 늘어선 병력을 약 44만 명, 반년이 안 되어 니멘을 건너 돌아간 병력을 6만 명으로 적습니다. 파스퇴르 연구소 보도자료는 원정에 동원된 병사를 50만~60만 명, 퇴각 중에 죽은 사람을 약 30만 명으로 적습니다.
이 숫자들은 서로 맞지 않는다기보다 세는 대상이 다릅니다. 강가에 늘어선 병력, 원정 동안 동원된 모든 병사, 퇴각 중의 사망자, 강을 건너 돌아온 병력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숫자를 볼 때는 그 숫자가 무엇을 세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전체에서 1812년이 차지하는 무게도 숫자로 볼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재단의 인명 피해 글을 보면, 프랑스가 15년 동안 잃은 사람 가운데 50% 가까이가 1812~1814년 세 해에 나왔습니다.
1812년이 남긴 것
원정의 끝은 동맹의 끝으로 이어졌습니다. 12월 30일 프로이센의 요르크 장군이 타우로겐 협정에 서명했고, 이 협정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동맹이 끝났습니다. 나폴레옹은 12월 파리에 돌아오자 뮈라에게 베를린과 오데르강에 이미 4만 명이 있다고 썼고, 1813년도 전쟁으로 시작됐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원정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레이의 견해입니다. 알렉산드르 1세는 1814년 3월 동맹군을 이끌고 파리에 들어갔습니다. 레이는 커진 러시아의 영향력이 빈 회의를 이끌었고, 그 회의가 그은 유럽의 경계가 100년을 갔다고 적습니다.
이름에도 흔적이 남았습니다. 러시아는 이 전쟁을 "조국 전쟁(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이라 부르고, 러시아 대통령 도서관 전시에서도 니멘 도하가 그 시작입니다. 프랑스어에서는 "베레지나"가 참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한 원정이 두 나라의 말에 서로 다른 낱말을 남겼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나폴레옹 전쟁 한눈에: 군단 체제와 징병 — 이 원정에 나선 군단과 징병 제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봅니다.
-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의 마지막 하루 — 1812년 뒤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를 따라갑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 군대를 먹이고 움직이는 일이 오늘 어떻게 짜여 있는지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 새 기술이 전쟁을 바꾼 20세기 이후의 순간들을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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