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6월 18일 일요일 아침, 벨기에 브뤼셀에서 멀지 않은 들판은 밤새 내린 거센 비로 질척했습니다. 낮은 능선 두 줄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의 프랑스군이, 다른 쪽에는 웰링턴(Wellington) 공작의 연합군이 섰습니다. 이 하루의 싸움이 23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끝냈습니다.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는 그만큼 유명하지만, 그날을 적은 기록은 생각보다 자주 어긋납니다. 프랑스군은 몇 명이었을까요? 첫 포성은 몇 시에 울렸고, 몇 명이 쓰러졌을까요? 영국과 독일의 국립 박물관, 프랑스의 나폴레옹 재단이 내놓는 답이 조금씩 다릅니다.
엘바 섬 탈출에서 세인트헬레나 유배까지 넉 달을 연표로 따라가고, 그날 병사들이 든 머스킷과 소총이 어떤 무기였는지 살펴봅니다. 서로 다른 숫자는 어디서 나왔는지와 함께 나란히 놓습니다.
엘바에서 벨기에까지: 백일 천하
1814년 5월부터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엘바 섬에 유배돼 있었습니다. 1815년 2월 26일 그는 약 1,000명과 함께 쌍돛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왔고, 3월 1일 프랑스 남부에 내렸습니다. 열한 달 만의 귀환이었습니다.
파리로 가는 길, 그르노블에서는 그를 잡으러 온 연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립무기고(Royal Armouries)의 연표 속 나폴레옹은 혼자 그들 앞으로 걸어가 "여기 있다. 원한다면 너희 황제를 죽여라!"라고 외쳤고, 병사들은 그의 편에 섰습니다.
3월 20일 그는 파리에 들어갔습니다. 백일 천하(Hundred Days)라 불리는 두 번째 통치의 시작입니다. 그로부터 석 달 남짓 뒤 워털루의 하루가 옵니다.
이 귀환을 맞는 마음은 나라마다 달랐습니다. 독일 역사박물관(DHM)은 그 소식이 수백만 프랑스인에게는 기쁨과 더 나은 앞날에 대한 희망이었지만, 특히 독일에서는 다시 프랑스의 지배와 전제 아래 놓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키웠다고 설명합니다.
유럽의 강국들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3월 13일 빈 회의에 모인 연합국은 나폴레옹을 법 밖의 사람으로 선언하고 제7차 대동맹을 꾸렸습니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함께했고, 3월 17일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은 저마다 15만 명을 동원하기로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군대가 다 모이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북쪽 네덜란드 땅에는 블뤼허(Blücher) 원수의 프로이센군과 웰링턴의 영국·연합군이 모이고 있었고, 둘을 합치면 프랑스군보다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빨리 공격해 두 군대를 떼어 놓고 하나씩 이기려 했습니다. 빠른 승리로 대동맹을 갈라놓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6월 16일, 리니와 카트르브라
6월 15일 나폴레옹은 상브르(Sambre) 강을 건너 지금의 벨기에로 들어갔습니다. 두 적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튿날 두 곳에서 동시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리니(Ligny)에서는 프랑스 주력이 프로이센군을 이겨 물러나게 했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M)에 따르면 프로이센군은 2만 명 넘게 잃었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그 절반이었습니다. 같은 날 웰링턴은 교차로 마을 카트르브라(Quatre Bras)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아 냈습니다.
카트르브라에서는 어느 쪽도 밀려나지 않았습니다. 왕립무기고는 이 결과를 웰링턴에게는 전술적 승리, 나폴레옹에게는 연합군이 블뤼허를 돕지 못하게 막은 전략적 승리로 봅니다. 그래도 프로이센군이 물러난 이상, 웰링턴도 옆구리를 내준 채 홀로 남지 않으려면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날 프랑스군에는 묘한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데를롱(d'Erlon)의 제1군단이 리니와 카트르브라 사이를 오가다 어느 쪽 싸움에도 끼지 못한 것입니다. NAM은 서툰 참모 업무를 그 까닭으로 들며, 그 군단이 제때 싸웠다면 프로이센의 패배가 더 컸을 수 있다고 봅니다.
6월 17일 웰링턴은 워털루 마을 쪽으로 물러났고, 나폴레옹은 그루시(Grouchy) 원수에게 군대를 떼어 주어 프로이센군을 쫓게 했습니다. 그 군대의 크기는 자료마다, 심지어 같은 박물관의 글 안에서도 3만, 3만 3,000, 4만으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진 프로이센군은 생각보다 멀쩡했습니다. 4만 8,000명의 프로이센군은 경험 많은 직업 군대였고, 참모본부가 리니의 패배 뒤 48시간 안에 군대를 다시 짜 워털루로 옮겼습니다. 왕립무기고는 프로이센군을 사실상 없앴다고 여긴 것을 나폴레옹의 큰 실수로 꼽습니다. 블뤼허의 지원 약속을 받은 웰링턴은 프로이센군이 올 때까지 버티며 싸우기로 했습니다.
비 온 밤과 몽생장 능선
6월 17일 밤에는 거센 비가 내렸습니다. 이 비가 이튿날을 얼마나 바꿨는지는 자료마다 무게가 다릅니다.
왕립무기고의 요약은 나폴레옹이 땅이 마르도록 공격을 한낮까지 미뤘다고 적습니다. 나폴레옹 재단(Fondation Napoléon)의 역사가 티에리 랑츠(Thierry Lentz)는 대포를 자리에 놓고 제대로 쓸 수 있을 만큼 땅이 마르기를 오전 11시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봅니다. 나폴레옹 재단은 나폴레옹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재단입니다.
왕립무기고의 시각표에는 다른 사정도 보입니다. 새벽 4시 45분 폭풍이 그치자 나폴레옹은 6시에 공격하겠다고 했지만, 군대 대부분이 아직 자리를 잡는 중이라 9시로, 다시 11시로 미뤘습니다.
젖은 땅과 늦어진 전개가 함께 시간을 잡아먹은 셈입니다. NAM은 이 늦어짐이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에게 싸움에 낄 시간을 주었다고 설명합니다.
웰링턴은 몽생장(Mont-Saint-Jean) 능선을 따라 군대를 펼쳤습니다. 반도 전쟁에서 다듬은 방식대로 대부분을 능선 뒤에 두어 적의 눈과 포격을 피하게 했습니다. 나머지는 능선 앞의 거점 세 곳을 지켰습니다.
서쪽의 우구몽(Hougoumont) 성관은 영국 근위병과 독일 경보병이, 가운데의 라에생트(La Haye Sainte) 농장은 독일군과 영국 소총병이 맡았습니다. 동쪽 끝 파플로트(Papelotte) 마을에는 독일 나사우 공국의 군대가 들어갔습니다. 웰링턴의 군대에는 영국군 말고도 네덜란드,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 나사우의 병사가 섞여 있었습니다.
경험 없는 병사와 반도 전쟁(1808~14) 고참이 뒤섞인 군대였기에, NAM은 웰링턴이 먼저 공격에 나설 형편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맞은편 남쪽 능선에서는 라벨알리앙스(La Belle Alliance) 여관 둘레에 프랑스군이 섰고, 나폴레옹은 그 여관을 앞쪽 지휘소로 썼습니다.
6월 18일, 하루의 흐름
나폴레옹의 계획을 두고도 설명이 둘입니다. NAM은 먼저 우구몽을 쳐서 웰링턴이 그쪽으로 지원군을 보내게 한 뒤 본대를 치는 계획으로 봅니다. 랑츠는 가장 강한 오른쪽을 묶어 두고 가장 약한 왼쪽을 돌아, 웰링턴을 북서쪽으로 밀어내 프로이센군과 떼어 놓으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첫 포성의 시각도 다릅니다. 왕립무기고 시각표에서는 11시 20분 프랑스 대포대(Grande Batterie)가 불을 뿜고 레유(Reille)의 제2군단이 우구몽을 칩니다. NAM에서는 큰 포격 뒤 11시 30분에 우구몽 공격이 시작되고, 그 포격은 웰링턴의 배치와 젖은 땅 때문에 효과가 일부 줄었습니다.
우구몽은 하루 내내 싸움터였습니다. 프랑스군은 성관 앞 숲을 걷어 냈지만 숲을 나서는 순간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보급을 위해 열어 둔 북문으로 작은 무리가 뛰어들었으나, 맥도넬(MacDonnell) 중령과 그레이엄(Graham) 상병이 문을 다시 막았습니다. 성관은 끝까지 영국 쪽 손에 남았습니다.
오후 1시쯤 데를롱의 제1군단이 연합군 가운데를 크게 밀고 들어왔습니다. 네덜란드·벨기에군을 밀어냈지만 능선 꼭대기에서 영국 보병에 막혔고, 곧 영국 중기병의 반격을 받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연합군 장군 픽턴(Picton)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워털루에서 쓰러진 가장 높은 장교였습니다.
영국 중기병은 프랑스 보병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제45·제105연대의 독수리 군기(eagle) 둘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달려 나갔다가 프랑스 기병의 반격에 크게 당했습니다. NAM이 가진 독수리 군기는 나폴레옹이 유배 동안 사라진 것을 대신해 1815년에 군에 새로 나눠 준 100개 가까운 군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후 2시 30분쯤 첫 프로이센군이 동쪽에서 전장에 닿았습니다. 오후 중반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오른쪽에 따로 방어선을 세워야 했습니다.
오후 4시, 네(Ney) 원수는 연합군이 물러난다고 잘못 보고 라에생트와 우구몽 사이로 대규모 기병 돌격을 명령했습니다. 웰링턴의 보병은 이름 그대로 네모꼴로 선 대형, 방진(square)을 짰습니다. 질척한 땅이 프랑스 기병의 발을 붙잡았고, 영국 방진은 포격에 사상자를 내면서도 오후 내내 되풀이된 돌격을 버텼습니다.
랑츠는 이 돌격을 조금 다르게 그립니다. 오해가 눈사태처럼 겹쳐 프랑스 기병 전체가 뛰어들었고, 나폴레옹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효과 없는 돌격은 방진에 부딪혀 꺾였습니다.
그 사이 동쪽에서는 뷜로(Bülow)의 프로이센 제4군단이 프랑스군 뒤쪽의 플랑스누아(Plancenoit) 마을을 쳤습니다. 마을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치열하게 다퉈졌고, 밤 9시가 돼서야 프로이센군이 차지했습니다.
오후 6시쯤 프랑스군이 마침내 라에생트를 빼앗았습니다. 지친 왕의 독일 군단(King's German Legion)이 바링(Baring) 소령 아래 지키던 곳이었습니다. 웰링턴의 가운데가 크게 약해져 네는 지원군을 청했지만, 나폴레옹은 먼저 플랑스누아를 되찾는 데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 틈에 웰링턴은 자리를 다시 다졌습니다.
오후 7시쯤 나폴레옹은 마지막 패인 근위대(Imperial Guard)를 내보냈습니다. 이때 투입된 근위대 예비는 약 3,500명이었고, 전장의 프로이센군은 약 5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근위대는 우구몽과 라에생트 사이 능선을 올랐지만 그곳은 웰링턴이 가장 강한 곳이었고, 영국 근위병과 경보병의 사격 앞에서 멈칫하다 무너졌습니다.
지텐(Ziethen)의 프로이센 제1군단이 연합군 왼쪽과 이어지자 프랑스군 전체가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퇴각은 프로이센 기병에 쫓기며 밤새 이어졌습니다. 밤 10시쯤 웰링턴과 블뤼허는 라벨알리앙스 여관이나 그 근처에서 만나 서로를 축하했습니다. 한 시간쯤 뒤 그루시는 와브르(Wavre)에서 틸만(Thielmann)의 프로이센군을 이겼지만, 워털루의 패배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머스킷, 소총, 대포, 칼: 그날의 무기
왕립무기고는 워털루를 부싯돌 머스킷(flintlock musket)과 소총을 든 보병, 칼·권총·창을 든 기병, 앞에서 장전하는 대포가 함께 나선 유럽의 마지막 대규모 정면 전투로 봅니다. 그날 병사들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었는지 하나씩 보겠습니다.
영국 전열 보병의 기본 총은 India Pattern 머스킷이었습니다. 이 무렵 머스킷은 흔히 '브라운 베스(Brown Bess)'라 불렸는데, 노동 계급 여성을 부르던 별명에서 온 이름이라는 것이 왕립무기고의 연구입니다. 병사와 총이 서로 기대어 사는 사이라는 뜻이 담겼다고 봅니다. 1795~1815년에 이 머스킷과 앞선 형이 300만 자루 가까이 만들어졌습니다.
머스킷이 실제로 쓰인 거리는 생각보다 짧았습니다. 시험에서 가장 정확한 거리는 약 50 yd(약 46 m)였습니다. 1750~1830년의 전투 19건을 분석하면 보병이 맞서 쏜 평균 거리는 64 yd(약 59 m), 앞으로 나아가며 쏠 때는 30 yd(약 27 m)였습니다. 영국 보병은 전투에서 1분에 세 발을 쏘도록 기대됐습니다.
일부 병사는 베이커 소총(Baker rifle)을 들었습니다. 총열 안에 홈을 판 이 소총은 전열 보병의 머스킷보다 훨씬 정확하고 멀리 쏘았으며, 더 짧고 가벼웠습니다. 적어도 200 yd(약 183 m)까지는 과녁을 정확히 맞혔습니다.
대신 느렸습니다. 머스킷이 1분에 3~4발을 쏠 때 베이커 소총은 약 2발이었습니다. 탄이 총열의 홈에 꽉 맞아야 해서 밀어 넣기 힘들었고, 흑색 화약 찌꺼기가 그 일을 더 어렵게 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만들어진 베이커 소총은 1만 4,000자루가 넘었습니다.
대포는 모두 포구로 화약과 탄을 넣는 앞장전식이었습니다. NAM의 숫자로 나폴레옹은 워털루에 대포 246문을, 웰링턴의 연합군은 156문을 두었습니다.
기병의 칼에도 그날의 사정이 남아 있습니다. 영국군은 워털루에서 처음으로 갑옷을 입은 프랑스 흉갑 기병(cuirassier)과 맞섰습니다. 1796년형 영국 중기병 칼은 끝이 손도끼처럼 생겨 찌르기가 거의 불가능했는데, 전투를 앞둔 며칠 동안 그 끝을 창끝 모양으로 간 칼이 있었습니다. 찌를 수 있게 되자 갑옷 입은 상대 앞에서 쓸모가 커졌습니다.
그날 빼앗은 두 독수리 군기도 모두 1796년형 중기병 칼을 든 병사들이 얻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총의 운명도 바뀌었습니다. 워털루 뒤 영국 정부는 머스킷 계약을 모두 취소했고, 영국 곳곳의 무기고에 쌓인 70만 자루가 넘는 머스킷은 그 뒤 수십 년에 걸쳐 처분됐습니다.
몇 명이 싸우고 몇 명이 쓰러졌나
병력부터 자료마다 다릅니다. NAM은 프랑스군 7만 2,000명과 대포 246문, 영국·연합군 6만 8,000명과 대포 156문으로 적습니다. 독일 역사박물관은 프랑스군을 약 7만 명, 연합군을 그와 거의 같은 수로 보고, 랑츠는 약 6만 5,000명의 프랑스군이 상대와 거의 같은 힘이었다고 씁니다.
프로이센군의 숫자는 무엇을 세느냐에 따라 바뀝니다. NAM의 4만 8,000명은 프로이센군 전체입니다. 왕립무기고의 약 5만 명은 저녁 7시 30분쯤 싸움에 들어와 있던 수이고, 독일 역사박물관의 약 4만 5,000명은 프랑스군 옆구리를 친 병력입니다.
사상자는 더 크게 갈립니다. NAM은 나폴레옹이 죽거나 다치거나 잡힌 사람으로 4만 명 가까이를 잃었고, 연합군 사상자는 2만 2,000명이라고 적습니다. 랑츠는 밤 10시에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죽은 사람이 1만 800명, 그 가운데 프랑스 병사가 6,800명이었다고 씁니다. 다친 사람은 약 3만 5,000명이었고 그 3분의 2가 프랑스군이었습니다.
두 셈은 기준이 다릅니다. NAM의 프랑스군 숫자에는 포로가 들어 있고, 랑츠의 숫자는 모든 군의 죽은 사람과 다친 사람입니다. 랑츠의 두 숫자를 더하면 4만 5천 명이 넘는데, 여기에는 포로가 빠져 있습니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일 역사박물관은 이튿날 아침의 전장을 수천의 주검이 늘어선 끔찍한 풍경으로 그립니다. 다친 병사들은 넋을 놓고 앉아 있었고, 흩어진 병사가 가장 바란 것은 물 한 모금이었습니다. 웰링턴도 옛 친구와 전우, 병사들을 잃어 가슴이 찢어진다며 "진 싸움을 빼면, 이긴 싸움의 절반만큼 서글픈 것도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왜 졌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집니다. 랑츠는 나폴레옹이 병을 앓아 판단이 흐려졌고, 웰링턴의 잘 짜인 방어와 프랑스 포병의 비효율, 군단장들의 실수가 겹쳤다고 봅니다. 전투가 끝나자 곧바로 종이 위의 싸움이 시작됐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네가 기병을 희생시켰는지, 그루시가 블뤼허보다 먼저 왔어야 했는지, 참모장 술트(Soult)가 제 몫을 했는지가 그 싸움의 주제입니다.
워털루가 남긴 것
나폴레옹은 6월 22일 두 번째로 퇴위했습니다. 7월 7일 연합군이 파리에 들어갔고, 그는 영국에 항복해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St Helena) 섬으로 보내졌습니다. 1821년 그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NAM은 워털루가 프랑스 혁명 뒤 유럽을 흔든 전쟁들을 끝냈고, 루이 14세 때든 나폴레옹 때든 대륙을 지배하려던 프랑스의 시도도 끝냈다고 봅니다. 그 뒤 유럽에는 크림 전쟁(1854~56)이라는 짧은 끊김을 빼면 1914년까지 전반적인 평화가 이어졌습니다. 오랜 적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가까워져 크림에서 함께 싸웠습니다.
영국군은 이 전투로 처음 '전역 메달(campaign medal)'을 주었습니다. 워털루 메달은 계급과 역할에 상관없이, 워털루와 그 앞 이틀의 싸움에 있었던 모든 병사에게 돌아갔습니다. 장군과 졸병이 같은 메달을 받은 셈입니다.
전장은 곧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됐습니다. 전투 며칠 뒤 기념품 수집가와 첫 관광객이 왔고, 전장 답사는 원정 직후 시작돼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1820년 네덜란드 왕 빌럼 1세는 아들 오라녀 공(Prince of Orange)이 다쳤다고 여긴 자리에 사자 언덕(Lion's Mound)을 쌓았습니다.
이름도 남았습니다. 영어에서는 승승장구하다 끝내 무너진 사람을 두고 "자기의 워털루를 만났다(met their Waterloo)"고 말합니다.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곡인 ABBA의 「Waterloo」도 이 표현에서 나왔습니다. 많이 기록되고 많이 이야기되면서, 워털루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몰락을 뜻하는 신화 같은 상징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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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전쟁 한눈에: 군단 체제와 징병: 워털루에 이르기까지 23년의 큰 흐름과 그 군대가 어떻게 짜였는지 봅니다.
- 1812년 러시아 원정: 대육군은 왜 돌아오지 못했나: 워털루 세 해 전의 원정을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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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약 무기에서 한참 지나, 빛을 쓰는 무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공식 기록으로 따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