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1월 20일, 라오스 국경에서 멀지 않은 베트남의 깊은 골짜기에 낙하산이 잇달아 펴졌습니다. 이튿날까지 프랑스군 5개 대대가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와 그 둘레에 내렸습니다. 작전 이름은 '카스토르(Castor)', 프랑스어로 비버라는 뜻이었습니다.
여섯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54년 5월 7일, 이 기지의 중앙 거점이 무너졌습니다. 두 달 뒤 제네바에서 정전 협정이 맺어졌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났습니다.
왜 하필 산골 분지였을까요? 활주로 두 개에 기대던 기지는 어떻게 버텼고, 미국은 왜 끝내 폭격기를 보내지 않았을까요? 당시 미국 외교관의 전보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록, 국방부의 내부 연구로 그 여섯 달을 따라가 봅니다.
식민지 전쟁과 미국의 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식민지를 되찾으려 했습니다. 1946년 협상이 깨지자 베트남 북부에서 호찌민(Ho Chi Minh)의 베트민(Viet Minh)과 프랑스군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습니다. 라오스는 1949년, 캄보디아는 1953년에 독립했고, 프랑스는 호찌민에 맞설 인물로 옛 황제 바오다이(Bao Dai)를 다시 세우려 했습니다.
미국은 왜 이 식민지 전쟁에서 프랑스 편에 섰을까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이웃이 차례로 따라 넘어간다는 '도미노'로 베트남과 동남아시아를 설명했습니다. 또 미국은 NATO를 키우고 서독을 다시 세우는 데 프랑스의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돈의 흐름이 그 변화를 보여 줍니다. 1950년 1천만 달러로 시작한 미국의 지원은 1954 회계연도에 10억 6,300만 달러가 되었습니다. 그해 프랑스가 치른 전쟁 비용의 78%였습니다.
지원이 크게 늘어난 데에는 1953년의 나바르(Navarre) 계획이 있었습니다. 프랑스·베트남군을 늘리고 주도권을 되찾아 1955년까지 승리의 길을 닦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1953년 한국전쟁 정전 무렵, 미국은 이미 프랑스를 지키는 일에 깊이 묶여 있었습니다.
산골 분지에 내린 낙하산
카스토르 작전 사흘 뒤, 하노이의 미국 영사는 프랑스군 코니(Cogny) 장군 대변인의 설명을 본국에 전했습니다. 목적은 타이족이 사는 지역에 기지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지가 라오스 방어의 북쪽 닻이 되고(남쪽 닻은 자르 평원), 사방으로 적을 찾아 나서는 공격대의 출발점이 되고, 타이족 유격대를 키우는 거점이 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대변인은 방어만 하는 기지가 아니라 공세 작전을 위한 기지라고 강조했습니다.
12월이 되자 프랑스의 기대는 더 분명해졌습니다. 프랑스 고위 사령부는 가까운 시일에 디엔비엔푸 부근에서 큰 교전을 끌어내기를 바랐습니다. 사이공의 미국 대리대사가 전한 드장(Dejean) 프랑스 판무관의 말로는, 나바르 장군은 포병 2개 대대를 포함해 거의 1개 사단을 디엔비엔푸에 두었습니다. 그쪽으로 다가오던 베트민 2개 사단(제316·304사단)이 싸움에 응하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지는 라오스 국경 가까운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었고, 둘레를 단단히 요새화했습니다. 바깥과 오가는 데 쓸 활주로는 두 곳이었습니다. 상대를 끌어들여 한자리에서 결판을 내려던 이 선택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아래의 연표가 보여 줍니다.
3월 13일, 활주로가 막히다
1954년 3월 13일,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 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베트남인민군(VPA)이 디엔비엔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시점에는 정치가 걸려 있었습니다. 곧 제네바에서 열릴 국제회의의 의제에 인도차이나 문제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미 국방부의 내부 연구인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는 이 요새가 다가오는 제네바 회의 때문에 실제 전략 가치보다 훨씬 큰 정치적·심리적 무게를 갖게 되었다고 봅니다. 드장 판무관도 같은 무렵 미국 영사에게 베트민의 공격 결정이 거의 전부 정치적이었다고 말하며, 이 싸움을 "전쟁의 결정적 교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첫 며칠에 기지 북쪽 끝의 거점 두 곳이 무너졌습니다. 알제리 1개 대대가 이틀 동안 지킨 '가브리엘(Gabrielle)'과 외인부대 1개 대대가 지킨 '베아트리스(Béatrice)'였고, 두 대대에서 돌아온 병사는 약 250명이었습니다. 프랑스 쪽은 두 거점 앞에서 베트민 수천 명이 숨졌다고 주장했습니다.
3월 16일 무렵 베트민 포병은 프랑스 진지를 겨냥해 분당 평균 10발을 쏘고 있었고, 그 때문에 활주로 두 곳을 모두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증원 병력과 보급품은 전부 하늘에서 떨어뜨려야 했습니다.
날씨도 프랑스 편이 아니었습니다. 분지를 덮은 땅안개 때문에 프랑스 포병은 상대 포를 찾아 되쏘는 대포병 사격(counter-battery fire)을 거의 할 수 없었고, 프랑스 공군도 베트민의 포 진지를 찾아 폭격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이 무렵 프랑스 연합군은 11개 대대, 베트민은 28개 대대였습니다.
하늘로만 이어진 보급
활주로가 막힌 기지에서 군수(logistics)는 곧 하늘의 일이 되었습니다. 증원 병력도 보급품도 수송기에서 낙하산으로 떨어뜨려야 했습니다. 이 공중 투하는 미국이 프랑스에 빌려준 C-119 수송기에 크게 기댔습니다.
나가는 길은 더 좁았습니다. 부상자를 실어 낼 수 있는 것은 헬기뿐이었는데, 베트민에게는 항공기를 쏠 대공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 대공 무기는 어디서 왔을까요? 펜타곤 페이퍼는 베트민이 포병과 레이다를 포함한 중국 군사 원조의 큰 증가로 도움을 받았다고 적습니다.
4월 초 프랑스 정부가 미국 대사에게 전한 보고는 더 구체적입니다. 중국인이 운용하고 레이다로 조종하는 37 mm 대공포 40문이 디엔비엔푸에 있고, 중국군이 모는 보급 트럭 1,000대 가운데 500대가 3월 1일 뒤에 들어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프랑스 쪽의 보고입니다.
투하 임무를 맡은 조종사 가운데에는 미국인도 있었습니다. 5월 6일, CAT 소속으로 C-119를 몰던 미국인 조종사 맥거번(McGovern)과 버포드(Bufford)가 디엔비엔푸 상공에서 대공포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CAT의 공중 투하는 잠시 멈췄다가 5월 8일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4월 29일 NSC 회의에서 래드퍼드(Radford) 미 합참의장은 기지의 모습을 숫자로 설명했습니다. 그의 추정으로 프랑스가 가진 땅은 지름 약 1,500야드(약 1.4 km)로 줄어 보급품을 떨어뜨리기가 매우 어려워졌고, 수비대에는 하루 최소 약 200톤의 보급품이 필요했습니다. 프랑스 사상자는 약 5,500명, 지하 의무실에 누운 들것 환자가 1,000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프랑스군을 보병 약 8,500명과 포병 1,200명, 맞선 베트민을 약 40,000명으로 추정했습니다. 나바르 장군은 베트민이 디엔비엔푸를 '질식'시켜 차지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워싱턴의 망설임
포위가 시작되자 프랑스는 워싱턴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3월 20일 프랑스 참모총장 폴 엘리(Paul Ely) 장군이 워싱턴에 왔습니다. 이 방문을 둘러싸고 '벌처(Vulture) 작전'이라는 이름이 남았습니다.
펜타곤 페이퍼에 실린 프랑스 쪽 보고에 따르면, 래드퍼드가 엘리에게 비공식으로 꺼낸 이 계획은 B-29 폭격기 약 60대가 마닐라 근처 클라크 기지에서 떠나 미 제7함대 전투기 150대의 호위를 받으며 디엔비엔푸 둘레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펜타곤 페이퍼를 쓴 이들은 살펴본 문서철에서 벌처 작전의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래드퍼드는 1965년 인터뷰에서 공습 계획이 생각의 단계를 넘어선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4월 3일의 일도 기록이 성깁니다. 펜타곤 페이퍼는 정부 문서에 세부가 없다고 밝히고 출판된 자료에 기대어 적습니다. 그날 덜레스 국무장관과 래드퍼드가 의원 8명(공화당 3명, 민주당 5명)을 국무부에서 만났고, 래드퍼드가 항공모함 에식스(Essex)와 박서(Boxer)의 항공기 200대로 공습하는 계획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튿날 밤 파리에서는 비도(Bidault) 외무장관이 라니엘(Laniel)과 함께 미국 대사를 불렀습니다. 상황을 구하려면 미국 항공모함 항공기가 지금 바로 디엔비엔푸에 개입해야 한다는 요청이었습니다.
4월 7일 기자회견에서 아이젠하워는 인도차이나가 왜 중요하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석과 텅스텐 같은 자원, 공산 체제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많은 사람, 그리고 '넘어지는 도미노' 원리를 들었습니다. 줄지어 세운 도미노의 첫 개를 넘어뜨리면 마지막 것도 아주 빨리 넘어간다는 비유였습니다.
말은 강했지만 결정은 신중했습니다. 3월 말 미국 정부 안의 논의는 지상군 없이 미국 혼자 개입해서는 효과가 없다는 쪽으로 모였습니다. 의회와 행정부 관리들은 더 큰 연합의 일부가 아니면 개입하지 않으려 했고, 영국과 다른 NATO 나라들은 이미 가망이 없다고 본 구출에 끼지 않았습니다.
5월 7일과 제네바
5월 7일 저녁 8시 30분(현지 시각), 드장 판무관은 사이공의 미국 대리대사에게 디엔비엔푸 중앙 거점이 무너졌다고 알렸습니다. 항복 선언은 없었고 곳곳에서 개별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거점 '이자벨(Isabelle)'은 그때까지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NSC에서 중앙정보국장은 첫 보고를 전했습니다. 베트민 방송은 17개 중대, 3,000~4,0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고, 드카스트리(de Castries) 장군도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수비대는 누구였을까요? 펜타곤 페이퍼에 실린 표로는 함락 하루 전인 5월 6일 디엔비엔푸의 병력이 장교 393명, 부사관 1,666명, 사병 13,026명, 모두 15,105명이었습니다. 베트남인이 싸우는 병력의 3분의 1이 넘었고 사병만 보면 40% 가까이였지만, 부사관에서는 6분의 1, 장교에서는 3%가 안 되었습니다.
요새가 무너지면서 미국이 디엔비엔푸에 개입할 가능성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프랑스의 코티(Coty) 대통령과 베트남의 바오다이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제네바의 협상은 그 뒤로 두 달 넘게 이어졌습니다. 7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에 대한 정전 협정이 따로따로 맺어졌습니다. 7월 21일에는 서명 없는 최종 선언이 나왔고, 미국 대표 베델 스미스(Bedell Smith) 국무차관은 협정에 '유의한다(takes note)'는 선언을 했습니다.
프랑스와 베트민은 정전과 함께 17도선을 따라 나라를 잠정적으로 나누는 데 합의했습니다. 제네바의 또 다른 합의는 1956년에 총선거를 치르도록 정했습니다. 미국은 그 합의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가 떠난 자리에서 미국은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남베트남의 지도자로 세웠고,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결성을 지원했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의 정리처럼, 미국은 그 뒤 20년 동안 베트남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디엔비엔푸는 프랑스의 전쟁이 끝난 곳이면서 미국의 전쟁이 길게 이어지기 시작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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