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둘레의 바다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크고 물살이 빠릅니다. 1232년 여름, 고려 조정은 이 섬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1270년 개경으로 돌아갈 때까지 섬 안의 도성에서 몽골과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섬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나라를 지키려는 선택이었을까요, 권력을 지키려는 선택이었을까요? 이 물음에는 지금도 한 가지 답이 없습니다. 같은 백과 항목 안에 두 평가가 함께 실려 있을 정도입니다.
이 글은 1231년 첫 침입부터 1259년 강화, 1273년 삼별초 항쟁의 끝까지를 따라갑니다. 길잡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들과 국가유산청의 기록입니다. 항목마다 쓴 연구자가 달라 날짜와 햇수가 어긋나는 곳이 있는데, 그런 곳은 나란히 놓고 읽어 봅니다.
형제 맹약에서 국교 단절까지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은 같은 적을 쫓는 자리였습니다. 몽골이 금나라를 치던 무렵, 몽골에 쫓긴 거란 유민 세력이 1216년 고려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가 이끄는 고려군에 밀린 이들은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 버텼습니다.
1218년 말, 뒤쫓아 온 몽골군의 수장 합진이 함께 치자고 요구했습니다. 이듬해 강동성의 거란 유민이 항복했고, 고려와 몽골은 몽골의 요구에 따라 이른바 '형제 맹약'을 맺었습니다.
그 뒤로 몽골 사신이 해마다 왔습니다. 무리한 공물 요구와 사신의 무례한 태도에 고려 쪽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1225년,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돌아가던 길에 압록강변에서 피살되었고,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보고 관계를 끊었습니다.
1231년, 우구데이 칸은 동서 두 방향으로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저고여의 죽음은 고려를 치는 명분이 되었습니다.
1231년, 첫 침입과 구주성
1231년 8월, 살리타이(撒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12월에는 도읍 개경이 포위되었습니다.
북쪽 내륙의 요충지 구주(龜州)에서는 그해 9월부터 12월까지 네 차례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서북면병마사 박서(朴犀)가 성의 네 면에 부대를 나누어 맡기고, 자신은 전체를 지휘하면서 북쪽을 지켰습니다. 이웃 고을에서 온 별초 250여 명도 나뉘어 섰습니다.
몽골군은 누차(樓車)와 대상(臺床) 같은 공성 기구를 만들어 쓰고, 땅굴을 파고, 기름으로 불을 질렀습니다. 성 안의 고려군은 끓는 쇳물을 부어 그 기구들을 태우고, 물에 적신 진흙으로 불을 껐습니다. 10월 중순에는 몽골군이 성 서쪽 28곳에 포차(砲車)를 늘어놓고 포격했습니다. 성벽이 무너질 때마다 박서는 곧바로 다시 쌓게 했습니다.
「구주성전투」 항목에는 몽골의 한 노장이 남긴 말이 옮겨져 있습니다.
>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의 공방전을 여러 번 보았으나, 일찍이 이러한 맹렬한 공격에도 끝내 항복하지 않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런데 구주성은 싸움에 져서 문을 연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경이 포위되자 조정은 항복을 결정했고, 왕족 회안군 왕정(王侹)을 안북부의 몽골군 진영에 보내 강화를 청했습니다. 12월에 강화를 맺은 조정이 사신을 보내 투항을 독촉하자, 박서는 서너 차례 거부하다가 국법을 어길 수 없어 1232년 1월 성문을 열었습니다.
이 항목을 쓴 윤용혁은 구주성이 몽골군 한 부대를 붙잡아 두어 본진의 공격 속도를 늦추었다고 봅니다. 구주는 그 공으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습니다.
몽골군은 북계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명을 남기고 물러갔습니다. 다루가치는 몽골 제국이 정복지에 두던 총독·감독관의 직명입니다.
왜 강화도였나
1차 침입이 끝나고 몇 달 뒤, 고려 조정은 다시 싸우는 길을 골랐습니다. 결정을 이끈 사람은 무신집권자 최우(崔瑀)였습니다. 1232년 6월,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도망쳐 온 교위 송득창이 몽골군이 곧 쳐들어온다고 알리자 천도론이 급히 힘을 얻었습니다.
반대도 컸습니다. 관료 대부분은 개경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지정사 유승단은 나라를 위해서도 개경은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고, 야별초 지유 김세충은 천도에 반대하다가 최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왕이 떠나던 날에는 이통이라는 사람이 개경을 지키겠다며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항목마다 하루가 다릅니다. 「강화천도」는 7월 6일 왕이 개경을 떠났다고 쓰고, 「출륙환도」는 6월 16일에 방침이 확정되고 7월 7일 고종이 강화도로 옮겨 갔다고 씁니다.
섬은 왜 강화도였을까요? 강화도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공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개경과 가깝고, 지방과 이어지거나 세금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조운(漕運)에도 좋았습니다.
그해 9월 살리타이는 배를 만들며 태주의 향리 변려를 붙잡아 강화로 가는 물길을 물었습니다. 변려가 매우 험하다고만 하고 끝내 말하지 않자 몽골군은 그 계획을 접었습니다.
「강화천도」 항목을 쓴 신안식은 최우가 천도를 밀어붙인 까닭으로 몽골군의 재침을 막을 확실한 방어책이 없었다는 점을 먼저 듭니다. 1차 침입 뒤 초적과 지방 저항 세력이 활발히 움직인 데 따른 불안도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정권을 지키려는 정치적 계산, 몽골의 과도한 공물과 인질 요구를 피하거나 미루려는 외교 전략도 배경에 있었습니다. 외침을 당하면서 도읍을 옮긴 경우는 이때가 유일했습니다.
천도는 미리 준비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궁궐과 관청은 천도 2년 뒤인 1234년, 여러 지방에서 징발된 사람들의 노동으로 세워졌습니다. 외성은 1237년에 증축되었고, 1250년에는 둘레 2,960여 칸에 크고 작은 문 17개를 둔 중성을 쌓았습니다. '강화도성'을 줄여 강도(江都)라고 불린 도읍이 이렇게 섰습니다.
강도의 삶은 바깥과 달랐습니다. 백성이 전쟁에 시달리는 동안 최씨 정권의 생활은 자못 호화로웠고, 왕족과 귀족도 팔관회·연등회·격구를 즐기며 지냈습니다.
산성과 섬으로 들어간 사람들
천도와 함께 각 도에 사신이 내려갔습니다. 사람들을 산성과 섬으로 들여보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성이나 섬에 들어가 지키는 것을 입보(入保)라고 합니다. 산성으로 가면 산성입보, 섬으로 가면 해도입보입니다.
몽골이 오기 전에는 적이 쳐들어오면 고을 관아가 있는 성, 곧 치소성(治所城)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성은 고을 가운데의 구릉이나 높지 않은 산에 있었습니다. 1차 침입 때 이 성들이 넓은 지역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무력해졌습니다. 기동력이 장점인 몽골군을 상대로 오래 버티려면 다른 자리가 필요했습니다.
새 입보처는 고을에서 멀리 떨어진 험하고 높은 산성, 그리고 육지에서 비교적 가까운 요충지의 섬이었습니다. 섬으로 가기 어렵거나 아예 갈 수 없는 고장이 많아 대개는 산성이 입보처가 되었습니다. 한 산성에는 여러 고을 사람이 함께 들어갔습니다. 조정은 산성에 37명에 이르는 방호별감을 보내 성을 고치고 별초군을 지휘하게 했습니다.
살던 땅을 떠나 섬이나 깊은 산으로 가라는 명령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머뭇거리거나 저항하기도 했고, 관리들은 집과 곡식을 불태우고 가혹한 벌을 주면서까지 해도입보를 밀어붙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섬 안이나 바닷가의 땅을 나눠 주고, 섬으로 옮긴 고을의 조세를 면제해 주기도 했습니다.
「해도입보책」 항목은 해도입보가 수전(水戰)에 상대적으로 약한 몽골군을 막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그 자체로는 소극적인 방어책이었다고 적습니다. 1250년대 전까지 몽골군은 섬을 직접 공략하지 못했습니다. 1254년 이후에야 전략을 바꿔 섬을 쳤습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입보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섬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생겼습니다.
처인성과 충주성
산성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싸움의 앞줄에 선 곳도 있었습니다. 1232년, 다시 쳐들어온 살리타이는 고려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것을 꾸짖고 왕이 육지로 나오라고 요구했습니다. 고려는 응하지 않았고, 몽골군은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해 12월 16일,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있던 처인성(處仁城)에서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활을 쏜 사람으로 기록된 이는 백현원의 승려 김윤후(金允侯)입니다. 그는 난을 피해 성에 들어와 있다가, 함께 입보한 처인부곡의 주민과 승려들을 이끌었습니다.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곧 북쪽으로 물러났습니다.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김윤후는 상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굳이 사양하고 그보다 낮은 섭랑장이 되었습니다.
스물한 해 뒤 김윤후의 이름이 다시 나옵니다. 1253년 10월, 야굴(예쿠)이 이끄는 몽골군이 충주성을 에워쌌고, 성을 지키는 방호별감이 김윤후였습니다. 그가 충주산성 방호별감이 된 해는 「김윤후」 항목에 1253년, 「처인성전투」 항목에 1250년으로 적혀 있습니다.
포위는 70여 일 이어졌고 군량이 거의 바닥났습니다. 김윤후는 이 싸움에서 이기면 귀하든 천하든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관노의 문서를 불살라 믿음을 보이고,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12월, 몽골군은 그대로 물러갔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관노와 백정에 이르기까지 공을 세운 사람들이 차등 있게 관작을 받았고, 충주는 이듬해 국원경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김윤후」 항목은 이 일을 중앙 정부와 일반 백성이 함께 싸운 대표적인 사례로 봅니다.
서른 해를 숫자로 읽기
「해도입보책」은 30년, 「몽고」는 30여 년의 전쟁이라고 씁니다. 1231년 첫 침입에서 1259년 강화까지를 해로 세면 28년입니다. 그 사이 싸움이 쉬지 않고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231년과 1232년 뒤로 침입은 1235~1239년, 1247~1248년, 1253~1254년, 1254~1259년에 있었습니다. 1231년을 1차, 1232년을 2차, 1253년을 5차, 1254년을 6차로 부르는 항목들의 차수도 이 순서와 맞습니다.
침입과 침입 사이에는 협상이 있었습니다. 몽골은 강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오라는 출륙환도(出陸還都), 왕이 몸소 와서 조회하는 친조, 왕의 자제를 투르칵, 곧 볼모로 보낼 것 등을 요구했습니다. 고려는 침공이 시작되면 환도를 약속했다가 몽골군이 물러나면 미루고 다시 버텼습니다. 출륙환도는 두 나라 사이의 가장 큰 외교 쟁점이 되었습니다.
| 숫자 | 무엇 | 어느 자료 |
|---|---|---|
| 72명 | 1231년 몽골군이 북계에 남긴 다루가치 | 「몽고」 |
| 4회 | 1231년 9~12월 구주성의 큰 싸움 | 「구주성전투」 |
| 37명 | 산성에 파견된 방호별감 | 「산성입보책」 |
| 70여 일 | 1253년 충주성이 포위된 기간 | 「충주전투」 |
| 30년, 30여 년 | 전쟁 기간 | 「해도입보책」, 「몽고」 |
| 28년 | 1231년 첫 침입에서 1259년 강화까지 해로 센 값 | 계산 |
강화, 환도, 그리고 삼별초
1250년대 후반, 고려 안에서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여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습니다. 1258년, 항전을 주장하던 무신집권자 최의(崔竩)가 유경과 김준 등에게 피살되면서 최씨 정권이 끝났습니다. 이듬해 태자 전(倎)이 전쟁을 끝내려고 몽골로 떠났습니다.
몽골의 헌종 뭉케는 남송 원정길에서 세상을 떠났고, 태자는 북쪽으로 올라오던 쿠빌라이를 만나 그 병영에 머물렀습니다. 마침 고려에서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쿠빌라이는 태자를 고려 국왕으로 책봉해 돌려보냈습니다. 그가 원종(元宗)입니다. 고려는 풍속을 바꾸지 않을 것 등을 요구해 승낙을 받았고, 1259년 강화 뒤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은 더 없었습니다.
도읍은 바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무신정권은 이어졌고, 김준에서 임연·임유무로 이어진 집권자들은 환도를 거부하거나 늦추었습니다. 원종은 몽골에 다녀오며 환도를 선포했고, 1270년 임유무가 휘하 장수들에게 피살되면서 무신정권이 끝났습니다. 그해 5월 23일 재추들이 모여 개경 환도를 논의하면서 강도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삼별초(三別抄)는 이 결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최우 때 밤마다 도둑을 단속하던 야별초가 생겼고,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습니다. 여기에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로 꾸린 신의군을 더해 삼별초라 불렀습니다. 1253년 무렵부터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이 거의 없어지고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삼별초는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세워 따로 정부를 만들고 진도를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과 흔도가 이끄는 몽골군이 진도를 치자, 1271년 김통정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탐라로 들어갔습니다. 1273년 전라도 배 160척이 연합군 1만 명을 싣고 탐라로 향했고, 그해 항쟁은 진압되었습니다. 그들이 쌓아 항파두리성이라 불려 온 성의 유적이 지금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일대에 남아 있습니다.
삼별초를 어떻게 볼지는 갈립니다. 최씨 정권의 사병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국가 재정으로 기르고 국고에서 녹봉을 주었으니 공병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출륙환도」 항목은 삼별초의 항전이 자주성을 살렸다는 면에서 긍정적이지만, 전란을 계속 일으켰다는 면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다고 함께 적습니다.
남은 것: 대장경판과 엇갈리는 평가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판은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탔습니다. 최우 등은 대장도감을 두어 대장경을 다시 새기게 했습니다. 강화도의 대장도감과 남해·강화의 분사대장도감에서 만든 이 경판이 지금 합천 해인사에 있는 대장경판입니다.
걸린 시간은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해인사 대장경」은 16년 만인 1251년 9월 25일, 양력으로 10월 11일에 완성했다고 씁니다. 같은 항목은 정장의 판각 자체는 12년 동안 마쳤으며 『고려사』의 16년은 도감을 두고 경판을 만들기까지 걸린 전체 기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국가유산청 기록은 시대를 "고려시대(1237∼1248년)"로 적고, 수량을 81,258매로 적습니다. 경판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천도에 대한 평가도 하나가 아닙니다. 고려 정부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고, 단기전을 노리는 몽골의 거듭된 공격에 맞서기에 유리할 수도 있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본토에 대한 대책 없이 이루어져 정권을 지키려는 조치로 낮춰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출륙환도를 두고도, 항전을 포기한 일이라 자주성에 큰 손상을 주었다는 견해와 항전이 길어져 백성의 피해가 컸으니 더 일찍 했어야 한다는 강화론 쪽 비판이 함께 있습니다.
전쟁의 짐은 무엇보다 농민에게 떨어졌습니다. 몽골군의 살육과 포로로 사람을 잃었고, 많은 재물을 약탈당했으며, 특히 소와 말 같은 가축을 잃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국보급 국가유산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런 시기에 금속활자와 팔만대장경, 상감청자 같은 성과가 나왔다는 점도 「강화천도」 항목은 함께 적습니다.
전쟁 뒤 고려와 몽골은 100여 년 동안 긴밀한 관계를 이어 갔고, 그 관계는 고려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274년 몽골의 첫 일본 원정에도 고려는 김방경을 도독사로 삼아 8,000여 명의 군사와 전함으로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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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의 일본 원정: "가미카제" 이야기의 기록: 1274년 원정에 고려가 어떻게 얽혔는지 이어서 다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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