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3월 24일, 나토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공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78일 동안 나토는 땅에 군대를 들여보내지 않고 하늘에서만 전쟁을 치렀습니다. 6월 10일 공습이 멈췄을 때 유고군은 코소보에서 물러나고 있었고, 이틀 뒤 나토가 이끄는 평화유지군이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이 78일을 두고는 지금도 묻는 것이 많습니다. 공습만으로 정말 상대가 물러섰는지, 안보리 승인 없는 개입이 정당했는지, 민간인은 몇 명이 숨졌는지. 이 글은 나토와 유엔, 구유고 국제형사재판소(ICTY), 미 국무부의 기록으로 공습이 왜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났는지, 그리고 무엇을 두고 지금까지 목소리가 갈리는지를 따라갑니다.

유고슬라비아가 쪼개진 뒤의 코소보

코소보는 세르비아 남쪽에 있는 주로, 주민 대부분이 알바니아계입니다. 1987년 5월 세르비아 공산당의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의 당 회의에 갔을 때, 그곳 세르비아인들이 회의장 밖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 주는 모습이 세르비아 쪽 언론에 크게 실리면서, 은행가 출신이던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밀로셰비치는 1989년부터 세르비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두 자치주가 헌법으로 보장받던 자치권을 빼앗으려 했고, 1989년 중반 두 주는 세르비아에 다시 묶였습니다. 1989년 베오그라드가 코소보를 직접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계 사이에는 긴장과 폭력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사이 유고슬라비아는 쪼개지고 있었습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했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새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만들었습니다. 이어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쟁은 3년 동안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고 수백만 명을 집에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1998~1999년, 코소보에서 다시 폭력이 터졌습니다.

1998년: 충돌과 안보리 결의

오래 쌓인 긴장은 1998년 2월 말 세르비아 군·경찰과 코소보 알바니아인 사이의 폭력으로 터졌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3월 31일 결의 1160을 낸 데 이어, 9월 23일 결의 1199에서 세르비아 보안군과 유고 군의 "지나치고 무차별한" 무력 사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많이 났다고 적었습니다. 같은 결의는 사무총장 추산으로 23만 명 넘게 집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10월 13일 나토의 북대서양이사회는 공습을 실제로 준비하는 활성화 명령을 승인했습니다. 미국의 리처드 홀브룩 대사가 밀로셰비치와 휴전과 코소보 주둔 세르비아 병력 수준에 합의했고, 밀로셰비치가 따르기로 하면서 공습은 취소되었습니다. 합의를 지켜보려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코소보 검증단을 보냈고, 나토는 공중 감시를 맡았습니다.

그래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998년 말까지 30만 명 넘는 코소보 주민이 집을 떠났고, 여러 휴전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으며, 협상은 멈춰 있었습니다.

라착과 랑부예: 외교가 멈춘 석 달

1999년 초 상황은 다시 타올랐습니다. 나토는 양쪽의 도발과 세르비아 군·경찰의 지나친 무력 사용을 함께 꼽고, 그 가운데 1월 15일 라착 마을에서 비무장 민간인 40명이 학살된 일을 적습니다. 국제 사회는 평화적 해결에 새 힘을 싣겠다며 다시 중재에 나섰습니다.

회담은 2월 프랑스 랑부예와 3월 파리에서 두 차례 열렸습니다. 나토가 이끄는 군이 주둔해 보장하는 조건으로, 코소보가 유고 연방 안에서 자치를 누리는 안이었습니다. 알바니아계 대표단은 이 안을 받아들였고 베오그라드는 거부했습니다.

3월 들어 세르비아 군·경찰은 병력과 전차를 더 들여와 작전을 키웠고, 수만 명이 집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홀브룩이 마지막으로 밀로셰비치를 설득하러 갔지만 실패했습니다. 나토는 3월 24일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세로 연표 열네 줄. 1987년 5월 밀로셰비치가 코소보 당 회의에서 세르비아인의 이야기를 듣고 널리 보도됨, 1989년 베오그라드 직접 통치와 1989년 중반 자치권 상실, 1998년 2월 말 세르비아 군경과 코소보 알바니아인의 폭력, 1998년 9월 23일 안보리 결의 1199(23만 명 넘게 집을 떠남), 1998년 10월 13일 나토 공습 활성화 명령과 취소, 1999년 1월 15일 라착에서 비무장 민간인 40명 사망, 1999년 2~3월 랑부예·파리 회담(알바니아계 수락, 베오그라드 거부), 3월 24일 동맹군 작전 시작, 5월 7일 베오그라드 중국 대사관 오폭, 6월 3일 아티사리·체르노미르딘이 가져간 평화안 수락, 6월 9일 군사기술협정, 6월 10일 공습 중단(78일째)과 결의 1244(14대 0, 기권 1), 6월 12일 KFOR 첫 부대 진입, 6월 20일 세르비아군 철수 완료. 3월 24일부터 6월 10일까지 78일로 묶여 있다
자치권 박탈에서 KFOR 진입까지, 1987~1999년 연표 (도표)(도표)

78일의 공습

작전 이름은 동맹군 작전(Operation Allied Force)이었습니다. 1999년 3월 24일 시작해 6월 10일 중단되기까지 모두 78일이 걸렸습니다. 나토가 밝힌 정치 목표는 다섯 가지였습니다. 모든 군사 행동과 폭력·탄압을 검증할 수 있게 멈추는 것, 코소보에서 군·경찰·준군사 조직을 빼내는 것, 국제 군사 주둔을 받아들이는 것, 모든 난민과 실향민이 조건 없이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 국제법과 유엔 헌장에 맞는 정치 합의를 맺는 것입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첫날 세 가지를 내세웠습니다. 나토가 진지하다는 것을 보이고, 코소보 민간인에 대한 더 잔혹한 공세를 막고, 필요하면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군의 전쟁 능력에 큰 타격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목표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공습이 시작되자 밀로셰비치는 물러서기는커녕 대규모 인종 청소를 곧바로 강화했고, 수십만 명의 코소보 사람이 이웃 나라로 달아나거나 쫓겨났습니다.

공습은 한꺼번에 쏟아붓지 않고 단계적으로 넓혀 갔습니다. 처음에는 유고의 방공망을 겨냥했고, 그 뒤 나토가 가진 가장 앞선 정밀유도 체계를 써서 범위를 키웠습니다.

나토 집계로 78일 동안 3만 8,000회 넘게 출격했고 그 가운데 1만 484회가 표적을 공격한 타격 출격이었습니다. 출격을 3만 8,400회로 센 나토 수치도 있고, 투하한 공중 탄약은 2만 3,614발이었습니다. 연합군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공습에는 19개 동맹국이 함께했습니다. 그중 분쟁이 시작되기 겨우 2주 전에 가입한 새 회원국 셋은 정치적으로 지지했지만 전투 병력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역사와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19개국이 한목소리를 내는 일 자체가 이 작전의 큰 숙제였습니다.

두 칸 막대 도표. 위 칸은 나토 수치로 본 공습이다. 전체 출격 3만 8,400회(나토 누리집은 3만 8,000회 넘게), 타격 출격 1만 484회, 투하한 공중 탄약 2만 3,614발, 연합군 전사자 0명. 아래 칸은 폭격으로 숨진 민간인을 자료별로 적었다. 휴먼라이츠워치 488~527명(90건), 유고 외무부 자료 약 495명(부상 820명), ICTY 검토 위원회 약 500명, 6월 10일 안보리에서 중국 대표가 주장한 1,000명 넘게(점선, 집계가 아닌 주장). 두 칸의 눈금은 서로 다르다
78일을 숫자로: 출격·탄약과 자료마다 다른 민간인 사망 집계 (도표)(도표)

왜 지상군을 보내지 않았나

나토 전략에서 가장 드러나게, 가장 뜨겁게 다툰 대목은 지상군을 뺀 결정이었습니다. 클린턴은 3월 24일 "전쟁을 하러 코소보에 우리 군을 보낼 생각이 없다"고 말했고, 이렇게 방침을 공개한 말이 특히 비판을 받았습니다. 미 의회조사국(CRS)의 1999년 보고서는 이 말을 군사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말이라 부르면서, 머뭇거리는 동맹국들을 안심시키려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5월 18일 클린턴은 미국도 동맹국도 어떤 선택지를 빼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말했습니다.

지상군에는 분명한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땅에서 군대가 다가오면 밀로셰비치는 공습을 버티며 시간을 끌기 어려워집니다. 대신 모든 동맹국이 병사들의 죽음과 부상을 각오해야 합니다. 나토 국가들은 끝내 침공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는데, 서방 쪽 사상자가 낳을 정치적 부담도 그 까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미군이 지상 전투부대를 크게 보낸 것은 태스크포스 호크 하나였습니다. 아파치 공격 헬기가 중심인 이 부대는 4월 4일 발표 때 열흘이면 배치된다고 했지만, 알바니아에 다 모이기까지 4월 21일이 걸렸습니다.

수도 티라나의 공항은 한 번에 C-5 수송기 한 대나 C-17 두 대만 받을 수 있었는데, 부대를 옮기는 데 150회 넘는 수송 비행이 필요했습니다. 같은 공항은 코소보에서 몰려온 피란민을 돕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아파치는 끝내 투입되지 않았고, 지상군을 쓰거나 위협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를 두고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집니다.

끝내기: 군사기술협정과 결의 1244

끝은 외교에서 왔습니다. 6월 3일 핀란드의 아티사리 대통령과 러시아의 체르노미르딘 특사가 베오그라드에 가져간 평화안을 유고 정부가 받아들였습니다. 6월 9일 나토와 유고 연방은 군사기술협정을 맺었고, 다음 날 유고군 철수가 시작된 것을 확인한 나토가 공습 중단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6월 10일 안보리는 유엔 헌장 7장에 따라 결의 1244를 찬성 14, 반대 0, 기권 1(중국)로 채택했습니다. 결의는 유고 연방에 코소보의 폭력과 탄압을 즉시 끝내고 모든 군·경찰·준군사 조직을 빠르게 철수하라고 요구하면서도, 유고 연방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회원국과 국제기구가 세울 국제 안보 주둔에는 적대 행위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막는 일과 코소보 해방군(Kosovo Liberation Army, KLA)의 무장 해제가 맡겨졌습니다.

6월 12일 코소보 평화유지군(KFOR)의 첫 부대가 코소보에 들어갔고, 6월 20일 세르비아군 철수가 끝났습니다. KFOR는 처음에 약 5만 명이었습니다. 그 직전 보스니아에 있던 러시아군 180~200명이 KFOR보다 먼저 프리슈티나 비행장으로 달려가 차지하는 일도 있었는데, 일부 비판자는 이를 나토 지휘 체계의 약점으로 보았습니다.

밀로셰비치는 왜 물러섰을까요. 1999년 11월의 CRS 보고서는 "분명하지 않다"고 먼저 못 박은 뒤, 나토 폭격의 피해, 흔들리지 않은 동맹의 결속, 지상전 계획 가능성, 자기 군을 지키려는 뜻, 보호자로 기대한 러시아가 등을 돌린 것을 주된 까닭으로 꼽았고, 유고군이 입은 피해 자체는 큰 요인이 아니었을 수 있다고도 적었습니다. 2001년 RAND 연구(램버스)는 공습이 동맹 승리의 유일한 요인은 결코 아니었지만, 버텨 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항복의 무대를 마련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가운데 위 상자는 1999년 6월 3일 평화안 수락이다. 아래 다섯 상자가 선으로 이어진다: 나토 폭격의 피해, 흔들리지 않은 동맹의 결속, 지상전 계획 가능성, 자기 군을 지키려는 뜻, 보호자가 되지 않은 러시아. 1999년 11월 미 의회조사국(CRS) 보고서가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며 꼽은 주된 요인들이다. 아래 노란 상자에는 같은 보고서의 '유고군이 입은 피해는 큰 요인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말, 초록 상자에는 RAND(램버스, 2001)의 '공습이 유일한 요인은 결코 아니지만 버텨 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무대를 마련했다'는 결론이 있다
베오그라드는 왜 물러섰나: 1999년 CRS가 꼽은 요인과 2001년 RAND의 결론 (도표)(도표)

정밀유도무기와 동맹 사이의 능력 차

나토가 내세운 무기는 정밀유도무기(precision-guided munition, PGM)였습니다. 폭탄이나 미사일이 스스로 길을 고쳐 정해진 곳에 떨어지도록 만든 무기입니다.

그런데 그 무기를 고루 가진 나라는 많지 않았습니다. 공습을 지휘한 미 공군의 쇼트 중장은 능력 부족 때문에 표적 배정이 달라졌고, 특히 정확한 야간 폭격은 미국 자산에 더 기대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나토 군사위원회 의장이던 이탈리아의 벤투로니 제독과 전 의장인 독일의 나우만 장군은 지금의 능력으로는 유럽 회원국이 미국 없이 이 임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 평가에서 부족하다고 꼽힌 분야는 길었습니다. 정밀유도무기, 레이저 표적 지시기(laser designator) 능력, 안전하게 서로 통하는 통신, 피아 식별, 전자전, 방공 위협 경보, 정보 수집과 배포, 대형 수송기, 공중급유(aerial refueling)기, 야간 투시 능력입니다. 레이저 표적 지시기는 레이저를 표적에 비춰, 레이저 유도 폭탄이 그 반사광을 따라가게 하는 장비입니다. 나토는 1999년 4월 창설 50주년 정상회의에서 이런 부족을 찾아 대책을 내는 방위능력구상(DCI)을 시작했습니다.

논란이 된 무기도 있었습니다. 나토는 집속탄을 썼고, 열화우라늄탄을 쓴 증거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집속탄을 따로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조약 조항이 없었고, 공습을 검토한 ICTY 위원회는 두 무기 모두에 대해 수사를 시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민간인 피해와 중국 대사관

연합군 전사자가 없었다는 숫자 뒤에는 유고 쪽 민간인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 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90건의 사건을 기록해 나토 폭격으로 숨진 유고 민간인을 적게는 488명, 많게는 527명으로 보았고, 그 죽음의 62~66%가 12건에서 났다고 했습니다. 유고 외무부가 엮은 자료는 기록된 사례에서 약 495명이 숨지고 820명이 다쳤다고 적었습니다.

ICTY 검사를 위해 공습을 검토한 위원회는 유고에 직접 가지 않고 문서만으로 살폈고, 두 자료와 비슷한 값을 약 500명으로 보았습니다. 결론은 수사를 시작하지 말라는 권고였지만, 같은 결론에서 나토가 실수를 인정했고 판단 착오가 있었을 수 있으며 일부 표적 선택은 법적 논쟁거리일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6월 10일 안보리에서 중국 대표는 나토가 민간인 1,000명 넘게를 죽이고 100만 명 가까운 실향민과 난민을 낳았다고 주장했습니다.

5월 7일에는 베오그라드의 중국 대사관이 폭격을 맞았습니다. 미 국무부 피커링 차관이 6월 17일 중국 정부에 낸 설명으로는 중국 기자 3명이 숨지고 대사관 직원 20명이 다쳤고, ICTY 위원회의 표에는 민간인 3명 사망, 15명 부상으로 적혀 있습니다.

미국은 이 공격이 실수였고 누구도 대사관을 겨냥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원래 표적으로 삼은 유고 정부 기관 건물의 위치를 잘못 잡았고, 대사관의 새 위치가 어느 데이터베이스에도 없었으며, 검토 과정이 두 잘못을 잡지 못했다는 세 가지 실패가 겹쳤다는 설명입니다.

맞은 건물은 군사 목표가 아닌, 분명한 민간 시설이었습니다. 나토와 미국 정부 기관들이 공식 사과했고, 미국은 중국 정부에 2,800만 달러, 사상자 가족에게 450만 달러를 주기로 했습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정보 요원 한 명을 해임하고 고위 관리자 여섯 명을 징계했습니다.

땅 위의 피해는 폭격만이 아니었습니다. ICTY는 밀로셰비치를 기소하면서 코소보 알바니아계 민간인 약 80만 명을 강제로 추방한 혐의를 적었습니다. 밀로셰비치는 2006년 3월 11일 숨졌고 재판은 판결 없이 끝났기 때문에, 이 숫자는 기소장에 적힌 혐의로 남아 있습니다.

정당했나: 서로 다른 목소리

코소보 공습에는 안보리의 승인이 없었습니다. 이 점이 지금까지 가장 크게 갈리는 대목입니다. 6월 10일 안보리 회의에서 나온 말들을 나란히 놓으면 그 차이가 보입니다.

중국 대표 선궈팡은 미국이 이끄는 나토가 안보리 승인 없이 주권 국가를 공격해 유엔 헌장과 국제법을 심각하게 어겼다고 했습니다. 러시아 대표 라브로프는 국제 관계의 틀을 크게 흔든 나토의 일방적 행동을 강하게 비난했고, 유고 대표 요바노비치는 자기 나라를 침략의 피해자라고 불렀습니다. 반대편에서 프랑스 대표는 랑부예 회담이 베오그라드의 비타협으로 깨졌고, 커지는 민간인 탄압 때문에 나토가 인종 청소와 추방을 끝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대표는 베오그라드가 3월에 평화를 받아들였다면 몇 달의 죽음과 파괴, 강제 이주를 피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법률가들의 정리도 한쪽으로 기울지 않습니다. ICTY 위원회는 "안보리의 사전 승인 없는 인도적 개입"의 정당성이 뜨겁게 논쟁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소에는 침략, 곧 평화에 반한 죄를 다룰 권한이 없어서, 검사실은 전쟁에 나선 것 자체가 합법이었는지는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위원회가 본 것은 전쟁 중에 쓴 수단이 전쟁법에 맞았는지뿐이었습니다.

나토는 표적을 고를 때 국제법에 맞는지, 군사적으로 정당한지, 민간인 피해를 줄였는지를 여러 지휘 단계에서 검토했다고 밝힙니다. CRS는 이 분쟁이 동맹국들이 일부는 인도적 이유로 전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새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안보리 회의록과 ICTY 보고서는 모두 공개되어 있어, 각 쪽의 말을 원문으로 견주어 읽을 수 있습니다.

78일이 남긴 것

코소보를 힘으로 세르비아에서 떼어 내거나 밀로셰비치를 몰아내는 것은 공습이 내세운 목표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결의 1244가 유고 연방의 영토 보전을 다시 확인하면서, 코소보는 유엔이 다스리는 땅이 되었습니다.

밀로셰비치는 2001년 권력을 잃고 체포되어 헤이그의 국제 재판소로 넘겨졌고, 2006년 재판이 끝나기 전에 감옥에서 숨졌습니다. 코소보는 2008년 독립을 선언했고, 러시아의 반대 속에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나라가 이를 승인했습니다.

KFOR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처음 약 5만 명이던 병력은 2002년 초 약 3만 9,000명, 2003년 말 1만 7,500명으로 줄었고, 지금은 31개 동맹·협력국의 약 4,700명이 결의 1244의 임무를 이어 갑니다. 나토는 알바니아계를 인종 청소에서 지키려고 개입했던 것처럼, KFOR 배치 뒤로는 코소보의 세르비아인을 같은 운명에서 지키는 데도 힘쓰고 있다고 밝힙니다.

군사 쪽에서는 두 가지가 눈에 띕니다. 하나는 지상군을 들이지 않은 채 상대가 물러섰다는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정밀 타격과 야간 폭격 능력이 미국에 몰려 있었다는 동맹 안의 격차입니다. 앞의 것은 그 까닭을 두고 설명이 갈립니다. 뒤의 것은 유럽 나라들의 능력 개발 관심을 북돋웠을 수 있지만, CRS 보고서가 나온 1999년 11월까지 그 관심은 국방 예산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정밀유도폭탄: 코소보 공습의 중심에 있던 정밀 타격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봅니다.
  • 공중급유: 동맹 사이 능력 차로 꼽힌 급유기가 하는 일을 봅니다.
  • 전자전: 부족한 분야로 꼽힌 전자전이 무엇인지 봅니다.
  • 걸프전 공중전: 스텔스기와 정밀유도무기가 주목받은 이유. 8년 앞선 1991년의 공중전을 다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