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0일 0시, 모스크바 시각으로 자정이 되자 남캅카스 산악 지대에 휴전이 시작됐습니다.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아르메니아 총리, 러시아 대통령의 이름으로 나온 아홉 조항 성명의 첫 조항이었습니다. 9월 27일에 시작된 싸움은 44일 만에 멈췄고, 아제르바이잔은 1994년부터 26년 동안 잃고 있던 땅의 상당 부분을 되찾았습니다.

이 전쟁은 군사 분야 밖에서도 "드론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이야기됐습니다. 그렇다면 싸움은 왜 2020년에 다시 터졌고, 어떻게 흘러갔으며, 드론은 왜 그토록 주목받았을까요? 미 의회조사국(CRS) 보고서와 휴전 성명 원문, 두 나라 정부의 기록, 연구소 분석을 바탕으로 따라갑니다. 지명은 두 나라 말이 다른 곳이 많아 처음 나올 때 두 이름을 함께 적습니다.

산악 지역 하나를 둘러싼 오랜 분쟁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는 '산악 카라바흐'라는 뜻이고, 아르메니아어로는 아르차흐(Artsakh)라고 부릅니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남캅카스의 산지입니다.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은 오래 섞여 살았지만 종교가 다릅니다. 아제르바이잔인은 대부분 무슬림이고 아르메니아인은 대부분 기독교도입니다.

이 땅의 정치와 인구의 역사는 두 나라 사이에서 격렬하게 다투어집니다. 오늘의 경계가 생긴 것은 소련 시기입니다. 1921년 이 지역은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에 배정됐고, 1923년 정식으로 세워지고 경계가 정해졌습니다. 소련이 끝날 때까지 이곳은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안의 자치주(oblast)였습니다.

1989년 인구조사에서 이 지역 인구는 18만 9,000명이었고, 아르메니아인이 77%, 아제르바이잔인이 22%였습니다. 분쟁은 1988년에 시작됐습니다.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관할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로 옮기려 했지만 소련 당국은 경계를 다시 긋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동원과 폭력 충돌이 이어졌고, 1991년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은 독립을 선언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은 이 지역의 자치 지위를 없앴습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자 두 나라 군대가 직접 싸웠습니다. 1994년 5월 휴전이 맺어졌을 때 아르메니아·나고르노카라바흐 군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대부분과 그 주변 여러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합치면 아제르바이잔 국토의 약 14%였습니다. CRS가 옮긴 관찰자들의 추정으로는 약 2만 명이 숨지고 100만 명 넘게 집을 떠났습니다.

떠난 사람은 어느 한쪽만이 아니었습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그 주변의 아제르바이잔인 약 50만 명, 아르메니아에 살던 아제르바이잔인 약 18만 5,000명, 아제르바이잔에 살던 아르메니아인 35만 명 넘게가 고향을 잃었습니다. 199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 분쟁에 관한 결의 네 건을 채택해 아제르바이잔의 주권과 영토 보전, 무력으로 영토를 얻을 수 없다는 원칙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1994년 휴전 뒤 26년

휴전 뒤의 협상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민스크 그룹(Minsk Group)이 맡았습니다. 1992년 OSCE 참가국들은 민스크에서 회의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 회의는 끝내 열리지 않았지만 이름과 협상의 틀을 남겼습니다.

민스크 그룹이 만들어진 해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OSCE 자료에는 1992년, CRS 보고서에는 1994년으로 나옵니다. 1997년부터는 프랑스, 러시아, 미국이 공동의장을 맡았습니다.

2007년부터 공동의장국들은 여섯 가지 '기본 원칙(마드리드 원칙)'을 협상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첫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변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 돌려주는 것, 둘째는 안보와 자치를 보장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임시 지위, 셋째는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잇는 회랑입니다. 넷째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주민의 의사 표현으로 최종 지위를 정하는 것, 다섯째는 피란민의 귀향, 여섯째는 평화유지 활동을 포함한 국제 안전 보장입니다. 두 나라는 이 원칙을 놓고 협상했지만 거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입장 차이는 컸습니다. 아르메니아·나고르노카라바흐 지도자들은 주변 지역을 완충지대이자 최종 지위 협상의 카드로 보았습니다. 아제르바이잔 지도자들은 주권과 영토 보전, 아제르바이잔인이 집으로 돌아갈 권리를 고집했습니다.

전선이 조용했던 것도 아닙니다. 1994년부터 2016년까지 150마일이 넘는 접촉선과 국경에서 해마다 양쪽 군인과 민간인 수십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16년 4월에는 사흘 동안 큰 충돌이 벌어져 보고된 사상자가 최소 200명이었습니다.

2018년 아르메니아의 정권 교체는 분쟁을 풀려는 새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2020년 들어 긴장은 다시 커졌습니다.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185마일쯤 북쪽의 두 나라 국경에서 포격이 오갔고, 공식 집계로 군인 최소 17명(아제르바이잔 12명, 아르메니아 5명)과 아제르바이잔 민간인 1명이 숨졌습니다. 7월 충돌에 이어 가을 전쟁까지 터지자 많은 관찰자가 놀랐습니다.

2020년 9월 27일부터 11월 10일까지

2020년 9월 27일, 아제르바이잔군과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지키던 아르메니아·나고르노카라바흐 군 사이에 큰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많은 관찰자는 이 전쟁이 1990년대에 잃은 지역 가운데 일부라도 되찾으려는 아제르바이잔의 공세로 시작됐다고 봅니다. 아제르바이잔 당국은 처음에 아르메니아 쪽의 포격에 대응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CRS는 그 주장의 증거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적었습니다.

싸움은 6주 동안 이어졌고, 아제르바이잔군이 조금씩 나아가는 흐름이었습니다. 북쪽 산악 지대에서는 아르메니아·나고르노카라바흐 군이 첫 공세를 막아 냈습니다. 10월에 전선이 크게 움직인 곳은 남쪽,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이란 사이의 평지였습니다. 아제르바이잔군은 푸줄리, 자브라일, 잔길란 지역을 차지하고 이란과 맞닿은 국경 전체를 확보했으며, 나고르노카라바흐 남부의 하드루트 부근에서도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다음 목표는 라친이었습니다. 라친은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중심 도시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제르바이잔어 한켄디)를 잇는 길 위에 있습니다. 격전 끝에 아르메니아군의 반격으로 이 시도는 막혔습니다.

그 뒤 싸움은 슈샤(Shusha, 아르메니아어 슈시)로 옮겨 갔습니다. 슈샤는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도시이고,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잇는 도로 위에서 스테파나케르트를 내려다봅니다. 아제르바이잔군은 2020년 11월 8일 또는 그 무렵 슈샤를 차지했습니다.

휴전 하루 전에는 러시아군이 휘말린 사건도 있었습니다. 11월 9일 아제르바이잔군이 아르메니아 땅 안에서 러시아군 Mi-24 헬기를 격추해 2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은 곧 사과하고 조사를 약속했습니다. 다음 날 0시에 휴전이 시작됐습니다.

연표. 위 줄은 1921년부터 2020년까지의 긴 흐름이다: 1921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에 배정, 1923년 자치주 설치, 1988년 분쟁 시작, 1991년 독립 선언과 자치 지위 폐지, 1994년 5월 휴전, 2016년 4월 사흘 충돌, 2020년 7월 12~16일 국경 충돌. 아래 줄은 2020년 9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를 넓혀 그렸다: 9월 27일 개전, 10월 1일 미국·러시아·프랑스 정상 성명, 10월 10일 모스크바 휴전, 10월 17일 재확인, 10월 26일 휴전, 세 번 모두 지켜지지 않음, 11월 8일 무렵 슈샤, 11월 10일 0시 휴전, 반환 기한 11월 15일 칼바자르(뒤에 11월 25일로 늦춰짐), 11월 20일 아그담, 12월 1일 라친. 개전부터 휴전 전까지 44일이라는 표시가 있다
1921~2020년의 긴 흐름과 2020년 가을 44일 (도표)(도표)

세 번의 휴전과 11월 3자 성명

휴전 시도는 세 번 있었습니다. 10월 1일 미국, 러시아, 프랑스 정상이 함께 성명을 내 즉각적인 적대 행위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10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인도적 휴전이 합의됐고, 10월 17일 파리에서 나온 성명으로 다시 확인됐습니다. 미국이 중재한 세 번째 인도적 휴전은 10월 26일 현지 시각 오전 8시부터였지만, 앞의 두 번처럼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싸움을 멈춘 것은 11월 10일 자 3자 성명이었습니다. 1조는 모스크바 시각 11월 10일 0시부터 완전한 휴전을 선언하고, 두 쪽이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문다고 정했습니다. CRS는 실제로 이 조항이 아제르바이잔이 전쟁 중에 얻은 지역을 그대로 지키게 했다고 보았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여기에 더해 아그담을 11월 20일까지, 칼바자르를 11월 15일까지, 라친을 12월 1일까지 아제르바이잔에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칼바자르 기한은 아르메니아의 요청으로 11월 25일까지 늦춰졌습니다.

러시아는 평화유지군 1,960명과 장갑차 90대, 차량과 특수 장비 380대를 접촉선과 라친 회랑에 배치하기로 했습니다. 머무는 기간은 5년이고, 어느 쪽도 6개월 전에 끝내겠다고 알리지 않으면 5년씩 저절로 늘어납니다. 폭 5 km의 라친 회랑은 슈샤를 지나지 않고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를 잇습니다. 피란민은 유엔난민기구(UNHCR)의 감독 아래 돌아오고, 포로와 억류자, 시신을 서로 넘기며, 아르메니아 서쪽에 떨어져 있는 아제르바이잔 영토 나히체반과 본토를 잇는 길을 포함해 지역의 경제·교통 연결을 되살린다는 조항도 들어갔습니다.

서명 방식도 기록에 남았습니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화상 회의 형식으로 서명했다고 밝혔고, 파시냔 총리는 오전 1시에 서명했다고 적었습니다.

이 성명이 다루지 않은 것도 중요합니다. 성명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정치적 지위와 공식 경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변 지역 반환이나 회랑처럼 기본 원칙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기본 원칙은 최종 지위의 결정과 안보, 자치 보장을 한 묶음으로 보았고, 이 둘은 성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평화유지군도 기본 원칙은 러시아만이 아닌 국제 임무를 전제했지만, 이번 평화유지군은 러시아군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조항 도표. 2020년 11월 10일 3자 성명의 아홉 조항을 상자 아홉 개로 그렸다. 1 모스크바 시각 11월 10일 0시 휴전, 지금 자리에서 멈춤. 2 아그담 11월 20일까지 반환. 3 러시아 평화유지군 1,960명, 장갑차 90대, 차량·장비 380대. 4 아르메니아군 철수와 나란히 배치, 5년, 자동 연장. 5 휴전 감시 센터. 6 칼바자르 11월 15일, 라친 12월 1일, 폭 5 km 라친 회랑. 7 유엔난민기구 감독 아래 피란민 귀환. 8 포로·억류자·시신 교환. 9 경제·교통 연결 회복, 나히체반 연결. 아래쪽에 성명이 다루지 않은 것: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정치적 지위, 공식 경계. 지도가 아니라는 메모가 있다
11월 10일 3자 성명의 아홉 조항과 다루지 않은 것. 지도가 아닙니다 (도표)(도표)

드론은 왜 주목받았나

두 나라 군대의 기본 장비는 비슷한 뿌리에서 왔습니다. 러시아는 두 나라 모두에게 큰 무기 공급국이었고, 두 나라 모두 전차와 포를 비롯해 주로 러시아제와 개량한 소련제 장비를 썼습니다. 달라진 것은 아제르바이잔이 지난 10년 동안 크게 늘린 군비였습니다. 이때 들여온 첨단 무기는 아제르바이잔의 정찰과 정밀 타격 능력을 높였습니다.

그 가운데 눈에 띈 것이 무인기(UAV)였습니다. 지상 통제소, 데이터 링크와 함께 하나의 무인 항공 체계(unmanned aerial system, UAS)로 움직이는 비행체입니다. 전쟁 동안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이스라엘에서 산 장비를 비롯한 드론에 크게 기댔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들여온 무장 드론과 흔히 자폭 드론이라 부르는 배회탄약도 썼습니다.

개전 전 거래도 보도됐습니다. 터키는 2020년 첫 아홉 달 동안 1억 2,000만 달러가 넘는 군 장비를 아제르바이잔에 판 것으로 보도됐고, 그 안에 바이락타르 TB2 드론이 있었습니다.

TB2는 레이저 유도 스마트 탄(MAM)을 달 수 있습니다. 레이저 유도는 이 사이트의 다른 글과도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레이저가 표적에 만든 밝은 점을 무기가 따라가는 방식은 정밀유도폭탄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드론을 쓴 쪽이 아제르바이잔만은 아니었습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미사일방어 프로젝트 분석은 러시아, 터키, 이스라엘, 자국 설계의 드론이 포병을 돕는 정찰과 직접 타격을 모두 맡았다고 정리합니다. 아르메니아의 드론은 정찰 위주의 작은 자국산 기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전쟁이 "드론 전쟁"으로 기억되는 데는 영상의 몫이 컸습니다. 아제르바이잔 드론은 이 전쟁에서 관심의 중심이었고, TB2의 고화질 카메라로 찍은 공격 영상은 온라인에 올라오고 수도 바쿠의 전광판에 틀어졌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짧은 화면이 이 전쟁의 대표 장면처럼 퍼진 것입니다.

그 영상을 어떻게 읽을지는 의견이 갈렸습니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한 분석은 영상 속 아르메니아군이 서툴러 보인다는 이유로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기는 시각은 잘못이라고 했고, 영상이 아제르바이잔의 성공 장면 위주로 골라졌다는 점을 그 까닭 가운데 하나로 들었습니다. 다만 이를 보고 전차의 시대가 끝났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심각한 오류라고 보았습니다. 지상전은 결국 땅을 차지하고 지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CSIS 분석도 드론이 큰 역할을 했지만 그 능력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쓰고, 가장 큰 교훈으로 '전 영역 방공(full-spectrum air defense)'의 중요성을 꼽았습니다. 개별 무기가 전쟁의 본질을 바꾸지는 않으며, 새 무기를 서로 맞물려 쓰는 것이 전장을 더 치명적으로 만든다는 해석입니다. 드론을 막는 수단이 왜 한 가지로 끝나지 않는지는 대드론 체계 글에서, 그 수단의 하나로 거론되는 레이저 무기의 기본은 따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남긴 것

CRS가 공식 발표와 보도를 모아 정리한 숫자로, 이 전쟁의 전투 사망자는 6,000명이 넘습니다. 아르메니아 쪽이 약 3,360명, 아제르바이잔 쪽이 약 2,820명이었고, 민간인 사망자는 150명이 넘었습니다. 숫자 하나하나가 두 나라 어딘가의 가족을 뜻합니다.

집을 떠난 사람은 훨씬 많았습니다. 아르메니아 당국은 11월 2일 기준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 인구 약 14만 7,000명 가운데 9만 명이 떠났다고 밝혔고, 12월 초까지 2만 5,000명 넘게 돌아왔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아제르바이잔 당국은 분쟁 지역 가까이 살던 아제르바이잔인 약 4만 명이 전쟁 동안 잠시 피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포격은 전선 밖의 도시에도 떨어졌습니다. 언론과 비정부기구들은 스테파나케르트를 비롯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마을, 그리고 분쟁 지역 밖 아제르바이잔의 간자와 바르다 같은 도시가 포격을 받아 최소 수십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났다고 보고했습니다. 포로를 살해했다는 보도는 양쪽 모두에서 나왔고, 12월에는 아제르바이잔 당국이 전쟁범죄 혐의로 자국 군인 4명을 체포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도 위험은 땅속에 남았습니다. 남아 있던 지뢰에 새 불발탄이 더해졌습니다. 분쟁 지역의 마을은 곳곳이 부서지거나 낡았고, 지뢰와 불발탄은 귀향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꼽혔습니다. 미국은 휴전 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를 비롯한 기구를 돕는 인도 지원 500만 달러를 내놓았습니다.

전쟁 뒤: 두 나라와 협상 틀

두 나라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파시냔 총리는 성명이 "나 개인에게도, 우리 국민에게도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고 적고, "이것은 승리가 아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성명이 발표되자 아르메니아에서는 시위대가 정부 건물을 공격하고 의회를 잠시 점거했으며, 야당과 시위대는 총리의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외교·국방·경제 장관이 물러났습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대규모 축하가 벌어졌고, 군사 작전과 정부에 대한 지지가 높았습니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이 성명을 "우리의 영광스러운 승리"라고 부르며 "우리 국민의 30년 갈망이 끝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문서를 두고 한쪽은 고통을, 다른 쪽은 승리를 말한 셈입니다.

주변 나라의 자리도 달라졌습니다.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켰고, 대통령 대변인은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를 통한 아르메니아 안보 약속이 카라바흐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터키는 아제르바이잔을 외교적으로 강하게 지지했고 드론도 공급했습니다. CRS는 이 전쟁으로 러시아와 터키의 영향력이 커졌다고 보았습니다.

미 국무부는 싸움을 끝낸 것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평화적인 협상 타결로 가는 첫걸음일 뿐이라고 밝혔습니다. 전쟁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정치적 지위를 풀지 못했고, 1990년대부터 이어진 국제 분쟁 해결의 틀을 뒤집었습니다.

그 틀은 몇 해 뒤 공식적으로 닫혔습니다. 2025년 9월 1일 OSCE 각료이사회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공동 요청에 따라 민스크 과정과 관련 기구를 닫기로 결정했고, 마무리는 2025년 11월 30일에 끝났습니다. 1990년대 초에 시작된 협상의 틀이 30여 년 만에 문을 닫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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