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서울 시각 오전 10시, 주한 미국 대사 무초(Muccio)는 국무장관 앞으로 전보를 쳤습니다. 북한군이 오늘 아침 여러 곳에서 대한민국 영토로 들어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전보가 워싱턴에 닿았을 때 그곳 시계는 아직 6월 24일 토요일 밤 9시 26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왜 그 새벽에 시작됐고, 서울은 어떻게 사흘 만에 무너졌을까요? 당일 오간 미국 외교 전보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항목들을 나란히 놓고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나흘을 따라갑니다. 시각과 날짜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른 곳은 어느 자료의 것인지 함께 적습니다.

38선은 어떻게 국경 아닌 국경이 되었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나뉘었습니다.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점령했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2차 대전 중 두 나라가 일본군 철수를 감독하려고 한반도를 38선에서 잠정적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부터 나라를 가르려고 그은 선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해 12월 모스크바에 모인 미·영·소 세 나라 외무장관은 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 해결책 없이 결렬되었습니다.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고, 유엔총회는 11월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의했습니다.

소련군사령관은 위원단이 북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1948년 5월 선거는 남쪽에서만 치러졌고,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섰습니다. 소련군은 그해 10월부터 철수를 시작했고, 미군은 1949년 6월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를 마쳤습니다.

잠정 군사분계선이던 38선은 두 정부가 들어서면서 1995년 백과 「한국전쟁」 항목의 말대로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었습니다. 1950년에 이르자 두 지역의 긴장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점점 더 적대적인 두 군대가 38선을 따라 늘어서 있었습니다.

전쟁 전야: 병력과 장비의 차이

북쪽은 소련군이 떠난 1948년 10월까지 이미 완전 무장한 보병 4개 사단과, 소련제 T-34 중형전차를 갖춘 제105 기갑대대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1949년에는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인 병사 2만 5,000명이 북한으로 넘어왔습니다. 「한국전쟁」 항목은 그 결과 북한군 10개 사단 13만 명이 38선에 배치되고, 후방에는 예비군 10만 명이 조직되었다고 씁니다.

국군은 1949년 해병대와 공군까지 갖춰 병력이 약 10만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장비가 빈약했고 예비군이 없었습니다. 8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은 38선에서 먼 후방에 있으면서 게릴라 소탕에 매여 있었습니다.

짝 막대 도표. 1995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전쟁」 항목 표 1의 남북 장비 수를 줄마다 국군(위)과 북한군(아래)으로 나란히 그렸다. 포: 곡사포 91문 대 자주포 및 각종 곡사포 728문. 대전차포 140문 대 550문. 박격포 960문 대 2,318문. 장갑차 24대 대 54대. 전차: 국군 칸은 비어 있고 북한 242대. 해군: 전투함 및 소해정 28척 대 어뢰정 30척. 항공기: 연락기 및 연습기 22대 대 전투기·폭격기 및 기타 211대. 줄마다 눈금이 따로이며, 두 쪽 항목이 늘 같은 종류는 아니라는 메모가 있다
전쟁 직전 남북의 장비, 백과 항목의 표 하나에 적힌 숫자 (도표)(도표)

장비 차이는 숫자로 보면 더 뚜렷합니다. 항목의 표에서 북한군은 전차 242대를 가졌고, 국군 칸에는 전차가 아예 적혀 있지 않습니다. 박격포는 960문 대 2,318문, 항공기는 국군의 연락기·연습기 22대 대 북한군의 전투기·폭격기 등 211대였습니다.

두 칸의 항목이 늘 같은 종류는 아니라는 점도 함께 봐야 합니다. 국군 곡사포 91문 옆의 북한군 728문은 자주포와 각종 곡사포를 합친 숫자입니다. 해군도 국군은 전투함과 소해정 28척, 북한군은 어뢰정 30척으로 서로 다른 배를 셌습니다.

전쟁을 결심한 배경으로 1995년 항목은 국외 요인 네 가지를 듭니다. 1949년 10월 중국 대륙의 공산화,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 1950년 1월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뺀다는 애치슨 국무장관의 성명, 그리고 1949년 말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찾아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낸 일입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 교육 자료도 애치슨이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암시했고, 일부가 이를 미국이 한국을 지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합니다.

김일성은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 통일안을 확정했습니다. 같은 무렵 북쪽은 남북통일 최고입법회의를 서울에서 열자고 하는 등 평화 공세를 폈고, 1995년 항목은 이것을 침공 계획을 가리려는 움직임으로 봅니다.

6월 25일 새벽 4시

무초 대사의 전보 925호는 한국군 보고를 바탕으로 썼고, 그 일부는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의 현장 고문 보고로 확인된 것이었습니다. 전보에 따르면 공격은 오전 4시쯤 옹진반도에 떨어진 북한군 포격으로 시작됐습니다. 오전 6시쯤 북한군 보병이 옹진·개성·춘천 지역에서 38선을 넘기 시작했고, 동해안 강릉 남쪽에는 상륙이 있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개성은 오전 9시에 함락됐다는 보고였고, 그 공격에는 북한군 전차 10대가량이 함께했습니다. 전차를 앞세운 다른 부대는 춘천으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무초는 공격의 성격과 방식으로 보아 대한민국에 대한 전면 공세로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다른 곳의 기록도 시각이 조금씩 다릅니다. 「춘천지구 전투」 항목에서는 05시에 국군 제6사단 앞으로 30분 동안 공격준비사격이 쏟아졌고, 이어 자주포를 앞세운 보병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서쪽의 국군 제1사단은 날이 밝기도 전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과,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맞았습니다.

날짜별 칸 도표. 6월 25일(일, 서울 시각): 4시쯤 옹진 포격, 5시 춘천 쪽 국군 제6사단 앞 30분 공격준비사격, 6시쯤 옹진·개성·춘천에서 보병 월경과 강릉 남쪽 상륙 보고, 9시 개성 함락 보고(전차 10대가량), 10시 전보 925호 발신(워싱턴 수신 6월 24일 오후 9시 26분). 6월 25일(뉴욕): 안보리 결의 82호, 9 대 0·기권 1, 소련 불참. 6월 26일: 13시쯤 의정부 점령, 김일성 방송. 6월 27일: 트루먼의 해·공군 지원 명령, 결의 83호(7 대 1). 6월 28일: 2시 30분쯤 한강 철교 3개와 인도교 1개 폭파, 서울 함락(1995년 백과 항목은 6월 27일)
6월 25~28일, 나흘의 기록. 시각은 자료에 적힌 대로입니다 (도표)(도표)

같은 날 오후 1시, 무초 대사의 허가를 받은 방송 WVTP는 "오늘 새벽 4시" 북한군이 38선 여러 곳에서 대한민국 방어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알렸습니다. 다만 방송은 북쪽이 전면전을 일으키려 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미국 공관 사람들에게는 되도록 집이나 근무지에 머물라고 당부했습니다. 본국에 보낸 전보보다 한결 조심스러운 말이었습니다.

첫 소식은 어떻게 전해졌나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는 시차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6월 25일 오전 10시에 보낸 전보 925호를 국무부는 6월 24일 토요일 오후 9시 26분에 받았습니다. 당직 책임자는 오후 10시 15분에 담당자들에게 알렸고, 오후 11시에는 대통령에게 전하라며 두 부를 백악관에 보냈습니다.

그보다 앞서 워싱턴은 언론 속보로 먼저 소식을 들었습니다. UP 통신은 그날 밤 북한군이 경계선 너머로 전면 공세를 폈다고 보도했습니다. 서울 대사관과 전화가 닿지 않자 국무부는 급히 알려 달라는 전보 612호를 보냈고, 이 전보는 925호가 도착하기 전에 쓰였습니다.

소식을 들은 미국은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했습니다. 이날 채택된 결의 82호는 북한에서 온 군대의 대한민국 무력 공격을 "평화의 파괴(breach of the peace)"로 판정했습니다. 그리고 즉각 적대 행위를 멈추고 북한 당국이 군대를 38선으로 곧바로 물리라고 요구했습니다.

표결은 9 대 0, 기권 1(유고슬라비아)이었습니다. 소련 대표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 자료는 소련이 여섯 달 전부터 유엔이 중국 대표 자리를 주지 않는 데 항의해 안보리에서 빠져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의정부와 춘천: 엇갈린 첫 사흘

서울로 가는 길목 의정부에는 북한군의 주공인 제1군단이 들어왔습니다. 2013년에 쓰인 백과 「의정부전투」 항목은 북한군이 6월 26일까지 서울과 한강교를 점령하려 했고, 이 지역 북한군이 4만 8,000명을 넘었다고 적습니다. 맞은편 국군 제7사단은 외출·외박으로 4,500여 명만 부대에 남아 있었습니다.

육군본부는 의정부를 지키려고 서울 근처 부대에 더해 대전·대구·광주의 사단, 육군사관학교 생도대대까지 급히 보냈습니다. 하지만 후방의 부대들은 편성을 다 갖추지 못한 채 대대 단위로 따로따로 출발했습니다. 의정부는 26일 13시쯤 점령되었습니다.

의정부가 무너진 영향은 전선 전체로 번졌습니다.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문산의 제1사단, 춘천의 제6사단, 동해안의 제8사단도 전선을 유지하려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6월 26일 김일성은 이 전쟁을 남한을 '해방'시켜 조국 통일을 이루는 전쟁이라고 방송했습니다.

구간 도표. 38선을 가로 띠로 그리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섯 상자를 놓았다. 옹진반도: 4시쯤 포격. 개성-문산: 국군 제1사단, 6월 25일 9시 개성 함락 보고, 6월 28일 뒤 한강을 건너 철수. 동두천·포천-의정부: 국군 제7사단 4,500여 명 대 북한군 4만 8,000명 이상, 6월 26일 13시쯤 의정부 점령. 춘천-홍천: 국군 제6사단, 84 km 정면, 5시 공격준비사격, 6일 버팀, 6월 30일 18시 홍천 점령. 동해안: 국군 제8사단, 강릉 남쪽 상륙 보고, 의정부가 무너진 뒤 철수. 아래 띠에 서울 함락 6월 28일(1995년 백과 항목은 27일)과 한강교 폭파 28일 2시 30분쯤. 지도가 아니며 위치·경로·거리는 그리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38선의 다섯 구간과 첫 며칠. 지도가 아니라 서쪽에서 동쪽 순서만 나타냅니다 (도표)(도표)

춘천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국군 제6사단은 가평에서 현리까지 84 km에 이르는 넓은 정면을 맡고 있었는데, 북한군 제2군단은 첫날 소양강을 넘지 못했습니다. 제6사단은 소양강과 홍천의 말고개 일대에서 6일 동안 버텼고, 북한군은 6월 30일 18시에야 홍천을 점령했습니다. 「춘천지구 전투」 항목은 이 덕분에 국군이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만들 시간을 얻었다고 평가합니다.

한강교 폭파와 서울 함락

27일 저녁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서울 외곽을 압박했습니다. 28일 자정이 지나자 전차 일부가 국군이 없던 청량리 쪽으로 돌아 새벽 2시경 홍릉 일대로 들어왔습니다. 북한군 전차가 시내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은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습니다.

28일 오전 2시 30분경, 27일 오후부터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공병들이 철교 3개와 인도교 1개를 끊었습니다. 다리 위를 달리던 차량 수십 대가 부서지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단선 철교 하나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아 나중에 북한군이 쓰기도 했습니다.

이 폭파는 서울 외곽을 지키던 국군 주력과 많은 시민을 강북에 남겨 둔 채 퇴로를 끊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폭파 책임자 최창식은 1950년 9월 총살되었고, 12년 뒤인 1962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서울이 무너진 날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1995년 「한국전쟁」 항목은 북한군이 6월 27일에 이미 서울을 점령했다고 쓰고, 같은 해 쓰인 「문산전투」 항목은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었다고 적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은 북한군이 일주일 안에 서울을 차지했다고만 씁니다. 서쪽의 국군 제1사단은 서울이 함락되자 퇴로가 막혀 행주와 이산포 나루에서 한강을 건넜고, 공용화기와 장비 대부분을 두고 철수했습니다.

바다 건너의 결정도 빨라졌습니다.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미 해군과 공군에 한국군을 지원하라고 명령했고, 같은 날 안보리는 결의 83호로 유엔 회원국들에게 무력 공격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주라고 권고했습니다. 이 표결은 7 대 1(유고슬라비아)이었고, 이집트와 인도는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트루먼은 같은 날 성명에서 공산주의가 이제 체제 전복을 넘어 무력 침공과 전쟁으로 독립국을 정복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28일에는 도쿄의 맥아더 원수가 한국에 와 전선을 둘러보고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일본에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곧 건너왔지만 전세를 되돌리기에는 힘이 모자랐고, 싸움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차 앞에 선 군대

첫 사흘의 기록에는 전차가 자주 나옵니다. 개성을 친 북한군에는 전차 10대가량이 있었고, 의정부와 서울로 밀고 온 부대도 전차를 앞세웠습니다. 표에서 본 대로 국군에는 전차가 없었고, 대전차포는 140문으로 북한군의 550문에 크게 못 미쳤습니다.

백과 「김풍익」 항목은 이 차이를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6월 26일 포병학교 교도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의정부 북쪽 금오리(축석령)로 부대를 옮겨 왔습니다. 당시 국군이 가진 화력으로는 T-34 전차의 장갑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105 mm 야포로 전차를 직접 겨누어 쏘아 한 대를 부쉈고, 두 번째 탄을 쏘려는 순간 전차포에 맞아 부대원들과 함께 숨졌습니다.

춘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전차포중대의 심일 소위가 몸을 던진 공격으로 자주포 2대를 부쉈고, 홍천 쪽에서는 국군이 대전차 특공대를 꾸려 자주포 10여 대를 부쉈습니다. 모두 전차와 자주포를 막을 무기가 모자란 채로 치른 싸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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