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1일, 샌디에이고 앞바다의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함에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주요 전투 작전은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임무는 계속된다"고 덧붙였습니다. 뒤의 말이 훨씬 오래 맞았습니다.
미군이 이라크를 모두 떠난 것은 8년이 더 지난 2011년 12월이었습니다. 그사이 폭력은 잦아들기는커녕 2005년과 2006년에 크게 번졌고, 다국적군이 센 공격 건수는 2007년 여름에 가장 많았습니다. 2007년에는 미군을 늘리는 "증파(surge)"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 뒤에 왜 더 긴 전쟁이 이어졌을까요?
이 글은 점령 첫해의 결정, 반란 세력의 갈래, 증파와 안바르의 각성, 폭력이 줄어든 까닭을 둔 학자들의 서로 다른 답, 철수 때 남은 숫자를 차례로 봅니다. 백악관 보존 사이트의 연설과 설명 자료, 점령 당국의 명령 원문, 미 의회조사국(CRS) 보고서, 세계보건기구(WHO) 조사, 학술지 논문 요약과 대학의 연구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점령 첫해의 두 명령
주요 전투가 끝난 뒤 이라크를 다스린 곳은 연합군 임시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CPA)였습니다. 정권이 무너진 때부터 2004년 6월 28일까지 연합군은 공식적으로 점령군이었습니다. 2003년 5월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미국과 영국을 점령국으로 인정했습니다. 2004년 6월 28일 주권이 이라크에 넘어가면서 CPA는 없어졌습니다.
CPA가 처음 낸 두 명령은 지금도 자주 이야기됩니다. 2003년 5월 16일의 명령 1호는 바트당을 사회에서 걷어 내는 명령이었습니다. 당 조직을 없애고 고위 당원을 자리에서 내보내 공공 부문에서 다시 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모든 중앙 부처와 대학·병원 같은 딸린 기관에서는 위 세 단계 관리자가 당과의 관계를 면담받게 했습니다.
5월 23일의 명령 2호는 국방부와 정보부, 여러 정보·보안 기관을 해산했습니다. 육군·공군·해군·방공군과 다른 정규군, 공화국 수비대, 특별 공화국 수비대도 해산 목록에 들었습니다. 징집병은 복무 의무에서 풀렸고 징병은 무기한 멈췄습니다.
해산된 기관의 직원은 2003년 4월 16일 자로 해고된 것으로 하고 퇴직 수당을 주기로 했습니다. 고위 당원은 수당과 연금에서 뺐습니다. 대령 이상은 스스로 아니라고 증명하지 않는 한 고위 당원으로 보았습니다.
이 결정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CRS 보고서는 전쟁 전 군의 계획이 이라크군 부대를 전후에 다시 불러 국경 경비 같은 일에 쓸 수 있다고 가정했다고 설명합니다. 명령 2호는 그 길을 막았습니다. 부대를 다시 불러 치안과 재건을 돕게 하거나 새 군대의 바탕으로 삼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서쪽 안바르주의 사정도 어려웠습니다. 큰 국영 기업이 문을 닫고 연금이 끊겼으며, 바트당 제거 정책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생겼고, 많은 주민이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형편은 알카에다 계열이 파고들 틈이 되었습니다.
누가 싸웠나
반란은 한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한 갈래는 이슬람 극단주의 목표를 내건 수니파 아랍인의 테러였습니다. 이라크 알카에다(Al Qaeda in Iraq, AQI)가 가장 이름난 조직이었지만, 실제로는 이라크인과 외국인 전투원이 섞인 느슨한 조직망으로 보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다른 갈래는 시아파 민병대였습니다. 젊은 성직자 무크타다 알사드르가 이끈 마흐디군(Jaish al-Mahdi, JAM)이 대표적입니다. 2004년 4월 그의 추종자들은 남부 여러 도시에서 한꺼번에 봉기했고, 연합군이 이를 진압했습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미 해병 제1원정군이 안바르주의 도시 팔루자를 되찾는 "팬텀 퓨리"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흔히 "팔루자 II"로 부르는 작전입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미 국방부는 오랫동안 "반란(insurgency)"이라는 말을 쓰기를 꺼렸습니다.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은 이 전쟁을 돌아보며 "국가를 무장 해제하려던 전쟁이 반란과의 싸움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선거의 해와 사마라
2005년은 투표의 해였습니다. 1월에 선거가, 10월에 헌법 국민투표가 있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2007년 1월 연설에서 1,200만 명 가까운 이라크인이 투표했다고 돌아보았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 선거가 이라크인을 하나로 묶고, 이라크 보안군을 키우면 더 적은 미군으로 임무를 마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투표 때마다 공격도 튀었습니다. 다국적군이 센 공격 건수는 2005년 1월 선거와 10월 국민투표 같은 정치적 고비에서 크게 올랐습니다.
2006년 2월, 사마라의 황금 사원이 폭파되었습니다. 시아파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2월 22일 부시 대통령은 조의를 표하는 성명을 내고 모든 이라크인에게 자제를 요청했습니다. 이 폭파를 계기로 종파 폭력이 커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2007년 1월 연설에서 그 뒤의 일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알카에다와 수니파 반군이 시아파의 보복을 부르려고 사원을 폭파했고,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일부 급진 시아파는 암살단을 만들었으며, 폭력이 바그다드를 종파별 거주지로 쪼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특히 바그다드의 폭력이 이라크의 정치적 성과를 덮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2006년 6월 8일,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알카에다를 이끌던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를 전날 밤 미군이 사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바그다드에서는 "함께 앞으로(Together Forward)"라는 이름의 작전이 이어졌습니다. 그해 10월 다국적군 사령부는 이 작전이 기대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인정했습니다.
2003~2011년 연표
아래 연표는 해마다 큰 일을 셋까지 골라 정치·협정, 폭력, 병력·작전으로 나눠 놓은 것입니다. 2006년과 2007년 줄을 견주어 보면 폭파와 증원, 휴전이 얼마나 촘촘히 붙어 있는지 보입니다.
증파: 더 많은 병력, 다른 방식
2007년 1월 10일, 부시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새로운 길(New Way Forward)"을 발표했습니다. 2만 명이 넘는 미군을 더 보내고, 그 대부분인 다섯 여단을 바그다드에 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안바르주에도 4,000명을 늘린다고 했습니다.
연설은 앞선 바그다드 작전이 실패한 까닭을 직접 들었습니다. 무장 세력을 몰아낸 동네를 지킬 이라크군과 미군이 모자랐고, 병력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무장 세력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리한 지역을 지킬 병력 수준을 갖춘다"고 했습니다. 이라크 정부는 바그다드의 아홉 구역에 육군과 국가경찰 여단을 배치해 모두 18개 여단을 이 일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정치 조건도 붙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 정부가 스스로 발표한 이행 목표(benchmark)를 지키게 하겠다고 했고, 미국의 약속에 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못 박았습니다. 같은 날 나온 백악관 설명 자료에는 안바르에서 알카에다와 싸우려는 부족을 더 돕고, 이라크군을 10개 사단에서 13개 사단으로 늘린다는 계획이 들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간 부대는 육군 여단전투단 다섯, 해병 원정대 하나, 해병 대대 둘이었습니다. 미군은 증파 부대가 오기 직전인 2007년 1월 약 13만 5천 명에서 그해 10월 약 16만 8천 명으로 늘었습니다. 2003년 주요 전투 때의 정점인 약 25만 명보다는 적은 숫자입니다.
바뀐 것은 병력 수만이 아니었습니다. 크로커 대사와 다국적군 사령관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이 대반란(counterinsurgency) 방식을 군 전체에 자리 잡게 했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관찰자가 동의한다고 CRS는 적었습니다. 그 방식은 주민의 안전, 긴밀한 협력을 통한 이라크 보안군 강화, 이라크 정부의 통치·경제 개발 역량 키우기를 앞세웠습니다. 육군과 해병대의 대반란 교범 FM 3-24는 2006년 12월에 나왔습니다.
안바르의 각성
증파와 비슷한 때, 안바르에서는 다른 변화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첫 움직임은 2005년이었습니다. 알카임과 하디타의 부족민이 미 특수부대와, 뒤에는 해병대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이 움직임은 "사막의 수호자"로 불렸습니다. 그 뒤 주도 라마디에서 "각성(Awakening)" 운동이 자랐습니다.
각성 운동의 첫 지도자는 알부리샤 부족의 압둘 사타르 셰이크였습니다. 그는 2006년 말 알카에다를 비난하고 연합군을 돕겠다는 선언문 서명을 이끌었고, 2007년 9월 13일 길가 폭탄에 숨졌습니다. 다국적군 서부 사령부 집계로는 2008년 1월까지 처음 나선 셰이크 열한 명 가운데 여섯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부족들은 왜 편을 바꿨을까요? 주민을 "구해 주겠다"며 안바르에 들어온 알카에다 계열은 실제로는 몹시 잔혹하게 굴었습니다. 편을 바꾼 반군과 부족민은 "이라크의 아들들(Sons of Iraq, SoI)"이라는 지역 경비 조직이 되었습니다. 전국 SoI 인원에는 10만 3천 명의 상한이 있었고, 2008년 10월 1일에는 이라크 정부가 바그다드주의 SoI 약 5만 4천 명을 넘겨받았습니다.
시아파 쪽에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2007년 8월 사드르가 휴전을 선언했고 마흐디군 대부분이 따랐습니다. 그는 2008년 2월에도 휴전을 다시 촉구했지만, 따르지 않고 폭력을 이어 간 분파도 있었습니다.
길가의 폭탄과 콘크리트 장벽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은 이 전쟁을 돌아보며 "반란의 고된 시간, 길가 폭탄, 저격, 자살 공격"을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군은 이런 길가 폭탄을 급조폭발물(improvised explosive device, IED)이라고 부릅니다. 이 위협이 차량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는 따로 쓸 이야기입니다.
각성 운동은 이 위협과도 이어졌습니다. 다국적군 중부 사단 지역의 SoI는 2007년 6월부터 2008년 8월까지 급조폭발물 668개를 넘겼습니다. 현장 지휘관들은 대체로 SoI가 생긴 지역에서 IED 공격이 줄었다고 말했습니다.
바그다드에는 콘크리트 장벽이 늘었습니다. 2007년 4월에는 몇몇 주요 동네가 완전히 둘러막혀 "출입 통제 동네(gated communities)"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다국적 군단 사령관 레이 오디어노 중장은 차량 폭탄과 자살 공격을 어렵게 해 주민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국적군은 장벽과 시설 보강, 그리고 공격을 꾀하는 자들을 겨눈 작전이 함께 차량 공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장비와 기술의 몫도 있었습니다. CRS가 꼽은 안보 개선 요인 가운데에는 특수부대의 첨단 기술 능력, 그리고 특수부대와 일반 부대가 더 긴밀하게 함께 움직인 점이 들어 있습니다.
폭력은 왜 줄었나
숫자는 분명히 움직였습니다. 다국적군 집계에서 전체 공격은 기록이 시작된 2004년 초의 낮은 점에서 늘어, 마지막 증파 부대가 도착한 2007년 6~7월에 주당 1,500건 넘게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 뒤 크게 줄었고, 2008년 3월 바스라와 사드르시티 작전 때 한 번 튀었습니다. 2008년 말에는 주당 200건을 한참 밑돌아 2004년 초 수준이 되었고, 그 수준이 2009년 2월까지 이어졌습니다.
민간인 사망도 2007년 7~8월 증파 부대가 다 온 뒤 크게 줄었습니다. 다국적군은 2008년 1월까지 72% 넘게 줄었다고 보고했습니다. 현장 지휘관들은 공격이 적다고 적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고, 2008년 8월 퍼트레이어스 장군은 그 성과가 "아직 스스로 유지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폭력을 줄였을까요? 답은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2012년 여름 학술지 International Security에 실린 스티븐 비들, 제프리 프리드먼, 제이컵 샤피로의 논문 요약은 네 가지 주장을 나란히 놓습니다.
첫째는 2007년 1월에 시작된 미군 증원과 교리 변화인 증파를 꼽습니다. 둘째는 수니파 반군이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은 각성을 꼽습니다. 셋째는 종파 청소의 물결이 끝나 폭력이 저절로 잦아들었다고 봅니다. 넷째는 증파와 각성의 상호작용을 꼽습니다.
청소설을 받치는 연구도 있습니다. 2008년 UCLA의 지리학자 존 애그뉴와 토머스 길레스피의 연구 팀은 공개된 기상위성 야간 영상으로 바그다드 동네마다 밤 불빛이 어떻게 변했는지 쟀습니다. 2006년 3월부터 2007년 12월까지의 맑은 밤 네 번을 견주었더니, 주로 수니파가 사는 동네의 불빛이 2007년 2월 증파 직전에 크게 줄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증파 대상이 아니었던 키르쿠크·모술·티크리트·카르발라의 불빛은 그대로이거나 늘었습니다.
애그뉴는 바그다드의 폭력이 준 것은 증파가 시작될 무렵 공동체 사이의 폭력이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증파가 시작될 때는 이미 폭력의 표적이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거나 나라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연구진은 바그다드의 오랜 전력 부족도 일부 동네의 불빛이 줄어든 데 한몫했을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연구는 학술지 Environment and Planning A 2008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
비들 등 세 저자는 기밀 해제된 지역별 폭력 자료와 연합군 참가자 70명의 구조화 인터뷰로 네 주장을 따져 보았습니다. 그들의 분석에서는 청소설과 각성설이 뒷받침을 얻지 못했고, 결론은 증파와 각성이 맞물려야 폭력이 그만큼 빨리, 넓게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의 말로는 "둘 다 필요했고, 어느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청소설에는 전쟁 대부분 동안 가장 폭력적인 주가 거의 수니파만 사는 안바르였다는 점을, 각성설에는 2004년 초부터 2005년 말 사이의 비슷한 시도 적어도 네 번이 증파 같은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반론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각성 같은 현지 조건이 없는 곳에서 같은 방법이 같은 결과를 낸다는 증거를 이라크는 주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각성의 몫을 보여 주는 현장 기록도 앞 절에 있습니다. SoI가 넘긴 급조폭발물 668개, 그리고 SoI가 생긴 지역에서 IED 공격이 줄었다는 지휘관들의 말입니다.
논쟁은 이어졌습니다. 2013년 봄 같은 학술지에 존 헤이건·조슈아 카이저·애나 핸슨, 존 린지·오스틴 롱이 2012년 논문에 응답하는 글을 실었고 세 저자가 다시 답했습니다.
CRS 보고서도 원인을 하나로 꼽지 않았습니다. 이라크 보안군의 수와 능력이 커진 점, 여러 번 파병된 지휘관들의 경험, 많은 수니파 아랍인의 폭력 거부, 사드르의 휴전을 증파 병력과 함께 들었습니다.
철수와 남은 숫자
2008년 11월 17일, 미국과 이라크는 몇 달의 협상 끝에 전략 기본 협정과 안보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이라크 내각과 의회는 11월 27일 두 협정을 승인했고, 협정은 2009년 1월 1일 발효했습니다. 안보 협정은 시한을 둘 정했습니다. 미군 전투 부대는 2009년 6월 30일까지 주요 도시 지역에서 나가고, 모든 미군은 2011년 12월 31일까지 이라크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2010년 8월 31일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전투 임무가 끝났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때까지 미군 10만 명 가까이가 빠졌고, 남은 과도 병력은 이라크 보안군 자문·지원, 대테러 작전 지원, 미국 민간인 보호를 맡았습니다. 2011년 12월 14일 포트브래그 연설에서 그는 지난 3년 동안 미군 15만 명 가까이가 이라크를 떠났고, 며칠 안에 마지막 부대가 행군을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쪽 숫자도 무겁습니다. 150만 명 넘는 미국인이 이라크에서 복무했고, 3만 명 넘게 다쳤으며, 4,500명 가까이 숨졌습니다. 대통령은 부상자 수가 "눈에 보이는 상처만" 센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라크인의 희생은 자료마다 크게 다릅니다. 이라크 정부와 WHO가 9,345가구를 면담한 이라크 가족 건강 조사는 2003년 3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이라크인 15만 1천 명이 폭력으로 숨졌다고 추정했습니다. 불확실성을 감안한 범위는 10만 4천~22만 3천 명입니다. 이 기간에는 2006년 하반기와 공격이 정점에 이른 2007년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WHO 이라크 대표는 이 추정이 언론 보도를 걸러 센 Iraq Body Count 집계의 세 배이고, 2006년에 앞서 나온 더 작은 가구 조사보다는 네 배쯤 낮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사에 참여한 WHO 통계학자는 분쟁 중의 사망자 평가는 매우 어렵다며 결과를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망 등록과 병원 보고가 없는 곳에서는 가구 조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말도 함께였습니다.
조사로는 첫해에 하루 평균 128명, 둘째 해 115명, 셋째 해 126명이 폭력으로 숨졌습니다. 그 가운데 절반 넘게가 바그다드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라크 보건부 장관은 치안이 나빠 찾아가지 못한 집도 있었다고 밝히면서도, 조사 결과가 분쟁이 시작된 뒤의 막대한 죽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습니다.
집을 떠난 사람도 많았습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2008년 말 이라크 안의 피란민을 280만 명 가까이로 추정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은 두 번 있었습니다. 2003년 5월의 "주요 전투 종료"와 2011년 12월의 "전쟁의 끝"입니다. 그 사이 8년의 기록은 숫자 하나로도, 원인 하나로도 정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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