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7일 밤 9시 29분, 원산 앞바다의 미 해군 중순양함 세인트폴(USS Saint Paul)이 8인치 포탄 한 발을 쏘았습니다. 정전이 효력을 내는 밤 10시 몇 초 전에 떨어지도록 맞춘 포탄이었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는 이것을 한국전쟁에서 미 해군이 쏜 마지막 포탄으로 기록합니다.
그 한 발 뒤로 2년 넘는 협상이 있었습니다. 회담이 열리는 동안에도 전선에서는 이름 붙은 능선마다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회담장에서는 무엇을 두고 그렇게 오래 다투었고, 능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으며, 마지막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글은 1951년 7월 개성의 첫 회의부터 1953년 7월 판문점의 서명까지를 회담과 전선 두 줄로 나란히 따라갑니다.
회담은 왜 1951년 여름에 열렸나
전쟁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나자 두 진영 모두 한계를 보았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휴전회담 항목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공산군 측은 자기 힘으로 한반도 전체를 차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유엔군 측도 힘으로 응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미 해군 쪽 기록도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중국군의 두 차례 봄 공세가 큰 대가를 치르고 실패한 뒤 전선은 점점 굳어 갔고, 같은 고지가 여러 번 주인을 바꾸었습니다.
첫 제안은 소련에서 나왔습니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J. Malik)가 유엔 방송에서 휴전 협상을 제의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7월 8일 개성에서 양쪽 연락장교가 절차를 맞추었고, 7월 10일 개성 고려동의 내봉장(來鳳莊)에서 본회의가 열렸습니다.
유엔군 측 대표단은 미 해군의 조이(C. T. Joy) 중장을 비롯한 미군 장성들과 국군의 백선엽 소장이었습니다. 공산군 측은 북한의 남일 대장과 중공군 장성들이 나왔습니다. 회담 장소는 1951년 10월 하순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겨졌습니다.
다섯 가지 의제
처음 싸움은 "무엇을 이야기할지"였습니다. 유엔군 측은 군사분계선, 휴전 감시, 포로처럼 휴전에 앞서 풀어야 할 순수한 군사 문제만 다루자고 했습니다.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분계선으로 정하는 일과 외국 군대의 철수를 먼저 다루자고 맞섰습니다.
협상을 시작한 지 16일 만인 7월 26일, 양쪽은 다섯 가지 의제에 합의했습니다.
| 의제 | 내용 |
|---|---|
| 제1의제 | 협상 의제의 채택 |
| 제2의제 | 군사분계선의 설정 |
| 제3의제 | 휴전 감시 방법과 그 기구의 설치 |
| 제4의제 | 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 |
| 제5의제 | 양쪽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
가장 빨리 풀린 것은 제5의제였습니다. 1952년 2월 7일 시작해 열하루 만인 2월 17일에 합의했고, 휴전협정이 효력을 낸 뒤 3개월 안에 정치회담을 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3의제는 두 단계로 풀렸습니다. 1952년 2월 23일에는 휴전 뒤 외국군의 교체 병력을 한 달에 3만 5,000명까지 드나들게 한다는 데 합의했고, 5월 7일에는 스웨덴·스위스(유엔군 측 지명)와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공산군 측 지명) 네 나라로 감시 기구를 꾸리기로 했습니다.
가장 오래 걸린 것은 제4의제 포로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오히려 쉽게 풀릴 것으로 여겨졌던 의제였습니다.
회담장의 설전, 능선의 혈전: 1951년
회담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전제가 붙어 있었습니다. 최종 합의에 이를 때까지 양쪽 모두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백과사전 휴전회담 항목은 그 결과를 "휴전회담장에서는 설전(舌戰)이, 전선에서는 혈전(血戰)이" 벌어졌다고 표현합니다.
유엔군은 협상하는 동안에도 목표를 좁힌 제한 공격으로 압력을 이어 갔습니다. 공산군은 빼앗긴 진지를 되찾거나, 회담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북쪽으로 튀어나온 유엔군 진지를 공격했습니다. 1951년 8월 22일 분계선 문제로 공산 측이 회담 중단을 발표하자 전투는 다시 거세졌습니다.
그해 늦여름과 가을의 큰 싸움은 강원도 양구 북쪽 산지에서 이어졌습니다. 유엔군은 전쟁을 넓히지 않는 범위에서 제한된 목표들을 차례로 쳤습니다.
- 피의 능선(Bloody Ridge), 8월 17일~9월 3일. 983·940·773고지를 잇는 능선으로, 이름은 미군 신문 『Stars and Stripes』가 붙였습니다.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북한군 제12·제24사단을 물리치고 능선을 차지했습니다. 제36연대는 이 싸움에서 1,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국군과 미군을 합친 사상자는 1개 연대 규모였습니다.
- 펀치볼(해안분지), 8월 31일~9월 20일.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가 해안분지의 북쪽과 동쪽 고지들을 빼앗아 분지를 확보했습니다.
-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9월 13일~10월 13일. 미 제2사단이 894·931·851고지를 공격했고, 국군 제7사단이 계곡 건너편에서 함께 공격했습니다. 한 달 동안 유엔군은 3,7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상자는 2만 5000여 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공세가 이어진 끝에, 10월 22일 공산군 측의 요청으로 판문점에서 회담이 다시 열렸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비무장지대 항목은 유엔군 측의 이 공세가 회담 재개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먼저 그은 선: 군사분계선 합의
제2의제에서 유엔군 측은 지금 양쪽 군대가 맞닿은 접촉선을,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분계선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결국 접촉선 안이 받아들여져 1951년 11월 27일 군사분계선 협정에 조인했습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줄일 수 있습니다.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지금의 접촉선을 분계선으로 하고 남북으로 2 km씩, 폭 4 km의 비무장지대를 둔다. 이 선은 30일 안에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만 유효하고, 그러지 못하면 조인 당시의 접촉선을 분계선으로 한다.
30일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12월 27일까지 휴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 선은 의미를 잃었고, 분계선은 1953년 7월 22일에야 다시 확정되었습니다.
1년 반을 끈 포로 문제
포로 문제는 1951년 12월 11일부터 논의되었습니다. 그달 명단을 주고받을 때 유엔군 측은 132,474명을 내놓았고, 공산군 측이 내놓은 국군·유엔군 포로 명단은 11,559명이었습니다.
더 큰 쟁점은 송환 원칙이었습니다. 유엔군 측은 포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한국·북한·중국·대만 가운데 갈 곳을 고르는 자유송환(자원송환)을 내세웠습니다. 공산군 측은 모든 포로를 무조건 고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제송환(전원송환)을 고집했습니다. 미 해군 역사 자료도 협상이 늘어진 큰 까닭으로, 항복한 중국군 가운데 많은 이가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정을 듭니다.
1952년 4월 유엔군사령부가 포로들을 조사한 결과는 자료마다 다르게 옮겨져 있습니다. 휴전회담 항목은 민간인 억류자를 포함한 약 17만 명 가운데 10만 명이 자유 송환을 원했다고 적고, 한국전쟁 항목은 유엔 측이 귀국 희망자를 약 8만 3000명(북한 7만 6600명, 중국 6,400명)으로 통고했다고 적습니다. 공산 측은 강제송환을 다시 주장했습니다. 이미 1952년 2월 27일부터 약 두 달 멈춘 적이 있던 회담은 10월 8일 날짜를 정하지 않은 휴회에 들어갔습니다.
수용소 안도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모두 15만 명이 있었습니다.
5월 7일 수용소장 돗드(Francis T. Dodd) 준장이 제76수용소 출입구에서 포로 대표와 면담하다가 포로들에게 붙잡혀 5월 10일 저녁에야 풀려났습니다. 후임 콜슨(Charles F. Colson) 준장이 포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회신했지만, 클라크(M. W. Clark) 유엔군사령관은 이 약속을 강요에 의한 것이라며 무효로 선언했습니다. 백과사전 집필자는 소요의 뿌리를 친공·반공으로 갈린 포로들의 갈등과 공산군 측의 조종에서 찾습니다.
1952년 10월: 백마고지와 저격능선
회담이 멈춘 그 달, 강원도 철원과 김화에서 이 전쟁의 가장 큰 고지전 두 개가 벌어졌습니다.
백마고지(395고지), 10월 6~15일. 철원 북쪽 백마고지를 지키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열흘 동안 12차례 쟁탈전이 오갔고 고지의 주인이 7번 바뀐 끝에 국군이 고지를 지켰습니다.
피해 숫자는 같은 백과사전 항목 안에서도 둘입니다. 중공군 1만여 명이 전사·부상·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다는 문장과, 중공군 1만 3,000여 명을 격멸했다는 문장이 함께 있습니다. 국군 제9사단의 사상자는 3,500여 명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저격능선, 10월 14일~11월 24일. 김화 북쪽 7 km, 해발 580 m 정도에 넓이 1 km² 정도인 작은 능선입니다.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15군과 42일 동안 이 능선을 두고 싸웠습니다. 중공군은 2개 연대 병력을 잃고 오성산 북쪽으로 물러났고, 국군도 1개 연대 병력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국군 측에서는 이 두 싸움을 6·25전쟁의 2대 격전으로 부릅니다. 중공군 측은 저격능선과 그 옆 삼각고지의 싸움을 묶어 '상감령전역'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남겼습니다. 같은 가을의 싸움이 양쪽 기록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남은 것입니다.
1953년의 마지막 매듭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은 뒤 협상은 빨라졌습니다. 4월에는 먼저 병들거나 다친 포로를 서로 바꾸었습니다. 4월 11일 상병 포로 교환 협정이 맺어졌고, 20일부터 교환이 시작되었습니다. 회담이 다시 열린 날은 자료에 따라 4월 16일(휴전회담 항목)과 4월 26일(한국전쟁 항목)로 다릅니다.
6월 8일 오후 2시, 판문점에서 포로 협정이 서명되었습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W. K. Harrison Jr.) 중장과 공산군 측 남일 대장이 서명했고, 영문·한국문·중국문 세 가지로 만들었습니다.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스위스·스웨덴·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인도로 이루어진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맡기고, 인도 대표가 의장을 맡기로 했습니다.
한국 정부와 국민은 휴전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첫 휴전반대 국민대회는 1951년 6월 10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 열렸고, 1953년 3·1절 뒤에는 반대 운동이 5월 말까지 7,000회에 이를 만큼 퍼졌습니다. 대한민국 대표는 끝내 휴전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6월 18일부터 이틀 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결정으로 반공포로들이 수용소를 빠져나갔습니다. 8개 수용소에 있던 35,698명 가운데 27,388명이 탈출했고, 56명이 그 과정에서 숨졌습니다. 공산군 측은 강하게 항의하며 회담을 다시 멈추었고, 유엔군 측이 한국군도 휴전협정을 지키도록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회담이 이어졌습니다.
미국은 6월 25일 로버트슨(W. S. Robertson) 특사를 보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1~12일 무렵 휴전에 동의했고, 그 조건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장기 경제원조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사이에도 전투는 이어졌고, 특히 한국군 방어선에 대한 공격이 거셌습니다. 7월 22일 군사분계선이 마지막으로 확정되었습니다.
7월 27일: 서명과 마지막 포성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해리슨 중장과 남일 대장이 휴전협정서와 부속 협정서에 서명했습니다. 이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김일성 북한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중공군 사령관이 각자의 후방 사령부에서 서명했습니다.
협정은 그날 밤 10시에 효력을 냈습니다. 같은 날 영국 하원에서 셀윈 로이드(Selwyn Lloyd) 국무상은 협정이 영국 서머타임 새벽 2시에 서명되었고 12시간 뒤 사격을 멈추기로 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을 "두 해의 협상을 포함한 3년 넘는 전쟁"이라 부르며, 한국 사람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회담이 몇 번 열렸는지도 자료마다 셈이 다릅니다. 유엔군사령부는 서명에 합의하기까지 158번 만났다고 하고, 백과사전 휴전회담 항목은 서명이 제159차 본회의에서 이루어졌다고 적습니다. 1952년 10월 휴회 때까지만 해도 1년 동안 200번 모이고 345시간을 썼다는 집계도 있습니다. 유엔군사령부는 이 정전을 역사상 가장 오래 협상한 정전이라고 부릅니다.
정전이 남긴 것
협정은 마지막 접촉선에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 MDL)을 그었습니다. 양쪽이 이 선에서 2 km씩 물러나 폭 4 km의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가 생겼고, 유엔군사령부 자료로 그 길이는 241 km입니다.
선을 지키기 위한 기구도 셋이 생겼습니다.
| 기구 | 구성 | 하는 일 |
|---|---|---|
| 군사정전위원회(MAC) | 양쪽이 5명씩 임명한 고급 장교 10명 | 협정 이행을 감독하고 위반을 협의해 처리 |
| 중립국감시위원회(NNSC) | 스위스·스웨덴·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 남북 각 5개 출입항에서 교체 병력·장비를 감시하고 비무장지대 밖의 위반을 조사해 보고 |
| 중립국송환위원회(NNRC) | 같은 4개국, 의장국 인도 | 송환을 거부한 포로를 맡아 다시 선택하게 함 |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중립국송환위원회의 관리 아래에서 출신국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기간은 포로교환협정 항목에 90일 이내, 중립국송환위원회 항목에 4개월로 적혀 있습니다. 모두 22,604명 가운데 88명이 중립국을 골랐고, 유엔 측은 1954년 1월 23일 설득 기간이 지난 송환 거부 포로 2만 3000명을 풀어 주었습니다.
정치회담은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협정은 1953년 8월 28일 유엔총회에서 공식으로 받아들여졌지만, 1954년 스위스 제네바의 회담에서 평화조약은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백과사전 한국전쟁 항목의 말로는, 그 뒤 휴전협정만이 유일한 공식 문서로 남았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1953년의 이 휴전을 "불안한 휴전(uneasy truce)"이라 부르며, 남과 북의 분단이 이때 굳어졌다고 봅니다.
이 2년을 미군 쪽 기록으로 더 자세히 읽고 싶다면 미 육군 군사사 센터가 펴낸 월터 허미스(Walter G. Hermes)의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가 있습니다. 휴전 협상과 그동안 이어진 고지 싸움, 거제도 포로 소요를 한 권에 다룬 책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6·25 전쟁의 발발: 1950년 6월 25일 새벽. 이 글의 협상이 끝맺은 전쟁의 첫날입니다.
- 미그 앨리: 한국전쟁의 제트기 공중전. 능선 위 하늘에서 같은 시기에 벌어진 싸움입니다.
- 자주포: 포가 스스로 움직이면 달라지는 것. 고지전에서 무거운 포격이 어떤 몫을 했는지 생각해 볼 때 오늘의 포병 체계로 이어 읽을 수 있습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2년 동안 움직이지 않는 전선을 받치는 일이 무엇인지 오늘의 군수 개념으로 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1950년대 이후 무기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 다른 갈래로 이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