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4년 가을, 지금의 마산 앞바다인 합포에서 900척이 넘는 배가 떠났습니다. 고려 군사와 몽골·한족 군사, 그리고 배를 부리는 뱃사람들이 함께 탔습니다. 목적지는 바다 건너 규슈의 하카타였습니다. 일곱 해 뒤 더 큰 함대가 같은 바다로 나섰고, 두 번 모두 돌아왔습니다.

일본에서는 두 번째 실패를 두고 신이 보낸 바람, 가미카제(神風)를 말했습니다. 정말 바람이 일본을 지켰을까요? 원과 고려가 왜 바다를 건넜는지, 하카타만에 왜 돌담이 섰는지,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공공 기관과 미국 대학의 학자들이 같은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읽는지 차례로 봅니다.

사신과 거절

원정을 명한 사람은 원 세조 쿠빌라이였습니다. 몽골은 1271년 11월 나라 이름을 원(元)으로 정했습니다. 원이 처음부터 배를 띄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나라가 먼저 고려를 통해 일본을 외교로 복속시키려 했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연합군을 꾸렸다고 설명합니다.

1268년과 1271년에 몽골 사신이 일본에 왔지만, 일본의 막부는 몽골에 복속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가 원정의 계기가 됐습니다.

고려의 처지도 함께 봐야 합니다.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돌아갔고, 1273년 삼별초가 진압된 뒤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두 번의 일본 원정에 군사를 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 군대를 여원연합군, 또는 여몽연합군이라고 부릅니다. 고려 조정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1268년부터 1294년까지의 연표 도표. 1268년과 1271년 몽골 사신이 일본에 옴, 1274년 첫 원정(합포 출발, 쓰시마·이키, 하카타, 밤의 폭풍우, 귀환), 1276년 무렵부터 하카타만에 돌담을 쌓음, 1279년 남송 정복, 1280년 고려에 정동행성 설치, 1281년 두 번째 원정과 태풍, 철수, 1282년 1월 첫 정동행성 폐지, 1283년 정동행성 재설치, 1292년 자바 원정, 1294년 일본 원정 계획 중단. 점의 색으로 원정, 일본의 방비, 원과 고려 쪽의 일을 나눈다
1268년의 사신에서 1294년의 계획 중단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해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1274년: 하카타만의 첫 원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적힌 날짜로 1274년 10월 27일, 연합군이 합포를 떠났습니다. 김방경이 이끈 고려군 8,000명, 흔도가 이끈 몽한군 25,000명, 그리고 뱃사공과 바닷길 안내자, 노를 젓는 사람 6,700명이 900여 척에 나눠 탔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싸움을 문영의 역(文永の役)이라고 부릅니다.

함대는 쓰시마와 이키를 차례로 점령하고 하카타로 나아갔습니다. 고려군을 이끈 김방경은 후쿠오카에 내려 일본의 방어군을 눌렀습니다. 연합군은 하카타에서 이겼지만 날이 저물 무렵 물러났습니다.

그날 밤 폭풍우가 일었습니다. 적지 않은 배가 부서지거나 가라앉았고, 함대는 11월 27일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군사는 1만 3,500여 명이었습니다. 그 숫자 하나하나가 합포에서 배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이 실패를 무엇 때문으로 볼지는 자료마다 무게가 다릅니다. 컬럼비아 자료는 첫 원정이 주로 날씨 때문에 실패했다고 봅니다. 김방경 항목은 물러나는 길에 만난 거센 풍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적습니다.

바닷가의 돌담

일본 쪽은 다음 침공을 기다리며 바닷가에 벽을 쌓았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1276년 이후 규슈의 9개 지방에 명해, 각자 가진 땅의 넓이에 따라 길이를 나눠 맡겨 하카타만 일대에 돌담을 쌓게 했습니다. 동쪽 가시이에서 서쪽 이마즈까지 동서로 약 20 km에 이릅니다.

당시 기록에서 이 벽의 이름은 석축지(石築地)였습니다. 지금은 원구방루(元寇防塁)라고 부릅니다. 하카타만의 모래언덕 위에 쌓았고, 자리마다 구조가 달랐습니다. 이마즈 지구의 벽은 높이 3 m, 아래 폭 3 m, 위 폭 2 m의 사다리꼴로 쌓아 올렸습니다.

하카타만이 왜 표적이 됐을까요? 후쿠오카시는 그 무렵 하카타와 하코자키, 이마즈, 가시이 같은 바닷가 마을이 남송을 중심으로 한 대외 교역의 요충이었고, 그래서 몽골의 공격 대상이 됐다고 봅니다. 벽은 1931년 3월 30일 국가 사적이 됐고, 지금은 다섯 지구 열 곳으로 나뉘어 지정돼 있습니다.

1281년: 두 함대와 태풍

1279년 남송을 무너뜨린 원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다시 서둘렀습니다. 남송을 치려고 장강을 건널 수군까지 꾸렸던 원이었습니다. 1280년 8월 고려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섰고, 충렬왕이 그 우두머리가 됐습니다. '정동'은 일본을 원정한다는 뜻이고, 이 관청은 이듬해 원정을 준비하는 기구였습니다.

1281년의 편성은 두 갈래였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방경이 지휘한 고려군 15,000명, 흔도와 홍다구 휘하의 몽한군 30,000명, 범문호가 지휘한 강남군 100,000명을 적습니다. 강남은 옛 남송의 땅을 가리킵니다. 일본에서는 이 싸움을 홍안의 역(弘安の役)이라고 부릅니다.

계획은 두 함대가 이키에서 만나 함께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고려군과 몽한군은 5월 3일 합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강남군이 늦게 도착해 작전이 어긋났고, 도착한 강남군은 태풍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연합군은 다시 물러났습니다.

두 원정의 흐름 개념도. 위쪽 1274년: 고려의 합포에서 출발한 한 함대가 쓰시마, 이키를 거쳐 하카타만으로 가고, 밤의 폭풍우 뒤 돌아온다. 아래쪽 1281년: 합포에서 떠난 고려군과 몽한군, 그리고 옛 남송 땅의 강남군이 이키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강남군이 늦게 왔고, 태풍 피해 뒤 철수한다. 하카타만 해안에는 약 20 km의 돌담(석축지)이 표시돼 있다. 지도가 아니고 거리와 방향은 실제와 다르다는 메모가 있다
두 번의 원정을 네모와 화살표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해안의 돌담도 이 원정에서 제 몫을 했습니다. 홍안의 역 때 석축지는 몽골군의 상륙을 막았습니다. 1274년에는 몽골군이 규슈 북부에 상륙했지만, 1281년의 싸움은 주로 섬과 바다 위에서 벌어졌습니다.

바람인가, 싸움인가

컬럼비아 자료는 1281년의 원정이 첫 번보다 훨씬 컸고, 끔찍한 태풍이 함대를 망가뜨려 원정을 그만두게 했다고 적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 태풍을 우연이 아니라 신이 보낸 것으로 믿고 '신의 바람', 가미카제라 불렀습니다. 일본 열도는 신이 지키니 바깥 세력이 결코 침략할 수 없다는 믿음도 함께 굳어졌습니다.

같은 사건을 다르게 읽는 학자도 있습니다. 역사학자 토머스 콘런(Thomas D. Conlan)은 2001년 책 『In Little Need of Divine Intervention』에서, 중세 일본 무사들이 '신의 바람' 없이도 몽골군과 맞서 버틸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폭풍이 일기 훨씬 전부터 일본이 몽골과 맞서 버티고 있었고, 원정의 규모도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았다는 것이 그의 해석입니다.

무엇자료읽는 법
1274년 실패컬럼비아 대학 교육 자료주로 날씨 때문
1274년 실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방경)물러나는 길의 거센 풍랑으로 큰 피해
1281년 실패컬럼비아 대학 교육 자료태풍이 함대를 망가뜨려 원정을 그만둠
1281년 실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여원연합군)강남군의 늦은 도착과 태풍 피해로 철수
1281년 상륙후쿠오카시돌담이 상륙을 막음
두 원정 전체콘런(보든 대학)폭풍 전에 이미 맞서 버팀, 규모도 작았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적은 두 원정의 편성을 나란히 놓은 막대 도표. 1274년: 고려군 8,000명, 몽한군 25,000명, 뱃사공·길잡이·노군 6,700명, 배 900여 척. 1281년: 고려군 15,000명, 몽한군 30,000명, 강남군 100,000명. 아래 상자에 다른 해석 두 가지가 있다. 컬럼비아 대학 자료는 1281년 원정이 첫 번보다 훨씬 컸다고 보고, 보든 대학의 콘런은 원정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고 본다
한 백과사전의 숫자와 두 가지 다른 해석. 숫자는 자료마다 다르게 읽힙니다 (도표)(도표)

두 읽기는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태풍이 함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는 것은 한국과 미국 자료가 함께 적고, 일본 무사들이 해안과 바다에서 싸웠다는 것은 일본 기관의 기록과 두루마리가 보여 줍니다. 어느 쪽의 몫이 더 컸는지는 지금도 해석이 갈리는 물음입니다.

원정 뒤 가미카제라는 생각이 왜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도 콘런이 풀려는 물음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본이 연합군이 태풍 때문에 제대로 공격하지 못한 일을 들어 신풍의 신화를 강조했고, 뒷날 천황제를 세우는 중요한 역사적 경험으로 내세우기도 했다고 평가합니다.

두루마리와 바다 밑의 배

이 원정에서 싸운 사람이 남긴 그림이 있습니다. 히고(지금의 구마모토현) 출신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1246년생)가 몽골과의 싸움에서 보인 용맹을 남기려고 주문한 것으로 보이는 두루마리, 『몽고습래회사(蒙古襲来絵詞)』입니다. 실제 침공 뒤 겨우 몇 해 만에 만들어져, 그림 자체가 귀한 당대 기록입니다.

그림 속 장면은 구체적입니다. 스에나가가 방어벽 위에 앉은 같은 지방의 무사 기쿠치 다케후사 앞을 지나며 자기의 용맹을 증언해 달라고 부탁하고, 무사들이 배를 저어 몽골 함대로 나아가며, 스에나가가 적의 배에 뛰어올라 몽골 장수와 맞붙습니다. 그림 위에는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고, 스에나가의 이름만 붉은 글씨입니다.

다만 이 두루마리는 한 사람이 자기 공을 알리려고 만든 기록입니다. 보든 대학 사이트는 두루마리가 어떻게 고쳐졌는지를 옛 사본들과 견주어 보여 줍니다. 스에나가가 배에 탄 장면은 빠져 있습니다. 두루마리의 눈에 띄는 부분을 오려 족자로 따로 꾸미는 일이 가끔 있었으니, 손상 때문에 사라진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림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오랫동안 물음이었습니다. 그림 속 낯선 무기 '데쓰하우(てつはう)'와 원군의 배를 두고 사실성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우키시 교육위원회가 연 원구 750년 특별 기획전의 소개는, 홍안의 역 때 원군 배가 가라앉은 것으로 보는 나가사키현 다카시마 앞바다 해저에서 나온 배와 그림 속 배에 공통점이 보여, 이 묘사가 스에나가가 실제로 본 풍경이었음이 밝혀졌다고 설명합니다. 이 두루마리는 지금 일본의 국보입니다.

다카시마 앞바다는 일본 수중 고고학의 현장이 됐습니다. 일본학술진흥회의 연구 과제는 이마리만 해저 전체를 음파로 훑어 몽골 침몰선의 선체 일부와 많은 기와를 찾았고, 뒤의 과제는 현지에 그대로 두고 보존하는 다카시마 1·2호 침몰선을 주된 소재로 수중 유적 조사 방법을 세웠습니다. 그 전까지 일본에서 침몰선 같은 수중 유적 조사는 거의 손대지 않은 분야였습니다.

배는 어디서 왔을까요? 텍사스 A&M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사사키(Randall J. Sasaki)의 연구는 목재를 분류하고 이음 방법을 분석했습니다. 출신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석한 잔해 상당수는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만든 작은 배에서 왔고, 큰 V자형 화물선과 고려 배는 건져 올린 목재 가운데 작은 몫일 것으로 봅니다.

고려와 원에 남은 것

원 세조는 두 번 실패하고도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정동행성은 원정이 끝난 직후인 1282년 1월 문을 닫았다가 1283년 다시 섰고, 이때 전쟁 준비는 주로 강남에서 이뤄졌습니다. 새 원정 계획도 준비됐지만, 세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1294년 일본 원정 계획은 중단됐습니다.

원에게 이 원정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컬럼비아 자료는 이런 원정이 몹시 많은 돈을 들였고, 군사 원정의 실패가 중국에서 몽골 제국이 약해지고 끝내 무너지는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봅니다. 1292년의 자바 원정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고려에는 다른 흔적이 남았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충렬왕이 2차 원정에 관여하면서 고려 왕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됐고, 동시에 원나라가 고려에 대한 지배력을 키우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합니다. 쿠빌라이가 죽은 뒤 정동행성은 군사 기능이 크게 줄어 원과 고려를 잇는 관청으로 남았습니다.

일본에는 해안의 돌담과 두루마리, 그리고 '신의 바람'이라는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이 두 원정은 근대 이전에 일본 정벌을 시도한 처음이자 유일한 사례입니다. 후쿠오카시는 지금 원구방루를 역사적 사실과 배경을 이해하고 평화를 생각하는 문화재로 정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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