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압록강 가까운 하늘에 날개가 뒤로 젖혀진 낯선 제트기가 나타났습니다. 소련이 설계한 MiG-15였습니다. 그 뒤 정전까지 2년 반 넘게, 한반도 북서쪽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의 하늘은 제트 전투기끼리 되풀이해 맞붙는 곳이 됐고 '미그 앨리(MiG Alley)'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왜 하필 그 좁은 하늘이었을까요? 답의 한쪽은 압록강이라는 국경에 있습니다. 이 글은 미그 앨리가 어디였는지, 유엔군 조종사가 왜 압록강을 넘지 못했는지, 두 제트기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숫자가 자료마다 어떻게 다른지를 공개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1950년 11월, 낯선 제트기
MiG-15를 처음 몬 쪽은 자료에 따라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스미스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NASM)은 1950년 말 러시아인이 몬 MiG-15가 북한 하늘에 나타났고, 전쟁이 끝나기 전 중국과 북한의 MiG-15가 합류했다고 적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AWM)은 1950년 11월 중국 공군이 소련제 MiG-15를 전쟁에 들여왔다고 적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의 한국전 연표에는 11월 9일의 일이 짧게 남아 있습니다. 그날 항공모함 부대인 제77기동부대(Task Force 77, TF 77)는 압록강의 국경 다리들을 처음 공격했습니다. 같은 날 MiG-15가 항공모함 필리핀 시(USS Philippine Sea)에서 뜬 F9F 제트기를 공격했고, 연표는 이것을 이런 형식의 비행기끼리의 첫 교전으로 기록했습니다. 11월 18일에는 F9F 8기가 MiG-15 8~10기와 맞붙어 1기를 떨어뜨리고 5기에 피해를 주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MiG-15는 37 mm 기관포 1문과 23 mm 기관포 2문을 달았습니다. NASM의 설명으로는 이 비행기가 B-29 폭격기를 포함한 프로펠러기를 하늘에서 몰아냈고, F-80·F-84 같은 1세대 제트기로는 감당하지 못해 미국이 공중 우세(air superiority)를 되찾으려고 F-86을 서둘러 한국에 보냈습니다.
압록강 남쪽의 좁은 하늘
'미그 앨리'는 만주와 한국의 국경, 청천강 골짜기와 압록강 사이 지역에 붙은 별명입니다. AWM의 장소 항목은 이곳의 상대가 국경 너머 안둥(Antung)의 비행장에 기지를 둔 MiG 전투기였다고 설명합니다. 북한 북서쪽 끝, 국경 바로 남쪽의 띠 같은 하늘이었습니다.
유엔 항공력은 한국의 나머지 하늘에서는 대체로 우세했습니다. 그래도 호주 공군 조종사들에게 가장 위험한 지역은 미그 앨리였습니다. 국경이 가까워 MiG는 싸운 뒤 압록강 너머 기지로 곧장 돌아갈 수 있었고, 유엔군 조종사는 그 강을 건너는 것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1952년 5월 연표의 한 줄은 이 하늘이 어떻게 쓰였는지 보여 줍니다. 그달 MiG-15는 북서부의 철도 표적을 노리던 유엔군 전폭기를 거듭 공세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연표는 이것을 적이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 지역에서 방어 능력을 더 활용하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넘지 못한 국경
국경 문제는 MiG가 나타나자마자 워싱턴의 일이 됐습니다.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오스틴(Austin)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1950년 11월 10일 오후 만주에서 뜬 비행기가 유엔군 B-29 2기를 떨어뜨렸다는 보고를 언급했습니다.
같은 날 국무부 중국과장 클럽(Clubb)은 메모를 올렸습니다. 한국 문제가 유엔의 틀 안에 있는 만큼, 만주에 기지를 둔 적기를 "추격(hot pursuit)"하든 대공포 진지를 치든 유엔의 승인 없이는 국경 너머로 군사 행동을 넓혀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사흘 뒤인 11월 13일, 애치슨(Acheson) 국무장관은 동맹국에 있는 대사관에 전보를 보냈습니다. 적이 만주를 '특권적 피난처(privileged sanctuary)'로 쓰는 것을 큰 문제로 들고, 유엔 항공기가 압록강 위 공역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공격해 온 적기를 만주 공역 안으로 "2~3분 비행 거리"까지 쫓게 할 필요가 곧 생길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동맹국의 반응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11월 14일 네덜란드 외무장관 스티커르(Stikker)는 도발은 분명하고 짧은 시간 동안의 추격이 법적으로 정당하다는 데는 다툴 것이 없다고 하면서도, 국경을 넘는 비행이 가져올 결과를 크게 걱정하며 그것이 극동의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같은 날 캐나다 쪽은 국경을 넘는 적기 추격의 정당성을 인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유엔의 호주 대표단도 이 문제를 매우 걱정했다는 기록이 남았습니다.
11월 18일 네덜란드 정부는 각서를 건네, 추격은 유엔군 사령관에게 준 권한을 넘는 일이니 안전보장이사회나 총회의 명시적 승인 없이 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이듬해에도 남았습니다. 1951년 7월 13일 합동참모본부는 정전 협상이 깨지면 압박을 높여야 한다고 보았지만, 중국과의 전면전에 휘말릴 행동은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조건 아래 내놓은 권고 가운데 하나가 한국 위에서 시작된 공중전에 한해 국경을 무시하고 추격 범위를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기관들의 설명에서 세이버 조종사들은 중국 국경 너머로 적을 쫓을 수 없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두 제트기는 어디서 왔나
MiG-15는 1946년, 높은 고도에서 낮에 적기를 막을 요격기를 서둘러 만들라는 스탈린의 요구에 맞춰 설계됐습니다. 첫 비행은 1947년 12월 30일이었고, 석 달 뒤인 1948년 3월에 생산이 승인됐습니다. 엔진은 영국에서 왔습니다. 영국이 러시아에 판 롤스로이스 '닌(Nene)'과 '더원트(Derwent)' 제트 엔진을 소련이 곧바로 베끼고 다듬어 RD-500, 클리모프 RD-45, 개량 VK-1로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항공기로는 처음으로 양산 후퇴익(swept wing), 여압 조종석, 사출 좌석을 갖춘 것도 MiG-15였습니다. 설계팀의 미코얀과 구레비치는 독일의 터보제트와 후퇴익 연구를 알고 있었지만, NASM은 엔진을 빼면 설계가 온전히 러시아 것이었다고 봅니다.
F-86의 출발은 조금 더 앞섭니다. 1944년 가을 미 육군 항공대는 XP-86 시제기 3기를 주문했지만, 1945년 여름이 되자 최고 속도가 요구한 600 mph에 크게 못 미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무렵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노획한 독일의 공기역학 자료가 설계자들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 자료가 보여 준 것이 후퇴익의 효과였습니다. 날개를 뒤로 젖히면 소리의 속도에 가까운 빠른 속도에서 공기가 눌리며 생기는 압축성 효과가 늦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후퇴익기는 비슷한 직선익기보다 더 높은 마하수(Mach number)에서도 조종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느린 속도에서 안정성이 나빠지는 문제가 생겼고, 설계자들은 날개를 35도 젖히고 앞전에 자동 슬랫을 달아 이를 풀었습니다.
첫 XP-86은 1947년 10월 1일 날았고, 1948년 4월에는 얕게 내리꽂으며 마하 1을 넘었습니다. 두 기체의 첫 비행은 석 달이 채 차이 나지 않습니다. 무장도 달랐습니다. 세이버는 기수에 .50구경 M3 기관총 6정을 달았고, 처음의 수동 거리 측정식 마크 18 조준기는 뒤의 형식에서 레이다로 거리를 재는 A-1CM 조준기로 바뀌었습니다.
1951~1953년의 흐름
1950년 12월, 미 공군의 초기 세이버 부대인 제4전투요격비행단이 서울에 왔습니다. 12월 17일에는 NASM이 알려진 첫 후퇴익 전투기끼리의 전투라고 적는 싸움이 벌어져 브루스 힌턴(Bruce H. Hinton) 중령이 MiG-15를 떨어뜨렸습니다. NASM이 가진 F-86A도 이 부대와 함께 1950년 12월 일본으로 옮겨졌고, 대부분의 임무를 서울 가까운 김포 기지에서 날았습니다.
다른 나라 부대도 있었습니다. 호주 공군 77비행대대는 프로펠러기 무스탕을 글로스터 미티어(Gloster Meteor) F Mk8 제트기로 바꾼 뒤, 1951년 7월 29일 김포에서 첫 제트 전투 임무를 날았습니다. 미티어와 MiG-15의 첫 충돌은 8월 29일이었습니다.
처음 맞붙은 결과가 좋지 않자 미티어의 운용이 제한돼, 77비행대대는 미그 앨리에 들어가지 않고 초계와 경폭격기 호위, 지상 공격을 맡았습니다. 12월 2일에는 역할이 더 좁아졌고, 1952년 1월 8일부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주로 지상 공격을 했습니다. 이 비행대대와 함께 작전에 나선 영국 공군 조종사 37명 가운데 6명이 숨지고 1명은 격추돼 포로가 됐습니다.
하늘에 나타나는 MiG의 수는 갈수록 늘었습니다. 1951년 10월 2일 한국 상공에서 관측된 MiG-15는 180기로 그때까지 가장 많았습니다. 11월 29일에는 300~320기가 관측돼 기록이 바뀌었고, 유엔 전투기는 네 번의 큰 공중전에서 약 265기와 맞붙었습니다.
1952년 2월 27일에는 F-86 86기가 북서부 상공에서 MiG-15 404기를 관측했습니다. 연표는 이 숫자에 "맞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1952년 4월 1일 북서부 상공에서는 그해 가장 큰 공중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날 보고된 결과는 MiG 10기 격추, 3기 격추 추정, 12기 피해였고, 유엔군은 F-86 1기를 잃고 2기가 가볍게 다쳤습니다. 이런 날들이 이어진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서명됐고, 그날 밤 10시에 모든 적대 행위가 그쳤습니다.
숫자는 누가 셌느냐에 따라 다르다
미그 앨리의 손실 숫자는 대개 10 대 1 같은 비율 하나로 전해집니다. 이 비율은 당시 유엔군 쪽이 센 숫자에서 나온 것이고, 상대편이 주장한 숫자는 전혀 다릅니다. 세는 대상과 기간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먼저 당시 유엔군 쪽 집계입니다. NASM의 F-86 쪽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세이버가 MiG-15를 800기 가까이 격파하고 F-86은 80기 미만을 잃었다고 적고, 다른 문단에서는 10 대 1이 넘는 승리 비율이라고 적습니다. 같은 박물관의 MiG-15 쪽에도 F-86과의 전투에서 MiG-15가 10:1의 손실 비율을 겪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한편 미 해군 연표의 1952년 8월 4일 줄은 전쟁이 시작된 뒤 공산군 MiG가 1,000기 넘게 격추됐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둘도 그대로 견줄 수 없습니다. 앞의 것은 세이버가 전쟁 끝까지 거둔 숫자이고, 뒤의 것은 1952년 8월까지 모든 유엔 항공기가 거둔 숫자입니다.
상대편의 숫자는 소련의 참전이 더는 국가 기밀이 아니게 된 뒤에 나왔습니다. 1989년부터 관련 사실이 쏟아져 나왔고, 소련 참전 조종사들도 한국 공중전에 나섰다고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븐 잘로가(Steven J. Zaloga)가 1991년 2월 미국의 『Air Force Magazine』(지금의 Air & Space Forces Magazine)에 쓴 글에는 양쪽의 주장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소련 쪽 자료는 전쟁 끝까지 미군기를 1,200기 넘게 떨어뜨렸다고 주장했고, 중국은 85기를 주장했습니다. 세이버 조종사들이 주장한 MiG-15는 792기입니다.
같은 글에는 미 공군이 밝힌 자기 쪽 공대공 손실 139기(전투기 121기, 폭격기 18기)도 있습니다. 이 139기는 F-86만이 아니라 미 공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모두 합친 숫자라, 앞에 나온 'F-86 80기 미만'과는 세는 대상이 다릅니다.
소련·중국 쪽의 주장도, 세이버 쪽의 주장도 모두 당시 자기 쪽이 센 숫자입니다. 어느 쪽 주장이든 상대편 기록과 맞춰 본 숫자는 이 글에서 연 공개 자료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어느 쪽 숫자도 정답으로 고르지 않고, 누가 센 숫자인지와 함께 나란히 둡니다. 관측된 MiG의 수도 당시 보고된 숫자라, 연표 스스로 "맞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날이 있습니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글의 숫자는 대부분 비행기의 대수지만, MiG-15와 F-86은 모두 조종사 한 사람이 타는 비행기였습니다. 호주 비행대대와 함께 날다 숨진 영국 조종사 여섯 명처럼, 기념관이 이름으로 기록해 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긴 것
두 기체는 한국을 떠나서도 오래 남았습니다. MiG-15는 17개 형식으로 1만 2,000기 넘게 만들어져 약 35개 나라가 썼고, 한국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MiG-17로 개량됐습니다. 세이버는 모두 8,443기가 만들어졌고 그 가운데 554기가 F-86A였으며, 캐나다·일본·이탈리아에서도 면허 생산됐습니다.
미그 앨리가 전쟁 전체에서 차지한 몫은 크게 보지 않는 시각도 있습니다. NASM의 전시 설명은 한국과 베트남의 공중 공격이 재래식 무기로 치른 제한된 작전이었고, 항공력이 두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다만 미국의 전략 항공력이 소련과 중국이 전쟁을 세계 전쟁으로 넓히지 않게 막는 데 도움이 됐다고 덧붙입니다.
국경을 넘지 않는다는 선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950년 11월의 전보들은 압록강 너머로 몇 분을 더 날지 말지가 동맹국 정부들이 전면전을 걱정하며 다툰 정치 문제였음을 보여 줍니다. 미그 앨리라는 좁은 하늘은 비행기의 성능과 함께 그 결정이 만든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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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진호 전투: 영하 30도의 철수: MiG-15가 나타난 같은 해 겨울, 땅 위의 싸움을 다룹니다.
- 사격통제체계: 센서와 무장 사이의 연결고리: 레이다로 거리를 잰 A-1CM 조준기에서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 레이다: 전파로 거리와 움직임을 어떻게 알까: 돌아온 전파로 거리를 재는 원리를 봅니다.
- 공대공 미사일: 미사일의 눈은 무엇을 볼까: 기관포 다음 시대의 공중전 무기를 다룹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하늘의 표적을 막는 또 다른 길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